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옳다
길리언 플린 지음, 김희숙 옮김 / 푸른숲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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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구걸을 하며 삶을 이어온

누구를 타깃으로, 어떤 말을 꺼내면 구걸에 성공하는지 정확히 아는 소녀였습니다.

어른이 되어 유사성행위로 생계를 꾸리게 됐을 때는

어떤 말과 어떤 표정, 어떤 분위기가 남자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지,

그래서 그들을 단골로 확보할 수 있는지를 아는 유능한 창녀가 됐습니다.

3년의 유사성행위로 손목에 이상이 생긴 는 이번에는 사이비 점쟁이의 길에 나섭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상대의 마음을 읽는 일에 능숙하던 는 무난히 그 일에 적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제의 고객 수전 버크를 만납니다.

빅토리아 풍의 저택에 살며 의붓아들과 트러블을 겪고 있는 여자.

는 그녀를 통해 큰돈을 도모하지만 저택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불안한 기운을 느낍니다.

명백히 고의적인 악의와 소시오패스 기질을 내뿜는 의붓아들 마일즈의 언행은 물론,

꼬리가 잘린 고양이, 벽에 목 매달린 인형, 피가 배어나오는 벽,

게다가 100여 년 전 저택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살인사건의 기록 등으로 인해

더는 저택에 머무를 자신이 없어질 무렵, 마일즈는 에게 수전의 진실을 폭로합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누가 사악한 자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경계에서 혼란스러워 하던

의외의 사태에 휘말리면서 고향을 떠나 새로운 인생을 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됩니다.

 

 

가제본 서평단에 뽑혀 책을 받아보곤 화들짝 놀랐습니다.

너무 얇아서... 본문 내용이 정확히 83페이지...

가제본 서평단이라 단편집 가운데 한 편만 샘플로 읽어보라고 보내준 것인가, 했는데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봤더니 정말 그 한 편으로 된 작품이었습니다.

길리언 플린의 작품이라 큰 기대를 했는데 엽편소설 같은 한 편 뿐이라 정말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83페이지의 분량에 이만한 이야기를 담아낸 그녀의 필력에 또한번 놀라기도 했습니다.

 

분량이 짧은 탓도 있지만, 처음 책읽기를 끝낸 후엔 좀 얼떨떨한 기분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뭘 읽은 거지? 분명 길리언 플린인데, 이 묘한 위화감은 뭐지?

그래서 딱 세 번을 더 읽었습니다. (그래봐야 2시간도 안 걸렸지만요.^^)

그랬더니 그제야 작품의 맛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결말을 안 뒤에 더 생각하게 만드는 수수께끼 같은 책이라는 출판사 소개글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짧은 분량임에도 미스터리, 호러, 공포, 복수 등 다양한 장르물 코드는 물론

선과 악, 진실과 거짓말, 도덕과 부도덕 등 진지한 서사들이 함께 깔려있는 작품입니다.

길리언 플린답지 않은 영국식 블랙유머로 시작된 이야기가

어느 새 불길한 빅토리아 풍 저택으로 말려들어간 뒤 소시오패스 같은 캐릭터가 등장하자

마치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변모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간결한 이야기는 마치 프롤로그만 보여주다 만 것처럼

딱히 엔딩이랄 것도 없는 어정쩡한 상태에서 끝나는데,

(말하자면 나를 찾아줘다크 플레이스’, ‘몸을 긋는 소녀의 오프닝만 읽은 느낌이랄까요?)

개인적으로는 이 이후의 이야기를 언젠가는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인의 마음을 읽을 줄 알고 그를 통해 정직하진 않지만 자연스러운 삶을 살아온 ’,

저택의 불길한 기운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듯한 의문의 여인 수전 버크,

앞으로 소시오패스로 대성(?)할 자질을 갖춘 15살 소년 마일즈 등

매력적인 캐릭터와 설정들을 길리언 플린이 이대로 덮어두진 않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길리언 플린의 작품을 고작 83페이지 밖에 만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예상치 못한 특별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는 반가움이 교차한 작품입니다.

