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메르세데스 빌 호지스 3부작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육중한 메르세데스 차량으로 군중들을 덮치며 오르가즘을 느끼는 최악의 소시오패스와

이 사건을 미결로 남긴 채 퇴임한 전직 경찰과의 대결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일그러진 가족사에 타고난 소시오패스 기질까지 갖춘 브래디 하츠필드는

자신이 일으킨 사건을 수사하다 퇴직한 형사 호지스에게 조롱으로 가득 찬 편지를 보냅니다.

당초 목적은 그의 우울증과 적막감을 부추겨 자살에 이르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결과는 오히려 꺼져가던 호지스의 에너지를 부활시키고 말았습니다.

 

노련함과 경험으로 중무장한 호지스는 거꾸로 브래디를 패닉 상태로 몰아넣으면서

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경찰에 알리지 않은 채 전도유망한 흑인 청년 제롬,

불안정한 정신의 소유자지만 IT 능력자인 홀리의 힘을 빌려 비밀수사를 벌입니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압박당하던 브래디는 미련 따위 남아있지 않은 자신의 인생을 걸고

마지막 원대한 계획, 즉 수천 명의 목숨을 한꺼번에 날려버릴 희대의 사건을 기획함으로써

호지스를 위기일발의 상황으로 몰아넣습니다.

 

● ● ●

 

스티븐 킹의 첫 탐정 미스터리라지만 주인공의 직업이 전직 형사라는 점을 제외하곤

폭발 직전의 긴장감, 냉소적인 유머감각, 능청맞을 정도로 물 흐르듯 굴러가는 문장들,

그리고 후반부에 폭주하며 급가속 되는 스릴감 등

그의 전작들이 보여준 미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낯익은 작품입니다.

 

사실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대로) ‘업계 최고수인 스티븐 킹이

왜 진작 그만의 개성이 녹아있는 명탐정 캐릭터를 탄생시키지 않는지는 늘 의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그의 첫 탐정 캐릭터가

60을 훌쩍 넘긴데다 심장이 갑자기 멈춰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고도 비만의 퇴직 경찰이라는 점은 작은 충격과 함께 더욱 큰 의문을 던져줬습니다.

필립 말로나 해리 보슈나 패트릭 켄지처럼

좀더 하드보일드하고, 시크하고, 거칠지만 똑똑한 탐정을 기대했던 탓일까요?^^

 

킹은 그의 첫 탐정에게 슈퍼맨의 능력 대신 노련함과 통찰력이라는 미덕을 부여했습니다.

거기다 자신의 약점을 알고, 지나온 인생을 후회할 줄 아는 인간미를 얹어 놓음으로써

폼나는 탐정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는 배신했지만,

대신 그 어느 탐정보다 인간적이고, 응원해주고 싶은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비주얼이나 나이 때문에 가끔 아쉽거나 안쓰러워 보일 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호지스 형사의 수사는 잔꾀나 행운보다는 무모한 돌직구의 냄새가 더 강합니다.

또한 고집스런 원 맨 밴드가 아니라 남들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가 하면,

잘 모르거나 부족한 부분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솔직함을 지닌 인물입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런 부족한 점 투성이인 캐릭터 덕분에

소시오패스를 향한 그의 집념은 더 진정성 있게 그려졌고,

그가 수사과정에서 겪는 굴곡들은 환호와 연민을 불러일으키기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킹이 호지스 형사에게 준 너무나 큰 시련은

솔직히 좀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할 정도로 말이죠..)

 

킹의 작품을 많이 읽진 못했지만 샤이닝닥터 슬립’, ‘조이랜드

읽은 작품마다 등장했던 일그러진 가족사는 미스터 메르세데스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특히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나름의 핸디캡을 부여함으로써

호지스 형사 대 미스터 메르세데스의 대결 구도 외에도 풍성한 읽을거리를 전해줍니다.

