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이용덕 지음, 양윤옥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8월
평점 :
품절


번역하신 양윤옥 님은 옮긴이의 말에서 일본 블로거의 글을 인용하시면서,

이 작품의 제목이 두 가지로 읽힐 수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그런 생각일랑 접게 해줄 테니.”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기꺼이 도와줄 테니.”

 

저 역시도 그랬지만, 아마 대부분의 독자는 후자 쪽의 이야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역시 읽는 내내 등장인물이나 줄거리 모두 기대한 대로 전개됐지만,

마지막까지 읽은 후에는 전자와 후자가 절묘하게 섞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훤칠한 외모와 달리 굼뜨고 요령 없고 덤벙대는 결점을 지닌 데다

친구도 없고, 똑똑하고 잘난 가족들과는 절연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이며,

입시를 코앞에 둔 삼수생이면서 아르바이트로 생계까지 챙겨야 하는 도쿠야마 히사시는

머리도 나쁘고, 인내심도 없고, 게을러터지기만 한 내 인생은 절망적이야.”라고 자책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21살 청년입니다.

 

그런 도쿠야마가 우연히 들른 단란주점에서 19살의 야마나카 하쓰미를 만납니다.

그녀가 준 명함에는 힘들거나 죽고 싶어지면 전화주세요. 언제든지.”라고 적혀있습니다.

도쿠야마는 대량학살, 고문, 강간 등을 다룬 책들과 호러DVD를 좋아하는 하쓰미가

처음엔 낯설고 기이하게 여겨지지만 금세 그녀에게 마음을 사로잡히고 맙니다.

 

죽음을 지상최고의 선으로 생각하며 온통 악의로 둘러싸인 염세주의의 화신인 하쓰미는

조금씩 도쿠야마의 몸과 마음을 잠식해갑니다.

거절하는 법도, 자신의 생각이나 소신을 당당히 밝힐 줄도 모르던 도쿠야마는

어느 순간인가부터 인격을 짓밟는 화법으로 상대방의 치부를 노골적으로 공격하는가 하면,

희망이나 노력 등 긍정적인 가치관이란 그저 맹목적이고, 허무하고, 무의미하며,

식욕과 성욕 등 모든 욕구는 그저 짜증나고 꼴사나운 일이라는 하쓰미의 지론에 동조합니다.

, 죽음만이 고통과 상처, 과거와 미래로부터 단절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에 물들어갑니다.

 

하쓰미가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기꺼이 도와줄 테니.”라고 말하는 인물이라면,

직장 상사인 가타오카는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그런 생각일랑 접게 해줄 테니.”라고 말하며,

도쿠야마를 밝은 쪽으로 끌어내기 위해 애쓰는 인물입니다.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두 여신을 연상시키는 하쓰미와 가타오카 사이에서

도쿠야마는 어느 쪽으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잡아야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이렇듯 이야기는 한없이 어둡고, 엽기적이고, 파국을 향해서 치닫기만 하지만,

약해진 사람이 베갯머리에 놓고 되풀이해서 읽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변()

책 내용과는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이 떠올라서 잠시 당혹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읽은 뒤에 저만의 방식으로 내린 해석을 풀어놓자면,

작가의 변은 여러분에게 파멸의 끝을 보여주겠지만 오히려 거기에서 희망을 찾아내라.”

속뜻이 담긴 역설이라는 생각입니다.

 

오래 전 스무 살 무렵,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중 마지막 수록작 그해 겨울을 읽고 비슷한 경험을 했었는데,

한겨울 눈 덮인 산맥을 넘어 바다에 뛰어든 주인공의 이야기를 읽은 뒤

죽음에의 동경과 삶에 대한 애착이 동시에 몰려와 혼란스러운 한때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 혼란을 종식시킨 것은 결국 역설의 힘이었는데,

말하자면 제대로 된 바닥을 쳐야 비로소 올라갈 수 있는 의지를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조금 성격은 다르지만, 작가는 파멸의 끝 또는 진짜 바닥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희망이라는 자신의 의도를 역설적으로 전달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지금은 하쓰미 식 염세주의도, 가타오카 식 희망론도 믿지 않는 나이가 된 탓에

