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보는 눈
마이클 코리타 지음, 나동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0월
평점 :
품절


숨은 강에 이어 다시 한 번 마이클 코리타의 기발한 상상력을 맛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오늘 밤 안녕을이나 밤을 탐하다가 일반적인 스릴러로 분류된다면,

사물을 보는 것만으로 거기에 깃든 사연이나 과거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데다

특별한 환각을 보게 되는 주인공이 등장한 숨은 강이나,

100여 년 전부터 켄터키 동부의 블레이드 릿지라는 외진 벌판에서 벌어진 기이한 현상과

그로부터 파생된 살인, 자살 등 수많은 죽음의 비밀을 쫓는 형사반장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호러와 미스터리가 절묘하게 결합된 독특한 초자연 스릴러라고 할 수 있습니다.

 

● ● ●

 

진실 찾기를 맡은 것은 형사반장 케빈 킴블과 폐간된 신문의 베테랑 기자 로이 다머스입니다.

두 사람은 어느 날 외딴 산등성이에 등대를 세워놓은 괴짜 노인 와이엇의 전화를 받습니다.

강요된 자살을 암시하며 제대로 된 조사와 발표를 부탁한 그는 결국 자살체로 발견되는데

문제는 그의 등대에서 발견된 수많은 인물사진과 지도에 표기된 이름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곧 지도 속 이름들과 사진 속 인물들의 상관관계를 파악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살인, 자살, 사고에 가해자 또는 피해자로 연루됐던 인물들이며,

그 사건들은 100여 년 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산발적이긴 하지만

모두 블레이드 릿지라는 등대 주변 지역에서 캄캄한 밤에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살아남은 자들이 공통적으로 목격했다는 푸른 불꽃의 정체는 무엇인가?

외딴 산등성이의 등대에 적외선 조명까지 설치한 와이엇의 목적은 무엇인가?

살인자들의 공통점 치명적 사고를 당하고도 멀쩡히 살아남은 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왜 하필 외지고 버려진 땅 블레이드 릿지가 사건의 무대인가?

킴블과 로이는 탐문과 함께 블레이드 릿지의 역사까지 파헤치면서

상식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의 진상을 파헤칩니다.

 

● ● ●

 

결정적 키워드 하나만으로도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맥 빠지게 할 수 있는 탓에

자세한 줄거리는 물론 결정적인 사건조차 쉽게 언급하긴 어렵지만,

초자연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폭주하기에 딱 좋은 작품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혹시 그쪽 취향이 아닌 독자라도 블레이드 릿지에서 벌어진 기괴하고 특별한 사건들을 통해

충분히 매력적이고 긴장감 백배의 묘미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영웅의 서사, 즉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의 경로를 따라가는 작품은 아닙니다.

오히려 작품의 배경인 블레이드 릿지 만큼이나 어둡고 음습한 톤이 작품 내내 이어지고,

주인공 킴블의 개인사, 사랑, 미션, 위기는 하나같이 마음을 무겁게 만듭니다.

초자연 스릴러라고 하지만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묘사는 극히 단순하고 간결합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정말 그런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감나는 비현실감이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사실 유령, 귀신, 환각 등 비현실적인 설정이 스릴러라는 장르와 맞닿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이클 코리타는 독자들에게 이질감을 남겨주지 않습니다.

처음엔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하면서 위화감을 느끼다가도

어느 새 블레이드 릿지를 떠돌며 수많은 죽음을 초래한 비현실적인 존재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글빨의 힘이라기보다는 빈틈없이 직조된 정교한 설계도의 힘 덕분입니다.

블레이드 릿지의 비극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다양한 캐릭터들,

100년도 훌쩍 넘은 과거 속에 묻혀있던 블레이드 릿지의 참혹한 사고들,

인간은 보지 못하는 것을 지켜보는 등대 주변 고양잇과 동물구조센터의 동물들,

그리고 사건과 사건, 가해자와 피해자를 이어주는 비극적인 인과관계 등

마이클 코리타는 비현실적 설정이 주축이 된 방대하고 복잡한 서사를

그 어떤 사실적인 작품보다 철저하고 빈틈없이 설계했습니다.

