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인 은총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이동윤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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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카드에나 등장할 법한 그림 같은 마을 스리 파인스를 무대로

가마슈 경감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른바 범죄 없는 마을로 꼽힌다면 캐나다에서 1,2등을 다툴만한 평화로운 곳이지만

스리 파인스는 1년 만에 또다시 끔찍한 살인사건과 마주하게 됩니다.

다만, 1년 전에는 희생자를 기리는 슬픈 마음들이 온 마을을 우울하게 잠식했었다면,

이번에는 마치 희생자의 죽음을 축하하는 듯한 기묘한 분위기가 연출됩니다.

 

● ● ●

 

명상가이자 디자이너인 CC 드 푸아티에는 스리 파인스에 터를 잡은 이후

거의 물과 기름처럼 스리 파인스 사람들과 격리된 채 살아왔습니다.

괴팍하고 사나운 악녀의 기운을 내뿜는데다 어리바리한 남편과 고도 비만의 10대 딸을

쥐 잡듯 몰아세우는 모습을 보며 스리 파인스 사람들은 어이없어 하거나 분노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한 컬링 대회장 한복판에서 사망합니다.

관객과 컬링 선수로 가득했지만 정작 아무도 그녀의 죽음의 순간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사고가 아닐까 했지만, 가마슈 경감은 치밀하게 준비된 살인임을 알아냅니다.

하지만 가마슈 경감은 단서를 모으고, CC의 정체와 인간관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오히려 수사가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 ● ●

 

솔직히 고백하자면, 쉽지 않은 책읽기였습니다.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풍경과 개성 넘치는 착한 사람들로 둘러싸인 마을,

살인사건을 다룬 이야기임에도 마지막 장을 덮은 후 따뜻한 느낌을 전해줬던 독특한 맛,

이웃집 아저씨 같은, 하지만 뛰어난 능력과 진심어린 멘토링으로 존경을 받는 가마슈 경감 등

스틸 라이프가 남겨준 좋은 기억 덕분에 꽤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치명적인 은총은 제겐 산만하고, 난해하고, 지루한 느낌만 남겨줬습니다.

 

무엇보다 이야기의 중심에 서있는 피살된 CC의 캐릭터가 가장 답답한 부분이었는데,

그녀의 정체는 물론, 그녀가 왜 스리 파인스에 정착했는지,

그녀가 사이비 냄새가 진동하는 명상론을 기반 삼아 펼치려던 비즈니스의 실체는 무엇이며,

멍청한 남편과 뚱뚱한 딸에게 저지르는 악행의 근거는 무엇인지 등

독자를 납득시키고 공감시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정보가 끝까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여러 차례 언급되긴 했지만, 저의 이해력 부족 때문인지 통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스리 파인스의 괴팍한 시인인 루스 자도의 시()를 비롯해서

몇 번을 되읽어도 그 의미를 잘 모르겠는 어려운 시가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어떤 때는 그저 현학적인 수사 이상으로 읽히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 안에 중요한 단서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렵고 귀찮아서 다시 읽고 싶지도 않았고,

만약 정말 그 시 안에 단서가 있다면, 그건 적절한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루스 자도는 시인이니 그렇다 쳐도, 가마슈 경감을 비롯한 스리 파인스의 많은 사람들은

당연한 것처럼 고전과 현대의 시구들을 자유자재로 인용하곤 합니다. 이 점도 납득 불가..)

 

단서들은 모두 암호처럼 모호했고, 사건 주위에는 형이상학적인 상징들이 넘쳐나는데,

문제는 가마슈 경감이 그 암호와 상징들을 꿰어 맞춰 해결점에 이르는 과정들 역시

객관적인 논리와 명료한 추리보다는 계시를 받은 듯한 갑작스런 깨달음에 의지하곤 합니다.

덕분에 사건들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해결됐지만,

엔딩은 깔끔하지도, 여운을 남겨주지도 못한 채 마무리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내가 책을 잘못 읽은 건가라는 생각에 다른 분들의 서평을 찾아봤는데,

대부분의 독자들이 남긴 호평을 보곤 또 한 번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취향의 문제라고 마음 편하게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스틸 라이프를 떠올려보면 작가와의 궁합 자체가 저와 맞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런 악평에 가까운 서평을 쓰면서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루이즈 페니의 필력이 여전히 빛나는 지점들도 많았습니다.