19살의 하쓰미와 21살의 도쿠야마의 절박함 또는 확신이 크게 와 닿지 않는 게 사실이지만,

그들의 파멸과 죽음에 대한 지론은 제법 솔깃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어서,

자칫 작가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깨달음을 얻는 독자가 있을까봐 은근히 걱정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요...^^;)

 

독자에 따라 하쓰미의 캐릭터나 신념, 가치관에 대해 공감 못하는 경우도 꽤 있을 것입니다.

, 부연 안개 속을 걷는 느낌으로 마지막 장에 이른 독자도 적잖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나름의 성찰과 고민 끝에 하쓰미의 몸과 마음이 죽음과 염세주의에 녹아들었다기보다는

오히려 19살의 치기처럼 읽힌 점은 꽤나 아쉬웠습니다.

그녀의 천재성과 심오한 사고를 강조하기 위해 설정된 소품들은 조금은 작위적이었고,

그녀를 막다른 벽까지 몰아붙인 죽음을 갈망하게 만드는 에너지나

마지막에 이르러 그녀가 내린 최종 선택의 이유도 쉽게 이해하긴 어려운 대목이었습니다.

 

사실 곳곳에서 ?”라는 질문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이야기의 특성 상 왠지 그렇게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은 묘한 강박도 느껴졌고,

또 그에 대한 선명한 대답이란 존재해서도, 존재할 수도 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쩌면 창조적 발상과 도전 정신이 깃든 완전한 신인을 대상으로 한 문예상 수상작이기에

일부 아쉬운 점들이 있더라도 이해하고, 용인하면서 차기작을 기대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재일 한국인 3세 작가라 좀더 애정을 갖고 지켜보고 싶은 작가입니다.

다음엔 발상과 도전을 넘어 한 단계 성장한 작품으로 만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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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약간 상세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부부를 참혹하게 살해한 범인이 잠적합니다. 그의 이름과 사진이 언론과 인터넷에 공개되고

전방위적인 수사가 진행되지만 범인은 성형수술까지 받으며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갑니다.

그리고 세 남자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어촌 마을에 흘러들어와 불우한 이력을 지닌 소녀 아이코와 인연을 맺는 청년 다시로,

게이들이 모이는 사우나에서 광고회사 직원 유마를 만나 그의 집에서 동거하게 되는 나오토,

그리고 엄마의 바람기로 오키나와로 도망 온 이즈미 앞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남자 다나카.

 

하나같이 본명도, 이력도 분명치 않은 존재들이라 그들과 인연을 맺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들의 과거를 알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습니다.

우연처럼 그들의 이미지는 공개수배 프로그램에 등장한 범인의 인상과 비슷합니다.

의심은 사소한 데서 출발하게 되고,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절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공포는 의심을 무한대로 증폭시키고, 증폭된 의심은 예상치 못한 파국을 초래하고 맙니다.

 

● ● ●

 

어느 날 갑자기 내 곁에 가까이 다가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항간에 떠도는 살인사건 수배범과 비슷한 인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는 절대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그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가 의심스럽고 무섭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 작품의 제목은 부부 살인범이 현장에 피로 남긴 두 글자 분노에서 따온 것이지만,

정체를 밝히지 않는 상대방에게 드는 분노라는 감정,

그런 상대방을 계속 의심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라는 감정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분노는 부부 살인범을 쫓는 미스터리의 골격을 지니고 있지만

주된 서사는 이처럼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인간의 딜레마입니다.

 

가출을 밥 먹듯 하며 몸과 마음을 망쳐버린 아이코의 아버지 요헤이는

딸에게 희망과 안식을 주는 다시로를 믿고 그가 딸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를 바라지만

과거를 솔직히 털어놓지 않는 그에 대한 의심이 자라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가 살인범이라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딸의 인생은 복구불능이 되기 때문입니다.

