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매살인
한스 올라브 랄룸 지음, 손화수 옮김 / 책에이름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파리인간’, ‘위성인간에 이은 크리스티안-파트리시아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각각 작중 배경이 1968, 1969, 1970년으로 설정돼있는데

정치와 역사를 전공한 작가의 방대한 지적 자산이 유감없이 발휘될 수 있는 무대입니다.

특히 촉매살인에는 나치주의의 잔재, 젊은 공산주의자들의 조직,

국가정보원의 비밀 스파이 등 굵직굵직한 정치적 서사들과 함께

시기와 질투로 일그러진 사랑, 비극적인 가족사 등 다양한 코드들이 복잡하게 버무려져 있어

앞선 두 작품보다 훨씬 더 볼륨감이 두터워진 느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 ● ●

 

197085, 젊은 공산주의자 마리에가 전철역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합니다.

그녀의 연인이자 그룹의 리더 팔코가 행방불명된 지 꼭 2년째 되는 날에 벌어진 일입니다.

마리에와 팔코 사건을 동시에 수사하기로 한 크리스티안 경감은

두 연인이 속해있던 공산주의 그룹의 멤버들에 대한 탐문은 물론

실종되기 전 팔코가 쓴 논문에서 거론된 나치주의 네트워크에 대한 조사까지 진행하지만

두 사람의 피살-실종이 단순한 치정극인지, 정치적 갈등의 산물인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크리스티안의 비공식 파트너인 천재 장애 소녀 파트리시아는

마리에의 죽음이 또 다른 사건을 야기할 촉매살인이 될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그녀의 예상대로 살인사건이 잇따르지만 마리에의 죽음과의 접점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고,

크리스티안은 사건해결을 코앞에 둔 상태에서 패닉에 빠지고 맙니다.

 

● ● ●

 

2차 대전 종전 이후 25년이 지났지만 노르웨이의 정국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나치주의자들은 여전히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유지한 채 반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고,

소비에트와 중국을 장악한 공산주의는 유럽의 젊은이들을 들끓게 하고 있으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여론은 찬반으로 갈려 끝없는 정치적 논쟁을 불러일으킵니다.

작가는 이런 혼란스러운 시대적 배경을 무대로 비극적인 살인사건을 구성했습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정의를 위해 상대의 피와 항복을 요구하는 냉혹한 대결,

가족, 연인, 친구 사이마저 갈라놓은 역사의 상흔과 이념의 차이,

사상적 동지지만 엇나간 사랑으로 인해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게 된 청춘들...

 

꽤나 묵직한 서사를 바탕으로 작가는 촉매살인이라는 독특한 설정을 선보입니다.

, 하나의 사건이 (우연히 또는 운명적으로) 또 다른 사건들을 촉발한다는 것인데,

이 작품에선 마리에의 죽음이 선행하는 촉매살인이고,

뒤이어 벌어지는 복수의 죽음들이 그로 인해 야기된 사건들로 설정돼있습니다.

또한 2년 앞서 벌어진 팔코의 실종은 촉매살인을 잉태시킨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엔딩까지 모두 읽은 뒤 이 씨앗으로 인해 양산된 수많은 비극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운명의 아이러니라는 것이 얼마나 예측불가능하고 허망한 것인지 새삼 느낄 수 있습니다.

 

크리스티안-파트리시아 콤비의 수사가 여느 때보다 고전을 거듭한 가장 큰 이유는

사건의 형태가 남녀 간의 단순 치정극처럼 보이기도,

, 정치적 음모에 의한 계획된 사건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사상적 동지를 자처했던 이들이지만 경찰의 탐문 앞에서는 상대의 허물을 기꺼이 폭로합니다.

특히 남녀 간의 애정 문제에 관한 한 지저분해 보일 정도로 얽히고설킨 관계가 드러납니다.

이런 치정의 관계는 말초적인 재미에 그치지 않고 보다 큰 그림의 일부로 작동하면서

마지막까지 독자들의 호기심을 꾸준히 자극합니다.

