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처럼 싸우고 꽃처럼 아끼고
디안 지음, 허유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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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모든 창작물 가운데 이 작품보다 더 발칙하고 도발적인 제목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번역물의 경우 가능하면 원제 그대로 쓰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주인공의 이름인 둥니’(東霓)라는 평범한 원제를 직역한 것 보다는 훨씬 더 센스 있고 다양한 의미를 담아낸 작명 솜씨인 것 같습니다.

 

개처럼 싸우고 꽃처럼 아끼고’(이하 개꽃’)는 주인공 둥니를 중심으로 한 정씨 일가의 싸우고 아끼는 이야기입니다. 둥니의 인생은 전쟁 그 자체입니다. 폭력적이며 증오심으로 똘똘 뭉친 부모 밑에서 보낸 진창 같은 유년기와 대학을 포기한 채 무대 여가수로 전전하며 밑바닥 삶을 살았던 청춘기를 지나 지금은 서른이라는, 싸우기에도 타협하기에도 어중간한 나이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데, 지적 장애를 안고 태어난 돌바기 아들 청궁을 인질(?) 삼아 별거 중인 남편에게 더 많은 돈을 뜯어내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며, 사촌지간인 시줴와 난인, 동창이자 가족(또는 가족이 될 뻔하는)인 천옌과 장이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애정과 증오가 오락가락하며 쌍욕과 몸싸움을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그녀의 아군이라면 사촌오빠 부부가 내팽개친 탓에 그녀가 거두게 된 12살 소녀 쉐비와 8살 연하의 대학원생 렁산, 그리고 늘 가족의 중심을 잡아주는 작은아버지 내외뿐입니다.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지옥 같은 현실은 둥니로 하여금 스스로 온몸에 가시를 두른 채 다가오는 사람 모두를 찌르고 베어버리게 만듭니다. 사랑의 신기루와 장밋빛 미래 따위는 더 이상 믿지 않고, 시기와 질투로 자신을 공격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겐 날선 말과 경멸의 시선을 아끼지 않으며 오직 자신만을 위해 온 세상과 전력을 다한 싸움을 수행하는 중입니다.

 

어쩌면 개꽃은 한국에서 흔하디흔한 막장 드라마 그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돈이 걸린 이혼 전쟁, 새로운 사랑을 위해 이혼마저 불사하는 유부녀, 한 여자를 사이에 둔 삼촌과 조카, 남아선호사상과 그에 얽힌 출생의 비밀 등 갖가지 막장의 요소가 빼곡히 차있는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꽃은 결코 천박해보이지도, 가벼워보이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주인공 둥니의 삶은 독자에게 공분, 공감, 동정, 연민을 불러일으키면서 과연 가족이란 맞서 싸울 개인가, 아끼고 보듬어줄 꽃인가?”라는 정답 없는 현실적인 질문과 고민거리를 던져주기 때문입니다.

 

읽는 내내 둥니를 지켜보는 일은 여러 가지로 마음 편한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그녀에게 세상의 모든 행운이 쏟아지면서 주변의 못된 개들이 느닷없이 예쁜 꽃으로 개과천선하는, 그런 어이없는 해피엔딩은 아니었으면, 하고 바랐던 것도 사실입니다. 기대대로 작가는 마지막까지 둥니의 삶을 현실 속에 철저히 못 박아 둡니다. 물론 그래도 지금보다는 나을 거야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화해의 제스처들이 묘사되고, 둥니 역시 일정 부분 자신만의 삶에 충실할 수 있게끔 자유로워졌으며, 사랑, 증오, 시기, 질투라는 극단의 감정에서도 조금은 해방된 듯한 엔딩이 그려지지만, 작가는 어중간한 화해 대신 현실적인 긴장을 여운처럼 남겨둔 채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개꽃은 부모 또는 부부가 돼본 적이 없는 독자에겐 강한 양념이 들어가 호기심을 자극하는 가족 판타지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픽션이다 보니 약간은 과장되고 문제 많은 캐릭터가 집약되긴 했지만 공감보다는 엿보기의 재미라는 측면에서 개꽃을 탐독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까요? 하지만 개꽃,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누구나 맞닥뜨리게 될 현실 그 자체입니다. 둥니가 겪은 전쟁의 일부만 겪을 수도 있지만, 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녀보다 훨씬 더 많은 전쟁과 고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자의든 타의든 부모 또는 부부, 즉 가족이란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제도이면서 동시에 인류가 만들어낸 최악의 제도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숙명으로서의 가족과 최악의 제도로서의 가족을 민낯 그대로 묘사한 개꽃은 누군가에겐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누군가에겐 예방주사의 역할을 해줄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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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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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와 햇빛, 맑고 싱그러운 지중해성 기후가 떠오르는 캘리포니아지만, 거기에 덧붙여 그곳에서의 완벽한 하루라니 더할 나위 없이 낭만적인 타이틀입니다. 모래사장에 놓인 모포와 먼 수평선이 파스텔 톤으로 그려진 표지 역시 캘리포니아 해변의 멋들어진 낭만을 한껏 거들어줍니다.