일에 전념한 덕분에 유능한 경찰은 됐지만 무정한 남편과 아버지가 돼버린 호지스 형사,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지만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는 청년 제롬,

자기 강박과 왕따라는 성장기 탓에 50이 다 되도록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홀리,

그리고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뒤 세상과 단절된 채 알코올중독자 어머니와 단 둘이 살면서

거부할 수 없는 화인(火印)같은 소시오패스 유전자를 자가발전 시킨 브래디 하츠필드 등

모두가 평범하지 못한 개인사 또는 가정사를 보유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이런 설정은 킹만의 독특함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오히려 상투적인 느낌이 강한 설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성과 차이점이 느껴지는 이유는

역시 순식간에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킹의 화려한 비유와 표현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따뜻함과 시니컬함이 공존하는 문장들, 비속어를 전혀 비속하지 않게 만드는 표현들,

날이 잔뜩 선 유머와 덫이 숨겨진 해학 등을 통해

캐릭터들은 더 세심하게 묘사되고, 현장의 사실감은 고조됩니다.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다가 언제 여기까지 왔지?” 싶어서 되돌아가 천천히 재독하다보면

빠른 계곡물처럼 흐르는 그의 문장에 얼마나 깊이 빠져들었는지 새삼 놀라게 됩니다.

 

스티븐 킹답게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는 엔딩이 인상적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을 보니

호지스 형사를 주인공으로 한 3부작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네요.

60이 넘은 은퇴형사, 술 마실 나이도 안 된 파릇하고 똑똑한 흑인 청년,

그리고 어딘가 불안정한 폭탄 같은 40대 여인으로 구성된 호지스와 외인구단

후속작에서 또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지 정말 기대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린의 시선
서미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어디까지 내용을 소개하는 게 적당한지 가늠할 수 없어서 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글을 보니

스포일러가 아닐까?’라고 우려했던 내용이 전부 노출돼있어서 그 수준에 맞춰 서평을 씁니다.

조금이라도 찜찜한 분들은 제 서평은 물론 책 소개글도 건너뛰고 작품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20년 전, 살인범의 만행으로 가족은 몰살당하고 본인도 27곳의 자상을 입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이제 서른이 된 여자 최아린은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녀는 꿈을 통해, 또는 환시를 통해 남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서 아무 때나 불쑥불쑥 일어나곤 합니다.

그 능력은 때론 지독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지만,

때론 그 자체가 독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미쳤다, 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진술이었지만 최아린의 특별한 느낌에 끌린 오성준 형사는

그녀가 언급한 장소에서 토막 난 여자의 시신을 발견하곤 충격을 받습니다.

그녀의 특별한 능력을 눈에 보이는 대로 믿어야 할지,

숱하게 봐온 사기꾼들과 다를 바 없다고 이성적인 판단을 해야 할지 혼란스럽습니다.

결국 최아린의 특별한 능력에 계속 의지하게 된 오형사의 수사는 나름 진전을 보이지만

어느 순간 오형사는 오히려 최아린이 유력한 용의자가 아닐까 의심하게 됩니다.

 

● ● ●

 

어떤 여자가 경찰서 강력반 형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꿈에, 살인사건 피해자가 암매장 된 곳을 봤습니다. 거기가 어디냐 하면...”

현실이라면 바로 여경들에게 끌려 나가거나 심하면 병원으로 직행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픽션에서는 심심찮게 다뤄지는 캐릭터이기도 하죠.

공교롭게도 유사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일본 장르물을 본 직후에 이 작품을 보게 돼서

저도 조금은 얼떨떨한 느낌이었는데,

어쨌든 비현실적인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서미애 작가는 나름의 근거와 사례를 통해

아린의 특별한 능력을 제법 현실적인 것으로 느끼게 만들어줍니다.

 

이야기는 단순해보이면서도 어딘가 몽환적인 느낌을 갖게 만드는데,

그것은 현재의 토막 살인사건과 20년 전 아린이 겪은 사건이

현실과 꿈, 환시를 수시로 오가며 묘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형사의 수사에 도움을 주는 현실의 아린이 있는가 하면,

꿈을 통해 20년 전 사건 당시의 참상을 낱낱이 지켜보는 아린도 있고,

길을 가다 문득 환시를 통해 현재와 과거를 들여다보는 아린도 있습니다.