 

이런저런 복잡한 설정들 때문에 촉매살인은 사소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따라가야

후반부의 반전이나 작품 속 인물들이 겪는 정서적 충돌을 제대로 맛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속도감만큼이나 페이지는 술술 넘어가고,

전작에 비해 재미라는 부분에 작가가 꽤 신경 썼다는 점도 확연히 눈에 보이는데

그런 점들 때문에 많은 독자들이 호평을 남긴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몇몇 지점에서는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도 이 작품의 제목이자 이 작품만의 독특함을 상징하는 촉매살인이라는 설정이

개연성이라든가 선명함에 있어 많이 부족했다는 점이 가장 아쉬웠습니다.

엔딩에 가서 마리에의 죽음이 어떤 방식으로 촉매 역할을 했는지,

, 그녀의 죽음이 촉발시킨 살인사건의 진상과 범인의 정체 등이 설명되긴 하지만

어딘가 개연성도 부족하고 인과관계는 작위적으로 끼워 맞춰진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더불어 파리인간이나 위성인간에서도 지적했던 부분이지만

크리스티안이 파트리시아에게 지나치게 의존한 탓에 그 존재감이 미약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촉매인간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파트리시아에게 기댈 생각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주인공으로서의 미덕이나 매력이 많이 훼손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스 올라브 랄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치른 우리에게도

역사와 개인의 문제를 다룬 굵직한 미스터리 서사가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그런 작품들이 있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너무나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소재라서인지

어딘가 정곡을 피해가는, 순문학적인 정서만 강조된 느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의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통해서도

불행하지만 기억해야만 할 현대사를 조망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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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애플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7
마리 유키코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사실 3주 전쯤 마리 유키코의 여자 친구를 읽곤

이 작가의 작품은 절대 연이어 읽으면 안 되겠군, 다짐한(?) 적이 있습니다.

흔히 이 작가의 작풍을 가리켜 일컫는 이야 미스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싫은 기분이 든다기보다는 어딘가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답답함과 무거움이 부담스러웠고,

한 번 읽어서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 구조 탓에

기어이 두 번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난감함 역시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은 직후 제목과 표지만 보고 달달한 로맨스 소설인가보다 여겼다가

작가 이름을 보곤 (좀 오버하자면) 화들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또 이 여자야...?^^

더구나 ふたり라는 원제 덕분에 책을 읽기도 전부터 불길한 기운에 휩싸였습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마리 유키코는 정말 제 정신을 산란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원제 ふたり는 한 사람의 정신이상 증세가 주변인에게도 전염되는 것을 뜻하는

감응정신병의 동의어 ‘2인정신증에서 파생된 말이 아닐까, 막연하게 추정(?)해봅니다.

이 작품에 수록된 8편의 에피소드에는 각종 망상에 사로잡힌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망상은 주변의 인물들에게 전염 또는 심각한 피해를 입히곤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소설 속 남자주인공 이름으로 설정한 여류소설가를

나를 사랑하는 여자로 여기곤 집요하게 스토킹하다가 끝내 폭력을 휘두르는 인물도 있고,

온 사방에 설치된 도청기와 카메라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인물도 있습니다.

금지된 일에 더욱 집착한 나머지 불행을 자초하는 인물도 있고,

나를 제외한 세상사람 모두가 집단최면에 걸렸다고 확신하는 인물도 있습니다.

 

8편의 에피소드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소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광분 또는 광란이라는 뜻을 가진 ‘Frenzy’라는 제목의 여성패션잡지입니다.

잡지 모델의 헤어스타일에 열광하여 너도나도 그 스타일을 추종하는가 하면,

그 잡지에 연재된 소설 때문에 참극에 참극이 거듭되기도 합니다.

또한 몇몇 에피소드는 인물과 사건이 서로 얽혀있는 연작 형태를 띠고 있는데

한 편에선 멀쩡하던 인물이 다른 편에선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앞서 벌어진 사건의 진실이 뒤에 등장한 에피소드에서 해결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인물, 사건, 소품이 서로 얽히고 엮이면서 독자는 혼란을 겪게 됩니다.

