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 없는 한밤에 밀리언셀러 클럽 142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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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매력이 철철 넘치는 3편의 중편과 1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작품집입니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독하다. 어쩌면 읽기 힘든 곳이 몇 군데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에필로그 속 구절대로 스티븐 킹은 잔혹, 엽기, 공포의 끝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들과 함께 아내를 살해하고 시궁쥐가 득실거리는 낡은 우물 속에 사체를 유기한 남자,

외딴 도로에서 여자들을 강간하고 살해한 뒤 배수구에 버린 남자,

대출만기는 물론 남자의 성기, 여자의 코, 심지어 생명까지 연장해주는 선한 메피스토텔레스,

그리고 30년이 넘도록 경찰의 눈을 피해 11명의 여자를 강간-살해한 두 얼굴의 악마 등

그야말로 스티븐 킹의 피조물다운 캐릭터로 중무장한 극강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네 가지 이야기를 관통하는 공통된 주제는 응징 또는 복수입니다.

자신을 망가뜨린 자에게 정공법대로 복수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자신이 망가뜨린 자의 유령에게 처절하게 복수당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스티븐 킹의 고백대로 정말 읽기 힘든 곳이 몇 군데(보다 훨씬 많이) 있었지만,

그의 여느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중간에 눈을 떼거나 외면하는 것이 더 힘들었기에

입안 가득한 씁쓸한 느낌에도 한 글자도 허투루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비범한 상황에 놓인 평범한 인물들에게 훨씬 더 흥미를 느낀다.”는 킹의 고백은

참혹하게 죽어간, 또는 오히려 죽지 못해 더 큰 괴로움을 안게 된,

또는 복수하지 않고는 화병 때문에라도 더는 살아갈 수 없거나

실천할 용기도, 자신도 없는 마음 속 복수심에 평생 상처를 안고 산 등장인물들을 감안하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잔혹한 고백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날것처럼 작위적이지 않고, 끔찍할 정도로 생생한 복수에 관한 킹의 이야기는

어쩌면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감춰두고 있는 비밀스런 욕망들을 민낯 그대로 들춰냄으로써

그의 흥미의 목표가 단순히 잔혹과 엽기와 공포에 머물지 않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자신의 땅과 권위, 아들 등 모든 것을 빼앗으려는 무례한 아내를 죽이고 싶은 남자의 욕망은

옆에서 살인을 거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공감할 수 있는 감정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은 오래된 절친에게 악마의 힘을 빌어

자신의 불행을 전가하려는 한 남자의 소심한 복수심도 응원의 대상입니다.

짐승처럼 자신을 강간하고 배수구에 내다버린 일당을 향한 복수심이나

순박한 가면 속에 연쇄살인마의 얼굴을 감추고 살아온 남자를 향한 용서할 수 없는 분노는

말할 것도 없이 누구나 공감하고 응원해주고 싶은 감정들입니다.

킹은 작품의 외피를 잔혹, 엽기, 공포로 꾸몄지만,

정작 그가 버무려넣은 속살은 다양한 욕망과 감정의 민낯들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작품마다 비범한 상황에 놓인 평범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사건도, 감정도 무리하게 과장되거나 작위적으로 설정되지 않습니다.

불편하거나, 무섭거나, 힘든 책읽기 속에서도

나라도 저랬을 거야.”, “나도 그러고 싶었을 걸.”라는 생각이 종종 들었던 것은

독자들의 비밀스런 욕망을 꿰뚫어 본 킹의 필력이 빛을 발한 덕분일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의 킹의 고백을 읽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인간이 할 리가 없는 행동을 글로 쓰는 작가들한테는 비웃음밖에 줄 것이 없다.