익숙한 서사에 멋진 반전 한두 개면 나름 독자들에게 먹힐 법도 한데,

마이클 코리타는 그야말로 일부러 가시밭길을 선택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워낙 소심해서(?) 영상으로는 공포물을 잘 못 보면서도 간혹 미드 슈퍼내추럴을 보곤 했는데

그 드라마의 팬이라면 아마 블레이드 릿지의 비극에 푹 빠져들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슈퍼내추럴보다 조금 덜 무서울지는 몰라도,

이야기의 규모나 서사의 깊이, 비극의 무게감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슈퍼내추럴2시간짜리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이 정도 맛은 당연히 우러나겠지만요.^^

 

스포일러 때문에 자세한 줄거리는 언급 못했는데,

이 서평만으로는 이 책을 읽어야할지 잘 모르겠다.”, 하는 분들은

인터넷 서점의 줄거리를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나름 스포성 내용이 있긴 하지만 알아도 무방한 정도라 괜찮습니다.

 

이 작품이 7,8월 한여름에 나왔더라면 좀더 분위기를 탔을 것이라는 아쉬움과 함께

간혹 눈에 띄는 모호한 번역들이 옥의 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국내 출간된 마이클 코리타의 네 작품이 모두 번역자가 달랐는데,

궁합이 잘 맞는 번역자가 있다면 한 분이 도맡아도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처럼 붉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1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상처투성이 과거와 애정 없는 부모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일부러 먼 지방으로 진학했고,

또래들의 허세와 어른 흉내에 질색하며 철저하게 투명인간처럼 살아가던 17살의 루미키.

그런 그녀가 철없는 세 친구로 인해 살인과 마약이 개입된 엄청난 사건에 휘말립니다.

누군가의 피로 물든 3만 유로를 무단으로 들고 와 제멋대로 나눠가진 현장을 목격하고 만 것.

루미키는 비밀을 지키겠다고 했지만 일은 그녀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루미키는 정체불명의 미행자에게 납치와 총격 등 무차별 공격을 받게 됩니다.

마음을 바꿔 3만 유로에 관련된 비밀을 파헤치기로 한 루미키는

차곡차곡 단서를 모으고, 역으로 미행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건에 달려듭니다.

그리고 종국엔 범죄조직의 보스가 개최한 파티에 백설공주 차림으로 잠입하기에 이릅니다.

 

● ● ●

 

동화작가, 번역가, 서평가 등의 이력을 지닌 핀란드의 작가 살라 시무카가 집필한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의 첫 편입니다.

주인공인 루미키는 핀란드어로 백설공주를 뜻하는 이름을 가진 17세 소녀입니다.

하지만 이름과 달리 자기 나이의 두 배 이상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성장한 루미키의 심신은

웬만한 어른 이상의 내공과 파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참혹한 폭력으로 물든 유년기와 청소년기 속에서 부모는 그저 침묵과 종속을 강요했고,

루미키는 조금씩 자신의 주위에 벽을 쌓으면서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결국 고등학교 진학과 동시에 가족을 떠나 자취를 시작한 루미키는

한겨울의 얼음수영과 격투기 수련으로 몸을 단련하고

스스로 정한 엄격한 좌우명에 충실함으로써 마음을 제어하면서

투명인간으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이행해왔습니다.

 

언뜻 보면 스티그 라르손이 창조해낸 살인기계 리스베트의 청소년 버전 같지만,

루미키는 어쩔 수 없는 17세 소녀의 면모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마음 속 깊이 불같은 사랑의 추억과 상처를 새겨놓았는가 하면,

자신의 좌우명 중 하나인 무난하게 살고 싶으면 참견하지 마라를 어겨가면서까지

위기에 빠진 사고뭉치 친구를 향한 연민 어린 마음을 감추지 못합니다.

물론 그런 여린 성격 때문에 무시무시한 범죄조직과 맞닥뜨리는 운명을 맞게 되지만요...

 

사건의 출발점부터 루미키의 행적 하나하나가 모두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정작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재미있는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야기 자체의 속도감이 워낙 뛰어나서

빠른 독자는 반나절이면 완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쉴 새 없이 벌어지는 사건들 속에 살짝살짝 거론되는 루미키의 불행한 과거사는

독자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는데,

작가는 정말 딱 필요한 만큼만 보여주곤

후속작 눈처럼 희다흑단처럼 검다에서 확인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작품 속에서 루미키의 뒤를 따라가다 보면 17세 소녀에게는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상황들,

즉 스파이 액션물 주인공조차 버거워할 만한 위기 상황을 잇달아 만나게 됩니다.