특히 마지막 에피소드를 읽고나면 출판사의 소개글대로

대체 누가 제정신이고, 누가 미쳐버린 사람인가?” 헷갈리게 될 정도입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어떤 에피소드나 등장인물에 대해

순간순간 확신이나 판단에 사로잡힐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는 한 번쯤 되짚어 보셨으면 합니다.

과연 그 확신과 판단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책의 서문에 실린 마리 유키코의 출간 기념 인터뷰입니다.

그 사람이 제정신인 것 같지? 하지만 잘 봐. 정말 그럴까?”라는,

어딘가 독자를 도발하는 듯한 거만한(?) 말투입니다.

이 서문대로 독자의 확신과 판단은 뒤로 갈수록 자신감이 없어지고 흐릿해지고 맙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정말 제정신인 사람과 미친 사람을 구분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단서를 찾고 싶은 마음에 글자 하나하나를 뚫어져라 노려보지만,

따옴표 속의 대사가 진실인지, 속마음을 서술한 평서문이 진실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서술트릭처럼 문장 속에 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에피소드 별로 줄거리를 정리하려다가 결국은 정리 불가를 외치고 자폭(?)하고 말았습니다.

 

애초 마리 유키코는 이 작품을 광기의 전염에 대한 소설이라고 칭했는데,

책을 읽다보면 광기의 전염 자체가 작품 속 인물들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라

독자가 작가로부터(혹은 작품 속 인물로부터) 강요받는 현상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순히 싫다, 무겁다, 부담스럽다의 차원을 넘어 당혹감과 패닉의 책읽기라고 할까요?

 

에피소드 가운데 에로토마니아’, ‘클레이머’, ‘골든 애플’, ‘핫 리딩

비교적 깔끔하고 선명한 전개, 미스터리와 반전 덕분에 쉽고 재미있게 읽힙니다.

나머지, 특히 후반에 배치된 에피소드들은 정말 난해하고 혼란스러운 이야기들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고, 기억은 뭉텅이로 사라지고, 망상과 착각은 임계점을 넘어섭니다.

하지만, 애써 누가 제정신인지, 누가 미쳤는지, 뭐가 진실인지 알려고 발버둥치지 않는다면

오히려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는 (좋은 의미에서) ‘이야 미스의 절정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정말 너무나도 기분 나쁜 나머지 마리 유키코를 블랙리스트에 올릴 수도 있습니다.

아마 서평도 거의 극과 극으로 나뉘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카페나 블로그, 인터넷 서점에서 이 작품의 서평들을 꼼꼼히 챙겨볼 예정입니다.

그런 식으로라도 독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접한 후에 다시 한 번 이 작품을 읽는다면

(‘여자 친구때 그랬던 것처럼) 첫 책읽기에서 발견 못한 마리 유키코의 속내를

일부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물론, 큰 자신은 없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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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9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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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가 일본의 한 스포츠매거진의 시드니 올림픽 특별취재원 자격으로

호주를 방문하고 쓴 여행기이자 올림픽 관전기라고 해서

처음엔 하루키 비즈니스가 이젠 그의 여행기나 스포츠 관전기까지 확장됐나, 라는

약간의 의구심(?)과 얄팍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느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키의 눈으로 본 호주는 막연하게 상상하던 낭만적인 여행지와는 확연히 달랐고,

올림픽 관전기 역시 개성과 현장감이 넘치면서도 어딘가 삐딱해 보이는 묘사들 덕분에

여느 여행기나 스포츠 해설보다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든 지루하고 재미없는 개막식에 대한 비판,

다국적 기업들과 돈에 의해 움직이는 올림픽의 상업주의적 행태,

TV중계에선 맛볼 수 없던 경기 전후의 여백이나 선수 개개인에 대한 단상을 읽다 보면

, 올림픽을 이렇게 경험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 인류의 본능인 투쟁심을 다스리기 위한 김 빼기를 위한 대리 투쟁의 장이면서도