하지만, 수록된 62편의 짧은 이야기들은 타이틀이 무색하리만치 전혀 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습니다. 원제인 ‘Revenge of the Lawn’(잔디밭의 복수)62편의 이야기를 잘 대변하고 있다면, 번역제목인 완벽한 캘리포니아의 하루는 무척이나 역설적인 제목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낯선 작가의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에세이가 아닐까, 하는 호기심과 나른하고 낭만적인 캘리포니아의 완벽한 하루에 대한 기대는 보기 좋게 배반당합니다.

 

표지를 넘기자마자 눈에 띄는 작가의 이력 - 극도의 가난, 정신병원에서의 전기충격 치료, 비트작가의 본거지에서 펼친 반문화운동, 49세에 홀연히 감행한 권총 자살 등 - 도 그렇고, 그의 대표작인 미국의 송어낚시에 대한 소개 - 강렬한 반체제 정신, 기계주의와 물질주의에 대한 비판, 목가적 꿈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허무를 다룬 작품 - 를 보면 수록된 62편의 이야기가 결코 평범한 에세이가 아님을 예감할 수 있습니다.

 

작가의 유년기이던 1930년대부터 20~30대를 보낸 1960년대에 쓰인 엽편 또는 단편들이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딘가 세기말 같은 건전하지 못한 정서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소소한 일상 속 해프닝을 지독할 정도로 시니컬하게 풀어낸 이야기(‘잔디밭의 복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타이피스트’, ‘그레이하운드의 비극’), 빈곤과 하위문화가 발산하는 쓸쓸하거나 염세적인 냄새로 가득 찬 이야기(‘독일과 일본의 완전한 역사’, ‘미친 노파들이 오늘날 미국의 버스를 탄다’), 유년기에 겪은 2차 대전이 남긴 기억들(터코마의 유령 아이들), 판타지를 동원하여 작렬하는 풍자를 선보인 이야기(‘샌프란시스코 YMCA에 바치는 경의’)가 주류이고, 누구에게도 읽힐 생각이 없는 것처럼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쓴 듯한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캘리포니아에 대한 사랑이 담뿍 묻어나는 다양한 이야기나 사소한 반전으로 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이야기도 수록돼있습니다.

제일 인상 깊게 읽은 건 표제작인 잔디밭의 복수인데, 사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웃음을 참지 못하곤 했지만, 해설을 통해 알게 된 이 작품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자유주의와 목가주의를 상징하는 파괴된 잔디밭, 그리고 나름의 방식으로 기계문명과 물질주의에 복수하는 자연의 섭리는 우화이면서 동시에 그 어떤 직설적인 비판보다 날카로운 메시지를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상징과 비유에 상식을 뛰어넘는 스토리가 펼쳐지곤 해서 간혹 난해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들과 마주칠 때가 있는데, 이건 아마도 당시 미국의 문화적, 사회적 특성에 대한 무지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반문이 절로 생각나는 작품도 꽤 있는 편이고, 작가 이력을 보고 나름 각오를 다진 독자 가운데에도 당혹감을 느끼는 경우가 적잖을 것 같습니다.

 

수록된 62편을 모두 이해하고 공감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앞서 언급한 몇몇 작품들은 엽편 또는 단편으로서의 매력과 함께 시대와 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 비판, 독설을 담고 있어서 나름 인상적인 책읽기가 됐습니다. 반전(反戰), 히피, 마약, 비틀즈 등 1970년대 미국의 안티 문화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리차드 브라우티건의 작품이 신선하고 매력적인 텍스트가 돼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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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두리 없는 거울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박현미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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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다섯 편의 괴담이 실린 작품집입니다. 학교 계단에 머물며 벌을 내리는 유령 (계단의 하나코), 분신사바의 저주 (그네를 타는 다리), 느닷없이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진 의문의 시체들 (아빠, 시체가 있어요), 거울 속에 나타난 미래의 자신때문에 겪는 참혹한 비극 (테두리 없는 거울), 상상 속에 만들었던 친구가 천재지변처럼 현실에 나타난 이야기 (8월의 천재지변) 등입니다.

