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역사 뫼비우스 서재
케이트 앳킨슨 지음, 임정희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띠지를 보면 케이트 앳킨슨을 영국 최고의 휴먼미스터리 작가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피로 얼룩진 살벌한 범죄소설에 따뜻한 인간미를 덧입힌 작품이라는 번역자의 후기 역시

휴먼미스터리 작품으로서의 살인의 역사를 함축적으로 정리한 문구입니다.

 

이야기는 영국 캠브리지에서 벌어졌던 세 개의 사건을 동시에 전개시키는데,

1970, 3살 때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올리비아 랜드를 찾는 일,

1979, 남편을 도끼로 살해하고 수감된 미셸의 갓 태어난 딸 탄야의 행방을 찾는 일,

1994, 아빠의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로라를 살해한 괴한을 찾는 일 등입니다.

 

사건의 성격만 놓고 보면 정통 미스터리와 다를 바가 없는 설정이지만

이 작품을 휴먼미스터리로 소개한 이유를 몇 가지 꼽아보면,

우선, 이야기의 뼈대 자체가 진실 혹은 진범 찾기보다는

2004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희생자 가족들의 고통 또는 회한에 맞춰져있기 때문입니다.

희생자들은 하나같이 가족들에게 사랑받던 딸 또는 동생이었고,

그들을 잃은 가족들은 짧게는 10, 길게는 34년간 아물지 않는 상처 속에 살아왔습니다.

민낯 그대로 상처와 고통을 드러내는 가족이 있는가 하면,

그것들을 꼭꼭 봉인한 채 자신의 삶에 충실하려고 발버둥치는 가족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무겁고 어두운 톤으로만 풀어놓진 않습니다.

영국식 냉소를 담은 시니컬한 문장이나 풍자와 해학이 묻어나는 블랙유머를 구사하는가 하면,

어쩐지 안쓰럽고 애틋한 시선으로 캐릭터를 바라보는 듯한 묘사를 동원하기도 합니다.

 

이 작품을 휴먼미스터리라고 정의할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세 개의 사건을 수사하는 잭슨 브로디(전직 경찰이자 현직 사립탐정)의 캐릭터가

탁월하거나 하드보일드한 면모를 자랑하는 명탐정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능력자일 뿐이며

그의 수사 방법 역시 딱히 특별하다고 할 것 없는 일반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는 (비록 이혼 후 아내가 키우고 있지만) 딸을 가진 아버지의 입장에서,

또 어린 시절 소중한 가족을 연이어 잃은 비극을 겪은 입장에서

의뢰인들의 고통을 위로하고, 그들의 호소를 들어주는 일에 더 힘을 씁니다.

물론 나름의 성실함으로 대부분의 사건을 해결하지만

일부는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연과 운명에 의해 해결되기도 합니다.

 

휴먼미스터리라는 장르적인 특별함도 그렇지만,

세 가지 사건이 묘하게 접점을 갖게 만든 형식적인 독특함도 눈길을 끄는 부분입니다.

세 사건 모두 캠브리지라는 한 공간에서 벌어진 탓도 있지만,

작가는 약간의 작위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세 사건에 얽힌 인물들이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도록 설정해놓았습니다.

독자에 따라 그 작위적인 인연을 불편하게 느끼는 경우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수용 가능한 수준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한 가지 잘 이해가 안 된 부분은 번역 제목이었는데,

이 작품의 원제는 ‘Case Histories’입니다.

어떻게 번역해야 원제의 맛이 잘 살아날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은 후의 솔직한 느낌은 살인의 역사라는 번역 제목은

어쩐지 내용과 잘 매치되지도 않을뿐더러 약간은 전략적(?)인 냄새가 풍기는 느낌이었습니다.

제목만 보고 거창한 스릴러를 연상한 독자들에겐 약간의 배신감이 남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휴먼미스터리라는 색다른 장르에 호기심이 있거나

미스터리엔 관심이 없더라도 영국식 냉소와 유머가 뒤섞인 묘사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살인의 역사는 의외로 매력적인 작품이 돼줄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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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일격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 / 검은숲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잘 알려진 대로 엘러리 퀸은 프레더릭 다네이와 만프레드 리 두 사촌 형제가

동명의 주인공을 앞세운 시리즈를 공동으로 집필하면서 만들어낸 필명입니다.