(별이 네 개밖에 안 된 이유는 순전히 분량의 아쉬움 때문입니다.^^)

그저 빠른 시일 안에 그녀의 장편 신간 소식이 들려오기를 고대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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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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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필한 노작가가 자신의 환갑을 기념하여 추리 문단의 제자들을 미로관으로 초대한다.

미로로 이루어진 괴이한 지하 저택으로 모여든 여덟 명.

그러나 노작가는 보이지 않고 대신에 그의 유언이 전해진다.

닷새 동안 미로관에 머물며 최고의 추리소설을 쓴 사람에게 자신의 유산을 물려주겠다는 것.

스승의 막대한 유산을 둘러싸고 작가들은 서로 경쟁자가 되어

각자의 방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연쇄살인사건.

(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글에서 인용)

 

미로관의 살인은 액자소설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당시 연쇄살인사건 현장에 있던 누군가1년이 지난 후 그때 상황을 재구성하여

추리소설로 집필했고, 그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소설을 읽어달라며 보냅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에필로그를 통해 누군가의 정체는 물론 사건의 진짜 진상을 밝혀냅니다.

위의 줄거리는 누군가가 집필한 추리소설의 내용입니다.

 

앞선 십각관의 살인이나 수차관의 살인에 비하면 사건은 빠르고 간결하게 벌어집니다.

범인이 누군지 추측해보기도 전에 희생자가 연이어 발견되고,

노작가의 초대로 미로관을 방문한 시마다 기요시는 발군의 능력으로 사건을 해결합니다.

 

다음엔 누가 희생될 것인지, 범인은 과연 우리들 중 누구인지,

극단의 긴장감과 의문을 남기며 이야기가 전개됐던 앞선 두 작품에 비하면

사건의 발생 자체는 좀 싱겁다 싶을 정도로 심플합니다.

하지만 반전의 묘미라든가 마지막 페이지까지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트릭의 맛만큼은

앞선 두 작품에 비해 결코 모자라지 않으며, 어떤 부분에선 오히려 뛰어나다는 느낌입니다.

 

사실 미로관의 살인은 독자에게 꽤 많은 힌트를 곳곳에서 제공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분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대놓고 힌트를 주는데,

그 중 진짜 힌트로 작동하는 것도 있지만, 한 번 더 꼬이는 힌트도 있습니다.

아무튼, 조금이라도 위화감이 드는 대목은 후반부에 반드시 트릭의 열쇠로 활용됩니다.

책을 읽으면서 그런 부분을 꼼꼼히 메모해놓는다면

어쩌면 시마다 기요시보다 먼저 범인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 속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갇혔던 미노스 미궁을 모티브로 한 기괴한 미로관,

더구나 참극의 무대였던 십각관과 수차관을 설계한 나카무라 세이지의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충격적인 살인방법, 밀실의 트릭, 다잉 메시지, 거듭되는 반전 등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다양한 볼거리가 넘쳐나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론 서사의 크기는 작더라도 쫄깃함만큼은 앞선 두 작품보다 낫다는 생각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이 높아 내용을 별로 언급하지 못했지만

천천히 읽어도 하루면 완독할 수 있는 작품이니 직접 그 매력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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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숲 블랙 캣(Black Cat) 23
타나 프렌치 지음, 조한나 옮김 / 영림카디널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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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84년 여름,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 노크나리의 숲에서 3명의 소년, 소녀가 실종됩니다. 수색 끝에 애덤 라이언은 피범벅이 된 채 발견됐지만, 나머지 2명은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20년 후인 현재, 애덤은 로브 라이언으로 개명한 뒤 살인사건 전담반 형사가 돼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악몽의 근원지로 남아있는 노크나리의 숲 유적 발굴현장에서 참혹한 사체로 발견된 12살 소녀 케이트 살인사건을 맡게 됩니다. 새로 살인사건 전담반에 배치된 여형사 캐시, 국회의원 삼촌을 둔 동료형사 샘 오닐이 로브의 파트너로 수사에 참여하고, 대규모 지원반이 구성되지만 사건은 미궁에 빠집니다.