세 명의 아린은 챕터가 바뀔 때마다 예고도 없이 툭툭 나타나

독자로 하여금 시점과 화자가 제멋대로 달라진다고 느끼게 만드는데,

이는 당혹감과 호기심, 긴장감을 한껏 고조시키기 위해 적절한,

즉 작품의 내용과 딱 들어맞는 구성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미애 작가의 전작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서평을 찾아보니 대체로 뛰어난 구성에 대해 호평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아린의 시선역시 그런 점에서 미덕이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그 덕분에 독자들은 현실의 사건에 적절히 몰입하면서도

아린이 겪은 20년 전 사건의 비밀과 그녀의 특별한 능력에 대해서도

조금도 쉴 틈 없는 호기심을 갖고 작품을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나란히 병행되는 두 개의 서사가 그만큼 잘 교차하며 녹아들었다는 의미입니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전직 심령술사이자 현재 아린을 돕는 루나의 캐릭터가

조금은 필요에 따라 설정된 것처럼 작위적으로 느껴진 점인데,

그 외엔 꿈이나 환시 능력에 대해 원초적인 거부감을 가진 독자만 아니라면

누구나 서미애 작가가 펼쳐놓은 정교한 미스터리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적절한 조연들의 배치와 무리하게 설정되지 않은 형사 캐릭터들,

반전은 물론 상처투성이 아린에게 희망의 끈을 남겨놓은 엔딩 등

많지 않은 분량에 여러 가지 미덕을 채워 넣은 서미애 작가의 필력 덕분에

그녀의 전작들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아린의 시선의 후속작, 그러니까 아린 시리즈가 출간될 수도 있다는,

조금은 이른 기대감도 갖게 됐구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걸 온 더 트레인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불임에 따른 우울증과 폭음으로 알코올중독이 된 채 남편에게 버림받은 레이첼은

친구 집에 얹혀살면서 매일 기차를 타고 이미 해고된 직장으로 거짓 출퇴근을 합니다.

창밖으로는 전 남편 톰과 새 아내 애나가 살고 있는 자신의 옛집이 보이는가 하면,

늘 웃음과 행복으로 가득 찬 이웃집의 메건과 스콧 부부도 보입니다.

어느 날 메건이 낯선 남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하곤 레이첼은 분노와 배신감을 느끼지만

그녀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알려야 된다는 강박에 빠집니다.

하지만 경찰도, 메건의 남편 스콧도 알코올중독에 빠진 레이첼의 진술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건 발생 당시 인근에서 피투성이가 된 레이첼을 봤다는 증언이 나오고,

필름이 끊긴 레이첼이 그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자 용의자로 의심받는 상황에 이릅니다.

기차 안에서 목격했던 메건 곁의 낯선 남자는 누구인지?

만취한 채 누군가에게 폭행당한 것 같지만 전혀 기억나지 않는 그날 밤의 진실은 무엇인지?

혹시 자신이 메건의 실종에 관여된 것은 아닌지?

레이첼은 끝없이 자문하지만 알코올에 의해 사라진 기억은 전혀 되돌아올 줄 모릅니다.

 

● ● ●

 

이야기는 세 여자 레이첼, 메건, 애나가 번갈아가며 화자를 맡으며 전개됩니다.

시제도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세 명의 와 그녀들의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구성은

독창적이면서도 궁금증과 긴장감을 동시에 증폭시키는 매력적인 설정입니다.

 

이야기는 실종사건의 진실을 찾는 미스터리의 구도를 갖췄지만

세 여자의 집착, 욕망, 기억, 거짓말 그리고 일그러진 사랑법을 그린 심리물에 가깝습니다.