형편없는 글은 사람들의 실제 행동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를 거부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를테면, 살인자들도 때로는 할머니가 길을 건너도록 도와준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타고난 이야기꾼처럼 자유자재로 문장과 단어를 구사하며

공포로 가득 찬 장면에서도 웃음을 이끌어내는 킹의 필력은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할머니를 도와주는 살인자라는 이 함축된 구절 하나만으로도

이야기를 구상하고, 설계하고, 지면에 완성해가는 그의 소설가로서의 태도가

(그의 표현대로) ‘형편없는 글을 쓰는 사람들과는 확연히 비교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수록된 네 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할머니를 도와주는 살인자이거나 살인자에게 도움을 받은 할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외성도 크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현실감 있는 인물들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그런 인물들이 킹의 유려한 문장들 속에서 사건을 만들고, 복수를 감행하면서

더없이 무서운, 하지만 더없이 생생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서툰 작가를 만났다면 뻔한 복수담으로 전락했을 소재들이

스티븐 킹의 손에서 공감과 성찰을 담은 이야기로 거듭났다.”워싱턴 포스트의 평은

이 작품의 미덕을 제대로 포착해낸 명문이라는 생각입니다.

 

킹의 마니아들에 비하면 아직 초보에 불과한 팬 수준이지만,

별도 없는 한밤에는 지금까지 읽은 킹의 작품 중 상위에 올려놓고 싶을 만큼

재미나 완성도 면에서 수작이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그동안은 킹의 장편 위주로만 작품을 골라왔는데, 새삼 중단편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더불어, 이 작품집을 킹의 마지막 중편집이 될 것이라고 단언한 닐 게이먼의 말만큼은

그저 막연한 추측이거나 마케팅을 위한 낚시성 멘트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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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과 십자가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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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부대에서 근무하다가 경찰이 된 존 리버스는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를 충격에 빠뜨린

연쇄 소녀유괴살인사건을 수사하던 중 범인으로 보이는 자에게 의문의 편지들을 받습니다.

난해한 메시지와 함께 매듭에 쓰인 노끈 또는 성냥개비로 된 십자가가 동봉된 편지 때문에

리버스는 혼란에 빠짐과 동시에 왜 자신에게 이런 편지가 오는지 의아하게 여깁니다.

희생자는 무작위로 선정된 것처럼 보이고, 단서도 패턴도 없는데다

재미가 아니라 기록을 위한 것처럼 보이는 범행 때문에 에든버러는 공포에 휩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보전화를 받은 리버스는 범인의 진짜 계획을 파악하곤 충격을 받습니다.

특히 자신이 사건과 밀접히 연관됐음을 알게 된 리버스는

힘겹게 억눌러왔던 트라우마의 봉인이 해제되면서 패닉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 ● ●

 

영국에서 매년 팔리는 범죄소설 중 10퍼센트를 차지하는 엄청난 시리즈임에도 불구하고

2005부활하는 남자들이 유일한 국내 소개작이었던 존 리버스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올해 6, 황금가지에서 출간한 페이스 오프에 실린 단편 인 더 닉 오브 타임에서

이언 랜킨이 창조한 스코틀랜드 형사 존 리버스를 처음 만나긴 했지만,

생소한 캐릭터인데다 단편이다 보니 큰 감흥 없이 지나쳤던 것이 사실입니다.

 

특수부대 생활이 남긴 엄청난 트라우마, 어린 시절부터 각인된 불행한 가족의 기억,

주변 동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 이혼이 가져다 준 엉망진창의 생활 등

몸과 마음이 상처투성이인 삐딱이로 설정된 리버스의 캐릭터는

막연한 느낌이긴 하지만 해리 보슈나 해리 홀레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습니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형사지만 정작 개인의 삶은 불행, 우울, 고독으로 똘똘 뭉쳐있습니다.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연약한 남자지만, 동시에 적재적소에서 활약하는 슈퍼맨이기도 합니다.

아마 이런 인간적인 면모 때문에 엄청난 시리즈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을까요?

 

데뷔작에서 리버스가 마주친 사건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소녀유괴살인입니다.

그것도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10살 안팎의 소녀들이 연이어 희생자가 됩니다.

거기다 리버스는 범인으로부터 직접 편지를 받는 역할을 떠맡습니다.

사건은 충격적이고, 리버스가 사건의 중심에 놓이면서 이야기는 긴박하게 출발합니다.

 

하지만 시리즈의 첫 작품이라 그런지 이런저런 정보와 설명들이 많이 개입됐고,

수사는 제보 이후 갑자기 급물살을 타면서 정신없이 흘러갑니다.

