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맨 그레이맨 시리즈
마크 그리니 지음, 최필원 옮김 / 펄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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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설적인 킬러 코트 젠트리, 일명 그레이맨에게 동생을 잃은 나이지리아 독재자 아부바커는

천문학적인 천연가스 개발권을 미끼로 거대 재벌 로랑그룹에게 그레이맨 제거를 요구합니다.

합법과 불법을 넘나들며 엄청난 규모의 부와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로랑그룹은

미국인 변호사 로이드와 독일인 킬러 리겔을 앞세워 그레이맨 제거에 혈안이 됩니다.

로이드는 그레이맨의 후원자이자 은인인 스파이계의 대부 피츠로이의 가족을 인질로 잡았고,

리겔은 로랑그룹이 내건 상금을 통해 수십 명의 다국적 킬러들을 끌어들입니다.

노르망디에 인질로 잡힌 피츠로이와 그 가족을 구하기 위해

그레이맨은 사방에 깔린 킬러들과 혈투를 벌이며 한걸음씩 노르망디로 다가갑니다.

 

● ● ●

 

자신을 제거하려는 로이드와 리겔, 그리고 수십 명의 뛰어난 다국적 킬러들을 상대하면서

노르망디까지 진격하는 그레이맨의 48시간 동안의 여정은 말 그대로 미션 임파서블입니다.

가는 곳마다 거리의 아티스트라 불리는 감시원들이 깔려있고,

조금만 틈을 보이면 엄청난 현상금에 눈먼 다국적 킬러들이 대낮 도심에서 총을 갈겨댑니다.

안 그래도 한때 몸담았던 CIA마저 눈에 불을 켜고 그레이맨을 찾고 있는 상황이라

그의 행보는 마치 눈이 가려진 채 지뢰밭을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그레이맨은 최고의 스파이물 본 시리즈를 연상시킵니다.

무엇보다 코트 젠트리의 이력이나 살인기계를 능가하는 뛰어난 능력이 그렇고,

그를 제거하기 위해 무수한 능력자 킬러들이 떼로 등장하는 점도 그렇습니다.

예상치 못한 배신과 위기, 기대하지 않은 조력자의 등장,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거대악의 존재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코트 젠트리는 냉혈동물 같은 킬러이면서도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언제라도 자신을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인간미와 정의감입니다.

그는 아무리 큰돈이 걸려있더라도 명백한 악이 아니라면 일을 맡지 않습니다.

반대로, 정의감 하나 때문에 무모해보일 정도의 상황을 자초하기도 합니다.

코트 젠트리의 노르망디 작전역시 그런 무모한 상황 중의 하나입니다.

한때 자신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지만 피츠로이는 은혜를 갚아야 할 사람이며,

나이지리아의 독재자와 로랑그룹의 하수인들은 누가 봐도 명백한 악 그 자체라는 사실이

코트 젠트리의 인간미와 정의감을 부추긴 원동력입니다.

조금은 인공적인 느낌이 들긴 하지만,

사실 이런 점은 액션물 주인공이 갖춰야 할 당연하면서도 기본적인 매력이긴 하죠.^^

 

액션물은 영상이 이라고 생각하는 취향 탓에 자주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최근 몇몇 작품을 통해 소설이 주는 남다른 매력을 발견하는 중입니다.

그레이맨이후 발표된 시리즈들이 연이어 배리상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을 보면

노르망디 작전 이후 코트 젠트리의 거취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후반부에 암시된 그의 다음 미션을 보니 역시 짜릿한 재미를 줄 것 같네요.

그레이맨의 성공으로 마크 그리니의 다음 작품들도 무사히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사족으로...

펄스에서 지난 여름 출간한 아파치는 재미있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여러 독자들이 편집에 관해 아쉬운 반응을 많이 보였습니다. 저도 그랬구요.

그레이맨의 경우 판형은 마음에 들었지만

페이지를 줄이려 한 탓인지 너무 작은 글씨 때문에 첫인상이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야기에 빠져들고나면 글씨 크기야 전혀 의식할 수 없게 되긴 하지만요...