 

첫 수록작 계단의 하나코를 제외하면 극도의 공포를 자아내는 호러물과는 살짝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괴담의 범주에 들면서도 따뜻함과 애틋함, 불안감과 공포 등 극과 극의 정서와 잔향을 남기는 특이한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차원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실화를 읽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츠지무라 미즈키의 작품은 츠나구나의 계량스푼밖에 보지 못해서 그녀만의 매력이나 특징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지만, 이 작품까지 읽은 경험만으로 말하면, (그녀 스스로 작가의 말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실과 거울의 경계, 진실과 꿈의 경계를 잃고 우연히 이쪽 세계에 스며든 존재감을 정말 매끄럽고 근사하게, 또 무시무시하게 잘 표현한다는 점입니다.

한 학생의 죽음의 진실을 캐는 학교 계단 속 유령이나 자신을 열 받게 한 주술사를 죽음으로 내모는 유령은 전형적인 판타지 속 캐릭터들이지만 츠지무라 미즈키의 작품 속에선 현실의 경계선까지 바짝 다가온, 정말 어딘가 실재할 것만 같은 캐릭터처럼 보입니다. 사라진 시체들을 소재로 한 블랙코미디의 주인공 여대생이나 불같은 사랑에 빠진 채 거울 속 미래에 모든 것을 건 비련의 여고생, 또 거짓말과 상상으로 자아낸 친구를 현실에서 만나게 된 왕따 초등학생 역시 하나같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에서 극심한 혼란을 겪는 캐릭터들입니다. 결국 츠지무라 미즈키 말대로 주인공들은 이쪽 세계에 스며든 기이한 존재들과 마주하면서 때로는 따뜻하고 행복한 엔딩을, 때로는 파국에 가까운 비극적인 엔딩을 맞이하게 됩니다.

 

?” 또는 어떻게?”라는 질문보다는 그저 저쪽 세계에서 온 존재들이 펼쳐놓은, 언젠가 내가 겪게 될지도 모를 판타지를 간접경험 해본다는 생각으로 읽어나간다면 장르적으로 취향이 안 맞는 독자라도 츠지무라 미즈키만의 독특한 매력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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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강 - 판타스틱 픽션 BLACK 14-2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4
마이클 코리타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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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할리우드에서 잘 나가는 촬영감독이었지만 지금은 장례식에서 상영될 고인의 영상물 제작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에릭 쇼는 어느 날 임종을 앞둔 한 거부(巨富) 노인의 과거사를 취재해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이미지를 보는 것만으로 거기에 깃든 사연이나 과거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에릭은 남부 인디애나에서 노인의 과거를 쫓던 중 예상치 못한 환각을 연이어 목격합니다. 야비하고 탐욕스런 노인과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소년이 등장하는 환각 속에서 에릭은 때론 그들과 대화를 나눌 정도로 깊이 개입하는가 하면, 때론 철저하게 관객이 되어 그들에게 일어났던 과거의 끔찍한 사건을 지켜보곤 합니다.

한편, 비루한 삶을 살아가던 조시아는 시카고에서 온 에릭이란 사람이 자신의 증조부에 대해 조사하고 다닌다는 소식을 듣곤 발끈합니다. 안 그래도 정체불명의 노인이 등장하는 기이한 꿈을 연이어 꾼 후로 근원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조시아는 에릭의 존재를 극도로 경계하면서 점차 위험한 지경으로 스스로를 몰아갑니다.

 


앞서 읽은 마이클 코리타의 밤을 탐하다오늘 밤 안녕을의 서평에 할리우드 영화에 잘 어울리는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라고 쓴 적이 있는데, 그래선지 사전정보 없이 읽은 숨은 강은 여러 가지로 쇼킹함(?) 그 자체였습니다. 읽는 내내 스티븐 킹의 샤이닝이 연상됐는데, 인터넷서점을 살펴보니 역시나 추천사나 소개글에 샤이닝이 거듭 언급돼있었습니다.

 

마이클 코리타의 웨스트바덴 호텔이 스티븐 킹의 오버룩 호텔을 만났다.” (댄 시먼스)

 

마이클 코리타는 스릴러적 요소와 스티븐 킹을 떠오르게 하는 호러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혼합시켜 복합장르의 재미를 가져다준다.” (북리스트=미국도서관협회)

 