납치, 총격, 격투, 잠복, 위장 등...

물론 작가가 공들여 설정한 루미키의 캐릭터 덕분에 무난히 읽히긴 하지만

그래도 간혹 위화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실수를 수습하기 위해 등 떠밀 듯 친구를 사지로 보내놓고도

닌텐도 게임에 빠져 환호하고 있는 철없는 17살 친구들 캐릭터 때문에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루미키의 애어른다움이 위화감을 느끼게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니키타 또는 리스베트 급의 내공을 지닌 저 소녀가 정말 17살 맞아?”

 

현지 언론에선 그녀를 한 마리 늑대 같은 여주인공이라고 표현했다는데

그러기엔 루미키에게는 지워낼 수 없는 17살 소녀의 잔상이 많이 남아있는 편입니다.

두 편의 후속작에서도 여전히 17살 소녀로 등장할지, 아니면 세월이 좀 튈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루미키가 어떻게 진정한 한 마리 늑대로 성장하는지 찬찬히 지켜보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자 친구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거품경제의 상징인 초고층 맨션에서 두 여자가 참혹한 시체로 발견됩니다.

검찰은 어설픈 수사와 막무가내식 추정으로 용의자를 체포하고 재판에 넘기지만,

예비 르포작가 나라모토 노에는 진실은 따로 있다고 확신하고 월간지에 기고를 시작합니다.

노에는 살해된 두 여자의 주변을 집요할 정도로 탐문하던 중

명백한 살해동기를 지닌 한 사람에 주목하곤 그 내용을 기고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 사태는 급변하고, 노에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합니다.

노에는 취재방향을 바꿔 새로운 탐문을 시작하고 결국 나름의 진상을 발표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던 노에 앞에 충격적인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 ●

 

큰 선만 놓고 보면 무척 심플한 구도처럼 보입니다.

검찰의 무리한 수사에 의심을 품은 의욕적인 예비 르포 작가가

끈질긴 취재를 통해 참혹한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이야기인데,

실은 이 작품에는 소화불량에 걸릴 정도로 다양한 코드들이 혼재해있어

한 번의 책읽기만으로는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저 역시 마지막 반전까지 갔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와 두 번째 책읽기를 마친 뒤에야

흐릿하나마 이야기의 큰 그림을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제목대로 이 작품에는 꽤 많은 여자들이 등장합니다.

예비 르포작가 노에, 피살된 두 여자 마키코와 요코, 사건을 담당한 검사 다마키 외에도,

노련하고 현실적인 편집장 무라오카, 피살된 두 여자와 인연이 있던 맨션거주자 및 동창생,

그리고 노에가 취재를 위해 만난 대다수의 인물들이 여자들로 구성돼있습니다.

그 가운데 친구라는 애증의 관계로 묶인 특별한 몇 명이 이야기의 중심부에 놓여있습니다.

 

작가는 여자들의 눈과 입을 통해 소화불량에 걸릴 정도로 다양한 코드들을 서술합니다.

절친이라 떠벌리고 항상 꼭 붙어 다니면서도 돌아서선 혐오를 느끼는 여자들의 우정의 민낯,

남편의 월급, 고급스런 맨션, 명품 향수와 가방 등 남들이 가진 것에 대한 가공할 질투 등

여자들의 미묘한 심리에 대해 꽤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것처럼 보이는) 대목부터

무계획적인 도시 개발과 집값 폭락, 가정주부의 사회 활동에 대한 제도적 제약,

연예인을 추종하는 팬덤 문화, 여성들의 성 상품화, 밀수입 약을 사용한 불법 낙태,

그리고 부실 수사를 자초한 검찰의 특임검사제, 폭로에 목숨을 건 와이드쇼와 잡지의 행태 등

다분히 사회파 미스터리에서 다룰 법한 현실비판적인 코드까지 총동원됩니다.

 

그래서인지 초반부터 누가 범인인가?’보다는 살해된 그녀들의 과거와 현재 엿보기

책 안에서는 모든 매스컴의, 책 밖에서는 독자의 관심과 시선을 잡아끌고 있습니다.

특히 자궁이 도려내진 채 시체로 발견된 마키코의 경우

커리어우먼이면서 동시에 인터넷에서 성을 팔았던 이력 때문에 더욱 이목을 끄는데

와이드쇼와 잡지들은 그녀의 가족, 친구, 지인들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니면서

그녀의 삶을 한오라기도 남김없이 모두 발가벗기려 노력합니다.