범인의 정체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고, 드러난 범행 동기는 조금은 밋밋해 보였습니다.

시리즈의 첫 작품들이 그렇듯 매듭과 십자가역시 작가가 의도적으로

이야기의 상당 부분을 리버스의 과거나 가족사와 연관 지어 전개시켰는데,

그래서인지 파괴력이나 완성도 면에서는 기대에 못 미친 것이 사실입니다.

오히려 캐릭터도 강하고 능력도 뛰어난 리버스의 모습으로 포문을 연 뒤

두 번째 작품쯤에서 과거사를 소개했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애당초 이언 랜킨은 이 작품의 끝에 존 리버스를 죽일 작정이었다고 고백했는데,

그래서 그의 모든 것을 보여주느라 이런 이야기 구성을 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해리 보슈나 해리 홀레를 연상시키는 만만치 않은 내공을 선보였으니

두 번째 작품부터는 엄청난 시리즈의 주인공으로서의 면모를 선보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또한 주변에 배치된 조연들 동료 형사, 연인이 된 공보담당자, 스토커 같은 기자 등

확실한 존재감과 재미를 준 덕분에 이후 작품에서도 감칠맛 나는 역할이 기대됩니다.

특히 혼란 속에 빠진 리버스 옆에서 차분하게 추리를 진행하는 연인 질 템플러는

후속작에서 리버스와 어떻게 엮일지 궁금하게 만드는 인물입니다.

두 번째 작품인 숨바꼭질이 이 작품과 함께 동시에 출간됐는데,

어둑한 하늘과 수시로 내리는 비, 세기말을 연상시키는 풍광으로 유명한 에든버러를 무대로

존 리버스가 제대로, 멋있게 활동하는 모습을 꼭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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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살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5
나카마치 신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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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77, 오후 7. 무명작가 사카이 마사오가 청산가리 중독으로 사망합니다.

경찰은 창작의 고뇌를 못 견딘 끝에 극단적인 선택, 즉 자살을 택한 것으로 결론지었지만

그를 아는 두 사람 편집자 아키코, 프리랜서 작가 쓰쿠미

그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각자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 탐문을 벌입니다.

특히 그의 유고(遺稿)의 제목이 ‘77일 오후 7시의 죽음이라는 점은

함부로 자살이라 단정할 수 없을 것 같은 묘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아키코는 사카이에게 의문의 돈 뭉치를 건넸던 미모의 여성 리쓰코를,

쓰쿠미는 여동생의 자살을 사카이의 탓으로 여긴 편집장 야나기사와를 범인으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두 용의자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주장했고, 결국 탐문은 알리바이 깨기에 집중됩니다.

집요한 조사를 진행하던 아키코와 쓰쿠미는 결국 사카이의 행적 속에서 단서를 찾아내지만

그들이 마지막에 맞닥뜨린 사카이 마사오의 죽음의 진실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 ● ●

 

모방 살의처럼 대놓고(?) 서술트릭이라고 밝힌 작품들은 독자의 도전의식을 불태웁니다.^^

첫 페이지부터 어떻게든 단서를 찾아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읽으면서

조금이라도 위화감을 풍기는 문장이 나오면 메모를 해놓거나 머릿속에 꼭꼭 저장해놓습니다.

작가의 트릭을 끝까지 알아내지 못했다가 뒤통수를 맞아야 재미가 극대화되겠지만

이상하게 서술트릭이란 딱지만 붙으면 이렇게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곤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방 살의는 제법 독자에게 친절한 서술트릭입니다.

그러니까 눈치 챌만한 단서를 간혹, 아주 애매한 형태로나마 남겨줍니다.

똑똑한 독자들은 2/3쯤 됐을 때 1차적인 사건의 진상은 눈치 챌 수도 있지만,

좀더 복잡한 진실의 모습은 결국 끝까지 가야 제대로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치밀하고 완벽한 트릭의 설계를 위해 작가가 들였을 노력을 감안한다면

역시 마지막 한 방에 뒤통수를 맞아주는 것이야말로 독자의 도리라는 생각입니다.^^

 

작가는 서로 모르는 두 명의 주인공에게 탐문의 미션을 부여함으로써

두 갈래의 수사가 중간에 합쳐지면서 진실이 드러날 것 같은 구도를 설정했습니다.