 

글씨 크기보다 더 아쉬웠던 것은 적잖은 오타와 무수한 띄어쓰기 오류였습니다.

일일이 찍어놓긴 했는데, 서평에 나열하기엔 양이 너무 많다는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야기만 놓고 보면 별 5개의 작품이지만, 오타와 오류 때문에 별 1개를 뺐습니다.)

저처럼 약간의 결벽증에 걸린 독자가 아니라도 자주 발견되는 오타는

작품과 출판사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입니다.

그레이맨의 후속작은 편집 과정에서 좀더 신경 쓴, 옥의 티 없는 결과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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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듣는 벽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마거릿 밀러 지음, 박현주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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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여행 중이던 친구 윌마가 멕시코 호텔에서 추락사하자 에이미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남편 루퍼트에게 의지하여 미국으로 돌아온 에이미는 윌마의 죽음의 충격에서 헤어나기 위해,

, 늘 타의에 의해 통제되던 삶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찾기 위해 집을 나갑니다.

하지만 에이미의 오빠 길은 동생의 가출을 묵인했다고 진술하는 루퍼트를 의심합니다.

에이미의 재산을 노린 루퍼트가 내연 관계인 비서 버턴과 짜고 에이미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사립탐정 도드를 고용하여 루퍼트의 뒤를 캐게 만듭니다.

도드에게 주어진 원래 미션은 에이미를 찾는 것이지만,

그는 윌마의 죽음에도 의혹을 가지면서 전방위로 탐문을 진행합니다.

그 와중에 도드는 루퍼트가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살인사건과 마주하게 됩니다.

루퍼트에 대한 의심이 고조되던 시점에, 도드는 그로부터 모종의 거래를 제안 받습니다.

 

● ● ●

 

가끔씩 고전 미스터리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무선 통신이라든가 컴퓨터가 없는 세상에서 펼쳐지는 진실 찾기 게임

현대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인간적인(?) 매력이 빛나곤 합니다.

일일이 발품을 팔면서 엄청난 종이자료들을 상대로 씨름을 해야 하는 기술적인 면도 그렇고,

트릭이나 사건의 흉악함보다는 등장인물의 캐릭터나 동기에 중점을 두는 서사 덕분에

게임 오버와 함께 기억에서 사라지는 현대물과 달리 묵직한 여운을 남겨주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목숨이 사라지는 참극이 벌어지긴 했지만,

엿듣는 벽에 등장하는 사건은, 규모만 놓고 보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일반 사건입니다.

하지만 가정 스릴러의 대가라 불렸던 마거리 밀러는

사건에 연루된 가족 또는 가족에 버금가는 주변 인물들의 캐릭터를 정교하게 설계하여

그들이 벌이는 맹목적인 믿음과 사랑, 이전투구와 의심, 탐욕과 질투 등

다채로운 감정과 관계를 긴장감 있게 그려냅니다.

 

언제나 제멋대로 화려하고 도드라진 삶을 살아온 윌마,

그와는 반대로 오빠의 강압 속에 한 번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본 적이 없는 에이미,

누구보다 에이미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실종에 관해 가장 큰 의심을 받고 있는 남편 루퍼트,

성년에 이른 에이미를 꼬마라 부르며 엄중한 보호 아래 놓으려는 오빠 길,

미스터리와 함께 사라진 시누이 에이미가 영원히 사라져주기를 바라는 길의 아내 헐린,

에이미의 오빠로부터 루퍼트의 불륜 상대로 의심받을 만큼 친밀한 관계에 있는 비서 버턴 등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애증을 가진 가족(에 버금가는 인물)들이

대치하거나 의심하거나 몰래 거래하면서 사라진 에이미의 행방을 놓고 제각각 움직입니다.

 

이렇듯 어딘가 의심을 살 만한 구석들이 충분한 인물들이 산재해있다 보니

독자는 누구를 범인으로 추정해야할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등장인물 모두 하나같이 진실과 거짓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독자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놓고 골머리를 앓게 됩니다.

