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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일격 ㅣ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 / 검은숲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잘 알려진 대로 ‘엘러리 퀸’은 프레더릭 다네이와 만프레드 리 두 사촌 형제가
동명의 주인공을 앞세운 시리즈를 공동으로 집필하면서 만들어낸 필명입니다.
책 소개에 따르면 ‘최후의 일격’은 두 사람의 공동 집필로는 사실상 마지막 작품이라는데
그래서인지 1929년 ‘로마 모자 미스터리’를 해결하고 이제 막 탐정이자 작가로 걸음마를 뗀
풋풋하고 새내기 같은 25살의 엘러리 퀸을 등장시켜 프리퀄의 향기까지 풍기고 있습니다.
사건은 주인공 존 서배스천과 엘러리 퀸이 태어난 1905년에 잉태되어
1929년 12월에서 1930년 1월에 걸쳐 본격적으로 벌어졌다가
27년이 흐른 1957년에 가서야 그 진상과 실체를 드러냅니다.
무려 52년에 걸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물론 사건의 중심은 1929년 크리스마스부터
다음 해 공현절에 이르는 12일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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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업자 아서 크레이그의 저택에서 열린 12일 간의 파티에는
엘러리 퀸을 비롯, 시인이자 막대한 유산의 상속자인 존 서배스천과 그의 약혼녀 러스티,
허영 가득한 여배우와 괴팍한 음악가, 출판업자, 주술사 등 모두 12명이 참석합니다.
그들은 12일 동안 정체불명의 존재가 보내오는 12개의 ‘선물’을 받게 되는데,
거기엔 맥락을 알 수 없는 선물과 기이한 암호 같은 카드가 담겨있습니다.
더구나 아무도 그 정체를 모르는 의문의 사체가 집안에서 발견되면서
12명에게 찾아온 12일 동안의 악몽이 저택을 휘감습니다.
아버지 퀸 경감의 도움까지 받으며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던 엘러리 퀸은
또 다른 시체가 발견된 후에야 사건 전체의 윤곽을 파악하게 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마지막 미스터리 때문에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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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속의 저택, 12명의 독특한 캐릭터들이 맞이하는 12번의 밤과 12개의 선물,
그리고 25년 전에 잉태된 후 현재에 이르러 끔찍한 결말을 맞은 연쇄 살인사건 등
설정만으로도 고전미가 물씬 풍기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25살의 풋풋한 엘러리 퀸은 최근 라이츠빌 시리즈에서 만난
중후한 멋을 풍기는 엘러리 퀸과 비교되어 그 나름의 재미를 주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멋진 하우스파티를 함께 나누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탐욕과 허세, 시기와 질투로 꽉 찬 인물들은
크리스마스와 새해라는 가장 화려하고 축복받은 시기에
역설적이게도 재앙 같은 12번의 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누구나 범인일 수 있고, 누구도 범인일 수 없는 미스터리한 상황에서
엘러리 퀸은 범인이 보내온 기이한 선물과 카드 문구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 애씁니다.
아직은 초보 탐정의 풋내를 벗어나지 못한 엘러리 퀸은
어딘가 조급하고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쉽사리 세운 가설은 어이없이 무너지고, 넘치는 자신감은 금세 쪼그라듭니다.
결국 12번의 밤이 지나도록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 자책감에 시달리는 엘러리 퀸의 모습은
지금껏 봐온 국명 시리즈나 비극 시리즈, 라이츠빌 시리즈에서의 엘러리 퀸과는 사뭇 달라
안타까우면서도 오히려 성장의 통과의례를 겪는 인간적인 면모를 느끼게 해줍니다.
좀 박하게 얘기하자면 진범이나 살인사건의 진실, 이어지는 반전은
요즘의 복잡하고 정교하게 구성된 장르물에 익숙한 독자들에겐
신선함이나 예상치 못한 충격이라는 점에선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CCTV도 DNA 검사도 없던 시절의 아날로그적인 추리의 맛과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와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느껴지는 어딘가 고풍스러운 정취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사랑받는 고전의 진면목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작가의 마지막 공동 집필 작품이기도 하고,
엘러리 퀸의 초창기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매력도 있어
‘최후의 일격’은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 작품임에 틀림없지만
아무래도 사소한 단서에서 차근차근 진실을 파헤치는 정통 엘러리 퀸의 활약에 매료된 탓인지
‘나이 먹은’ 엘러리 퀸을 만나보고 싶은 욕구가 간절해졌습니다.
아직 못 읽은 라이츠빌 시리즈에서 그런 엘러리 퀸을 만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