쾌락에 몸을 내맡기고 살던 유마는 겉으론 당당해 보이지만

실은 누구보다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는 게이입니다.

그런 그가 진심으로 마음을 주고 싶어진 나오토를 만나 삶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나오토가 살인범이라면, 그래서 그가 체포된다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기득권은 물론 삶 자체가 파탄날 수도 있습니다.

엄마의 바람기 때문에 야반도주하듯 오키나와로 흘러들어온 이즈미에게

외딴 섬에서 만난 다나카는 신비하면서도 의지처가 되는 인물입니다.

뭔가 사정이 있어 보이지만 이즈미는 더 이상 캐묻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머물던 외딴 섬에 남겨놓은 흔적은 이즈미를 큰 혼란에 빠뜨립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의심이 야기하는 딜레마는 거의 도박에 가깝습니다.

어중간한 타협이란 없으며 전적으로 도 아니면 모인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세 남자와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은 결과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이 게임 앞에서

때로는 무력감을, 때로는 자기혐오감을 느끼며 선뜻 베팅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세 남자의 이야기는 제각각의 궤도를 위태롭게 달리다가

마지막에 살인범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동시에 각각의 엔딩을 맞이하게 됩니다.

 

요시다 슈이치는 범인을 쫓는 형사에게도 비슷한 딜레마를 던져줌으로써

세 남자의 이야기와 병행하는 또 다른 긴장감을 제공합니다.

유기 고양이 때문에 인연을 맺은 여자와 점차 깊은 관계에 빠져들지만

그는 그녀에 관해 아무 것도 모릅니다.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찰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알아낼 수도 있지만 그녀를 믿어보기로 결심합니다.

세 남자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똑같은 처지에 놓인 채 수사에 참여하는 그를 지켜보는 것은

한편으론 그 끝이 궁금해지면서도 어쩐지 안쓰러워 견딜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요시다 슈이치가 펼쳐놓은 설정은 이해하기 어렵지도, 예상하기 힘들지도 않습니다.

이야기는 짐작한 대로 흘러가지만,

막상 엔딩에 이르러 마음에 와 닿는 무게감은 짐작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살인수배범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특별한 설정이지만

그로 인해 겪는 딜레마나 갈등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입니다.

요시다 슈이치는 그런 감정들을 억지로 쥐어짜지 않으면서도 120%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분노를 다루되 분노 자체를 문장 속에 우겨넣지 않습니다.

분노는 고스란히 독자 스스로 느낄 몫으로 남겨놓습니다.

마음이 느끼는 무게감이 짐작 이상으로 묵직해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역시 요시다 슈이치, 라는 평이 저절로 나오게 만드는,

그의 고유한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날이 조금 서늘해졌을 때 읽었다면 엔딩에서 느낀 묵직함이 조금은 덜 부담스러웠겠지만

고온다습한 날씨 덕분에 분노라는 감정과 정면으로 마주친 것도 그리 나쁘진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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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장 쪽으로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편혜영과 한강의 작품을 출간 순서대로 완독하겠다고 목표를 세우고 첫 작품을 읽은 것이

1년 전, 그러니까 아오이 가든이 작년 8, ‘여수의 사랑이 작년 10월의 일입니다.

편혜영의 두 번째 작품집인 사육장 쪽으로를 끝내는데 무려 1년이 걸렸습니다.

장르물에 대한 편식과 게으름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어쩌면 읽고 싶은 욕망과 피하고 싶은 무의식의 충돌이 진짜 이유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터넷 서점이나 블로그를 찾아보면 아오이 가든은 말할 것도 없고,

사육장 쪽으로역시 극과 극을 달리는 서평들이 게시돼있는 걸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체, 악취, 피와 뼈로 범벅이 된 불편한 풍경 속에 지어진 아오이 가든에 비해

사육장 쪽으로의 경우 평범한 일상을 무대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리적인 반발감과 문학적인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들이 꽤 많았습니다.