에이미는 정말 자신의 의지로 떠난 것인지? 아니면 이미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것인지?

그렇다면 남편 루퍼트는 정말 아내를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잔혹한 살인범인지?

에이미는 남편에게 무한한 신뢰를 받을 만큼 정말 여리고 착한 여자인 건 맞는지?

루퍼트를 에이미 살인범으로 여기며 탐정까지 끌어들인 오빠 길의 진심은 무엇인지?

 

작가는 이렇듯 안개처럼 희미하고 불확실한 정황 속에서 자유자재로 독자를 쥐고 흔듭니다.

이쪽으로 몰아가는가 하면, 어느 새 반대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모두를 의심하게 만들기도 하고, 동시에 모두를 혐의 없다고 판단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양면성을 가진 인물을 등장시켜 우아하면서도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능했다.

특히 히스테리와 광기의 경계에 선 위태로운 심리를 묘사하는 능력과,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클라이맥스에서 독자의 허를 찌르는 수법이 대단하다.”는 소개대로

마거릿 밀러는 캐릭터 플레이를 통해 독자를 미혹하는 뛰어난 필력의 소유자입니다.

 

느지막이 등장한 사설탐정 도드는 전현직 경찰과의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를 모아들이고,

날카로운 추리와 집요한 탐문, 청산유수 같은 언변으로 매력을 발휘합니다.

시리즈의 주인공이 될 만한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스포트라이트를 다른 인물에게 양보해야 했던 점은 아쉬웠지만,

고전적인 노력하는 천재형 탐정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가장 아쉬운 점은 여운을 느낄 틈도 없이 막을 내린 엔딩 부분입니다.

후반부에 거의 비약처럼 이야기가 점프하는 지점이 나오는데,

물론 그에 대한 부연설명이 장황하게 이어지긴 하지만,

어쩐지 챕터 하나가 통으로 빠졌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빈틈이 크게 보였습니다.

그런 탓에 마지막 50여 페이지는 마감이나 분량에 쫓겨 급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한,

, 모든 것을 실은 이러이러했다.”라는 누군가의 고백으로 대체한 느낌까지 받았습니다.

마지막 한 줄의 반전은 어느 정도 예상은 했어도 꽤 충격적인 대목인데,

급작스런 마무리 때문에 제대로 그 효과를 내지 못했다는 느낌입니다.

 

고전은 말 그대로 고전의 맛을 기대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화려하고 복잡다단한 현대 미스터리에 길들여진 독자에겐

마거릿 밀러의 작품은 어쩌면 올드하고 단순한 치정극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추하든 아름답든 인간 본연의 감정들에 대한 묘사라든가

답답할 정도로 아날로그적이지만 오히려 진실의 이면까지 파악해내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어쩌면 가볍고 속도만 빠른 일부 현대물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진미일 것입니다.

 

부록의 마거릿 밀러 장편소설 목록을 보니 엿듣는 벽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작품입니다.

1950년대 중반에 최전성기를 보냈다는 마거릿 밀러의 최상급 작품들을

앞으로도 꾸준히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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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팽창 스토리 살롱 Story Salon 3
구보 미스미 지음, 권남희 옮김 / 레드박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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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로 처음 만난 구보 미스미의 인상은 정말 강렬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번갈아 화자를 맡으며 파격적인 성애부터 뭉클한 감동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인연과 감정들을 억지스럽지 않게, 120% 공감하게끔 풀어낸 작품으로,

개인적으로 전 장르를 통틀어 베스트 중 하나로 꼽는 작품입니다.

 

그녀의 신작 밤의 팽창한심한~’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형제지만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게이스케와 유타,

그리고 두 형제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미히로 등 세 명의 주인공이 번갈아 화자를 맡아

코흘리개 시절부터 30대를 앞둔 지금까지의 10여 년간 서로가 주고받은 애증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의 삶은 사랑과 전쟁그 자체입니다.

