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김주영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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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약간 상세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원죄(冤罪) 피해자 지원 단체의 스태프인 나미키 나오토시는 자신과 동료들이 보살펴오던 세 명의 여성을 살해하려고 합니다. 그녀들은 사회를 파멸시킬 만큼 위험한 인격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료 스태프인 아카네가 그의 계획을 눈치 채고 그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해오자 나미키는 계획을 바꿔 당장 오늘 밤중으로 세 여성을 살해하기로 결심합니다. 무자비한 살인을 통해 극한의 절정감을 맛보면서 나미키는 폭주하듯 밤을 달립니다. 하지만 폭주의 끝에 이르러 나미키는 예상 못한 충격적인 사실에 직면하게 되고 연쇄살인의 동기는 물론 자신의 정체성마저 흔들리는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처음 만나는 이시모치 아사미의 작품입니다. 본격 미스터리가 전공이라는데, 어쩌다 보니 그가 잠시 외도한 작품부터 읽게 됐습니다. ‘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는 하룻밤에 걸친 연쇄살인마의 리얼한 살인기록이지만 동시에 판타지 또는 지독한 심리극으로 분류될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선정적이고 잔혹한 살인 과정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밀하고 사실감 넘치지만, 정작 연쇄살인마의 살인 동기는 어딘가 비현실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는 두 가지 서사가 절묘하게 뒤섞인 작품입니다. 하나는 완전범죄를 통한 연쇄살인을 꿈꾸는 범인의 시점에서 서술된 미스터리이고, 또 하나는 두 개의 판타지, 즉 심리조작과 세뇌를 통해 반사회적 괴물을 창조하려는 악마적 판타지와 그렇게 창조된 괴물을 파괴하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려 하는 강박적 판타지입니다.

 

나미키의 완전범죄 미스터리는 사실 초보 살인범의 어설픈 행각에 관한 기록이 전부입니다. 어떤 흉기를 준비하고, 누구부터 죽일 것이며, 어떻게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인가, 또 조금 전에 실행한 살인에서 실수한 것은 무엇이며, 반성할 것은 무엇인가 등 살인범 나미키가 끊임없이 주절대는 독백을 기록한 것이 대부분인데, 이런 서술은 때론 피식 웃음이 나오게 하다가도 때론 독자 스스로 범행을 저지르는 듯한 극단적인 사실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백미는 나미키가 목표로 삼은 세 여성의 정체성에 관한 악마적 판타지와 절박하게 연쇄살인을 감행하려는 나미키의 강박적 판타지에 있습니다. 나미키를 비롯한 원죄 피해자 지원 단체의 스태프들은 아버지를 잃은 세 명의 미소녀에게 특별히 관심을 더 가졌고, 수년에 걸쳐 그녀들을 보호하는 과정에서 이쪽 편저쪽 편이라는 이분법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속적으로 주입시켜 왔습니다. ‘이쪽 편인 자신들 외에는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되고, 아버지에게 원죄를 씌운 저쪽 편은 절대 악이라는 인식이 고착된 탓에 그녀들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인격으로 성장했고, 타인의 죽음과 불행에 대해 일체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괴물의 속성을 갖게 됐습니다. 오랫동안 그녀들의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던 괴물성이 비로소 발현될 것을 감지한 나미키는 그녀들이 사회를 파멸시킬 통제 불가능한 괴물로 전화되기 전에 살해할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괴물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나미키는 스스로 괴물이 되고 맙니다. 아무 거리낌 없이 살인을 저지르고, 시체를 보며 욕정을 느끼는가 하면, 죄책감 따윈 찾아볼 수가 없는 괴물에 다름 아닌 캐릭터로 진화해나갑니다. 그래서인지 역자 후기에 인용된 니체의 표현이 새삼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공감이 됐습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미소녀들이 반사회적 괴물로 성장하고 전화하는 과정, 그녀들의 괴물성을 증폭시키려는 쪽과 저지하려는 쪽의 목숨을 건 갈등, 또 괴물성이란 것이 누군가에 의해 키워지고 주입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누구에게나 잠재된 가능성인지에 대한 논란 등 섬뜩하고 독특한 판타지가 작품 전체에 걸쳐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작가는 세 여성을 상징하는 기호로 알라우네(Alraune)라는 전설 속 식물을 설정했는데, 독일의 전설에 따르면 알라우네는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교수형에 처해진 남자가 흘린 정액이 땅속에 머무르며 피워낸 기괴한 식물입니다. 알라우네는 그것을 뽑아 정성스럽게 키운 주인에게는 행복과 행운을 전해주지만, 그것을 뽑을 때 나는 비명을 들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귀를 막은 채 뽑아야 무사히 알라우네를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나미키에게 있어 세 여성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어간 아버지를 둔 알라우네였고, 자신과 지원 단체의 극단적인 보호와 세뇌 속에 사회를 파멸시킬 괴물로 성장한 나머지 반드시 뽑아내야 하는 존재들이 되고 말았으며, 그래서 나미키는 그녀들을 뽑는동안 듣게 될 비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귀를 막고 밤을 달렸던 것입니다.