뛰어난 능력과 따뜻한 마음씨를 소유한 가마슈 경감의 멋진 캐릭터라든가,

감성적인 가마슈를 든든하게 보좌하는 이성적인 경찰 보부아르와 라코스트의 매력,

민폐만 저지르다가 쫓겨났던 이베트 니콜이 재등장하면서 야기한 묘한 위기감,

가마슈에게 인정받아 꿈에 그리던 살인반 멤버가 된 로베르 르미외의 향후 행보 등

다양한 경찰 캐릭터는 스틸 라이프에 못잖게 강한 흡입력을 자랑합니다.

특히 가마슈 경감을 향한 퀘벡 경찰청의 은밀한 정치적 공격이 이번 작품에서도 이어졌는데,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서 가마슈 경감이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어떻게 풀어갈지,

그 음모를 주도한 세력들을 어떻게 박살낼지 무척 궁금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스틸 라이프에서 빛나는 주, 조연으로 활약했던 스리 파인스의 주민들은

이번에는 사건의 외곽에 머무른 나머지 상대적으로 왜소한 역할만 맡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로 하여금 마치 그들과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것처럼 느끼게끔,

그래서 그들을 그리워하게 만들고, 그들이 만든 크루아상을 먹고 싶게 만드는,

친근한 이웃으로서의 역할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역시 문제는 피살된 의문의 여인 CC 드 푸아티에였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좀더 선명한 캐릭터였다면, , 작가가 좀더 친절하게 그녀를 설명했더라면,

치명적인 은총이 제게 이런 평을 받을 이유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세 번째 시리즈인 가장 잔인한 달을 비롯해서 가마슈 경감 시리즈는 모두 읽을 작정입니다.

루이즈 페니가 펼쳐놓은 스리 파인스의 매력 자체를 포기할 생각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2CC 드 푸아티에를 만나는 일만큼은 피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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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나체들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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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파격적인 설정과 성()에 관한 직설적인 묘사 때문에 19금 판정을 받은 작품이지만

사실 두 남녀의 8개월 동안의 만남과 그것이 파국에 이르는 과정 자체는

새삼 19금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아도 인터넷을 통해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는,

2015년 현재의 관점으로 보면 오히려 진부한 스토리입니다.

 

● ● ●

 

평균보다 조금 못 미치는 외모를 지닌 덕분에 연애는 남 얘기처럼 알고 지내던 한 여자가

집단 괴롭힘의 트라우마, 열등감과 증오심으로 가득 찬 한 남자를 인터넷에서 만납니다.

8개월 동안 두 남녀는 파괴적이라 할 만큼 섹스에 집착하게 되고,

남자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두 사람의 성관계 동영상을 촬영한 후 인터넷에 올립니다.

파국을 감지한 여자가 결별을 선언하려던 순간 참혹한 사건이 벌어지고

두 남녀의 8개월의 치명적인 관계는 온 세상에 그 민낯을 드러내게 됩니다.

 

● ● ●

 

얼굴 없는 나체들은 스토리만 놓고 보면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지만,

모자이크 된 얼굴, 이름을 대체한 닉네임, 그리고 그를 통해 확보된 인터넷 상의 익명성

현실과 가상공간에서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방식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점에 관해서만큼은

충분히 주목받아 마땅한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외모도 성격도 평균을 넘지 못하는 요시다 기미코는

평범한 수준의 연애조차 요원한 일이 돼버리자 미키라는 닉네임 뒤에 숨어 남자를 찾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얼굴은 어떻게 해도 그 근본을 뜯어고칠 수 없는 불행한 유전의 결과였고,

콤플렉스로 커져버린 뒤에는 그녀 자신을 익명성의 세계로 숨게 만든 단초입니다.