좋아하는 작가지만, 무의식 속 어딘가에 저 역시 그런 반발감과 거부감을 갖고 있었기에

하루면 충분히 끝낼 수 있는 단편집을 1년을 끌어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썩은 저수지 인근의 폐가, 역병에 잠식된 채 하늘에서 개구리가 쏟아지는 도시 등

명백히 인공적이고 혐오감을 주는 아오이 가든의 공간들에 비해

사육장 인근의 전원주택, 도심 속 아파트 단지, 재개발 중인 소도시, 평범한 기업 사무실 등

사육장 쪽으로의 공간은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또는 우리가 직접 머물고 있는 곳들입니다.

물론 늑대 사냥이 벌어지는 도시, 유적지로 둘러싸인 채 모든 것이 정체된 도시처럼

여전히 어딘가 불온한 기운이 깃든 연극무대 같은 공간도 일부 등장하긴 합니다.

 

등장인물 역시 검은 물과 붉은 피 속의 시체들과 뒹굴던 아오이 가든속의 별종들 대신

도시의 한복판에서 마음은 분열되고, 몸은 피로에 찌든 채 하루하루를 무력하게 살아가는,

주변에 흔하게 널린 평범한 인간들 또는 우리의 자화상 같은 인간들이 등장합니다.

몇 번씩 취소됐던 여행을 드디어 떠나게 된 청춘남녀,

감언이설에 속아 신작로 곁의 전원주택으로의 이사를 감행한 파산 직전의 가장,

도시의 유적지 때문에 집수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람,

인형의 탈을 쓰고도 늘 웃어야만 하는 동물원의 퍼레이드 요원들,

직장과 가정의 붕괴를 코앞에 둔 위기의 중년남자 등

대체로 일그러진 현대를 소재로 한 다른 작품들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인물들입니다.

 

이들이 겪는 사건도 아오이 가든에 비하면 특별하다고 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인물들은 제각각 희망에 들떠 모종의 일을 벌입니다.

미뤄뒀던 여행을 떠나고, 전원주택이라는 판타지를 쟁취하고, 망가진 집을 고치고,

난생 처음 겨냥할 목표가 생기고, 승진을 위해 불법적인 미션에 기꺼이 몸과 마음을 바치고,

닭장 같은 삶을 하룻밤이나마 잊게 만들어주는 게임 친구들을 만납니다.

 

하지만 이들의 희망은 어이없는 실수로 망가지거나

애초 그렇게 운명 지어진 것처럼 갈수록 진창을 헤매며 끝없는 늪으로 사라져버립니다.

전원주택은 사육장을 탈출한 개들이 날뛰는 악몽의 무대가 되고,

여행은 불의의 사고로 엉망진창이 되며, 망가진 집은 고칠수록 더 망가지고,

상사의 기쁨과 자신의 승진을 위해 전력을 다한 서류는 졸음 덕분에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마지막 수록작까지 다 읽고 나면 왜 사육장 쪽으로를 표제작으로 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데,

우선, 등장인물 대부분이 처한 현실적 공간 고속도로, 전원주택, 동물원, 아파트 단지,

회사 사무실, 재개발 지역 은 하나같이 닭장이나 사육장과 닮은꼴들입니다.

도망칠 수도 없고, 도망친다고 해도 더 나은 현실과 만날 가능성이 없는 곳들입니다.

결국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비좁은 닭장과 사육장에 갇힌 채,

삶과 죽음은 물론 희망과 고통, 감정마저 전지전능하게 통제하는 주인 밑에서

자신의 발을 쪼아대며 출구 없는 먹먹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심지어 그리고 그들은 그 뒤로도 여전히 불행할 것이 분명하다.”는 식으로,

절대 해소되지 못할 불편함만 잔뜩 남겨놓은 채 이야기는 막을 내려버립니다.