 

아일랜드 출신 타나 프렌치의 데뷔작이자 2008년 굵직한 미스터리 신인상을 휩쓴 작품입니다. 20년의 시차를 두고 노크나리 숲에서 벌어진 실종사건과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지만 단순히 범인 찾기이상의 서사를 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숲에서 두 친구를 잃고 홀로 살아남은 로브는 아직도 그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케이트 살인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노크나리 숲을 다시 찾은 로브는 조각조각 되살아나는 유년기의 기억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더구나 되살아난 기억 가운데 케이트 살인사건과 교차되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로브는 20년의 시차를 둔 연쇄살인범의 가능성까지 고려하게 됩니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사라진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 등 로브가 겪는 심리적 고통은 미스터리에 맞먹는 분량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28살의 여형사 캐시는 이런 로브의 곁에서 뛰어난 파트너이자 특별한 친구역할을 하는데, 형사로서의 재능은 물론 범죄심리학에도 능한 인재입니다. (캐시는 타나 프렌치가 후속작으로 집필한 ‘The Likeness’의 주인공을 맡을 정도로 개성과 매력이 철철 넘치는 여형사입니다.) 로브와 캐시는 나란히 누워서도 그야말로 손도 안 잡고 잠만 자는 독특한 관계입니다. 막역한 동성친구처럼 서로를 편하게 대하며 허물없이 속을 털어놓을 뿐만 아니라 수사에서도 눈빛만으로 모든 것이 통할 정도로 손발이 척척 맞는 파트너입니다. 물론 두 사람의 관계가 그저 물 흐르듯 계속 좋게만 이어지진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남녀상열지사가 개입되면서 이상전선이 흐르는가 하면, 수사상 결정적인 지점에서 큰 충돌을 겪으면서 파열음을 내기도 합니다. 친구이자 연인이자 파트너인 두 사람의 관계의 흐름도 꽤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한낮에도 햇빛이 스며들지 못하는 숲이라는 공간, 20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곳에서 벌어진 소년과 소녀를 대상으로 한 실종사건과 살인사건, 그리고 실종사건 때 홀로 살아남아 고통스러운 성장기를 거친 소년이 20년 후 같은 곳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수사해야 하는 아이러니 등 살인의 숲은 소재와 캐릭터만 봐도 그 무거움이 만만치 않은 작품입니다.

타나 프렌치는 그 무거움을 무려 570페이지에 걸쳐 펼쳐놓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 느껴지는 두통과 여운이 여간 묵직한 것이 아닙니다. 특히 (많은 서평과 작가후기에서도 지적됐듯) 독자의 마음에 돌덩이를 올려놓은 듯한 엔딩은 불편하면서도 이것저것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무거움의 결정타입니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을 꼽자면 분량의 문제입니다. 사건 자체만 놓고 보면 무척 심플한 설정인데, 그에 비해 피로감과 지루함을 느끼게 할 정도로 분량이 부풀려졌다는 생각입니다. 우선은 화자로 등장한 로브가 자신의 감정이나 기분을 지나칠 정도로 과하게 토로했고, , 20년 전 친구들과의 추억에 대한 묘사를 위해서도 과한 분량이 할애됐습니다. 필요한 내용들이긴 하지만 조금만 절제했더라면, 그래서 450페이지 안팎으로 집필됐더라면 훨씬 더 몰입감도 높아지고 지루함 없이 읽을 수 있는 작품이 됐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작가의 필력이나 캐릭터의 매력 등으로 볼 때 후속작 출간이 당연하다고 보였는데, 타나 프렌치의 작품이 살인의 숲이후 더 이상 출간 안 된 점은 무척 아쉬운 일입니다. 현재 대부분의 인터넷 서점에서 품절 또는 절판 상태인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캐시가 주인공을 맡은 ‘The Likeness’만큼은 빠른 시일 안에 출간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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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 파커 시리즈 Parker Series 1
리처드 스타크 지음, 전행선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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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1~2번씩 현금수송차량을 턴 뒤 휴양지에서 아내 린과 함께 럭셔리한 휴가를 보내다가

돈이 떨어지면 새로운 일에 착수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오던 파커는

함께 거액의 무기밀매대금을 강탈한 말 레스닉의 배신으로 인해 죽음 일보직전에 이릅니다.

천운으로 목숨을 건진 파커는 말 레스닉에게 처절한 복수를 다짐하며 뉴욕에 입성합니다.