책 소개에 따르면 최후의 일격은 두 사람의 공동 집필로는 사실상 마지막 작품이라는데

그래서인지 1929로마 모자 미스터리를 해결하고 이제 막 탐정이자 작가로 걸음마를 뗀

풋풋하고 새내기 같은 25살의 엘러리 퀸을 등장시켜 프리퀄의 향기까지 풍기고 있습니다.

 

사건은 주인공 존 서배스천과 엘러리 퀸이 태어난 1905년에 잉태되어

192912월에서 19301월에 걸쳐 본격적으로 벌어졌다가

27년이 흐른 1957년에 가서야 그 진상과 실체를 드러냅니다.

무려 52년에 걸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물론 사건의 중심은 1929년 크리스마스부터

다음 해 공현절에 이르는 12일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 ●

 

인쇄업자 아서 크레이그의 저택에서 열린 12일 간의 파티에는

엘러리 퀸을 비롯, 시인이자 막대한 유산의 상속자인 존 서배스천과 그의 약혼녀 러스티,

허영 가득한 여배우와 괴팍한 음악가, 출판업자, 주술사 등 모두 12명이 참석합니다.

그들은 12일 동안 정체불명의 존재가 보내오는 12개의 선물을 받게 되는데,

거기엔 맥락을 알 수 없는 선물과 기이한 암호 같은 카드가 담겨있습니다.

더구나 아무도 그 정체를 모르는 의문의 사체가 집안에서 발견되면서

12명에게 찾아온 12일 동안의 악몽이 저택을 휘감습니다.

아버지 퀸 경감의 도움까지 받으며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던 엘러리 퀸은

또 다른 시체가 발견된 후에야 사건 전체의 윤곽을 파악하게 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마지막 미스터리 때문에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 ● ●

 

폭설 속의 저택, 12명의 독특한 캐릭터들이 맞이하는 12번의 밤과 12개의 선물,

그리고 25년 전에 잉태된 후 현재에 이르러 끔찍한 결말을 맞은 연쇄 살인사건 등

설정만으로도 고전미가 물씬 풍기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25살의 풋풋한 엘러리 퀸은 최근 라이츠빌 시리즈에서 만난

중후한 멋을 풍기는 엘러리 퀸과 비교되어 그 나름의 재미를 주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멋진 하우스파티를 함께 나누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탐욕과 허세, 시기와 질투로 꽉 찬 인물들은

크리스마스와 새해라는 가장 화려하고 축복받은 시기에

역설적이게도 재앙 같은 12번의 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누구나 범인일 수 있고, 누구도 범인일 수 없는 미스터리한 상황에서

엘러리 퀸은 범인이 보내온 기이한 선물과 카드 문구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 애씁니다.

 

아직은 초보 탐정의 풋내를 벗어나지 못한 엘러리 퀸은

어딘가 조급하고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쉽사리 세운 가설은 어이없이 무너지고, 넘치는 자신감은 금세 쪼그라듭니다.

결국 12번의 밤이 지나도록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 자책감에 시달리는 엘러리 퀸의 모습은

지금껏 봐온 국명 시리즈나 비극 시리즈, 라이츠빌 시리즈에서의 엘러리 퀸과는 사뭇 달라

안타까우면서도 오히려 성장의 통과의례를 겪는 인간적인 면모를 느끼게 해줍니다.

 

좀 박하게 얘기하자면 진범이나 살인사건의 진실, 이어지는 반전은

요즘의 복잡하고 정교하게 구성된 장르물에 익숙한 독자들에겐

신선함이나 예상치 못한 충격이라는 점에선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CCTVDNA 검사도 없던 시절의 아날로그적인 추리의 맛과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와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느껴지는 어딘가 고풍스러운 정취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사랑받는 고전의 진면목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작가의 마지막 공동 집필 작품이기도 하고,

엘러리 퀸의 초창기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매력도 있어

최후의 일격은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 작품임에 틀림없지만

아무래도 사소한 단서에서 차근차근 진실을 파헤치는 정통 엘러리 퀸의 활약에 매료된 탓인지

나이 먹은엘러리 퀸을 만나보고 싶은 욕구가 간절해졌습니다.

