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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다크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평점 :
마치 밤새 긴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입니다.
하루키의 작품에서 맡을 수 있는 고유한 향기가 물씬 배어있지만,
동시에 일종의 위화감(?) 같은 것도 곳곳에 숨어있는 듯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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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을 코앞에 둔 도시의 밤.
마치 드론 같은 존재가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체 없는 의식이며, 어느 곳도 들여다볼 수 있는 전지적 시점일 뿐입니다.
자칭 ‘우리’라고 하는 그 시점은 어둠이 내린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관찰합니다.
두꺼운 책과 담배와 함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밤을 새우는 19살의 아사이 마리,
아마추어 밴드에서 트럼본을 연주하며 사법고시에 관심을 둔 21살의 다카하시 데쓰야,
한때 잘 나가는 여자레슬러였지만 지금은 러브호텔의 매니저 일을 하는 가오루,
도망자 신세로 가오루의 러브호텔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특이한 이름의 고오로기,
마리와 동갑이지만 불법체류 신세로 매춘 조직에 얽힌 중국여자 궈돈리,
IT회사에 근무하며 철야를 밥 먹듯이 하는 수상쩍은 직장인 시라카와,
그리고 마리의 언니이자 무한 수면(睡眠) 상태에 빠져 있는 아사이 에리 등
도시의 이곳저곳에 머물러 있는 다양한 군상들이 ‘우리’의 눈에 비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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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인물 별로 토막토막 분절돼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반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고리들을 통해 정교한 원의 형태를 지닌 것 같기도 합니다.
밤이라는 특별한 시공간 속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털어놓거나 서로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인물들끼리 사소한 소품을 통해 촘촘히 연결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켜보는 사람은 크게 마리와 그녀의 언니 에리입니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마리와의 하룻밤 인연 때문에 ‘우리’의 시점에 포착되지만,
에리는 조금은 차원이 다른, 판타지 같은 세상 속에서 ‘우리’에게 목격됩니다.
마치 별개의 이야기처럼, 그녀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영원히 잠든 백설공주’입니다.
에리의 이야기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판타지에 가까워서
독자에 따라 공감과 이입이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런 불편함은 이야기의 끝에 가서 마리와 에리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밝혀지면서 해소됩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만난 마리와 다카하시가 해가 뜰 무렵 나름 각별한 관계가 되는 것 외엔
일반적인 소설의 서사를 따르는 내용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크고 작은 조연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등장인물이
밤에만 어울리는, 밤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낮에는 전부 사라질 것 같은
그런 특별한 이야기와 생각들을 풀어놓습니다.
밤은 혼자서만 간직해온 비밀을 처음 만난 사람에게 훌쩍 털어놓게 해주기도 하고,
모두가 아는 이야기임에도 새삼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게 만들기도 합니다.
같은 사람에게라도 낮에는 결코 내보일 수 없는 표정이나 행동이
밤의 영역에서는 너무나도 무방비하게 터져 나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애프터 다크’는 읽는 내내 왕가위의 영화를 떠올리게 만들었는데,
화려함과 빈곤, 타락과 쓸쓸함으로 가득 찬 밤의 도시 안에서
때론 무게감 없는 부유물처럼, 때론 폭발직전의 폭탄처럼 떠다니는 인물들을 그려냈던
‘2046’이나 ‘중경삼림’의 이미지들이 수시로 파편처럼 머릿속을 날아다녔습니다.
캐릭터나 스토리가 비슷한 것은 아니지만
도시의 야누스 같은 밤 풍경과 희로애락의 다양한 감정이 깃든 인물들의 눈빛만큼은
마치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많은 작품들처럼 호불호가 갈릴 여지도 많고,
다 읽고 난 후에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읽은 거야?’라고 자문할 독자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애프터 다크’는 어떤 교훈이나 특별한 인상, 감정을 느끼게 하는 작품은 아닙니다.
마리와 에리를 지켜보는 ‘우리’의 시점처럼 독자는 그저 그들을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늦은 시간, 번화한 거리 속 외진 계단 같은 곳에 앉아서 네온사인과 자동차 불빛을 배경삼아
쾌락이나 고통, 사랑이나 슬픔 따위에 푹 빠진 다양한 군상들을 지켜보는 느낌이랄까요?
또, 그런 모습을 누군가에게 몰래 감시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그저 그렇게 누군가의 삶을 지켜보다가
누군가에게는 부러움을, 누군가에게는 한심함, 누군가에게는 애증을 느끼면 그만입니다.
어떤 때는 그런 무심한 바라보기 자체가 너무나도 매력적일 때가 있으니까요.
‘애프터 다크’는 그런 식의 바라보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루키는 “집필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지금 보니 이니시에이션 스토리”라고 얘기했는데,
솔직히 읽으면서도 이니시에이션 스토리,
즉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한 고통스런 통과의례의 이야기라는 느낌은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의 인물들이지만 그들의 고통은 성장통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진짜 어른으로 막 진입한 후에야 비로소 마주치게 되는 현실들 – 그것이 제도이든,
사람이든, 감정이든 간에 – 때문에 파생된 것이었고,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에 좀더 깊이 빠져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하루키의 마니아는 절대 아니지만, 굉장히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작품입니다.
작품을 이해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딘가 음험하게 숨어있던 관음증의 일부가 묘한 방식으로 충족됐기 때문입니다.
소음과 음란함에 빠진 도시라도 좋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는 도시도 좋고,
그 어디에서든 ‘우리’ 같은 관찰자가 돼서 하룻밤쯤 차분히 이런저런 사람들을 지켜본다면
내 안에 숨어있던 건전한(?) 관음증과 마주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누구든 ‘애프터 다크’ 같은 이야기 한 편쯤 뽑아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