그녀는 나중에 남자가 인터넷에 올린 자신의 얼굴 없는 나체사진과 동영상을 보며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조차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요시다 기미코인지, 미키인지, 어느 쪽이 진정한 자신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집단 괴롭힘의 트라우마와 열등감에 사로잡힌 가타하라 미쓰루는

학교와 사회에 대한 증오심을 여자의 얼굴에 투사함으로써 대리만족과 쾌감을 느낍니다.

그는 여자는 남자의 변기라는 여성관을 가졌으며,

옷을 입은평범한 여자와의 사랑이 불가능한 남자입니다.

“(여자는) 사실은 누구나 암캐처럼 탐욕스러운 욕망의 노예이면서, 짐짓 시치미 뗀 얼굴로

그것을 은폐한다. 그런 낯짝이 나를 업신여기고 거부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는 미치라는 닉네임 뒤에 숨어 자신의 성욕을 처리해줄,

마음껏 더럽힘으로써 수치심과 굴욕을 맛보게 해줄 여자의 얼굴을 찾아다닙니다.

 

모자이크와 닉네임 뒤에 숨었던 미키와 미치의 관계는 결국 비극적인 파국을 맞이하지만

세상은 온통 관음증 환자처럼 수면 위에 드러난 그들의 섹스동영상에만 집착합니다.

그들은 미키와 미치가 숨기려고 했던 모자이크 속의 얼굴을 벗겨내고 싶었고,

닉네임이 아닌 그들의 실명을 알아내기 위해 혈안이 됩니다.

얼굴과 이름을 숨기려는 미키와 미치도 그렇고, 그들의 민낯을 확인하려는 세상도 그렇고,

모두 픽션이 아닌 현실 속에서, 인터넷 속에서 매일 같이 반복되는 현상입니다.

 

단지 19금이라는 딱지와 그를 초래한 선정성 때문에 이 작품에 관심을 갖는다면

대략 기대치의 절반 정도는 만족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와 미덕은 성애소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인터뷰는 이 작품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와 의미, 미덕 등을

잘 요약해놓았는데 그것을 인용하는 것으로 서평을 마칠까 합니다.

 

얼굴이란 인간의 동일성을 담보하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얼굴로 어떤 사람인지가 구분되고, 얼굴을 통해 한 인간으로 고정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는 그 얼굴을 가릴 수 있기에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게 아닐까...

바로 그것이 제가 이 책에서 쓰고 싶었던 것 중 하나입니다.

(야후 북스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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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 The Gorgon's Look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0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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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에는 두 개의 잘린 머리가 등장합니다.

전위예술가의 유작인 석고상 여인의 잘린 머리가 하나이고,

참혹하게 토막 난 채 택배상자에서 발견되는 여자의 잘린 머리가 나머지 하나입니다.

제목대로 사건의 진실과 비밀은 두 개의 잘린 머리를 통해서만 알아낼 수 있는데,

추리소설가이자 탐정인 노리즈키 린타로와 그의 아버지 노리즈키 사다오 경시는

꼬일대로 꼬인 이 난해한 사건을 집요한 추적과 추리로 해결해냅니다.

 

잘린 석고상의 머리를 통해 누군가는 오랫동안 숨겨진 비밀을 알아내게 되고,

누군가는 그것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으려 하며,

누군가는 그 존재 자체를 감춰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입니다.

사라진 석고상의 잘린 머리의 행방과 범인을 찾기 위해 린타로가 동분서주하던 즈음

실제 여자의 잘린 머리가 등장하면서 노리즈키 경시를 비롯한 경시청이 나서게 됩니다.

린타로의 추리는 여러 번 좌절을 맛보며 계속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미세한 단서에서 결정적인 추리를 끌어내는 특유의 재능을 무기삼아

아무도 예상 못한 진범을 찾아냅니다.

