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향기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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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에쿠니 가오리에 푹 빠져 그녀의 작품이라면 출간되는대로 찾아 읽던 때가 있었습니다. 금지된 사랑 또는 어긋난 사랑을 일체의 과잉 없이 담담하게 그린 그 작품들은 마치 제가 직접 겪고 있는 듯 절실하고 생생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미스터리와 스릴러에 빠져 한동안 잊고 있던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을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공교롭게도 새로 출간된 일본 미스터리를 검색하다가 이 작품을 알게 됐는데, 제가 기억하는 에쿠니 가오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여름 열대야를 서늘하게 식혀줄 미스터리 단편집이라는 소개글에 눈길이 갔습니다. 당연히 큰 기대감을 갖게 됐고, 그녀만의 미스터리의 색깔이 궁금해졌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출판사의 소개글은 조금은 과장 또는 왜곡된 것이 사실입니다. 다소 차이가 있더라도 독자에 따라 서늘함을 느낄 여지는 있지만, ‘열대야를 식혀줄 미스터리라고 보긴 어렵다는 뜻입니다. 개인적으로 정의하면 유년기의 여름에 겪었던 조금은 특별하고 기이한 경험담이랄까요? 에쿠니 가오리와 미스터리의 교집합을 기대했던 독자라면 실망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쉽고 편한 문장으로 일상의 디테일을 포착해내는 그녀만의 섬세함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수박 향기에 수록된 11편의 단편들은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록작 모두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는데, 무섭지는 않아도 뇌리에 깊이 각인될 것 같은 기담 종류가 많은 편이고, 담백한 수채화처럼 아름답고 서정적인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평범하지 않은 사랑법을 풀어놓은 작품도 있습니다.

 


여름이라는 공통분모를 위해 수박, 매미, 꽈리, 장미 등 여름의 향기와 색상을 상징하는 소품들이 등장하고, 귀신, 복수, 왕따, 집착, 장례, 가출, 유괴 등 다양한 장르물 코드들이 동원됐는데 재미있는 건 이런 소품과 코드들이 여름 또는 여름방학을 맞이한 유년기 소녀들의 일상 속에 녹아들면서 특별한 빛을 발한다는 점입니다. 소녀들이 그해 여름에 만났던 특별한 사람들과 나눈 특별한 경험들은 옳다, 그르다또는 좋다, 나쁘다라는 가치판단과는 무관하게 어른이 된 후에도 비밀스러운 나만의 것으로 기억 속 어딘가에 또렷하게 남아있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그 여름 자체는 모호하지만, 그 일만큼은 또렷이 기억한다.”는 식의 문장이 종종 눈에 띄곤 합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런 어린 시절의 기억에 대해 이성이나 해석의 옷도 입지 않아 무구하기만 한 순백의 감정들, 아니 감정이란 말로 규정되기에는 이른 마음속 어떤 덩어리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에쿠니 가오리가 그려낸 어떤 덩어리들은 때론 끔찍하거나 부도덕한 악몽처럼, 때론 한없이 애틋한 추억처럼 포장되어 있습니다. 소녀들의 기억 속에 남은 어떤 덩어리들과 함께 한 그해 여름에 대한 11편의 이야기는 미스터리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켜주진 못했지만, 그 대신 11번의 특별한 여름과 11명의 특별한 소녀들을 통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에쿠니 가오리만의 특별한 기담을 맛보게 해줬습니다. ‘수박 향기를 제 방의 미스터리 책장에서 일반문학 책장으로 옮겨 꽂으면서 에쿠니 가오리가 제대로 된 정통 미스터리를 쓴다면 거기에선 어떤 맛이 날까?”,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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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키의 해체 원인 스토리콜렉터 31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이하윤 옮김 / 북로드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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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한국에 출간된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5편의 작품을 모두 본 덕분에, 닷쿠&다카치 시리즈의 프리퀄이라는 소개글 때문에 그의 데뷔작이라는 치아키의 해체 원인에 대한 기대감은 출간 전부터 각별했습니다. 간단하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니시자와 야스히코만의 특별한 상상력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의 힘은 데뷔작부터 강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갖가지 토막 사체가 등장하는 9편의 중단편은 끔찍하면서도 동시에 웃음을 끌어내는 마약 같은 흡인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만 닷쿠&다카치 시리즈의 프리퀄로 보기엔 좀 애매했는데, 두 사람이 대학에 다니는 중, 그러니까 현재 또는 과거 시점의 이야기도 실려 있지만, 대학을 졸업한 후의 닷쿠와 다카치의 이야기도 포함돼있어서 100% 프리퀄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크게 보면 7편의 단편과 1편의 희곡, 그리고 이 8편의 수록작을 망라한 궁극의 반전이 담긴 단편 1편이 실려 있습니다. 각 작품마다 기이한 형태의 토막 사체들이 등장하는데, 수갑을 찬 채 기둥에 묶인 상태에서 토막 난 여자 (해체 신속), 청산으로 독살된 뒤 34조각으로 토막 난 여자 (해체 신조), 불과 16초 만에 엘리베이터에서 옷이 벗겨지고 몸이 토막 난 여자 (해체 승강), 토막 난 채 6개의 상자에 분리되어 버려진 남자 (해체 출처), 앞선 희생자의 목이 다음 희생자의 몸과 함께 발견되는 연쇄살인 (해체 조응) 등 현실에서 벌어졌다면 세계적인 뉴스가 될 만한 희대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또한 광고 포스터에서 얼굴만 커터칼로 도려내진 모델 (해체 초상), 왼쪽 팔이 재단 가위로 잘린 곰 인형 (해체 수호) 등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인 토막 사건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다양한 토막 사체만큼이나 추리와 해결의 주인공도 제각각인데, 닷쿠와 다카치가 대학 재학 중에 해결한 사건이 있는가 하면, 졸업 후 취직도 하지 않고 미스터리한 삶을 사는 백수 닷쿠가 주인공인 작품도 있고, 예상을 깨고 고교 교사로 변신한 (두 사람의 선배) 헨미 유스케가 해결하는 사건도 있습니다.