표면적으로는 평화의 제전으로 불리는 올림픽의 양면성을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가 하면,

메달이라는 속세적 목표를 위해서든 참가에 의의를 두는 올림픽 정신의 구현을 위해서든

자신과의 싸움에서 전력을 다하는 선수들의 땀과 노력을 존경심을 갖고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말하자면 상업적인 흥밋거리, 잔혹한 승부의 세계, 의외의 지점에서 튀어나오는 감동,

거기에 올림픽의 이면을 바라보는 삐딱한 시각까지 골고루 갖춘 하루키 식 에세이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박동희 기자의 스토리와 감동을 지닌 프로야구 기사를 읽는 느낌이랄까요?

 

그의 호주 여행기는 좀더 특별했습니다.

평범한 여행객들은 웬만해선 발길을 들이지 않는 호주의 양지와 그늘을 골고루 보여주는데,

그래서인지 호주의 속살을 공짜로 여행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의 여행기의 철칙이 남들 가는 곳에 가지 말고, 남들 하는 것을 하지 말자.”라는데

읽다 보면 그 철칙이 엄격할 정도로 지켜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풍광 소개에 그치지 않은 그의 문장은

몹시 젊다 싶다가도 동시에 신비하게도 노쇠한 분위기가 도는 나라의 여러 면을 비춥니다.

때론 돌직구 같은 톤으로 이질적이거나 불편해 보이는 관습과 문화,

정크푸드로 가득한 먹거리 등을 대놓고 까기도 하지만,

때론 가도 가도 끝없어 보이는 광활한 호주의 규모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담대함에 대한 순수한 놀람을 거듭 언급하기도 합니다.

특히 후반부에 특별코너라는 부제로 실린 무라카미 사관에 의한 호주 역사

짧은 분량이지만 호주의 시작과 성장기, 그리고 현재를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던 대목입니다.

 

호주의 역사와 문화, 사람들의 느긋함과 열정, 올림픽의 여러 단상들로 채워진 시드니!’

어떤 작가도 시도하기 쉽지 않은 낯선 장르의 작품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재미있겠어?”라는 선입견을 주기 쉬운 형식이지만

하루키는 다분히 반골적이면서도 동시에 그만의 따뜻한 시각을 통해

남반구의 이국에서 보낸 스무날 가까운 특별한 날들을 기록했습니다.

한국에서 또다시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하루키가 그때까지 살아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지만,

개인적으로 하루키가 한국에서 열리는 (다른 형식이라도 좋으니) 대형 이벤트를

이런 형식으로 집필한다면 어떤 글들이 쏟아져 나올까, 무척 궁금해집니다.

 

여전히 출간 소식이 기다려지는 그의 작품은 소설이 분명하지만

2014년에 출간된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에 이어

하루키의 특별한 에세이를 읽을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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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의 다섯 번째 아내 블랙 로맨스 클럽
제인 니커선 지음, 이윤진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동화 푸른 수염은 웬만한 연쇄살인극에 못잖은 잔혹한 스토리와 캐릭터를 지녔습니다.

이 동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 꽤 많다고 들었는데,

제인 니커선의 푸른 수염의 다섯 번째 아내역시

모티브가 된 동화에서 그리 크게 벗어나지 않는 스토리로 짜인 작품입니다.

 

● ● ●

 

가난하지만 활달하고 그 또래에 어울리는 호기심과 욕망을 지닌 17살 소녀 소피아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대부이자 후견인인 드 크레삭의 초청으로 그의 저택을 방문합니다.

아직 노예제도가 남아있던 1855년의 미국 남부 미시시피에서

드 크레삭은 외부와 고립된 채 수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영국의 수도원을 통째로 옮겨 와 저택으로 삼을 만큼 엄청난 거부입니다.