게이스케와 유타의 아버지는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다가 폐암으로 쓸쓸히 죽어갔고,

미히로의 어머니는 12살 연하의 남자와 눈이 맞아 3년간 집을 나간 적이 있습니다.

고교 시절, 동생 유타가 미히로를 좋아하는 것을 알면서도 먼저 고백을 한 게이스케는

결국 미히로와 결혼을 약속하고 동거에 들어가지만 현재는 섹스 장애를 앓고 있습니다.

배란기가 올 때마다 발정하는 기계처럼 몸이 달아오르는 미히로는

자신의 몸에 흐르는 어머니의 더러운 피를 저주하면서도

더 이상 자신의 몸을 탐하지 않는 게이스케가 원망스러울 따름입니다.

형과 결혼할 미히로를 여전히 마음에 두고 있는 유타는

어느 날 자기 앞에 나타난 돌싱녀와 사랑을 나누지만 마음까지 주진 못합니다.

 

세 남녀 사이의 애증을 가로지르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는 섹스입니다.

게이스케는 아이가 태어나 가족이 완성된다면 섹스란 없어도 무방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여자가 성욕 운운하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반대로 미히로는 섹스 없는 결혼이란 불가능하다고, 인공적인 임신은 무의미할 뿐이라고,

그렇게 이룬 가족이란 것은 모래위에 지은 성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발적으로 딱 한번 미히로와 섹스를 한 유타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때 미히로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세 사람의 이런 차이는 실은 좀더 근원적인 곳에서 발생한 것들입니다.

미히로가 본능과 감정에 충실한, 그래서 더 기복이 큰 삶을 살아가는 캐릭터라면,

게이스케는 계획과 관리에 의한 어긋나지 않는 삶을 추구하는 캐릭터입니다.

유타는 두 사람의 중간쯤에 위치했다고 할까요?

구보 미스미는 주어진 삶에 대처하는 세 사람의 차이를 유년기부터 꼼꼼하게 설계했고,

그 설계도 위에 부모나 친구, 또 다른 연인 등 다양한 조연을 포진시켜

세 사람의 극적인 인생항로를 정교하지만 감성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남녀 간의 애증을 섹스를 매개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하면

언뜻 과격하고 다혈질적인 캐릭터, 흥분으로 가득 찬 문장을 떠올리기 쉽지만

구보 미스미는 한심한~’에서도 그랬듯 직설과 담담함을 절묘하게 섞은 문장들을 통해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사실감을 높이는 필력을 선보입니다.

섹스에 관해서는 옆 사람이 책을 들여다볼까 신경 쓰일 정도로 직설적인 묘사를 동원하지만,

가족이기에 받아들여야 하는 희로애락이나 남녀 간의 애틋한 감정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쿨한 것 이상의 건조함이 느껴질 정도로 담담한 묘사에 집중합니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수시로 에쿠니 가오리가 떠올랐는데,

아마 불륜 또는 어긋난 인연을 자주 그린 그녀의 작품 세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쿠니 가오리가 (상대적으로) 예쁘고 가녀린 문장들로 독자의 감성에 호소했다면,

구보 미스미는 좀더 현실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공감의 폭을 넓힙니다.

 

다만, 전작인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길 잃은 고래가 있는 저녁에 비해서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연애소설이라고 단정 짓기엔 나름 다양한 인격과 감정을 폭넓게 표현한 작품이긴 하지만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고 아프게만드는 서사의 깊이는 기대에 비해 부족했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앞선 두 작품이 짙은 여운, 또는 결코 해소되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을 남긴 것에 비해

조금은 가벼워 보이는, 왠지 인공미가 느껴지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점이 아쉬웠습니다.