아직 못 읽은 라이츠빌 시리즈에서 그런 엘러리 퀸을 만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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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9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살인의 해석
제드 러벤펠드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1909,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지낸 1주일을 배경으로,

한편으론 프로이트가 직간접적으로 수사에 개입한 엽기적인 살인사건을,

한편으론 그의 정신분석학에 반발하는 기존 신경학계의 프로이트 죽이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실존 인물과 역사적 사실 속에 허구의 인물과 사건을 그려 넣은 작품은 많이 읽었지만

이처럼 상상력과 리얼리티가 완벽하게 조합된 작품을 만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입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미국 방문이 유쾌하지 못했다는 프로이트의 회고를 기반으로

작가는 그가 1주일 동안 머물렀던 뉴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를 창작해냈는데,

무엇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대표되는 성()을 화두로 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대해

학문적, 도덕적인 반발은 물론 인신공격까지 가했던 기존 신경학계의 공세를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풀어낸 점이 압권이었습니다.

 

더불어,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이 초고층 마천루로 새로 그려지던 1909년의 뉴욕에서

호화 아파트에 살던 젊은 여인이 참혹하게 고문 살해된 채 발견되고,

동일범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두 번째 희생자가 겨우 목숨을 구한 상태로 발견된 사건은

우연한 인연이 겹치면서 프로이트와 이 작품의 주인공 스트래섬 영거 박사를

수사의 중심부로 끌어들이게 됩니다.

 

주된 이야기 역시 두 갈래로 진행됩니다.

클라크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강연을 하기로 돼있던 프로이트와

그의 저서를 번역하여 출판할 예정이던 외과의사 에이브러햄 브릴에게

의문의 협박장과 실질적인 위협 행위가 연이어 발생합니다.

작가는 협박의 주체로 비밀 결사처럼 보이는 삼두회라는 조직을 초반부터 등장시키지만

이들의 동기와 궁극적인 목적은 작품 전체를 통해 천천히 드러냅니다.

 

오히려 메인이라 할 수 있는 고문살인사건에는 뉴욕의 신참형사 리틀모어가 활약하는데

그야말로 온몸에 기름을 바른 것처럼 유들유들함으로 무장한 이 캐릭터는

프로이트의 자문을 받는 스트래섬 영거 박사와 콤비를 이뤄

끔찍한 살인사건의 실체를 밝혀 나갑니다.

리틀모어가 피해자와 용의자에 관한 정통 수사를 벌이는 동안

스트래섬 영거 박사는 두 번째 피해자인 17살 소녀 노라의 상담치료를 통해

사건 당일의 기억과 과거의 트라우마를 이끌어내면서 진상을 파악합니다.

 

두 사건에 모두 관여하게 된 영거 박사는 원래 셰익스피어를 전공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강압으로 의사가 되어 신경학을 전공하다가 프로이트라는 거성을 만났습니다.

그래서인지 작품 속에 햄릿에 대한 기존의 해석과 프로이트 식 해석의 논쟁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면서 등장하고, 그것은 사건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게 됩니다.

아마 프로이트와 햄릿에 관한 충분한 사전 지식을 가진 독자라면

살인의 해석에서 좀더 특별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고문살인사건의 실체는 반전을 거듭한 끝에 영거박사와 리틀모어에 의해 밝혀지는데,

그 속도감이나 꼬임(?)의 정도가 너무 빠르고 심해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입니다.

독자에 따라 너무 많이 꼬아놓았다고, 그래서 작위적으로 보인다고 불편해할 수도 있는데

저 역시 그렇게 느껴진 부분이 좀 있긴 했습니다.

(어쩌면 속도감에 휘말려 너무 빨리 읽느라 놓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목부터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이용하여 지어진 살인의 해석

얼굴마담으로 실존인물을 특별 출연시켰던 기존의 작품들과 달리

프로이트를 사건의 중심부에 위치시킴으로써 특별한 재미를 맛보게 해준 작품입니다.