아키코가 치정, 가족사, 돈에 얽힌 문제로 조사를 벌이는 한편,

쓰쿠미는 원한 쪽에 무게를 두고 탐문을 벌입니다.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전개된 추적이 과연 어디에서 접점을 만들어낼지,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찾아내는 단서는 무엇이 될지 읽는 내내 궁금함을 자아냅니다.

거기에 덧붙여 사카이의 죽음과는 무관한(또는 관계가 적은) 에피소드들을 동원하여

메인 사건 외의 풍성한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알려진 대로 서술트릭으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보다는 잘 짜인 트릭을 품은 미스터리라는 평이 온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서술을 무기로 독자의 눈을 속이고 뒤통수를 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정교한 설계도에 따라 꼼꼼히 구축된 웰 메이드 미스터리이기 때문입니다.

살육에 이르는 병이나 벚꽃 지는 계절에~’의 충격을 기대한 독자들에게는

조금은 심심한 서술트릭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1973년에 출간된 일본 미스터리정도의 정보만 갖고 이 작품을 읽는다면

작가가 존경의 뜻을 표했던 엘러리 퀸 이상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 사후 비로소 제 가치를 인정받은 작품이라고 해서 더 기대를 했고,

실제로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잘 익은 과일처럼 맛깔난 재미를 느꼈습니다.

이 작품 이후 이어진 살의(殺意) 시리즈가 앞으로도 계속 출간돼서

비운의 작가의 명품들을 계속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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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거리에서 1
오쿠다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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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로라하는 작가라면 적어도 한 작품 정도는 대표작으로 갖고 있을 정도로

일본의 장르물 문단은 소년 범죄나 왕따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솔로몬의 위증’,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

우타노 쇼고의 세상의 끝 혹은 시작’, 오리하라 이치의 침묵의 교실’,

구로타케 요의 그리고 숙청의 문을’, 츠지무라 미즈키의 오더 메이드 살인클럽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10대들의 범죄나 왕따에 관한 이야기는

나열하자면 끝도 없이 이어질 만큼 다양하게 출간되어 왔습니다.

 

침묵의 거리에서는 질풍과 노도의 정점에 서있는 중2 학생들의 왕따 이야기입니다.

왕따를 당하던 지역 유지의 아들이 학교에서 추락사한 채 발견되고,

왕따의 주범으로 알려진 4명의 학생이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하지만 10대들의 범죄나 왕따를 다룬 일반적인 미스터리 작품들과는 달리

침묵의 거리에서는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보다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의 딜레마에 집중합니다.

한쪽에선 왕따의 기운이 움텄던 학기 초부터 사건이 벌어진 현재까지의 디테일한 이야기를

교실과 동아리를 중심으로 전개시킵니다.

또 다른 한쪽에선 학교, 경찰, 검찰, 변호사, 언론, 유가족, 가해자 가족 등

사건과 관련된 어른들사이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갈등과 딜레마를 리얼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인지 끈질긴 탐문과 추리, 예기치 못한 반전의 충격을 기대한 미스터리 독자들에게는

침묵의 거리에서는 늘어지거나, 동어반복이거나, 양비론에 불과하거나,

또는 막판의 한 방이 없는 심심한 작품으로 읽힐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10대가 사건 중심에 놓인 이야기 가운데

이 작품만큼 딜레마에 대해 깊이 있고 리얼한 서사를 내놓은 작품은 없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저 역시 미스터리를 기대했던 탓에 약간의 지루함과 동어반복을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읽는 내내 어느 누구도 편들 수 없고, 어느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혼란과 딜레마를 겪으면서

오히려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공식과 미스터리 서사에만 충실했던 기존의 작품들과는 다른

특별한 독후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유가족은 동정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무책임한 부모로서 비난의 대상으로 그려집니다.

학교는 단호하고 원칙적인 대응을 주장하는 세력과 봉합에 급급해 하는 세력으로 갈립니다.