이 남겨진 불편함은 편혜영의 비호감 편에 선 독자들에게는 짜증과 찜찜함으로,

호감 편에 선 독자들에게는 그녀만의 특별한 미덕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아오이 가든의 충격을 한 번 더 맛보고 싶었던 독자에겐 다소 아쉬움과 실망감을 줬겠지만,

아마 두 번째 작품집에서도 하늘에서 개구리가 비처럼 쏟아지는 장면이 보였다면,

개인적으론 그것이 편혜영의 한계라고 규정지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평범한 인물과 일상 속의 이야기를 담은 사육장 쪽으로

전혀 모르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처럼 느끼게 만드는 대목이 많았고,

다음 작품에서는 그녀가 또 어떤 색다른 모습을 보여줄까?”, 라는 기대감을 갖게 해줬기에

오히려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진 작품집입니다.

 

개인적인 선호작을 꼽아보자면,

아오이 가든의 후계자라는 면에서는 사육장 쪽으로밤의 공사가 기억에 남았고,

무심한 얼굴로 잔인한 현실을 풀어놓은 분실물금요일의 안부인사도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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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 스미레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샘터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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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프로듀서로서 애지중지 키워온 신인그룹과의 결별,

워커홀릭인 자신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던 남친과의 연애의 종말 등

일과 연애 사이에서 전력을 다하며 살아가던 32살의 싱글녀 스미레에게

어느 날 갑자기 약속이나 한 듯 시련들이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만신창이가 된 채 고향집에 들른 스미레는 오랫동안 서먹하게 지내온 아버지에게서

기대하지 않은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됩니다.

동시에 퇴물이 된 싱글 대디 가수의 새로운 출발에 온 에너지를 퍼붓기로 결심합니다.

 

● ● ●

 

책으로도 영화로도 본 적은 없지만 그 제목만은 낯익은

무지개 곶의 찻집’, ‘쓰가루 백년 식당등을 집필한 모리사와 아키오의 작품입니다.

32살 워커홀릭 음악프로듀서 사쿠라 스미레의 다이나믹한 인생 분투기를 그린 작품으로,

행복과 웃음, 긍정의 힘과 에너지를 무한대로 발산하는 이야기입니다.

 

사쿠라 스미레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다크 서클로 꽉 찬 화장기 없는 32살의 얼굴, 낡은 청바지와 점퍼, 닳아빠진 운동화.

거대 음반사를 나와 1인 인디 음반사 스마일 뮤직을 세운 거칠 것 없는 뚝심.

철야를 밥 먹듯 한 덕분에 한겨울 길거리에서 좀비처럼 쓰러져 잠들기도 하는 무모한 열정.

하지만 그 열정 때문에 남친에게 버림받게 되는 기구한 운명.

무조건 타인을 믿어버리는, 부모와 고향이 물려준 시골스러움.

 

최근 몇 년 동안 일본 드라마를 안 봐서 요즘은 어떤 배우가 대세인지 모르겠지만,

예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액티브하면서도 어딘가 4차원 같은 분위기를 내뿜던

우에노 주리의 이미지가 연상되는 캐릭터입니다.

 

그녀의 이름 스미레는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인데,

-표정-센스-배려가 없는 4캐릭터에 시골에서 전통적인 간장 공장을 경영하는 아버지는

영어 Smile을 철자 그대로 읽었을 때의 음을 따서 그녀에게 스미레라는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웃는 건 자기 자신을 위한 게 아니래. 웃는 건 늘 타인을 향해서잖아?

그래서 타인이 웃어주면 그 웃음이 내게도 돌아온다는 거야.

그러니까, 주위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게끔 늘 웃는 딸로 자라주길 바랐던 거지.

그러면 결국 너도 행복해질 테니까.

아버지는 그렇게까지 생각해서 스미레라는 이름을 지어준 거야.

 

어른들을 위한 행복한 동화 같은 스마일, 스미레

어쩌면 그 어떤 판타지보다 더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의 현실에는 스미레에게 찾아온 기대하지 않은 행운이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은 특별한 인연은 신기루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사방을 둘러봐도 너무나 빡빡하기만 한 현실 때문에

행복과 웃음이 갖는 긍정의 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힘찬 에너지를 북돋아주는 마녀 같은 절친들,

음악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의지처가 되는 뛰어난 엔지니어,

음악프로듀서로서의 열정을 부활시켜준 퇴물가수와 그의 딸,

그리고 무뚝뚝하면서도 언제나 딸을 믿고 응원해주는 부모 등

스미레 주위에서 그녀를 지원사격해주는 무수한 아군들이나

마법처럼 술술 풀려나가는 상황들은 그 자체로 판타지입니다.