 

미스터리 독자들에게는 반복되는 상황과 어설픈 초보 살인범의 행각이 조금은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겠지만, 비현실적이면서도 묘하게 현실감을 발산하는 판타지에 집중한다면 그 어느 장르물과도 차별되는 독특한 재미와 긴장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시모치 아사미의 작품 중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를 소장하고 있는데 그의 전공인 본격 미스터리라고 하니 당장이라도 읽어보고 싶지만, 우선은 이 작품의 여운이 가실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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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니의 희귀본과 중고책 서점 - 어느 사이코패스의 사랑
캐럴라인 케프니스 지음, 배지은 옮김 / 검은숲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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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니의 희귀본과 중고책 서점에서 일하는 조 골드버그는 어느 날 서점에 찾아온 기네비어 벡을 자신의 운명으로 점찍습니다. 그날 이후 조의 일상은 벡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그녀의 스마트폰을 손에 넣은 뒤론 사생활까지 낱낱이 엿봅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벡은 조에게 쉽게 곁을 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벡은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연인과 단짝 친구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조의 집착은 점점 극단으로 치닫고, 벡을 소유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할 각오를 다집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벡을 갖게됐지만, 조 앞에 결코 희열과 기쁨만 찾아오진 않습니다. 또다시 나타난 방해자, 어딘가 의심스러운 벡의 행동, 꽁꽁 감춰놓았던 비밀의 탄로 등 조는 끝이 보이지 않는 벡과의 술래잡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합니다.

 

일기 또는 독백 형식으로 서술된 한 남자의 평범하지 않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조의 일기는 온통 벡에 대한 집착과 욕망, 섹스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동시에 (이 작품을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장르물로 분류시켜주는) 몇몇 살인에 대한 담담하면서도 세밀한 고백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 ‘어느 사이코패스의 사랑이라는 언밸런스한 부제는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녀의 메일을 해킹하고, 뒤를 미행하며, 소지품을 하나씩 소장해가는 조는 명백히 제정신이 아닌 광적인 스토커이고, 그가 저지른 살인 역시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 하에 실행된 것들이지만, 작가는 일기 형식의 문장과 집요하리만치 디테일한 심리 묘사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어느 순간 이 광적인 스토커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만듭니다. 스토킹이나 살인 모두 명백한 범죄이고, 조는 사이코패스로 분류되는 것이 마땅한 인물이지만 그의 일련의 행위를 내 것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처럼 잘 포장했기 때문입니다.

 

벡 역시 어느 한 곳, 누구 한 사람에게 얽매이지 않을 비범한 여자입니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사람을 끌어들여 파멸시키거나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치명적인 항성 같은 존재입니다. 조가 벡을 묘사할 때 종종 영화 클로저의 나탈리 포트만을 언급하곤 하는데, 그 영화를 본 독자라면 벡의 치명적인 매력이 어떤 모양새인지 쉽게 연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읽다 보면 결국 조와 벡 모두 비슷한 DNA를 지닌 사람들이란 걸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는 조와 벡의 해피엔딩을, 누군가는 비극적 엔딩을 기대하게 될 텐데, 두 사람의 관계가 조울증처럼 극단을 치달으며 전개되는 덕분에 거의 마지막까지 그들의 엔딩을 쉽게 예상할 수는 없습니다.