경찰 역시 강경한 형사과와 온정적인 생활안전과가 보이지 않는 각을 세우고,

가해자 가족은 자기 자식만큼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주장을 펼치던 끝에

누가 주모자냐?’를 놓고 서로를 비난하는 형국에 놓입니다.

그저 신참 여기자를 앞세운 언론만이 양쪽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유일한 캐릭터입니다.

가해자로 지목된 4명의 학생과 추락사 한 피해자 역시

알고 보면 진실은 따로 있다는 식으로 양면성을 지닌 캐릭터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여기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실망감을 느낀 독자들 가운데 대부분이 엔딩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는데,

아무래도 이야기 자체가 숨어있는 진실이나 충격적인 반전과는 거리가 먼 전개를 펼친 탓에

그런 식의 엔딩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30페이지도 채 남지 않았는데, 작가는 전혀 이야기를 수습할 생각이 없어 보이고,

혹시 3권이 있는 건가?,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이야기는 평범하게 전개됩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작가가 무리해서 뭔가 예상치 못한 엔딩을 만들었다면,

그러니까 억지로 교훈을 준다든가, 작위적인 반전을 만든다든가 했다면,

오히려 그것은 이 작품의 결정적인 흠이 됐을 것입니다.

 

오쿠다 히데오의 팬이다 보니 작품의 미덕만을 강조하고 싶은 사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침묵의 거리에서는 왕따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소재를 통속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보다는

다양한 입장들을 간접경험하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르포의 느낌으로 풀어냄으로써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된 매력을 갖췄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저 역시 다른 독자들과 비슷한 지점에서 아쉬움을 느꼈기에

오쿠다 히데오가 조금만 더 대중적인 전개와 독자가 원하는 엔딩을 감안했더라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들긴 했습니다.

 

700여 페이지의 내용을 두 권으로 분권한 만만치 않은 분량이지만

쉽고 명쾌한 오쿠다 히데오의 문장 탓에 하루면 충분히 마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왕따나 10대의 이야기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침묵의 거리에서를 통해 기존의 유사한 소재를 다룬 작품들과는 차별화된,

새로운 시각과 입장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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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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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으로 분권된 모방범이나 솔로몬의 위증에 비하면 검소한(?) 편이지만

그래도 9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만으로 일단 독자들을 압도하는 작품입니다.

더구나 원제인 베드로의 장렬(ペテロの葬列)’, 번역제목인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결코 가볍지 않은 분위기를 내뿜고 있어 물심양면으로 기대와 부담이 동시에 느껴졌습니다.

 

사실 이 작품이 누군가’, ‘이름 없는 독에 이은 행복한 탐정 시리즈라는 것을 몰랐고,

또 두 작품 모두 읽지 못한 터라 주인공 스기무라 사부로에 대한 사전정보도 없었습니다.

물론 충분한 설명이 들어있어 앞선 작품들을 못 읽은 독자에게도 전혀 문제는 없었지만

미리 알았더라면 시리즈 순서대로 읽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 ● ●

 

한적한 지방도로에서 권총을 든 노인에 의한 버스납치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는 경찰에게 자신이 지목한 세 사람을 찾아내라고 요구할 뿐 인질들을 겁박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인질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노약자나 버스기사는 풀어주기까지 합니다.

더구나 남은 인질들에게는 사건 종료 후 위자료를 보내겠다는 약속까지 합니다.

인질로 잡혀있던 스기무라 사부로는 노인의 말솜씨가 평범하지 않음을 눈치 챕니다.

상대방을 휘어잡으면서도 동시에 공감과 안심을 느끼게 만드는 그의 화술은

인질들로 하여금 도리어 동정심이나 돕고 싶은 마음까지 갖게 만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경찰이 버스에 진입하자마자 그는 권총으로 자살합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인질들에게 위자료가 든 봉투가 날아듭니다.

신고하자는 측과 그냥 받자는 측의 갈등이 확대되는 가운데

스기무라는 승산 없는 인질극을 벌인 노인의 목적, 그가 지목한 세 사람의 정체,

그리고 죽은 노인 대신 돈을 보내온 자는 누구인지 등에 대해 조사하기로 합니다.

 

● ● ●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인질극 이야기는 200페이지도 되기 전에 마무리됩니다.