 

사건을 추적하는 노에의 경우 검찰의 수사를 비난하며 제대로 된 진실을 찾겠다고 나서지만,

르포 작가로 성공하겠다는 일념 때문에 그녀 역시 넘어선 안 될 선을 쉽사리 넘곤 합니다.

피해자의 이메일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특정한 용의자에게 대놓고 조소를 날리는가 하면,

공개적으로 다음 호에서 범인을 밝히겠다.”는 미끼성 글까지 기고하기도 합니다.

 

이런 구성 덕분에 가독성은 뛰어나고 페이지는 순식간에 넘어가지만,

문제는 마지막에 이르러 뭔가 복잡하게 얽힌 느낌만 들 뿐 이야기의 본질은 생각나지 않은 채

지금까지 내가 뭘 읽었나?”라는 모호한 독후감만 남게 됩니다.

누가 누구를 미워했고, 질투했고, 그래서 살의를 느꼈고... 등의 선정적인 관계만 생각날 뿐,

정작 중요한 범행 동기와 반전의 의미는 깔끔하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차례 비판적으로 거론된 사회적 이슈는 포장지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고,

반전은 작위적인 느낌을 넘어, 없어도 무방했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듭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결국 결론을 모두 아는 상태에서 다시 한 번 첫 페이지로 돌아갔고,

그렇게 읽은 두 번째 책읽기를 통해 그나마 조금은 선명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제 이해력이 부족한 것이 제일 큰 원인이었겠지만,

단순한 사건과 길지 않은 분량 속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했던 작가의 의도도

의욕 과잉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꽤 인상적인 문장들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 특히

인간을 분발하게 만드는 건 부정적인 감정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네요.”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여자들의 언행을 설명하는 가장 인상적인 문장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물론 주변의 모든 여자들까지 어쩌면 시기, 질투, 증오, 욕망 등

다양한 부정적 감정들에 의해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이 가진 의미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역시 두 번의 책읽기는 필수입니다.

물론 한 번의 책읽기로 그 의미를 이해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혹시라도 실망감이 앞선 독자라면 시간을 내서 재독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먼저 출간된 살인귀 후지코의 충동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소문대로라면 실망만 하고 돌아설 작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잘린머리 사이클 - 청색 서번트와 헛소리꾼, Faust Novel 헛소리꾼 시리즈 1
니시오 이신 지음, 현정수 옮김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표지와 제목만큼이나 독특한 작품입니다.

사실 라노벨의 정의도 잘 모르고, 읽어본 작품도 거의 없다 보니

니시오 이신의 헛소리꾼 시리즈가 라노벨의 범주에 들어가는 작품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연쇄살인을 다루고 있는데다 어딘가 파격적인 냄새가 솔솔 풍긴 덕분에

중고서점에서 시리즈를 일괄 구매했습니다.

 

이야기 구도는 심플합니다.

절해고도 젖은 까마귀 깃섬으로 초대받은 천재들이 한 명씩 머리가 잘린 채 살해당하고,

독특한 캐릭터의 두 주인공, 쿠나기사와 이짱이 밀실살인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미스터리의 실체도 새롭거나 기발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전에 가까운, 또는 요즘의 눈높이로 볼 땐 설마, 소리가 나올 만큼 진부합니다.

하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심지어 에필로그마저 반전의 무대가 된다는 점이나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등장인물들의 판타지 같은 캐릭터,

심오한 듯 하지만 어딘가 허무한 헛소리처럼 들리는 죽음에 관한 철학적인 논쟁,

두 주인공의 숨겨진 과거사와 멜로 라인에 대한 작가의 감질 나는 떡밥 등

그동안 읽은 미스터리 작품들과는 다른 신선한 매력이 가득한 작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나께서는~”, “나란 분은~”이라며 스스로를 극존칭하는 화법을 쓰고,

고작 19살이지만 한때 전 세계를 들썩였던 전설적인 해커 팀의 팀장이라는 이력을 지닌데다

코발트색 긴 머리를 휘날리는 기이한 외모의 천재소녀 쿠나기사 토모는

독자의 시선을 한꺼번에 휘어잡는 극강의 주인공으로 손색없는 인물입니다.