소피아는 꽤 많은 나이 차이에도 드 크레삭의 매력과 그가 제공한 부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하지만 그에게 네 명의 부인들이 있었고, 모두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소피아의 마음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더구나 종잡을 수 없는 감정기복, 독재자 같은 절대 권력의 남발,

교회나 이웃 등 그 누구와도 접촉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무리한 요구 등

드 크레삭은 날이 갈수록 소피아의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숲에서 만난 목사에게 특별한 감정까지 갖게 된 소피아는

자신에게 청혼한 드 크레삭에게 거부 의사를 밝히며 저택을 떠날 것을 선언하지만,

협박이나 다름없는 엄포와 가족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오히려 불안한 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드 크레삭에게 벗어나기 위해 네 명의 전 부인들의 비밀을 캐기로 마음먹은 소피아는

절대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폐허가 된 예배당을 찾으면서 위기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 ● ●

 

흠모, 집착, 열애 등 다양한 형태의 로맨스가 등장하는데다

비명에 간 네 명의 전 부인의 비밀을 파헤치는 후반부의 설정들 덕분에

로맨스 소설 또는 로맨틱 스릴러라고 소개되고 있지만

그보다는 잔혹동화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호기심과 욕망에 사로잡힌 10대지만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착한 막내딸이기도 한 소피아,

한때 수도원이었지만 지금은 어딘가 악마의 기운을 발산하는 듯한 엄청난 저택,

저택의 주인이자 외부와 고립된 채 자신의 영역에서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드 크레삭,

그리고 다국적 식구들 - 영국인 가정부, 중국인 집사, 인도인 수발하인, 프랑스인 요리사 등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동화적 설정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원전인 동화 때문에 드 크레삭의 네 명의 전 부인들의 비밀은 그리 새로울 것이 없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그녀들의 캐릭터는 제각각이어서 순종적인 여자도, 반항적인 여자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붉은 빛을 띠는 머리카락의 소유자들이었고

자살, 병사, 실종 등 어딘가 미스터리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들은 소피아에게 처음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점차 자매들이라 여기고 싶을 만큼 공통분모를 가진 비극적인 동지애를 불러일으킵니다.

소피아는 저택에 남아있던 그녀들의 머리카락으로 팔찌를 만들고 벽걸이 융단을 수놓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드 크레삭의 다중인격적이고 소시오패스적인 기질로부터 도망침과 동시에

소극적이지만 그녀 나름의 저항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매력과 카리스마를 내뿜던 저택의 주인이자 거부인 드 크레삭이

광기 어린 소시오패스라는 실체를 드러내는 과정은 아주 천천히, 잔혹하게 묘사됩니다.

감정의 극심한 기복을 보이면서도 그는 소피아를 조근조근 짓밟기 시작합니다.

폭언을 퍼부었다가도 능숙하게 위로하는가 하면,

색욕을 드러냈다가도 어느 새 젠틀한 신사로 돌아옵니다.

옥탑에 갇힌 공주처럼 소피아를 외부와 철저히 단절시켜놓았다가도

곧 방문할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특별 외출을 허락하기도 합니다.

덕분에 소피아는 드 크레삭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됩니다.

혐오하다가도 동정하게 되고, 도망치고 싶다가도 보살펴주고 싶어지고...

그리고 그러는 사이 빠져나올 수 없는 진창 속으로 서서히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노예제도가 남아있던, 그것도 미시시피라는 미국 남부를 무대로 한 이야기는

이상할 정도로 기분 나쁘고 잔혹하고 폭력적인 느낌을 주곤 합니다.

푸른 수염의 다섯 번째 아내는 그런 느낌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작품입니다.

특히 풍광이나 인물에 대한 작가의 디테일한 묘사들 덕분에 그런 느낌들이 더욱 고조되는데,

이 점은 이 작품의 장점이자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500여 페이지의 분량 가운데 디테일한 묘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큰데다

소피아의 공포, 드 크레삭의 만행 등 비슷한 에피소드가 반복되다 보니

어지간한 독자들이라면 쉽게 지칠 수밖에 없는 구조의 이야기입니다.

번역자 역시 좀 힘들더라도 1/3까지만 참으면 그 뒤론 진가를 맛볼 수 있다.”라는 내용의

번역 후기를 남겼을 정도입니다.