 

2년 전쯤 읽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미친 사랑이라는 작품이 종종 생각났습니다. 1920년대에 출간됐고, 일본 특유의 사육이라는 테마를 기반으로 15살 소녀 나오미를 향한 28살 남자 가와이 조지의 평생에 걸친 사랑을 다룬 작품인데, 가와이 조지가 집착보다는 헌신에 가까운 무한애정을 바쳤다면 무니의~’의 주인공 조는 좀더 공격적이고 기복이 심하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결국엔 사랑에 관한 한 비슷한 경로를 걸은 인물들이었다는 생각입니다. 가와이 조지가 탐미주의에 빠진 마조히스트라면, 조는 공격적인 욕망으로 들끓는 사이코패스 새디스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사이코패스의 사랑이라는 부제 때문에 이 작품을 선택한 독자라면 당혹스러움을 느끼거나 매끄럽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경험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심리묘사가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어서 딱히 페이지터너라고 부를 수도 없고, 살인과 스토킹을 긴장감 있게 묘사했다고 할 수도 없어서 애초 장르물의 매력을 기대했던 독자들에게는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뛰어난 캐릭터 플레이와 집착-냉소-욕망에 관한 디테일한 심리묘사 등 이 작품만의 미덕은 분명히 인정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사족으로... 이야기 속에 다양한 음악, 영화, 책이 자주 인용되거나 언급되는데 저의 경우 다행히 대부분 아는 작품들이라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음악의 경우 엘튼 존과 데이빗 보위, 영화의 경우 한나와 그의 자매들’, ‘클로저’, 책의 경우 스티븐 킹의 샤이닝’, ‘닥터슬립과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가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영화와 책의 경우 검색을 통해서라도 약간의 사전 지식을 예습한다면 이 작품을 좀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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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홍지로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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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조로 추정되는 사기꾼에게 피해를 입은 시민들의 신고가 잇달아 87분서에 접수됩니다. 동시에 넉 달 이상 물속에 방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표류사체가 교각에서 발견됩니다. 흑인형사 아서 브라운이 사기꾼 사건을 맡아 탐문과 자료조사에 나서고, 스티브 카렐라는 표류사체의 신원파악과 살인사건 여부를 조사합니다. 아서 브라운의 사기꾼 수사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 식으로 더디게 진행되는 반면, 또다시 발견된 표류사체에서 앞선 사체와의 공통점이 드러나자 카렐라의 행보는 빨라집니다. 하지만 수사 과정에서 카렐라의 아내 테디가 본의 아니게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카렐라는 얼마 전 죽음 직전까지 갔던 악몽 같던 사건을 떠올리며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경찰 소설의 고전인 ‘87분서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으로 1957년에 출간됐습니다. 그동안 아이스’(1983)킹의 몸값’(1959)을 읽었는데, 두 작품이 비교적 사건 자체에 충실했던 반면, ‘사기꾼은 사건 뿐 아니라 87분서 형사들의 캐릭터나 개인사에 관한 이야기, 또 주인공 스티브 카렐라와 그의 아내 테디에 관한 이야기가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합니다.

 

여대생 애인과 휴가 갈 생각에 부풀은 신참이자 막내인 버트 클링, 불같이 성급하지만 일면 집요함까지 겸비한 흑인형사 아서 브라운, 초자연적인 참을성으로 무장한 특이한 이름의 대머리 형사 마이어 마이어, 폭력적인데다 얄밉기까지 한 로저 하빌랜드 등 87분서 형사들의 캐릭터 하나하나가 사건 못잖게 풍성하게 묘사됩니다. 사실 이런 묘사는 앞서 읽은 작품들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했지만 사기꾼의 경우 공과 사가 뒤섞인 상황들 때문인지 더 맛깔나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카렐라의 경우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인 마약 밀매인에서 죽을 예정(?)이었다가 편집자와 독자들의 성화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시리즈를 이어가게 된 덕분인지 두 번째 삶을 살아가는 그의 개인사가 사건만큼이나 비중 있게 다뤄집니다. 더불어, 작가의 말에 따르면 시리즈 두 번째 권에서는 보이지 않았고, 세 번째 권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카렐라의 아내 테디가 거의 주인공 급에 가까운 중요한 역할을 맡은 점도 색다른 재미를 주는 대목이었습니다.