이후로는 스기무라와 인질들의 진실 찾기가 진행되는데

여기에 덧붙여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복잡하게 병행됩니다.

평범한 출판사 편집자였다가 재벌의 서녀(庶女)와 결혼하면서 재벌가의 일원이 된 스기무라가

부모, 아내, 처가, 회사 중역 등과 겪는 복잡다단한 갈등들,

이제는 고인이 됐지만 스기무라가 과거 신세진 적이 있는 사립탐정의 가족과 얽히는 사건,

인질극의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사람들의 죄와 상처 등

따로 한 권의 작품이 될 만한 굵직한 이야기들이 메인 이야기만큼 비중 있게 다뤄집니다.

 

인질극 이후에 벌어지는 복잡한 상황에 대해 어디까지 어떻게 소개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출판사의 북 트레일러에서 대놓고(?) ‘다단계 사건의 뿌리를 파헤친다라고 홍보한 덕분에

서평에서도 마음 편하게 납치극의 배경에 다단계 사기가 있음을 설명할 수 있게 됐습니다.

미미 여사 스스로 인터뷰를 통해 밝힌 기획의도를 (약간 편집해서) 정리하면,

“‘깨끗한 피부를 갖고 싶다’, ‘건강해지고 싶다같은 우리 일상생활의 사소한 소망을,

또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드는 다단계 사기 경제 범죄가 싫은 거예요.

생활에 밀착된 악랄하고 치사한 수법이 싫었기 때문에 작품에서 써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작품 중에 악은 전염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역병처럼 퍼지는 다단계 사기의 추악한 양상에 딱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다단계 사기에 연루된 사람들은 피해자면서 동시에 가해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사람에 대한 믿음을 배신함으로써 자신들의 목적과 이익을 성취합니다.

또한 전염이라는 방식을 통해 자신들이 정점에 선 먹이사슬을 공고히 만들고 맙니다.

인질극의 배후에 다단계 사기의 이런 추악한 고리가 숨어있음을 알아낸 스기무라가

감춰진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은 말하자면 악의 전염경로를 추적하는 일입니다.

어떤 달콤한 언변과 화술로 어떻게 사람들을 전염시켰는지,

또 전염된 자들이 또 다른 희생자들을 낳게 만드는 시스템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전염은 어떻게 파국을 맞이하는지 등...

 

미미 여사의 엄청난 필력과 서사의 힘이 꽉꽉 채워진 작품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작품 가운데 가장 몰입이 힘든 작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다단계의 폐단과 후유증에 대해 지나치게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 점이 거슬렸습니다.

좀 과하게 얘기하자면, 말재주 좋은 사기꾼과 그 피해자들의 이야기일 뿐인데

거기에 베드로의 장렬이라든가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같은

철학과 윤리의 뉘앙스를 담은 제목을 붙인 것도 자연스럽지 못했고,

사기꾼의 화려한 언변을 타인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하는 능력으로 승화(?)시킨 점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가 됐지만, 너무 과대 포장된 나머지 현실성이 떨어졌습니다.

노인의 정체와 그가 지목한 세 사람의 죄, 위자료의 목적 등도

자연스럽게 와 닿지 못하고 왠지 기획의도를 위해 이야기가 짜맞춰진 느낌만 남았습니다.

또한 스기무라는 과도한 우연을 통해 비슷한 성격의 사건들,

, ‘사람의 마음을 배신하는 범죄와 동시다발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 역시 작품의 주제를 돋보이기 위해 작위적으로 설정됐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엄청난 분량임에도 워낙 페이지를 넘기는 힘이 강해서 하루면 끝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저처럼 미미 여사의 광팬이라면 위화감이 느껴지더라도 어떻게든 끝까지 달릴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라면 중간중간 남은 분량을 자꾸 확인하게 되는 책읽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삶의 전환점을 맞게 된 스기무라의 다음 이야기가

어떤 사건을 다루게 될지 내심 궁금하고 기대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아직 읽지 못한 스기무라의 과거사를 다룬 두 작품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래저래 미미 여사의 사회파 미스터리는 안 읽고는 못 버티는 중독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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