독자에 따라선 참아야 하는 지점이 1/3이 될 수도 있고, 2/3가 될 수도 있는데

어쨌든 심하게 디테일한 묘사는 이 작가만의 고유한 개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법 호불호가 갈린 책이긴 한데, 낯선 시대를 무대로 한 잔혹동화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도전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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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가 된 여자
엘리자베스 L. 실버 지음, 신상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10년 전 살인죄로 사형수가 된 노아 P. 싱글턴은 6개월 후 사형집행이 예정돼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희생자의 어머니이자 거대 로펌의 시니어 파트너인 말린 딕슨이 나타납니다.

그녀는 사형 반대청원을 넣겠다며 10년 전 사건 당일의 진실을 설명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말린 딕슨과 함께 온 신참 변호사 올리버는 노아가 감추고 있는 사실이 있음을 확신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노아는 10년 전 법정에서도 그랬듯이 입을 굳게 다뭅니다.

노아는 올리버가 갖고 온 공판기록을 읽으면서 자신에게 닥친 비극의 전말을 회상하고,

동시에 나름의 회고록, 즉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은 진실을 한 줄씩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 ● ●

 

태어난 후 한시도 평탄한 적이 없는 삶을 살아오다가

결국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수가 된 한 여자의 드라마 같은 일생을 다룬 작품입니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갈래로 전개됩니다.

출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는 사형수 노아의 회고,

죽은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노아를 용서하려는 진짜 이유를 밝히는 말린 딕슨의 고백,

노아와의 거듭된 면회를 통해 10년 전 사건의 진실을 캐려는 올리버의 노력이 그것입니다.

 

보통 사형수와 변호사가 만나는 이야기라면 극적인 반전을 통해 무죄를 입증하거나

최소한 사형제도에 관한 논쟁을 펼쳐 사형수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일반적인 전개입니다.

사형수는 어떻게든 진실을 위한 단서를 기억하려 애쓰고,

사형수를 돕는 변호사는 거대한 권력이나 악에 맞서 사방팔방 노력을 경주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사형수가 된 여자는 그런 비현실적이고 상업적인 전개 대신

죄와 벌이라는, 조금은 무겁고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난해하거나 어렵다는 뜻은 아닙니다.

불행한 출생과 성장, 한순간에 삶을 추락시킨 임신과 낙태,

23년 만에 나타난 아버지와의 재회와 그 재회가 불러온 끔찍한 살인사건,

과잉보호 속에 키운 딸에 대한 집착과 그 집착이 일으킨 돌이킬 수 없는 비극 등

다분히 막장에 가까운 캐릭터와 사건들이 등장하여 내내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독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왜 사형수 노아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지도, 감형이나 사형중지를 애걸하지도 않느냐는 점입니다.

이야기가 흘러가는 정황을 보면 분명 억울한 사연이 있을 법한데,

, 정말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왜 노아는 사형집행을 6개월 앞둔 지금도 저렇게 냉소적이고 쿨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다만, 노아가 회고하는 자신의 일생은 조금은 지루하게 읽히는 지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최후까지 감춘 진실을 알고 공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대목입니다.

 

딸을 살해한 노아에게 용서의 손을 내밀면서 실제로는 다른 속셈을 지닌 말린 딕슨의 계획도

독자에게 끝까지 미스터리와 긴장감을 안겨주는데,

후반에 노아의 회고를 통해 드러난 진실은 말린 딕슨을 한편으론 악녀로,

또 다른 한편으론 딸을 잃은 비극적인 어머니로 만듦으로써

독자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사형수가 극적으로 무죄를 입증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사형제도에 관한 고지식한 논쟁을 다룬 이야기도 아니지만,

한 여자의 굴곡진 일생과 사형수가 되기까지 벌어진 기막힌 사연들에 대한 서사는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다양한 여운을 남겨줍니다.

어딘가 모호하고 작위적으로 오픈된 듯한 엔딩이 아쉽긴 하지만

묵직한 비극을 좋아하는 독자에겐 기억에 남을 작품이 돼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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