 

사건 자체는 잔혹하거나 복잡하거나 자극적이지 않고, 그 해결 과정도 엔딩 부분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한 상황 외에는 딱히 독자의 뒤통수를 칠 만큼 현란하지 않습니다. 복잡한 구성과 연이은 반전으로 승부를 거는 현대의 미스터리나 스릴러에 비하면 소박한 설정이라고밖에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 시절의 경찰서가 풍기는 고전미와 매력적인 형사 캐릭터를 실컷 맛볼 수 있는 작품인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능청과 비꼼, 풍자와 해학의 진수를 보여주며 유려하게 흘러가는 에드 맥베인의 문장은 읽으면 읽을수록 유쾌함을 더해줍니다.

스티브 카렐라가 죽다 살아난 사연이 너무 궁금해서 조만간 마약밀매인을 찾아 읽을 예정입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묘한 중독성을 띤 ‘87분서 시리즈가 계속 출간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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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에 대한 고집
다니카와 슌타로 지음, 요시카와 나기 옮김, 신경림 감수 / 비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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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시를 위해 교과서에 실린 시()를 무작정 암기하고 기계적으로 해부했던시절 이후로 시는 저의 모든 일상에서 자취를 감춰버렸습니다. 한때 암울했던 시대를 통렬히 비판한 시를 사랑한 적은 있지만, 그것은 시 자체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공유할 수 있게 만드는 무기로서의 시에 대한 애정이었습니다.

 

저의 일상에서 시가 사라진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난해함때문이었습니다. 이 작품에 수록된 시인문답이라는 산문에서 다니카와 슌타로가 묘사했듯 평상시에 말하고 읽고 쓰는 것과는 많이 다른 언어를 통해 인간의 의식 밑에 있는 세계를 표현하는 시는 일반인에게 어필하기엔 태생적으로 핸디캡을 지닌 장르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정서는 메마르고, 직설적인 인스턴트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한때나마 열광했던 몇 편의 시와 일부 시인에 대한 애정마저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국민시인이라 불리는 다니카와 슌타로의 기념 선집인 사과에 대한 고집은 근 10여년 만에 읽어보는 시집입니다. ‘내가 이 시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일종의 공포심(?)으로 첫 페이지를 열었고, 여러 가지 감정과 기분 - 인내심, 난해함, 가벼운 놀람 또는 재미 등을 느끼면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호흡에 쭉 달렸습니다. 사실 한 권의 시집을 한 호흡에 달린다는 것은 시집과 시인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지만, 대강의 큰 맛을 먼저 느껴보기 위해 어렵고 이해되지 않는 대목에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60여 년간 발표한 방대한 작품 가운데 수록작을 선별한 탓도 있겠지만, 한 사람이 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톤의 시들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몇 번을 읽어도 모르겠는 철학적인 언어와 상징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말장난 같은 유희, 유아용 동시 같은 단순함이 있는가 하면, 출생과 죽음에 관한 파격적이고 독특한 묘사도 자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론 출생과 죽음에 관한 작품들에 눈길이 자주 머물렀는데, 특히 빌리 더 키드’, ‘탄생’, ‘장딴지’, ‘안녕등은 때론 풍자나 해학의 느낌이, 때론 현학과 철학의 느낌이 교차되는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보통 예술가라고 하면 선입관처럼 파란만장한 삶이 연상되는데, 다니카와 슌타로 역시 그 부분에서만큼은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시단(詩壇)이나 동인지, 아카데미즘의 세계와도 떨어져 살아온 독립군같은 삶도, 세 차례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한 굴곡 많은 삶도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단 한 권의 선집으로 한 시인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그래도 일본의 국민시인 다니카와 슌타로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고, 특히 장르물에 삽입된 단카나 하이쿠 외에 일본의 현대시를 접한 것도 특이한 경험이었으며, 그 가운데 공감할 수 있는 몇 편의 시를 만난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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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1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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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히 오래 전의 일이지만, 청소년 버전으로 출간된 추리소설에 흠뻑 빠졌던 때가 있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나 엘러리 퀸도 매력적이었지만, 코난 도일의 명탐정 셜록 홈즈와 모리스 르블랑의 괴도 루팡’(그땐 루팡이라는 표기가 표준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은 어린 독자의 마음을 휘어잡을 만큼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문학과 담을 쌓은 채 젊은 날을 보내면서 홈즈도 뤼팽은 기억에서 사라졌고, 뒤늦게 찾아온 장르물에 대한 관심은 온통 일본 미스터리와 현대 영미권 스릴러에 집중됐습니다. 그동안 뤼팽이 여러 곳에서 전집 혹은 단행본으로 출간됐어도 딱히 관심을 갖진 않았었는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코너스톤에서 출간된 전집 소식을 접하곤 오랜만에 제대로 한번 완독해야겠다는 욕심이 들어 10권의 시리즈를 덥석 구매해버렸습니다.