알코올중독으로 망쳐버린 과거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수렁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레이첼,

멈추지 않는 욕망의 화신이자 일그러진 사랑을 통해서만이 안식을 찾을 수 있는 메건,

불륜을 통해 레이첼의 남자를 쟁취했지만 그녀의 광기 서린 집착이 두렵기만 한 애나 등

결코 평범하지 않은 세 여자의 삶은 폭발 직전의 불안정한 화합물처럼 위태롭고,

어딘가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위화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 여자의 남자들 역시 비슷한 톤의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는데,

어딘가 음험해 보이기도 하고, 거침없는 욕망에 충실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서

누가 범인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의혹을 사게 됩니다.

 

인간미나 사회성이 결여된 것처럼 보이는 캐릭터들이지만

의외로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집착하고 욕망하는 가치관은 사랑과 가족입니다.

자신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가 하면

행복한 가족을 지키고 완성하기 위해 극단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습니다.

특히 사랑과 가족의 결정체인 아기가 세 여자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레이첼의 우울증과 알코올중독은 전 남편 톰과의 불임에서 기인했고,

애나의 행복과 불행은 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귀여운 아기 때문이며,

메건의 집착과 욕망은 아기를 잃었던 비극적인 기억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녀들의 욕망은 소박했지만, 그것이 초래한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고,

그 아이러니는 읽는 내내 목 안의 가시처럼 안쓰럽거나 불편하게 여겨졌습니다.

 

기찻길 옆에 자리 잡은 똑같은 모양의 집에 살며

운명처럼 얽히고설킨 관계를 맺어야만 했던 세 여자의 무겁고 고단한 삶을 지켜보는 것도,

또 그 관계 속에서 벌어진 의문의 실종 사건의 진실을 캐는 일도 무척 흥미로운 일이지만,

아쉬운 점이라면 비슷한 상황과 전개가 반복되면서 약간은 피곤한 책읽기가 됐다는 점입니다.

460여 페이지는 어지간한 미스터리나 스릴러에 비하면 약소한 분량이지만

걸 온 더 트레인에 담긴 이야기의 규모에 비하면 조금은 과한 분량이라는 느낌입니다.

이 작품에 쏟아진 찬사와 객관적인 판매량 지표를 보면서

한번쯤 고개를 갸웃했던 것도 동어반복과 분량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영미권 서평가들이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와 이 작품을 비교하며

어느 작품이 더 매력적인가, 라는 논쟁을 벌였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평하자면, 미스터리와 반전에 관한 한 나를 찾아줘가 한 수 위라고 판단되지만,

집요할 정도로 디테일을 살린 심리물을 기준으로 한다면

어느 작품이 우월하다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만큼 대등한 작품들이라는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랫맨
미치오 슈스케 지음, 오근영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약간 상세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아직 안 읽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마추어 밴드 선다우너의 연습 스튜디오 창고에서 이 밴드의 전직 드러머이자

히메카와 료의 연인인 히카리가 대형 앰프에 깔려 숨진 채 발견됩니다.

사건이라고도, 사고라고도 확신할 수 없는 히카리의 죽음에 대해

경찰은 물론 당시 스튜디오에 있던 밴드 멤버들도 진상을 파악하려 애씁니다.

히메카와 료는 히카리의 죽음을 지켜보며 23년 전에 겪은,

그러나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비극적인 가족사를 떠올립니다.

23년 전 누나의 죽음과 히카리의 죽음은 어딘가 닮은꼴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거듭된 반전 끝에 진범이 밝혀짐과 동시에

히메카와 료는 23년 전의 누나의 죽음의 진실과도 맞닥뜨리게 됩니다.

 

● ● ●

 

정교한 퍼즐처럼 빈틈없이 직조된 미스터리와

의식의 밑바닥을 훑는 듯한 조금은 관념적인 비극이 함께 섞여있는 작품입니다.

한쪽에선 밴드 연습 스튜디오에서 벌어진 히카리의 죽음을 추적하는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한쪽에선 히카리의 죽음으로 인해 23년 전의 비극적인 가족사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만

히메카와 료의 고통스럽고 복잡한 회한에 대한 묘사가 진행됩니다.

 

사실 사건 자체도, 그 해결 과정도 대단한 트릭이나 복잡한 구도를 갖고 있진 않습니다.