 


작품 제목대로 모든 수록작의 공통 화두는 해체의 원인은 무엇인가?”, 즉 범인이 굳이 희생자를 토막 낸 이유를 추리하는 것입니다. 닷쿠를 비롯한 해결사들은 단서와 정황, 원한 관계 등 객관적인 팩트보다 범인이 사체를 토막 내야만 했던 이유에 집착하면서 사건의 진상에 다가갑니다. 토막을 냄으로써 범인이 얻는 이익은 무엇인가? 어느 특정 부위만 집착하듯 토막을 낸 이유는 무엇인가? 토막 낸 사체를 특정한 방식으로 폐기한 이유는 무엇인가? 등을 끊임없이 추리한 끝에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의 혐의를 벗기는가 하면, 아무도 예상 못한 용의선상 밖의 사람을 범인으로 콕 집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수록작 모두 명쾌하고 확실한 결론을 내는 것은 아닙니다. 해결사의 추리대로 사건이 마무리되어 경찰이 진범을 체포하는 엔딩도 있지만, 일부 작품은 주인공이 이건 순전히 내 상상인데...”라는 식으로 말머리를 뗀 후 사건의 배경, 사체를 토막 낸 이유, 진범의 정체 등을 가설처럼 설명하면서 마무리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의 상상은 때론 너무 급진적이어서 아니면 말고식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기발함만큼은 한 번도 놀라지 않고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신선하고 매력적입니다.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작품 중에 그녀가 죽은 밤일곱 번 죽은 남자를 좋아하는데 그 외 다른 작품들에서도 매번 느끼는 점이지만, 그의 엄청난 상상력과 정교하게 이야기를 직조하는 힘은 보통 사람들의 뇌 구조에서는 절대 구현될 수 없는 차원인 것 같습니다. 수록작 대부분이 그렇지만, 특히 앞선 작품들의 주조연들이 총출동하여 궁극의 반전을 일으키는 마지막 수록작 해체 순로는 그런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천재성이 120% 발휘된 작품입니다. 또 희곡 형식으로 쓰인 해체 조응 - 추리극 <슬라이드 살인 사건>’은 상상력과 구성의 힘에 덧붙여 블랙코미디와 잔혹 미스터리를 제대로 믹스한 작품인데, 실제 연극으로 공연된다면 웃음과 공포를 번갈아 만끽할 수 있는 수작이 됐을 것입니다.

 

뒤에 실린 문고판 후기를 보면 니시자와 야스히코가 자신의 데뷔작인 이 작품을 개그에 비유하며 자학했던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사실 그의 닷쿠&다카치 시리즈는 상상력과 구성의 힘 못잖게 어딘가 B급 코미디의 냄새를 풍기는 어이없는 개그가 큰 미덕이자 매력이기 때문에, 그의 자학에서는 왠지 조금은 자랑의 뉘앙스가 풍기기도 했습니다.