또한 쿠나기사의 보호자이자 작품의 화자인 헛소리꾼 이짱은

섬에 모인 천재들과 비교하자면 지극히 평범한 19살 소년에 불과하지만

여러 가지 비밀을 간직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으며

밀실살인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명탐정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 외, 재벌가에서 의절당한 후 이름도 독특한 젖은 까마귀 깃섬의 여주인으로 살아가며

수시로 천재들을 초대하여 여흥을 즐기는 아카가미 이리아,

여주인 이리아를 보필하는 음험한 기운이 느껴지는 네 명의 메이드,

그리고 그녀에게서 초대를 받은 5명의 여자 천재 등

개성을 넘어 신비함까지 느껴지는 등장인물 면면만으로도 재미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밀실의 트릭과 진범의 정체 등 사건 해결 과정은 딱히 특이하지 않지만

캐릭터의 힘만으로도 한 번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리게 만드는 힘을 가진 작품입니다.

다만, 이런 계열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독자에겐 니시오 이신의 천재성이 돋보이겠지만,

미스터리 고유의 힘과 정통 서사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전체적으로 가볍고 어딘가 짝퉁 같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삶과 죽음, 존재와 관계 등에 대한 장황한 철학적 묘사는

의도된 포장술이나 현학적 자만심의 구현으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저 역시 몇몇 대목에서 이런 아쉬움들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뭐가 진짜고, 뭐가 거짓인지... 누가 진짜고, 누가 거짓인지...”라는

후반부의 이짱의 독백을 읽으면서 내가 이해를 못한 게 아니라 이게 작가의 의도였군.’ 하며

스스로 안심(?)하며 자위하기도 했습니다.

 

앞선 서평들을 보니 호불호가 거의 극과 극으로 나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는 작품의 완성도보다는 취향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구매한 남은 시리즈들을 연이어 읽을 생각은 없지만

때로 간식처럼 색다른 이야기가 생각날 때면 한 편씩 차례대로 읽어볼 계획입니다.

중독성 강한 쿠나기사 토모와 이짱의 캐릭터, 또 이후 두 사람의 활약과

5년 전 그들이 겪은 사건이 궁금해서라도 그리 오래 미뤄 두진 못하겠지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롱 워크 밀리언셀러 클럽 143
스티븐 킹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체주의 국가가 된 가상의 미국에서 엄청난 경쟁을 통해 선발된 100명의 소년들이

1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무한정 걷고 또 걷는 서바이벌 게임 롱 워크에 참여합니다.

워커(Walker)라 불리는 그들은 먹는 것은 물론 용변과 잠까지 걸으면서 해결해야 합니다.

시속 6.5km 이하로 속도가 떨어지면 경고가 날아들고,

3번의 경고 이후에는 그들을 감시하는 군인들에게 즉시 총살당합니다.

걷기와 총살TV를 통해 전국에 중계되고, 거리는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권력자인 통령(統領)은 군중들의 환호 속에 워커들을 독려하며 독재의 카리스마를 발산합니다.

이 기상천외한 쇼 롱 워크에서 99명의 죽음 이후 홀로 살아남은 생존자는

평생 누구도 넘보지 못할 부와 명예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 ● ●

 

누구나 배틀 로열’, ‘헝거 게임을 연상할 수 있는 익숙한 줄거리입니다.

두 작품 모두 적극적인 투쟁, 즉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살아남는 룰을 설정해놓았지만

롱 워크에는 게임 참여자들 간에 살인도, 투쟁도, 사건도 없습니다.

물론 며칠 동안 수백km의 고통스러운 걷기 속에 갈등도, 다툼도, 왕따도 존재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모인 집단이라면 반드시 존재할 법한 일상적인 수준에 불과합니다.

말하자면, 걷기만 잘 하면 우승할 수 있는, 하지만 잘 걷지 못하면 가차 없이 총살당하는,

10대 소년들에게는 아이러니하면서도 한없이 잔혹한 게임입니다.

 

이 작품에는 전체주의 독재국가의 일그러진 면모를 보이는 장치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뼛속까지 군인이며, 선글라스를 낀 채 부동자세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권력자 통령’,

통령에게 열광하고, 워커들의 걷기와 총살에 환호하는 획일적으로 세뇌된 군중들,

무표정한 얼굴로 경고가 누적된 워커들에게 카빈소총을 발사하는 군인들,

권력의 명령에 거부하는 사람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끌고 가는 비밀조직 등...