 

궁극의 SF녹스머신을 통해 노리즈키 린타로의 방대한 과학 지식에 질린 적이 있는데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미술, 신화, 심리학 등 인문-예술 분야에까지 이른

그의 지적 스펙트럼의 폭을 맛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조금은 어렵고 난해한 내용도 있어서 린타로는 물론 독자들에게도 두통을 유발하고 있지만

나름 소소한 재미도 있거니와 사건 전개와 절묘하게 맞닿아있는 내용들로 묘사돼있어

약간의 노력과 집중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현실에서나 픽션에서나 대부분의 범죄의 근원에는 탐욕이 자리 잡고 있기 마련인데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에서 그려진 탐욕은 아무리 픽션임을 감안한다 해도

그 흉악함과 수단, 방법에 있어 그야말로 막장 중의 막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탐욕 자체가 일그러진 가족사와 결합될 때 그 악취는 몇 배로 강해지는데

노리즈키 린타로는 작정한 듯 출생의 비밀은 물론 가족 간의 불륜과 폭행 등을

거침없이 설정함으로써 불편함과 호기심을 동시에 자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석고상의 잘린 머리와 여자의 잘린 머리에 얽힌 비밀이 밝혀질 때쯤

독자는 미스터리가 해결되고 악이 응징됐다는 쾌감과 함께

인간이 어디까지 사악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무겁고 불편한 질문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풀기 어려울 정도로 꼬아놓았던 단서들을 후반부에 초고속으로 풀어내다 보니

이해하기 어렵거나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지점도 일부 있었지만,

어쨌든 노리즈키 린타로의 천재성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동시에 아직 못 읽은 시리즈 작품들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높여준 계기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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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밀실과 박사들 S & M (사이카와 & 모에) 시리즈 2
모리 히로시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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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외딴 섬에서 벌어진 3중 밀실 사건을 해결한지 1.

N대학 건축학과 조교수 사이카와 소헤이와 그의 제자 니시노소노 모에는

이번에는 교내 연구소 실험실에서 벌어진 기이한 밀실 사건과 마주하게 됩니다.

성공적인 실험의 뒤풀이를 하는 실험실 부속공간에서 두 구의 사체가 발견됩니다.

뒤풀이 참석자들이 지켜보고 있어 남의 눈을 피해 드나들 수 없는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은

수많은 가설과 추리 속에서 미제 사건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합니다.

견학 차 실험실을 찾았다가 참혹한 현장을 목격한 덕분에 사건 관계자가 되긴 했지만

사이카와는 애초부터 수사에 끼어들 마음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를 흠모하는 니시노소노 모에가 물불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건에 개입하면서

사이카와 역시 불가능한 밀실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특히 니시노소노 모에가 끔찍한 위기에 빠지는가 하면

또다른 사체가 실험실에서 발견되자 사이카와의 추리는 급물살을 타게 됩니다.

 

● ● ●

 

건축학과 조교수 사이카와 소헤이와 그의 제자 니시노소노 모에가 이끄는

이공계 미스터리’ S&M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보통 모든 것이 F가 된다S&M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모리 히로시가 처음 집필한 작품은 차가운 밀실과 박사들입니다.

 

모든 것이 F가 된다의 해설을 맡았던 세나 히데아키가

“‘차가운 밀실과 박사들은 중요한 작품이지만

본 작품과 비교하면 수수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라고 평한 반면,

이 작품의 해설을 맡은 오타 다다시는

“‘F’에 비해 이번 작품은 조금 놀라울 만큼 정통적인 본격 미스터리다.

그렇지만 얕잡아 볼 수는 없다. 그 논리성은 지극히 뛰어나다.

‘F’가 입맛에 맞지 않았던 독자도 이 작품은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대신 순도 99%의 강렬한 자극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라고 평했습니다.

 

두 사람의 평은 각자 자신이 맡은 작품에만 충실한 해설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두 작품을 모두 읽은 독자라면 양쪽 평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차가운~’‘F’에 비해 외양이나 트릭의 수준에서 수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본격 미스터리의 본령에 가까운 뛰어난 논리성을 지녔을 뿐 아니라

분명 ‘F’보다 확실하고 공감하기 쉬운 대중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F’를 시리즈의 첫 편으로 결정한 작가와 출판사의 선택은

신선한 소재와 이공계 미스터리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개성 때문이라고 추정됩니다.