수소문 끝에 거대 범죄조직 아웃핏의 중간보스가 된 말 레스닉을 찾아내 복수를 마친 파커는

이번에는 자신의 돈을 되찾기 위해 아웃핏과의 일전을 불사합니다.

 

● ● ●

 

한 편의 속 시원한 액션 영화를 본 느낌입니다.

이야기 구조는 무척 심플합니다. 통쾌한 복수극 그 자체입니다.

딱히 미스터리나 반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흡입력이 대단한 작품입니다.

분량도 300페이지가 채 안 돼서 서너 시간이면 충분히 끝낼 수 있습니다.

 

도널드 웨스크레이크가 리처드 스타크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악당 파커 시리즈'의 첫 편으로

속도감과 스릴감, 적절한 폭력성과 선정성에 매력적인 주인공까지 겸비한 덕분에

지금까지 두 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멜 깁슨이 주연을 맡은 페이백도 그 중 한편인데,

아쉽게도 보진 못했지만 대략 어떤 톤의 작품이었을지는 쉽게 짐작이 갑니다.

 

파커는 분명 법을 어기며 살아온 악당이지만 나름 원칙과 도덕을 고수해온 인물입니다.

필요한 만큼의 돈을 얻으면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휴양지에서의 삶을 영위했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인명피해를 끼친 적도 없습니다.

그런 그가 동료와 아내의 배신으로 인해 18년 동안 지켜온 삶의 방식을 포기하게 됩니다.

무수한 살인을 저지르고, 무모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조직과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독자는 그의 과거를 알면서도 그의 폭주하는 복수를 응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악당이지만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주인공이 사악하고 거대한 진짜 악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는

지금은 영화나 소설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이 작품이 1962년에 나온 것을 보면 아마 그런 장르의 원조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너무 심플하고 직선적인 서사때문에

롤러코스터 같은 아찔함이나 오르락내리락 하는 맛이 덜하다는 점인데,

골치 아픈 서사 대신 거침없는 액션을 맛보고 싶은 독자에겐

오히려 딱 맞는 스토리와 캐릭터일 수도 있습니다.

 

스마트폰도 컴퓨터도 없던 시대의 악당이지만

파커는 오히려 그런 아날로그적인 면 때문에 더욱 그 매력이 돋보이는 인물입니다.

목숨을 건 미션을 마치고 조직에 쓴맛을 보여준 뒤 유유히 길을 떠난 파커가

그 이후에 어떤 행보를 걷게 될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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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요정 베루프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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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자와 호노부의 작품인데다 인터넷 서점 대부분이 미스터리 장르로 분류하고 있고,

원래 고전부 시리즈의 한 편으로 집필된 이력 때문에 당연히 미스터리 작품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 담긴 내용은 18살 소년 모리야의 성장통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물론 일상 속의 추리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을 추리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좀 애매합니다.

 

● ● ●

 

1년 전, 3이던 모리야와 그의 친구들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17살 소녀 마야와 만납니다.

마야는 눈에 띄는 사소한 소품이나 이국적인 관습 하나하나에 관심을 쏟으며

매번 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까?”라고 묻곤 합니다.

짧은 두 달 동안의 만남 속에서 모리야는 마야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된 것은 물론

미처 들여다본 적 없는 새로운 바깥세계에 대한 갈망에 휩싸입니다.

마야가 유고슬라비아로 돌아갈 날이 얼마 안 남았을 때 내전 소식이 들려옵니다.

모리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야는 일본을 떠났고 그 뒤로 소식이 끊깁니다.

1년이 지난 오늘, 모리야는 일기장에 적힌 마야와의 추억을 하나씩 되짚어가며

그녀가 유고슬라비아의 어느 곳으로 돌아간 것인지, 지금도 안전하게 잘 지내는지,

또 약속했던 편지는 왜 안 쓰는 것인지 알아내려 합니다.