(고백하자면, ‘길 잃은 고래가 있는 저녁의 서평에서 다음 작품에서는 가끔씩 웃을 수 있는

이야기와 캐릭터들도 함께 볼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해놓고는 또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이런저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한번쯤 마음속에 품어봤을 법한, 또는 한번쯤 눈 딱 감고 과감하게 저질렀던,

하지만 상식과 통념, 도덕이라는 굴레 때문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평생의 비밀로 간직했을 날것 같은 감정들이 작품 곳곳에 진하게 배어있는 덕분에

밤의 팽창은 구보 미스미의 독특한 매력이 발산된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제 갓 나온 따끈한 신간을 끝냈지만, 또다시 그녀의 작품을 기다리게 됩니다.

다음엔 또 어떤 파격을 들고 독자를 찾아올지 그저 궁금하고 기대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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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의 엔드 크레디트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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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야마 고교의 축제를 앞두고 2학년 F반에서 제작 중이던 미스터리 영화가

시나리오를 맡은 학생이 과로와 심리적 부담으로 쓰러지면서 촬영 중단사태를 맞이합니다.

신경 쓰여요.”라는 말을 달고 다니는 사건 수집가지탄다 에루는

F반의 이리스 후유미로부터 지원을 요청받고 호타루를 비롯한 고전부를 사건에 끌어들입니다.

고전부가 받은 미션은 그때까지 제작된 영화의 초반부, 즉 피살자가 발견된 장면까지만 보고

애초 작가가 구상했던 트릭과 범인을 추론해냄으로써 시나리오를 완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F반의 축제용 영화 제작이 결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제작에 관여했던 학생들의 다양한 추론 밀실살인, 3의 인물 설 등을 들으며

나름의 추리를 전개시키지만 좀처럼 진상은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미궁에 빠지고 맙니다.

 

● ● ●

 

미스터리의 힘이라는 기준에서만 보면 좀 싱겁게 느껴질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의 진짜 미덕은 작가의 상상력과 잘 짜인 형식의 힘에 있습니다.

영화의 초반부만 보고 시나리오의 나머지 부문, 즉 범인과 트릭을 알아내야 한다는 설정은

어떻게 보면 고교 1년생인 고전부 멤버들에게 어울리는 쉽고 단순한 미스터리 같습니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맡은 학생이 정작 미스터리에 문외한이었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사건 현장이 계획적으로 준비된 완벽한 밀실이며

누구도 범인으로 지목하기 곤란한, 좀처럼 추론하기 어려운 트릭이 동원됐다는 사실은

호타루를 비롯한 고전부 멤버들을 꽤나 당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독특한 상상력이 자아낸 재미있는 설정을 기반으로 작가는 한편으론 미스터리의 정석을,

다른 한편으론 고교 1년생의 성장통을 함께 다루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특히 안 해도 되는 일은 안 한다.’는 좌우명을 가진 호타루가

F반의 카리스마 여제이리스 후유미에게 말려들어 그답지 않게 진상 파악에 힘쓰는 모습은

빙과를 읽은 독자라면 어라~?” 소리가 나올 만큼 재미를 주는 대목입니다.

스스로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던 호타루는 이리스 후유미의 부추김

고전부 멤버들의 진심어린 칭찬덕분에 새삼 다른 눈으로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오버까지는 아니었지만 분명 호타루가 자기애와 자만심의 냄새를 풍긴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또래라면 거쳐야 할 아프고 힘든 통과의례의 발단으로 작용합니다.

시리즈를 이끌어가야 하는 주인공이면서, 아직 채워야 할 여백이 많은 10대의 호타루에게는

언젠가 한번은 겪어야 할 자기 성찰의 시간이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에서 펼쳐진 것입니다.

 

이런저런 장점과 미덕에도 불구하고 (‘빙과의 기억이 강렬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던 작품입니다.

호타루의 성장을 지켜보는 일은 재미는 있었지만 어딘가 교과서적인 냄새도 좀 난 듯 했고,

미스터리는 독특하고 개성 있게 설정되긴 했지만

조금만 더 치밀했거나 복잡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내내 들었습니다.

호타루에게 포커스가 맞춰진 덕분에 지탄다, 후쿠베, 이바라 등 다른 고전부 멤버들이

확연히 조연 역할에만 머물렀던 것도 아쉬움 중 하나였습니다.