비록 애피타이저 수준이지만 그의 정신분석학의 일면을 복습할 수 있었고,

햄릿에 대한 해석이라든가 사건 피해자의 억압된 기억을 복구하는 장면 등은

대학 시절 처음 프로이트를 대했을 때의 신기함과 놀람을 다시 연상시켜줬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영거 박사의 입을 통해 작가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관한

180도 다른 해석을 내놓는 대목인데,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스릴러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충분히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돼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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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의 문제 진구 시리즈 1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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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별난 철학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특이한 캐릭터 진구가 첫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수학 천재 중학생이었지만 아버지의 의문의 죽음 이후 삶 자체가 제 길을 벗어났고,

시큰둥한 호기심에 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복수 전공했지만 그 역시 3년 만에 접었으며,

지금은 딱히 세상사는 목표 같은 것도 없이 그저 내키는 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런 그가 연인인 주해미와 함께 맞닥뜨리는 7편의 사건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경찰, 유족, 직장동료로 변신해가며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동시에

아파트 한 채 값의 수입까지 올리는, 그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표제작 순서의 문제’,

셜록 홈즈처럼 사소한 진술을 들은 것만으로

사건의 전모를 눈앞에서 지켜본 듯 밝혀내는 대모산은 너무 멀다’,

특유의 기지(?)를 발휘하여 자살로 결론 난 사건을 손바닥 뒤집듯 살인사건으로 변모시키지만,

인간의 너저분한 탐욕에 대해서만은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는 중편 티켓 다방의 죽음’,

물리적으로 완벽하게 위장된 알리바이의 허구를 파헤치는 것과 동시에

도진기 작가의 또 다른 히어로 고진 변호사와의 첫 만남을 그린 단편 뮤즈의 계시’,

그리고 진구와 해미의 프리퀄 격으로 첫 만남 때 마주친 살인사건을 그린 환기통

사이즈는 중단편이지만 각 편마다 뚜렷한 개성과 매력을 지니고 있어

진구라는 캐릭터와 처음 만나는 독자에겐 깊은 인상을 남겨주는 작품집입니다.

 

사실 진구는 그 정체성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이 어려운 캐릭터입니다.

정의감으로 뭉친 명탐정인가 하면, 법을 우습게 여기는 불량시민의 면모도 있고,

세상을 달관한 백수인가 하면, 돈에 관한 한 절대 뒤지지 않는 욕심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출판사의 책소개에 나온 진구에 대한 설명은 100% 공감 가는 내용이었습니다.

 

도덕과 정의를 위해 재능을 쓰는 여타의 탐정과는 달리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범죄에만 반응하고,

법망의 허점을 찾아내어 이용하는 데 일말의 주저도 없는 진구는 소시오패스에 가깝다.

비상한 두뇌와 마비된 모럴(moral)로 범죄의 진실을 파헤치는 그는

가끔은 범죄자만큼이나 악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의 아슬아슬한 이중성을 보완해주는 것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해미의 역할입니다.

때론 철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진구에게 있어 그녀는

그가 좋아할만한 사건을 물어다 주는 중요한 사건 브로커(?)이자

대책 없이 게으름을 부리고 싶을 때 정신이 번쩍 나게 해주는 냉수 같은 존재입니다.

진구의 천재성이나 사건의 해결 과정만큼이나 두 사람의 투닥대는 멜로 라인은

진구 시리즈를 읽는 또 다른 재미입니다.

 

냉철하고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하드보일드 명탐정도 좋아하고,

마음껏 천재의 끼를 발휘하는 안하무인 명탐정도 좋아하지만,

그 두 개의 얼굴을 모두 가진듯한, 그래서 더 애정이 가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진구는

앞으로의 성장과 활약상이 더욱 더 기대되는 매력덩어리 캐릭터입니다.

진구 시리즈의 최신작 가족의 탄생이 출간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벌써부터 그 후속작이 기다려지는 것은 저만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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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에게 고한다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10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이연승 옮김 / 레드박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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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찰소설의 매력 중 하나는 범인과의 대결 구도 못잖게 흥미롭게 설정된 악역 경찰(특히 관료) 캐릭터입니다. 주인공은 범인을 잡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도 모자라 공을 빼앗고 과실을 떠넘기는 부패하고 사악한 관료들과 싸우느라 녹초가 되곤 합니다. ‘범인에게 고한다는 거기에 더해 평생 지워지지 않을 트라우마까지 얹어줌으로써 주인공을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넣은 상태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6년 전 벌어진 아동 유괴살해 사건 당시 마키시마는 특유의 감으로 범인을 포착했지만 무능한 관료들의 오판으로 인해 범인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실책은 그가 뒤집어썼고 좌천을 피할 길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연이어 발생한 아동 유괴살해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가나가와 현경으로 그가 복귀합니다. 공교롭게도 그를 복귀시킨 본부장은 6년 전 그에게 모든 실책을 떠넘겼던 자입니다. 전대미문의 방식, TV뉴스를 통한 공개수사가 시작되고 마키시마는 배드맨이라 자칭하는 범인과의 소통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시민은 물론 경찰 내부에서조차 무리한 시도라고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누군가는 6년 전 사건을 문제 삼아 마키시마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방송출연이 거듭될수록 마키시마는 점점 더 위기에 몰리고 사건해결은 요원해집니다. 결국 악화된 여론과 상부의 압력 때문에 또다시 희생양이 필요해진 본부장은 마키시마에게 1주일의 시한을 못 박습니다.