그에 비하면 차가운~’은 같은 밀실 트릭을 다루고 있지만

소재의 신선함보다는 추리의 논리적 전개에 더 포커스가 맞춰진 작품이고,

그러다 보니 독자들에게 가해지는 파괴력이 상대적으로 약해 보였기에

시리즈의 첫 작품이라는 영예를 ‘F’에게 양보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신선함과 기발함도 좋지만 공감력을 좀더 중시하는 개인적인 기준 때문에

저의 경우 차가운~’에게 별 반 개 정도는 더 주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입니다.

 

어딘가 심각하게 삐딱하고 4차원적이던 사이카와의 캐릭터는

차가운~’에서는 친근하고 응원해주고 싶은 캐릭터로 순화됐고,

띠동갑보다 어리면서도 사이카와에게 가열차게 대시하던 니시노소노 모에의 귀여움은

훨씬 더 적극적인 로맨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순간의 깨달음으로 비약적인 추리를 선보인 사이카와의 비현실적 천재성은 여전했고,

‘F’에서 사이카와에 필적한 추리를 보였던 니시노소노 모에는 약간 퇴보한 느낌을 보인 탓에

캐릭터의 진화라는 부분을 맛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아마 애초 차가운~’을 첫 작품으로 썼다가 ‘F’ 이후의 작품으로 수정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어쩔 수 없는 오류(?)가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이어 두 권의 작품을 읽은 탓에 본의 아니게 비교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것이 F가 된다를 읽고 모리 히로시에게 의문을 품은 독자에게

차가운 밀실과 박사들은 이후의 시리즈를 기대하게 만들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F’보다 좀더 고급스런 이공계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약간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선명한 논리와 현실적인 트릭, 비극적인 비하인드 스토리가 깔려있는 작품이기에

약간의 심심함을 넉넉하게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올해 안에 연이어 S&M 시리즈가 출간될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두 작품을 통해 모리 히로시의 팬이 된 입장에서 후속작의 출간이 무척 기다려집니다.

철저히 문과적 인간인 제게 또다시 이과적 지식의 범람을 떠안기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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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F가 된다 S & M (사이카와 & 모에) 시리즈 1
모리 히로시 지음, 박춘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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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외딴 섬의 최첨단 연구소에서 3중 밀실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사지가 절단된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된 마카타 시키는

14세 때 이미 세계 최고의 공학자로 인정받았지만,

부모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다가 다중인격으로 판명되어 풀려난 후

외딴 섬 연구소의 완벽한 밀실에서 15년째 격리된 채 연구에 몰두하며 살아왔습니다.

 

천재공학자 마가타 시키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세미나 여행 차 외딴 섬을 찾은

N대학 건축학과 사이카와 소헤이 교수와 그의 제자 니시노소노 모에는

본의 아니게 끔찍한 현장을 목격한 덕분에 사건의 한복판으로 휘말립니다.

CCTV와 경비들의 완벽한 감시망,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밀실에서 벌어진 사건은

연이어 벌어진 살인사건과 함께 연구소에 머물던 모든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습니다.

정기적인 배편도 없는데다 연구소의 최첨단 시스템이 망가지면서 외부와의 연락마저 두절되자

사이카와와 니시노소노 콤비는 자체적으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하지만 트릭은 파헤칠수록 견고해보이고, 동기는 추정조차 곤란해지는데다,

범행은 물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설명 불가능하다는 암담한 결론만 반복될 뿐입니다.

 

● ● ●

 

소문으로만 듣던 명작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의 솔직한 느낌은

멍하다... 당혹스럽다...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하나...? 등이었습니다.

대학입시 때 받은 수학과 과학의 참담한 점수가 떠올랐고,

노리즈키 린타로의 녹스머신을 읽은 후의 엄청난 두통도 새삼 기억났습니다.

 

이공계 미스터리라는 별명답게 이 작품 속엔 수많은 공학 지식이 등장합니다.

살해된 마카타 시키는 어린 나이에 천재 공학소녀로 인정받았었고,

외딴 섬 연구소는 1995년이라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21세기의 첨단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며,

주인공 사이카와는 건축학과 조교수면서 해박한 이공계 지식을 갖춘 모차르트적 인간입니다.

그래서인지 사건의 발단이나 추리, 그리고 해결과정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이과적 지식이

철저하게 문과적 인간인 저에게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대목들이었습니다.