 

굳이 결론을 내리자면...

일부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믿고 읽는 작가요네자와 호노부의 특별한 상상력을 맛보게 해준 것으로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는 나름의 존재감을 충분히 발휘했다, 정도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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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분의 1의 우연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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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 책소개에서 인용한 줄거리입니다.)

한밤중의 도메이 고속도로에서 일어난 6중 추돌사고. 알 수 없는 이유로 트럭이 전복되고

뒤따르던 차량들이 연달아 추돌하며, 6명의 사람들이 한 순간에 목숨을 잃는다.

근방에서 야경을 찍으려던 아마추어 사진가 야마가 교스케는 이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다.

추돌한 차량에서 불길이 치솟아 어둠을 대낮처럼 밝힌 생동감 넘치는 사진은

'10만 분의 1의 우연'이 만든 셔터 찬스였다는 극찬과 함께

신문사의 사진 공모전에서 연간 최고상을 수상한다.

하지만 그 사고를 통해 약혼녀를 잃은 누마이 쇼헤이는 사고와 야마가의 사진 사이에

우연이라고만 여길 수는 없는 필연적인 인과가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야마가 교스케에게 접근한다.

 

● ● ●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은 매번 무거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게 됩니다.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이라는 표현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개인과 사회, 선과 악, 옳고 그름에 관한 논쟁거리를 남겨놓는 주제의식 때문에

출간된 지 한참이 지난 현재까지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것 같습니다.

 

‘10만분의 1의 우연은 무척 아이러니한 제목입니다.

아무리 촉이 뛰어난 보도사진작가라 하더라도

언제쯤, 어느 곳에서 끝내주는대형사고가 일어날 것을 예상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10, 아니 100만 분의 1이라는 확률로도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약혼자를 잃은 누마이 쇼헤이는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 여기게 됩니다.

 

누마이는 사고 현장을 답사하고, 그곳에서 확보한 미미한 단서들을 바탕으로

너무나도 무모하고 막연한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동시에 사고 당시 생존자는 물론 사진가 야마가에게까지 접근하여

어떻게든 그날, 고속도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내려 합니다.

누마이가 진실을 찾아낼 가능성 역시 10만 분의 1의 우연 외엔 방법이 없습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추돌사건을 찍은 야마가의 사진에 관한 독자와 신문사 간의 논쟁을

약간은 과하다 할 정도로 초반부에 서술합니다.

너무나도 생생하고 참혹한 사고 순간이 담긴 사진을 굳이 신문에 싣거나

연간 최고상이라며 그 사진가에게 상금과 상패까지 주면서 치켜 올려야 하느냐, 라는 비난과

경종을 울리기 위한 보도사진의 속성이라는 신문사의 반론이 공방을 벌입니다.

이런 초반부의 장황한 서술은 이 작품의 주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미야베 미유키는 해설을 통해 그 주제를 한마디로 정리해놓고 있습니다.

개인이 자기표현을 위해서 하는 행동을 사회는 어느 선까지 용인할 수 있는가?”

 

이 작품 역시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답게

개인과 사회의 문제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서사를 다루고 있다는 해설입니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가 정리한 한 줄의 주제는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조금은 맥락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사진가 야마가의 행동에는 사회적인 영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고,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과는 거리가 먼, 명예욕이라는 개인의 야망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약혼녀를 잃은 누마이의 진실 찾기 역시 개인의 복수 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포일러 때문에 그 이유에 관해서는 더 언급하기가 어렵네요. 죄송합니다.)

 

어쩌면 ‘10만 분의 1의 우연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 가운데

가장 개인적인 수준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파의 묵직한 서사가 밑받침되지 못한데다, 엔딩 역시 작위적인 느낌이 강해서인지,

지금까지 읽은 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몰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오히려 확실하게 개인적 수준의 순수한 미스터리, 그것도 중편 정도의 분량으로 완성됐다면

훨씬 더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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