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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포수 이야기 ㅣ 낭만픽션 2
구마가이 다쓰야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문학이든 영상물이든 역사물 또는 시대물을 무척 좋아합니다.
거기엔 문명의 편리함도 없고 그저 느리고 무모한 일상만 잔뜩 있을 뿐이지만,
바로 그런 점이 인간의 날것 같은 감정이나 행위들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작품 가운데 인상 깊게 접한 작품들은 두고두고 몇 번씩 다시 보고 싶어지곤 하는데,
전 장르를 통틀어서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가 그랬고,
김훈, 조정래, 임철우의 소설이나 20세기 초중반의 황량함을 그린 영미권 소설이 그랬습니다.
‘어느 포수 이야기’는 1914년부터 약 20여 년의 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일단 제가 좋아하는 시대물이라는 조건에 맞아떨어지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작품 속 캐릭터, 감정, 스토리 등의 날것 같은 원시성만 놓고 보자면
앞서 언급한 어떤 작품보다 훨씬 더 싱싱하고 잔혹하면서 동시에 따뜻함을 지닌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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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상세한 줄거리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도호쿠 지방의 사냥꾼 ‘마타기’로 살아가던 마쓰하시 도미지는
지주의 딸 후미에와 사랑에 빠지지만 얼마 못가 마을을 떠나야 하는 처지에 몰립니다.
마타기로서 성공하겠다는 꿈까지 잃어버린 채 도미지는 광부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숱한 우여곡절과 사건을 통해 다양한 인연들을 맺으며 살아가던 도미지는
결국 광부의 삶을 접고 다시 마타기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지만
자신을 내쫓은 자들이 여전히 쌍심지를 켜고 있는 고향으로는 돌아가지 못합니다.
광산에서 알고 지낸 고타로의 마을에서 사냥패를 꾸려 정착하기로 한 도미지는
한때 유곽에서 몸을 팔던 고타로의 누이 이쿠와 부부의 연을 맺습니다.
그렇게 십여 년의 세월을 보내온 어느 날, 첫사랑인 후미에의 편지가 날아들고,
도미지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젊은 날 떠났던 고향을 찾아가야 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그리고 평생을 천직으로 여겨온 마타기로서의 삶에 중대한 기로를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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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문명의 이기인 총을 사용할 때도 있지만, ‘마타기’라 불리는 도호쿠 지방의 사냥꾼들은
기본적으로 본능에 충실한 선사시대(?)의 원시 사냥꾼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산신(山神)에 대한 경외심, 가족의 생사를 짊어진 의무감, 다른 사냥꾼들과의 경쟁과 충돌 등
그야말로 나약하기 짝이 없는 자연 속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생존을 위해 짐승의 피와 고기를 필요로 하는 냉혹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감정은 있습니다. 사랑하고, 증오하고, 그리워하고, 질투하는...
하지만 섬세한 감정들조차 공격적이고, 직설적이고, 때론 폭력적으로 발산되곤 합니다.
요바이(밤중에 성교를 목적으로 모르는 사람의 침실에 침입하는 일본의 옛 풍습)가 횡행하고,
업둥이를 비롯한 숱한 출생의 비밀에 동성애와 근친상간까지 등장하는가 하면,
부모와 자식이, 또는 형제가 서로에게 날선 시선을 날리기도 하고,
그 시대에만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진하고 깊은 사랑과 우정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과 감정의 원시성은 가혹한 도호쿠 지방의 자연환경에 기인합니다.
농사지을 땅조차 부족하고, 겨울엔 혹한과 폭설로 고립되는 그곳에서
남자는 마타기 외엔 달리 선택할 직업이 없고, 여자는 봉건적인 지위를 못 벗어납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좁디좁은 마을에서 집단의 폐쇄성은 강해지고,
남녀 간의 사랑, 친구와의 우정, 부모자식간의 애증은 에두르지 않고 표현됩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근현대의 경계라는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도미지의 일생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 그 자체에 다름 아닙니다.
난산으로 세상에 태어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훌륭한 마타기가 되고자 했지만,
한 여자와의 운명 같은 만남은 그의 평생을 쉴 새 없이 뒤흔들어놓고 맙니다.
잠시 원치 않는 광부의 삶을 살기도 했지만,
그곳에서도 도미지는 타고난 성실함과 사냥꾼으로서의 기질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두 번째 여자와의 극적인 만남은 위태롭던 그의 삶을 안정시켜줍니다.
마지막에 마타기로서의 삶의 기로에 선 그가 산신을 만나기 위해 설산에 오르는 시퀀스는
파란만장했던 그의 일생을 되돌아보게 하는 압도적인 서사를 풀어냅니다.
‘뛰어난 사냥꾼 마타기’와 ‘사랑에 충실한 남자’로 살아온 도미지의 삶을 지켜보는 일은
즐겁고 편안한 책읽기와는 거리가 먼 일이지만 가볍고 인스턴트 같은 이야기에 질린 독자라면
피부에 와 닿는 묵직한 감동을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돼줄 것입니다.
특히 남자 독자라면 “이 책은 (현대의) 거세된 남자들을 위한 회복과 각성의 묘약이다.
남자가 본래 어떤 동물인지 독자들은 알게 될 것이다.“라는 아사다 지로의 해설의 의미가
오랫동안 각인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