 


사건 자체는 복잡하거나 어려운 구도가 아닙니다. 하지만 범인에게 고한다는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갇힌 형사, 경찰 내부의 추잡한 알력, TV를 통한 범인과의 접촉 시도, 시청률 경쟁에 나선 방송사의 보도행태 등 다양한 설정을 통해 서사의 폭을 크게 확장시켰습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미덕들 덕분에 금세 마지막 페이지에 이를 정도로 책장은 술술 잘 넘어갑니다.

 

형식적인 특별함 외에도 범인에게 고한다는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이나 그들의 감정을 쉴 새 없이 요동치게 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함께 분노하고, 슬퍼하고, 웃게 만드는 작가의 필력이 도드라진 작품입니다. 최근 읽은 검찰 측 죄인에서도 느낀 점이지만 시즈쿠이 슈스케가 건드리는 감정선은 묵직하면서도 시니컬하고 동시에 어딘가 쓸쓸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특히 가족애라든가 화해와 용서를 다룰 때는 울컥함을 참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인공 마키시마가 부여받은 극단적인 상황과 감정들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견뎌낼 수 없을 정도로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입니다. 잡지 못한 범인, 지키지 못한 피해자, 황폐해진 자신으로 인해 그늘이 드리워진 가족 등 마키시마의 삶은 너덜너덜한 누더기에 다름 아닙니다. 터무니없는 마녀사냥 식 비난과 굴욕적인 좌천은 합리적이고 온화했던 그를 변질시켜 증오와 분노를 삶의 동력으로 삼게 만들었고, 결국 그는 6년 간 쌓여온 증오와 분노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터뜨려가며 소시오패스 배드맨과의 일전을 불사합니다. 그는 자신의 수사를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거리낌 없이 제거하는가 하면 오해와 비난을 감수하면서라도 진범을 잡기 위한 에 기꺼이 출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대 초반의 나이에 할아버지가 되어 아내와 딸, 손자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평범한 가장으로서의 모습이나 절망에 빠진 유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경찰의 길을 제대로 걷는 동료에게 애정과 믿음을 주는 모습은 그가 아무리 냉소와 비관에 길들여진다 해도 결국엔 자신의 본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마키시마 외에도 선과 악의 진영에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 역시 어디선가 본 듯한, 또 어딜 가든 하나쯤은 꼭 있을 법한 캐릭터를 지니고 있어서 읽는 내내 생생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특히 고위 관료에서 말단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포진한 경찰은 경찰캐릭터 백과사전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깊이나 사실감에서 압도적이었습니다.

 

다만, 배드맨의 단서를 잡고 체포하는 과정이라든가, 내부유출자를 찍어내는 이야기 등 몇몇 에피소드에서는 조금은 덜그럭거리는 느낌을 받기도 했는데, 그것이 독자를 너무 과대평가한 작가의 불친절함과 설명 부족 탓인지, 너무 빠른 속도로 읽느라 중요한 대목을 놓치고 지나간 독자 탓인지는 확실하진 않습니다. 어쩌면 명쾌하고 선명한 이야기와 빠른 전개를 맛봤던 검찰 측 죄인을 읽은 지 얼마 안 돼서 저도 모르게 두 작품의 서사나 속도감, 밀도 등을 비교한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시즈쿠이 슈스케의 대표작인 두 작품을 연달아 만나게 돼서 반가웠고, 특히 애호 장르인 법정물과 경찰소설이어서 더욱 반가웠습니다. ‘범인에게 고한다TV뉴스가 작품 속 중요한 설정이라 영상물로 제작될 여지가 많다고 여러 번 느꼈는데 검색해보니 2007년에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꼭 한번 찾아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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