그래서 읽으면서 가끔씩 묘한 반발감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스미레의 세상은 동화 그 자체군,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동안 몇 번씩 목구멍 깊은 곳이 뜨끈해지고

초밥 속에 뭉쳐진 겨자를 씹은 것처럼 코끝이 알싸해졌던 것은

그것이 설령 거짓이고 판타지라 하더라도

역시 행복과 웃음에게 거는 기대가 아직은 조금이나마 남아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스미레에게 찾아온 행운과 인연은 로또보다 더 만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잠시의 판타지를 통해 그래도 언젠가는...”이라는 긍정의 힘을 갖게 된다면,

반나절이면 충분히 완독할 수 있는 스마일, 스미레의 미덕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죠.

솔지히, 억지스러운 논리로 인생은 살만 한 것이야.’라고 주장하는 어설픈 에세이보다는

스미레의 좌충우돌 판타지가 훨씬 더 큰 위로가 돼줄 거라는 생각입니다.

 

정작 자신은 남들 앞에서 무뚝뚝한 표정밖에 지을 줄 몰랐던,

하지만 이제는 스미레에게 낯간지러운 문자도 보낼 줄 알게 된 아버지의 명품 문자 한 구절은

스마일, 스미레의 미덕을 알맞게 함축하고 있습니다.

 

행복하니까 웃는 게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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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심판 모중석 스릴러 클럽 38
프레드 바르가스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노르망디의 작은 마을 오르드벡에는 특별한 환영(幻影)을 보는 신기(神氣)를 지닌 인물이

오래 전부터 세대가 바뀔 때마다 대물림돼왔습니다.

그들이 보는 환영은 성난 군대, 또는 대규모 색출단, 메니 엘르켕이라 불리는 기마부대로

말들도 기마병들도 전부 해골 같고 팔다리가 일부 떨어져나갔으며,

사납게 울부짖으며 이승을 떠도는 반쯤 썩어 문드러진 죽은 자들로 편성된 군대입니다.

천 년 전부터 전설 아닌 전설로 오르드벡의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뿌려온 성난 군대는

악행을 저지르고도 벌을 피해간 현실 속 인물들을 참혹하게 심판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환영을 보는 인물은 성난 군대에게 끌려가는 현실 속 인물도 함께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현실 속 인물들은 3주 안에 어떤 형태로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파리의 강력계 서장 아담스베르그는 우연과 운명이 겹친 인연으로 이 사건을 맡게 됩니다.

현재의 영매인 리나 방데르모는 3명의 남자와 정체불명의 한 사람이

성난 군대에게 끌려가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진술하는데,

그들이 차례로 기이한 죽음을 맞이하면서 수사는 진전은커녕 막다른 골목을 향할 뿐입니다.

옮긴이의 말대로 반송장의 모습을 한 기마병들이 정말 죄 지은 사람들을 데려간 것인가?

아니면 성난 군대의 전설 뒤에 숨어 누군가 끔찍한 음모를 꾸미는 것인가?”라는 의문 속에

독자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선 채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가게 됩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우선 현실과 상상을 오가는 모호한 분위기입니다.

호러물에나 나올 법한 성난 군대는 공포와 동시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사건은 명백히 현실 속에서, 그것도 분명한 인간의 소행으로 벌어집니다.

그 어떤 명탐정이라도 도대체 어디부터 파헤쳐야 할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의 두 번째 특징은 바로 이 모호한 사건을 수사하는 파리 경찰들의 캐릭터입니다.