 

총살될 가능성인 99%인 무모한 걷기 게임에 참여한 워커들의 캐릭터와

전체주의 독재 권력이 빚어낸 공포심을 자극하는 장치들이 혼재되면서

이야기는 말 그대로 그로테스크한 외양을 띠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특별한 사건도, 반전도 없이

그저 100명의 소년들의 심리적 변화(자신감 또는 자만심, 후회, 공포 등)

그들이 나누는 대화, 갈등만으로 400여 페이지의 분량이 채워집니다.

 

이 작품의 가장 극단적인 설정은 롱 워크에 지원한 대부분의 소년들이

자신이 왜 이곳에서 목숨을 걸고 걷고 있는지 잘 모른다는 설정입니다.

각자 나름의 동기를 품곤 있지만, 그것이 진짜 동기인지 본인들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라는 체념은 그들보다 훨씬 더 나이가 먹은 중년들의 몫입니다.

이제 겨우 20년도 못 채운 소년들을 롱 워크로 등 떠민 것은 무엇일까요?

독자마다 다른 답이 나올 수도 있지만, 아마 일종의 광기가 아닐까요?

 

스티븐 킹이 리차드 바크만이라는 이름으로 이 작품을 집필한 것은 1966년이며,

당시 그의 나이는 롱 워크에 참가한 소년들과 비슷한 만 19세였습니다.

1960년대 후반은 미국 사회가 여러 가지 사건으로 극단적인 대립과 혼란을 겪던 시기입니다.

어쩌면 그는 10대만의 시선으로 미국 사회의 비극적인 단면을 그려낸 것일지도 모릅니다.

기성세대와 사회가 조장한 광기는 10대들이 소화하기엔 너무 버거운 것들이었고,

그들은 남은 삶을 무모한 도박에 걸 만큼 절박하거나, 패닉에 빠졌거나, 멍청했을 것입니다.

설령 목숨을 건 롱 워크에 자원하지 않았더라도

광기에 휘말린 10대들의 선택지는 마약에 절은 히피나 미래가 안 보이는 패배주의자,

아니면 잘 해야 반전 시위대의 끄트머리를 차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수백km를 걸으며 몸과 정신이 피폐해지는 소년들을 지켜보는 것은,

, 한계에 부딪혀 쓰러진 채 카빈소총에 맞아 참혹하게 죽어가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은,

, 경쟁자가 줄어들수록 안심과 다행, 욕심과 공포가 교차하는 소년들을 지켜보는 것은

무척이나 고통스럽고, 어이없을 정도로 화가 나는 일입니다.

차라리 배틀 로열이나 헝거 게임처럼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남을 죽이는 이야기가

훨씬 더 마음 편하게 읽힐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롱 워크는 어쨌든 마무리가 됩니다.

살아남은 최후의 1인이 우승의 영예를 안고 브라스밴드의 연주와 군중들의 환호를 받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어떤 미래가 남게 될까요?

그가 걸은 수백km는 아마 그가 평생 바라보며 살아야 할 심연의 깊이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스티븐 킹이 독자에게 던진 화두 역시 그만큼의 깊이와 무게를 지니고 있는데,

특히 요즘의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감지되는 불편하고 부당한 기운들 때문에

더욱 그 깊이와 무게가 오래 전 바다 건너 남의 이야기처럼만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좀 쓴 소리를 하자면...

솔직히 책읽기가 많이 힘들고 불편했습니다.

그것은 만 19세의 나이에 리차드 바크만이라는 이름으로 첫 장편을 쓴 스티븐 킹의

어딘가 정제되지 못한, 조금은 겉멋이 든 문장들 때문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매끄럽지 못한데다 몇 번을 되읽어도 그 뜻을 알 수 없게 만든,

또한, 명백히 직역 또는 오역의 느낌을 줬던 번역자의 문장들 때문일 것입니다.

스티븐 킹의 작품을 좋아하면서도 아직 읽지 못한 작품이 훨씬 더 많은 편이지만,

지금껏 읽은 작품 중에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설정과 서사의 힘 때문에 이상한 문장들속에서도 작품 자체의 미덕은 맛볼 수 있었지만

스티븐 킹 특유의 디테일의 매력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제가 잘못 읽은 것일 수도 있으니, 다른 분들의 서평도 지속적으로 찾아볼 생각입니다.

출판사에서 선물로 받은 책이라 장점 위주의 서평으로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이 이야기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서 쓴 소리 몇 줄을 남겼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