 

● ● ●

 

고전부 시리즈로 집필됐던 원고를 크게 고쳐 출간한 작품이라 그런지

캐릭터나 이야기의 톤에서 고전부 시리즈의 향기가 물씬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특히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가 많이 떠올랐는데,

그 이유는 고전부 시리즈의 주인공인 오레키 호타로가 그 작품에서 겪은 성장통 스토리,

즉 자신의 능력과 취향, 장단점에 대한 진지한 성찰,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확신,

그리고 그것들이 좌절됐을 때 겪게 되는 고통과 성장의 스토리가

이 작품의 주인공 모리야에게서도 그대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모리야는 대학 입시를 앞둔 평범한 18살 청소년입니다.

음악이든 운동이든 공부든 딱히 뭔가에 빠져본 적도 없고, 그럴 생각도 별로 없는데다

호화롭진 않지만 그렇다고 곤란하지도 않은 생활 속에 안주해있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유고슬라비아의 17살 소녀로 인해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단지 특별한 외모와 성격을 지닌 이국의 소녀에게 반했다는 점 외에도

17살에 어울리지 않는 원대하고 도전적이며 안주하지 않는 그녀의 삶의 방식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과 모방심 덕분입니다.

 

정치가를 꿈꾸는 마야는 아버지를 따라 세계를 다니며 유고슬라비아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각 나라의 문화와 관습을 집요할 정도로 메모하며 공부합니다.

처음엔 이국 소녀의 순진무구한 호기심이라 여기며 웃음 짓곤 하던 모리야는

점차 마야의 열정과 삶을 대하는 방식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결국엔 안이하고 평범할 뿐인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지경에 이릅니다.

 

마야는 내 좁은 세계에 숨구멍을 내준 방문자였다.

하루 세끼 거르지 않고, 교육도 받고, 몸에 탈난 곳도 없이 이렇게 살고 있지만,

이건 그냥 사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

 

바보의 엔딩 크레디트에서 오레키는 F반의 카리스마 여제 이리스 후유미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 즉 능력이나 취향, 장단점에 대해 심각히 고민하면서

잠시 자만에 빠지기도 하고, 잠시 좌절하기도 하는 통과의례를 겪습니다.

안녕 요정의 모리야 역시 마야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혁명적인(?) 변화를 꿈꾸지만

결과는 자신의 바람대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유고슬라비아로 떠난 마야로 인해 상심과 좌절을 맛본 모리야지만

그는 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난 추억을 바탕으로 마야의 현재를 알아내기 위해 분투하면서

좀더 과격한 방법으로 마야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세상은 그에게 더 큰 성장통만 안겨줍니다.

 

‘18은 우연히 만난 누군가로 인해 꿈, 미래, 이상이 전혀 달라질 수 있는 나이입니다.

자기애(自己愛)가 폭증할 수도, 자기혐오가 폭증할 수도 있는 나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층층이 쌓인 끝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성장을 겪게 됩니다.

사실 안녕 요정은 바로 이런 성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굳이 요약하자면,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대로 마야라는 요정을 통해 꿈꾸는 나의 이상향과

그것이 좌절됨에 따른 상실감을 유고슬라비아 분쟁이라는 사건을 매개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게는 좀 낯선 책읽기가 되겠지만(제가 꼭 그랬습니다^^;),

고전부 시리즈나 소시민 시리즈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어딘가 일맥상통하는 요네자와 호노부의 작품 세계를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카리스마와 추리 재능을 겸비한데다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여학생 다치아라이,

, “난 자기 손이 닿는 범위 밖에 관여하는 건 거짓이라고 생각해.”라며

모리야와는 정반대의 사고방식을 보여준 후미하라가 무척 인상적인 캐릭터였습니다.

성인이 된 모리야와 다치아라이가 등장하는 단편은 물론

기자가 된 다치아라이가 주인공인 장편(왕과 서커스)이 일본에서 출간됐다고 하는데

빠른 시일 안에 한국에서도 출간되기를 기대해봅니다.

 

사족으로..

안녕 요정에서 보틀넥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는 어떤 분의 서평을 발견했는데,

고백하자면 보틀넥1/4도 못 가서 중도 포기했던 작품입니다.

안녕 요정역시 미스터리를 기대했던 탓에 중간에 좀 힘든 부분이 있었던 것이 사실인데,

엔딩의 여운을 맛보고 나니 보틀넥에 다시 한 번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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