주인공인 아담스베르그 서장은 성난 군대만큼이나 특이한 존재감을 발산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수사에 관한 특별한 계획 같은 건 세워본 적도 없거니와

금방 들은 지명이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가 하면,

아무도 예상 못한 곳에서 추리를 시작하는 4차원에 가까운 캐릭터입니다.

구름에 대고 삽질하는, 추리의 자도 모르는 무식한 허깨비!”라고 비난받을 정도로

그의 추리는 오랫동안 함께 일한 동료조차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그의 휘하에 있는 형사들도 하나같이 괴짜 같은 개성을 자랑하는데,

백포도주를 입에 달고 사는 걸어다니는 백과사전, 갑자기 픽 쓰러져 잠드는 수면 과다 환자,

거구를 자랑하는 여자 경위, 비상식량을 사러 슬그머니 사라지는 허기증 환자 등

각 경찰서에서 너무 튄다는 이유로 왕따 당한 인물들만 모아놓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수사 활동까지 기행에 가까울 정도로 특이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나름의 장점들을 모아 아담스베르그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데

괴짜 같다고 가볍게만 여겨졌던 개성들은 어느새 각자만의 특별한 무기가 되어

사건 현장에서 빛을 발하곤 합니다.

 

이들의 캐릭터를 더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낯선 프랑스 식 문장과 표현들입니다.

한참 사건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니 어깨에 말벌이 앉았어.”라는 식으로

정말 맥락도, 뜬금도 없는 이야기를 툭툭 던지곤 합니다.

수시로 곁길로 빠져 코미디 같은 엉뚱한 수다를 잠시 늘어놓다가

어느새 슬그머니 본 이야기로 돌아오는 능청맞음은 처음엔 낯설고 혼란스럽게 느껴지지만

점차 적응하고 나면 영국식 유머와는 또다른 프랑스 소설 특유의 재미를 만끽하게 해줍니다.

(집중을 필요로 하는 후반부에서도 여지없이 이런 곁길이 나타나곤 하는데,

아무래도 자주 마주치다 보면 좀 가벼운 짜증이 느껴진 것도 사실입니다.)

 

작가는 꿈에서 가능한 것들이야말로 내 소설의 영토 안에서 현실이 된다.”라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는 성난 군대의 존재가 좀더 부각된,

그러니까 미쓰다 신조 식 호러로 풀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바람이 진하게 남았던 작품입니다.

사실 제일 궁금하고 기대했던 것은 성난 군대의 존재와 역할이었는데,

제 바람만큼 분량이나 비중을 차지하지 못해서인지 조금은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그보다 더 아쉬웠던 점은 주인공 아담스베르그 서장의 수사 기법입니다.

어딘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사람 좋은 동네 아저씨 같은 외형도 좋고,

자신만의 독특한 추리법으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은 다 좋은데,

그 방식이 직감이라든가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벼락같은 깨달음을 통해 이뤄진다든가,

앞뒤 맥락을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거의 비약에 가까운 상상력을 통해 추리를 완성하는 점은

독자를 꽤나 당혹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전 역시 벼락같은 깨달음비약에 가까운 상상력에 의해 설명되다 보니

나름 힘과 매력을 지닌 반전임에도 불구하고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장황할 정도로 사건의 배경과 동기, 수법과 비밀 등에 대해 자신의 추리를 설명하지만

무엇으로부터그런 추리가 가능했는지 몇 번을 되읽어도 잘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점이 특징이고 매력인 캐릭터인가보다.”라든가,

또는 성난 군대 자체가 환영이니까 이런 수사법이 더 어울릴 수도 있겠구나.” 하고

그냥 넘어가기엔 아쉬움이 너무 컸습니다.

 

최근 읽은 그 어떤 작품보다 개인적인 취향을 많이 탈 수 있는 작품인 것 같고,

호불호도 극명하게 나뉠 것 같은 작품입니다.

저와는 궁합이 잘 안 맞는 것 같지만, 현실과 상상의 모호한 경계를 선호하는 독자에겐

프랑스 추리소설의 여왕이라 불리는 작가의 필력이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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