 

원 제목 자체가 해체제인(解體諸因), 즉 직역하면 해체의 모든 원인인데, 일본에서 실제로 토막살인을 해체살인이라고 부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상한 뉘앙스의 해체대신 직설적인 어감의 토막을 번역본 제목으로 삼았다면 좀더 눈길을 끌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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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토어 밀리언셀러 클럽 138
벤틀리 리틀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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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풍광 좋은 애리조나의 작은 마을 주니퍼에 대형마트 더 스토어가 들어서면서 아무도 예상 못한 대혼란과 급격한 변화가 몰아닥칩니다. 더 스토어는 마을의 상권은 물론 의회, 경찰, 소방, 언론, 학교까지 먹어치우면서 마침내 주니퍼의 모든 것을 장악합니다.

처음부터 더 스토어의 등장을 불안하게 여겼던 빌은 주니퍼 내의 자영업자들이 몰락하거나 사라지거나 가게를 잃는 지경에 이르자 신문편집장 벤, 스트리트 등과 함께 더 스토어의 만행에 저항해보지만 오히려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심각한 위기에 처합니다. 특히 더 스토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두 딸에게서 심상치 않은 변화를 목격하면서 빌은 도청과 감시의 눈길을 뚫고 더 스토어와 정면대결을 펼치기로 결심합니다.

 


더 스토어는 소도시의 상권을 잠식하며 이익을 독점하는 단순한 대형마트가 아니라 작품 속에서 기업 흡혈귀라고 묘사되듯 실제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존재합니다. 대형마트가 없는 소도시만 골라 각종 혜택을 받으며 지점을 오픈한 뒤 의식주는 물론 행정과 언론에 이르기까지 그곳의 모든 것을 천천히 잠식합니다. 자영업자는 모조리 몰락하거나 주니퍼를 떠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고, 어떻게든 버텨보려는 사람들은 끔찍한 비극을 맞이합니다.

취약한 재정을 보완하기 위해 더 스토어의 등장을 환영하며 온갖 특혜를 줬던 의회는 결국 그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가 파멸의 길을 걷게 되고, 큰 혜택을 누리게 됐다고 좋아하던 소비자들은 점차 더 스토어의 노예로 전락합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거대 권력이 된 더 스토어에게 그 누구도 저항하지 못합니다. 이미 누군가 사라지거나, 의문의 죽음이나 방화를 당하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일그러진 자본주의의 단면과 함께 작가는 더 스토어를 통해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타인을 통제하며 쾌감을 느끼는 권력의 중독성을 설파합니다. 거기에 덧붙여 끔찍한 방법으로 직원들의 정신과 육체를 장악하는 과정이나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사람들에게 가차 없는 응징을 가하는 장면, 또 폐점 후 목격되는 정체불명의 존재들(밤의 매니저)을 등장시켜 문명화된 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잔혹극의 공포감을 상승시킵니다.

 

주니퍼를 지키기 위해 더 스토어에 저항하는 빌과 그의 친구들의 노력은 도청과 감시, 협박과 폭력 속에 무기력한 모습만 보일 뿐이고, 절반 이상의 주민은 더 스토어가 나눠준 독이 묻은 사과에 열광하며 그들에게 주니퍼를 쥐락펴락 할 수 있는 권력까지 기쁘게 넘겨줍니다. 슈퍼맨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더 스토어의 진격을 막을 방법은 없어 보이고, 결국 주니퍼의 멸망 외에는 딱히 예상되는 엔딩이 없다고 판단될 즈음, 작가는 전혀 예상 못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급선회시킵니다.

 

비교적 단선적인 서사에도 불구하고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긴장감 넘치게 채워 넣은 작가의 필력은 대단합니다. (물론 동어반복이 느껴지는 장면들이 종종 있어서 100페이지 정도만 줄였다면 그야말로 빈틈없는 작품이 됐을 거라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괴물처럼 자가발전하는 대형마트를 그린 대목이나 소도시 주민 개개인이 느끼는 공포심을 세밀하고 정교하게 묘사한 대목을 읽다 보면 스티븐 킹과 함께 대표적인 호러 작가로 알려져 있다는 작가 소개글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게 됩니다.