 

물론 이 작품이 이과적 지식 없이는 이해 불가능한 작품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순수하게 미스터리라는 골격만 따지고 보면 독자의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치는

모리 히로시의 신본격의 맛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인간의 불행, 탐욕, 운명 등 다양한 삶의 서사도 파란만장하게 녹아있고,

4차원처럼 보이는 두 명의 천재적 주인공의 맛깔난 캐릭터도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정기적인 배편도 없는 외딴 섬, 출입자체가 완벽한 통제 하에 놓인 연구소,

CCTV와 경비들이 24시간 감시하는 단 하나의 출입문을 가진 격리실 등

3중 밀실이 뿜어내는 카리스마는 아무리 봐도 뚫을 길이 없어 보입니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에 등장한 비극의 섬 츠노시마는

난이도만 놓고 보면 마카타 시키가 살해된 3중 밀실보다 쉽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14살 때 부모를 살해한 혐의를 받았고, 다중인격이라는 판정까지 받은 마카타 시키의 삶은

천재로 태어난 이들이 겪는 모든 불행과 비극적 운명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황금기 15년을 밀실에 갇힌 채 모니터를 통해서만 소통할 수 있었던 점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명처럼 주어진 천재성 때문에 끊임없이 연구를 거듭해야 했던 점,

결국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사지가 절단된 몸으로 만인 앞에 공개된 그녀의 최후 등은

기괴함과 우울함, 동정심 등 다양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설정들입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최고 매력은 역시 두 명의 주인공의 캐릭터입니다.

지극히 냉소적이며,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 자체를 혐오하는 것은 물론

때론 헤어날 수 없는 자뻑에 빠져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한 거만함으로 무장한 사이카와는

의외로 띠동갑보다 어린 니시노소노 앞에선 한없이 작아지는 귀여운 캐릭터입니다.

그의 추리 방법은 일면 지극히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면을 갖추고 있지만,

동시에 엘러리 퀸이나 미타라이 기요시처럼 순간의 깨달음을 통한 비약적 해결이라는,

조금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면모도 함께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치밀한 추리순간의 깨달음을 설명하기 위해

사이카와는 방대하고 난해한 이과적 지식을 동원하는데,

바로 이 지점이 독자들의 호불호를 갈리게 만든다는 생각입니다.

추리-깨달음-이과적 지식의 연결고리가 어쩐지 모호하다는,

필연적인 관계가 잘 설명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이카와를 대놓고 흠모하는 스무 살 여대생 니시노소노 모에 역시 드라마틱한 캐릭터입니다.

명문가의 딸이지만, 어릴 적 눈앞에서 부모의 죽음을 목격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으며,

단지 사이카와가 건축학과 조교수라는 이유만으로 건축학도가 된 특이한 인물입니다.

참혹한 사건 속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나름의 추리를 펼치는 강단 있는 면모도 매력적이고,

지칠 줄 모르고 사이카와에게 대시하는 사춘기 소녀 같은 귀여움도 눈길을 끄는 부분입니다.

10권까지 출간된 모리 히로시의 S&M 시리즈에서 그녀가 어디까지 성장할지도 궁금하고,

사이카와와의 로맨스가 결실을 맺을지도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책을 읽은 후의 당혹감이 너무 강해서 다른 분들의 서평을 찾아보니

예상대로 극과 극의 평가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이공계 미스터리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고,

어떤 분은 모호한 범행 동기나 애매한 마무리에 화가 난 분도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모리 히로시의 진가를 발견했다는 극찬을 한 서평도 적잖이 있었습니다.

양쪽의 이야기가 모두 수긍이 가는 지적들입니다.

트릭과 캐릭터는 뛰어나지만, 모호하거나 납득하지 못한 부분도 많기 때문입니다.

 

먼저 읽은 입장에서 조언하자면, 어렵고 골치 아픈 이과적 지식에 얽매이지 않고,

미스터리 그 자체에 유의하면서 읽어야 이 작품의 맛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리 할 것이지만, 반드시 두 번은 읽어야

외딴 섬에서 벌어진 기이한 사건의 진상을 좀더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은 책읽기는 여전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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