 

그 첫 편인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은 아직 명성을 얻지 못한 뤼팽의 초기 활동부터 영원한 숙적 가니마르 형사와의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대결, 그리고 세기의 라이벌인 헐록 숌즈(아마도 셜록 홈즈의 창조자 코난 도일의 허락을 받지 못한 탓에 이렇듯 괴이한 이름으로 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와의 짜릿한 첫 대결에 이르기까지 9편의 단편을 수록해놓았습니다.

화려한 부유층과 부도덕한 지배층을 터는 도둑의 이야기는 픽션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일반인에게는 환영받는 소재입니다. 특히 그 과정이 귀신 뺨치듯 기막힌 트릭으로 포장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죠. 더구나 몇월 몇일 몇시에 귀하를 방문하겠다.”며 대담한 도둑 예고장을 날리는 대목에선 호기심과 함께 영웅의 출격을 지켜보는 듯한 흥분까지 맛보게 됩니다.

 

뤼팽은 천재적 지능에 덧붙여 마술사, 화학자, 변장의 천재, 무술유단자 등 다양한 능력을 갖춘 완벽한 캐릭터로 묘사되어 불세출의 도둑에 오르게 됩니다.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은 이런 뤼팽의 캐릭터를 골고루 맛볼 수 있게끔 다채로운 에피소드로 꾸며져 있습니다.

유람선에서 체포된 뒤 수감생활을 하며 경찰을 멋지게 희롱하다가 기어이 아무도 예상 못한 방법으로 탈옥에 성공하는 3부작이 있고, 도둑 견습생으로서 처음 뤼팽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프리퀄 같은 단편도 있습니다. 열차 안에서 강도에게 습격당해 우스운 꼴이 되거나 뤼팽의 인생에서 딱 한 번 겪었다는 최악의 실수를 담은 에피소드도 있고, 타고난 직감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약간은 판타지 같은 작품도 있습니다. 물론 압권은 셜록 홈즈와의 기념비적인 첫 대결을 다룬 '헐록 숌즈, 한발 늦다'입니다. 비록 얼굴을 맞댄 것은 1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 천재의 불꽃 튀는 대결은 재회를 고대하게 만들 만큼 매력적이었습니다.

 

수록작 한두 편에서 느꼈던 번역의 아쉬움(제 이해력이 부족한 건지, 번역이 너무 앞서간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외엔 오랜만에 뤼팽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었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소개글에 실린 뤼팽에 대한 찬사는 뤼팽을 모르는 독자에겐 과장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제가 볼 때는 소설 속 뤼팽에 관해 이보다 간결하고 적확한 표현은 없다는 생각입니다.

 

물건을 훔치고 사기 행각을 일삼지만 그 방법이 우아하고 예술적이라 감탄을 자아낸다. 공권력은 뤼팽에게 어떠한 힘도 미치지 못하며 도리어 신랄한 조롱을 받기 일쑤다. 하지만 뤼팽은 조국 프랑스에 무한한 애국심을 보이고, 약한 존재가 도움을 청하는 손길을 거절하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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