 

물론 이런저런 아쉬움이나 잘 이해가 안 되는 지점도 있었는데, 무엇보다 조금은 급하게 마무리된, 또 그 해결방법 역시 다소 모호했던 엔딩 부분이 가장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더 스토어에게 직격탄을 맞는 자영업자들을 선의의 피해자로만 설정한 점이나 주니퍼의 소비자들을 획일적이고 우매한 추종자들로 암시한 점, 또 이미 다른 지역에서 크고 작은 사고를 일으켜 전국적인 주목의 대상이 된 더 스토어가 별 어려움 없이 경찰과 언론, 학교와 의회까지 장악하고 통행금지까지 단행하는 장면은 아무리 이 작품의 배경이 1990년대라고 하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었습니다.

 

몇몇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더 스토어는 갑자기 치솟은 5월의 더위를 충분히 식혀줄 만큼 서늘한 공포와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했고, 탐욕, 도덕, 권력, 이기심, 자본주의 등 다채로운 코드들이 전혀 색다른 방식으로 믹스될 수 있음을 일깨워준 특이한 작품이었습니다. 브람스토커 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더 스토어가 한국에 소개된 첫 작품이라는 점은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앞으로 가끔씩이라도 벤틀리 리틀의 작품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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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다시 벚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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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할복한 아버지 소자에몬의 무고함을 밝혀내고 무너진 가문을 되살리기 위해 에도로 올라온 도가네 번 출신의 후루하시 쇼노스케가 에도 대행 사카자키, 무라타야 대본소의 지헤에, 벚꽃 정령을 닮은 여인 와카, 그리고 자신이 머무는 쪽방촌 도미칸 나가야의 개성 강한 이웃들과 함께 겪은, 제목 그대로 뒤죽박죽또는 벚꽃박죽의 서사가 그려진 미스터리 사극입니다.

 

아버지의 누명 벗기기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가운데, 쇼노스케 주위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병행됩니다. 아버지의 누명이 아버지의 필체로 쓰인 조작된 뇌물 수취증서에서 비롯된 탓에 쇼노스케는 에도 대행 사카자키와 대본소의 지헤에의 도움을 받아 필사 일을 하면서 본인조차 혼동할 만큼 완벽하게 필체를 모방하는 대서인(代書人)’을 찾습니다. 그런 와중에 쇼노스케는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해결하는데, 편지 속 암호를 해독하는가 하면, 협박장의 글씨를 통해 납치사건을 밝혀내기도 합니다.

 

이 모든 사건들의 공통점은 뇌물 수취증서, 편지, 협박장 등 글로 쓰인 어떤 것이 중요한 단서나 증거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글씨를 들여다보고 필사하며 그것을 쓴 사람의 마음으로 사물을 보려는 쇼노스케의 노력은 일반적인 탐문이나 추리와는 또 다른 매력을 전해줍니다. 또한 그것이 쇼노스케의 목표 - 아버지의 글씨를 모방하여 누명을 씌운 자를 찾는 미션과 절묘하게 닿아있어 별개의 사건이지만 내내 긴장감을 갖게 만듭니다.

 


벚꽃, 다시 벚꽃19세기 에도를 무대로 한 미스터리로 분류되지만, 동시에 가족의 의미, 권력과 파벌, 빈곤의 문제 등 그 시대 사회상을 그린 작품이기도 합니다. 서로를 증오하는 가족부터 늘 다투면서도 믿음의 끈을 놓지 않는 가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가족 군상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재미와 감동, 안타까움과 회한을 전해주는가 하면, 한줌의 권력을 위해 서로를 속이고 파멸시키려 드는 파벌들의 다툼이나 당장 오늘 하루의 삶을 걱정해야 하는 빈곤의 문제는 물론, 끈 떨어진 무사들의 초라한 모습, 어려움 속에서도 건강함을 잃지 않는 쪽방촌 서민의 삶, 화려한 요릿집 여주인의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 등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킨 덕분에 마치 그 무렵의 에도를 한 바퀴 돌아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해줍니다.

 