실제로 샤이닝의 잭 토런스와 숨은 강의 에릭 쇼는 여러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환청을 듣고 환각을 볼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을 갖고 있고, 실재하지 않는 악마적 존재와 마주친 끝에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는가 하면, 신경증과 두통을 진정시키기 위해 찾는 약마저 아스피린 계열의 엑세드린으로 동일합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엔 두 주인공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이 무척 많은 편이고,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나 악의 캐릭터 역시 유사점을 많아서 그런지 샤이닝에 대한 오마주, 또는 스티븐 킹에 대한 헌사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이자 가장 중요한 무대인 숨은 강은 지하로 흐르던 본류가 지형적인 영향 때문에 간혹 웅덩이의 형태로 지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80년 전, 남부 인디애나의 작은 마을은 그 물을 이용한 생수산업으로 번영기를 구가했지만 대공황의 혼란 속에 탐욕과 이기심으로 중무장한 인물들로 인해 끔찍한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환각과 유령을 통해 80년 전의 비극에 휘말린 에릭과 조시아는 각자의 진실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건 대결을 벌이는데, 이들의 대결은 마치 샤이닝에서 오버룩 호텔에 잠식당한 잭 토런스와 그곳을 탈출하려는 모자(웬디와 대니)의 대결처럼 긴박하고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환각을 빚어내는 생수, 그 생수의 근원인 숨은 강, 그 강을 놓고 벌어졌던 80년 전의 탐욕으로 점철된 비극,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에릭과 조시아의 대결로 다시 한 번 되풀이되는 비극.... 스티븐 킹의 호러물, 특히 샤이닝과 그 후속작인 닥터 슬립의 팬이라면 숨은 강을 통해 그때의 흥분과 긴장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밤을 탐하다오늘 밤 안녕을을 기억하는 마이클 코리타의 팬이라면 호러 판타지로 이뤄진 숨은 강이 조금은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독자를 자유자재로 롤러코스터 위에 올려놓는 그의 천재적인 필력 덕분에 장르의 충격과 당혹감은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밤을 탐하다이후 2년이 되도록 그의 후속작이 출간되지 않아 무척 아쉬웠는데 RHK에서 올 가을에 그의 신작을 출간한다고 하니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오늘 밤 안녕을에 이은 링컨 페리 시리즈가 됐든 스탠드얼론이 됐든 마이클 코리타의 신작이라면 무조건 대환영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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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를 사랑하는 방법
헤일리 태너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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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의 러시아 이민자 슬럼가에서 섬처럼 고립된 채 성장하던 바츨라프와 레나는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천진난만함과 자유분방함을 잃지 않으며 먼 훗날 데이비드 카퍼필드를 능가하는 마술사와 조수가 되기를 꿈꾸는 소년, 소녀입니다. 그들은 5살에 만나 서로를 자신의 우주라고 믿으며 살아가지만 10살이 된 어느 날 레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영문 모를 이별을 겪었다가 몸과 마음이 화산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17살이 되어 운명적으로 재회합니다. 하지만 내내 서로를 잊지 못하던 두 사람의 극적인 만남은 금세 먹구름에 뒤덮이고 맙니다. 해제돼선 안 될 봉인처럼 7년 동안 묻혀있던 레나가 사라졌던 그날의 진실이 폭로되면서 바츨라프와 레나는 대혼란에 빠지고,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맞이할 위기에 처합니다.

 


줄거리만 보면 대단히 무겁고 심각한 미스터리처럼 보이지만, 이 작품은 제목의 느낌 그대로 소년과 소녀의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다만 그들이 처한 상황이나 주변 어른들의 캐릭터, 10살이라는 나이에 겪은 끔찍한 상처와 이별 이야기로 인해 한편으론 잔혹동화의 정서를 지닌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아무런 위장도, 이기심도 없는, 그래서 맑고 순수해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무엇이 숨어있는지 가늠할 수 없는 원시림 같은 위험한 모습을 띠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높이를 이해할 수 없는, 또는 이해하고 싶지 않은 어른들은 때론 선의로, 때론 악의 그 자체로 소년과 소녀의 삶에 개입합니다. 어른들은 자신들의 기준과 도덕을 옳다고 믿으며 소년과 소녀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하기도, 억지로 갈라놓기도 하지만 끝내 거스를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의 인력까지 멋대로 통제하진 못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사랑을 지키는 일은 곧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운명 같은 사랑의 힘을 더 이상 믿지 않거나 그에 관한 기억을 상실한 독자에게는 이 작품은 일종의 판타지 이상의 감흥을 주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황순원의 소나기가 그랬듯 바츨라프와 레나의 10여 년에 걸친 사랑, 이별, 재회는 어린 아이들의 풋풋하고 철없는 불장난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특별한 감정을 전해줍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상처를 극복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어른들이 쳐놓은 장막을 넘어서는 바츨라프와 레나의 사랑은 어쩌면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움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애틋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장밋빛 미래를 기약하며 이야기는 마무리되지만 누구나 다 두 사람이 앞으로 한참은 더 폭풍 속을 헤매야 할 운명임을 예감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소년과 소녀의 성장+러브스토리라고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한없이 가벼운 사랑이 난무하고 운명=허구라는 등식이 당연시 되는 시대에 바츨라프와 레나의 마법 같은 이야기는 그 또래인 10대부터 중장년에 이르기까지 모든 독자층을 아우르는 사랑에 관한 판타지로 분류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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