후반부에 격하게 몰아치며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반전이 이 작품의 백미이긴 하지만

사건이나 반전보다 랫맨의 개성과 존재감을 돋보이게 하는 진짜 미덕은

심리, 기억, 착각, 모방, 애증 등 다분히 관념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장치들을

현실의 사건들과 정교하게 결합시킨 작가의 완벽한 설계에 있습니다.

 

23년 전 누나의 죽음에 관한 히메카와 료의 기억은 혼란 그 자체입니다.

다만 자신과 아버지, 어머니가 누나의 죽음에 관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만큼은

불확실하지만 희미한, 진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모호한 기억을 지니고 있는데,

그 기억은 퇴색되기도, 변색되기도, 증폭되거나 축소되기도 하면서

지난 23년 동안 히메카와 료를 힘들게 해왔습니다.

 

그런데, 현재에 벌어진 히카리의 죽음은 누나의 죽음과 꼭 닮아있습니다.

아니, 히메카와 료는 두 죽음이 닮아있다고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그는 23년 동안 유기체처럼 제멋대로 자가발전해온 기억을

이제는 어떤 형태로든 정리하고 끝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자의반 타의반으로 히카리의 죽음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 히메카와 료는

파국을 맞이하기 직전 예상치 못한 반전을 겪으며 사건의 진상에 눈을 뜨게 되고,

그 과정에서 우연의 힘을 통해 23년 전 누나의 죽음의 진상까지 깨닫게 됩니다.

 

미치오 슈스케는 히메카와 료의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심리 상태를

현실의 두 사건과 빈틈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연결시킵니다.

그 때문에 사건의 해결 과정은 물리적인 단서나 자백, 목격담 등이 아니라

히메카와 료의 기억과 착각, 불안정한 심리상태에 의해 그 방향이 결정되곤 합니다.

물론 경시청의 형사가 수사를 진행하고, 물증을 찾아내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독자는 그 형사가 아니라 히메카와 료를 통해 사건을 들여다보게 설정돼있어

그가 혼란에 빠지거나, 기억과 착각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게 되면

독자 역시 똑같은 혼란과 착각을 겪게 됩니다.

 

이런 설정 탓에 독자에 따라 쉽지 않은 책읽기를 겪은 경우도 적잖을 것입니다.

마치 한편의 복잡한 심리극을 읽는 듯한 느낌도 편하지만은 않고,

관념적인 요소들을 현실의 사건들과 무리하게 연결시킨 지점에서는

정교함 대신 위화감이나 작위성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모방, 흉내, 카피의 대상으로 자주 등장하는 아버지의 역할,

주요 인물들은 물론 조연들에게까지 부여된 불행한 가족사,

밴드가 연주하는 노래 가사 속의 다양한 상징 등은

때론 과한 인공미 때문에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최근 읽은 그 어느 작품보다 서평 쓰기가 곤란했던 작품입니다.

단순한 내용 언급조차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상세히 묘사할 수 없었던 탓도 있지만,

주관과 관념처럼 실체 없는 것들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현실 속 사건들과 결부되다보니

서평 역시 무척이나 모호하고 관념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간략하게 총평하자면,

깔끔하고 선명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대놓고 추천하기 어려운 작품이지만,

인간의 심리와 기억에 관한, 묵직하고 어딘가 불온해 보이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미치오 슈스케의 반전 섞인 정교한 설계도를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법사의 제자들 밀리언셀러 클럽 140
이노우에 유메히토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돌연변이를 거쳐 탄생한 치사율 100%의 신종 바이러스로 고후 시 일대가 쑥대밭이 됩니다.

용뇌염혹은 드래건바이러스라 명명된 이 재난 속에서 기적적으로 네 사람만이 생존하는데

문제는 이들이 심각한 후유증, 즉 상식 밖의 능력을 지니게 됐다는 점입니다.

마음만으로 사물을 움직일 수 있는 염동력(念動力),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는 투시력,

그리고 회춘(回春)과 빙의의 힘 등 초현실적인 능력들이 그것입니다.