이 작품의 원제 사쿠라호사라’(ほうさら)뒤죽박죽이란 뜻의 고슈 방언 사사라호사라’(ささらほうさら)를 살짝 비튼 것인데, ‘여럿이 마구 뒤섞여 엉망이 된 모양을 뜻하는 우리나라의 뒤죽박죽과 달리 고슈 방언 사사라호사라온갖 일이 있어 힘들었다, 큰일났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쇼노스케가 고향 도가네 번에서는 물론 에도에서 생활하는 동안 자신의 목표를 위해 온갖 일을 겪으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뜻인데, 여기에 작품 곳곳에서 중요한 상징으로 등장하는 벚꽃의 의미를 더함으로써 벚꽃박죽이라는 운치 있는 제목이 태어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벚꽃, 다시 벚꽃이라는 세련된 제목도 괜찮았지만, ‘벚꽃박죽이라는 투박하지만 어딘가 중의적인 느낌을 주는 제목에 좀더 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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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싱 - 돌아온 킬러 의사와 백색 호수 미스터리 밀리언셀러 클럽 119
조시 베이젤 지음, 이정아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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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마피아 킬러이자 의사인 피에트로 브라우나는 라이어넬 아지무스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세탁한 채 유람선에서 선상 의사로 근무 하던 중 대부호 렉 빌의 제안을 받고 미네소타 주 오지에 있는 백색호수를 방문합니다. 그에게 주어진 미션은 백색호수에 괴물이 있다고 주장하며 스폰서를 끌어 모은 현지 캠핑장 운영자 레지 트레이거 일행과 함께 괴물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100% 사기 같지만 마피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 자금이 필요했던 아지무스는 렉 빌이 동행시킨 미모의 고생물학자 바이올렛과 함께 백색호수에 도착하지만 영문을 알 수 없는 기이한 사건에 연이어 휘말리며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작은 도시 포드와 그곳에 인접한 신비한 분위기의 백색호수는 괴물이라는 비현실적인 존재와 함께 으스스한 공포물의 배경을 이룹니다. 수년 전 일어난 백색호수에서의 의문의 사망사고가 정말 괴물에 의한 것인지, 그 후에 발생했지만 미제로 남은 살인사건 역시 괴물과 관련 있는 것인지, 이 쇼를 기획한 레지 트레이거를 비롯하여 괴물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자들의 의도는 무엇인지, 집단 히스테리에 걸린 듯한 백색호수 인근 주민들 사이의 긴장감의 실체는 무엇인지, 특히 거액을 주며 바이올렛과의 동행을 조건으로 아지무스를 백색호수까지 보낸 대부호 렉 빌의 의중은 무엇인지 등 수많은 미스터리와 함께 한시도 안심할 수 없는 위태로운 활극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집니다.

 

애초 모든 것이 사기라고 확신했던 아지무스는 백색호수에서 정체불명의 생물체를 직접 맞닥뜨린 후론 괴물 실재론이 마냥 허구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명백히 거짓 쇼라는 선입견과 실제 자신이 겪은 일사이에서 아지무스는 혼란에 빠집니다. 작은 도시 포드를 황폐하게 만든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은 더욱 난감했는데, 관련자들의 진술이 명백한 살인이라는 주장과 단순사고라는 의견으로 갈리면서 아지무스는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워집니다.

 

언뜻 보기엔 괴물 판타지와 살인 미스터리를 융합시켜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탐욕에 관한 것입니다. 막판에 드러나는 진실은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그로 인해 파생된 비극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탐욕을 선의로 왜곡하고, 희생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인간들을 고발하면서 작가는 괴물이라는 신비한 캐릭터를 등장시킴으로써 중층의 서사를 잘 정렬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런 무겁고 심각한 이야기를 운반하는 도구는 의외로 블랙 코미디 풍의 화법입니다. 냉소와 풍자를 가득 담아 최대한 비틀고, 비꼬고, 비아냥대는 문장들은 의사지만 마피아 킬러의 전력을 지녔고 도피자금을 위해 사기극이 분명한 쇼에 동참한 아지무스의 모순된 캐릭터와 잘 어울리면서 독자의 눈길을 즐겁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다만, 가끔씩 과하게 사용된 나머지 이야기의 진행을 방해하는 느낌을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큰 그림에서 보면 아쉬운 점들이 눈에 띄기도 하는데, 무엇보다 분량 대비 부족했던 서사의 두께입니다. 540페이지의 분량에 비해 알맹이가 되는 서사는 비교적 단선적이었고, 막판에 드러나는 비밀과 거짓말의 실체는 기대한 만큼의 폭발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쇼에 동참한 적잖은 인물들의 파란만장한 개인사가 상당한 분량으로 소개되지만 정작 메인 사건과의 관련성은 그리 밀접하지도, 촘촘하지도 않습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메인 요리는 소박한 반면 전채와 디저트는 너무 많은데다 지나치게 화려하다고 할까요?

 

워낙 개성이 강한 작품이라 독자들 사이에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블랙 코미디 풍의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또 음습한 분위기의 미지의 괴물서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대책 없는 킬러 출신 의사 라이어넬 아지무스의 모험담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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