바이러스를 퍼뜨려 수많은 희생자를 발생시킨 주범들로 낙인찍힌 가운데

병원이 제공한 거처에 머물며 바이러스의 연구에 일조하는 한편

자신들의 초능력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훈련을 받던 이들은

사회로 복귀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매스컴을 통해 자신들의 초능력을 선보이지만

그로 인해 생각지도 못한 참극에 빠지고 맙니다.

결국 경찰이 개입하고 이들을 체포하려 하지만 오히려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어 갑니다.

 

● ● ●

 

오래 전에 만화인지 영화인지 모르겠지만

번개를 맞고 초능력을 갖게 된 주인공이 등장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초능력까지는 아니지만 헐크 역시 연구과정에서 발생한 사고로 인해

초인적인 육체와 힘을 갖게 되는 캐릭터지요.

 

마법사의 제자들에 등장하는 초능력자들은 예전의 캐릭터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그야말로 슈퍼 울트라 급 능력자들입니다.

공중부양이나 과거를 투시하는 능력은 애교이고,

차를 탄 채 날아다니거나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옮겨 다니는 것은 물론

심지어 빙의를 통해 타인을 조종하거나 산허리를 잘라낸 뒤 공중에 띄우기도 합니다.

 

치사율 100%의 신종 바이러스의 습격에서 살아남은 극소수의 인물들이

초능력자가 되었다는 설정에서 출발한 마법사의 제자들

말 그대로 현실을 넘어선 판타지 오락물이지만

얼마 전 메르스를 겪은 한국 독자들에겐 남다른 섬뜩함을 느낄 수 있는 소재입니다.

 

염동력, 투시력, 빙의와 회춘 등 위험하지만 누구나 욕망하기 마련인 다양한 초능력,

인류의 멸망까지 초래할 만큼 극도로 위험한 바이러스,

어딘가 의심스런 병원의 태도, 경찰의 무리한 진압이 불러온 유혈참사,

매스컴의 흥분과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 초능력에 대한 여론 등

블록버스터 급 설정들이 다채롭게 등장한 덕분에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에, 갈수록 초현실성이 증폭되는 이야기들이 전개되지만

이상하게도 거부감이나 황당함은 전혀 느낄 틈이 없습니다.

 

사실 언뜻 봤을 때는 로빈 쿡의 감염이나 코마처럼 메디컬 스릴러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런 내용이라고 하기엔 제목이 너무 특이해서 궁금함과 호기심이 일었는데,

막상 초능력이라는 소재가 튀어나오자 당황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 호러물도 좋아하고 초현실적인 이야기도 좋아하지만

초능력을 가진 캐릭터에 대해서는 약간의 편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 같은 경향을 가진 독자나 기본적으로 판타지나 SF물에 관심이 없는 독자라도

물 흐르듯 이야기를 끌고 가는 작가의 필력에 한 번 발을 담그면

단숨에 끝까지 끌려갈 정도로 이야기의 흡입력은 대단합니다.

이 뒤에 남은 분량을 무슨 이야기로 채우려고 하지?”라는 의문이 들 때마다

작가는 생각지도 못한 시퀀스를 도입하면서 새로운 긴장감을 조성하고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엔딩에 대해서는 아마 호불호가 좀 갈릴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몇 페이지 남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를 정리하기는커녕

오히려 상황을 최악으로 치닫게 만든 작가가 어떤 엔딩을 준비했는지 정말 궁금했는데,

개인적으로 100% 만족할만한 엔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인상을 찌푸릴만한 엔딩도 아니었습니다.

 

이노우에 유메히토는 작년 여름 러버 소울로 처음 만났는데,

그때도 뛰어난 필력과 반전으로 기대 이상의 매력을 느낀 기억이 있습니다.

러버 소울을 읽은 후 그와 도쿠야마 준이치가 콤비작으로 내놓은

클라인의 항아리에 큰 관심을 갖게 됐었는데

절판 상태라 중고서점에서라도 찾아야지, 해놓고 금세 1년이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또 공수표가 될 수도 있지만, 읽는 건 나중이라도 어떻게든 구매라도 시도해봐야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