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조사관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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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관의 인권침해를 감시하는 국가인권위원회를 모델로 한 인권증진위원회를 무대로

개성 강한 각양각색의 조사관들이 때론 갈등을 겪으며, 때론 협력을 통해

인권지킴이로 분투하며 감춰진 사실을 밝혀내는 5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얼핏 책 소개만 보면 논픽션의 맛이 나지 않을까, 선입견이 들 수도 있지만

송시우 작가는 조사관들의 고민과 활약을 쫀쫀하고 알찬 미스터리 속에 잘 버무렸습니다.

불법적인 민간인 사찰,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공권력의 남발,

증거보다 진술에 의존하는 후진적인 사법체계 등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주제에 잘 어울리는 미스터리 픽션으로 포장하여 재미와 긴장감을 함께 전해줍니다.

도처에 숨겨놓은 덫과 복선을 이용하여 막판 반전을 꾀하는 에피소드도 있고,

명쾌하게 답할 수 없는 도덕적 딜레마에 대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등장하는 캐릭터도 정의감에 사로잡힌 슈퍼울트라 능력자와는 거리가 먼,

어딘가 한군데씩 부족함을 지닌 지극히 현실적이고 상식적인 인물들입니다.

조사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면서도 정작 인권위 일이 적성이 아니라고 여기는 한윤서,

40대의 아줌마 조사관으로 귀가 얇은 단점은 있지만 추진력만큼은 일품인 이달숙,

막내 조사관임에도 다혈질에, 성차별에, 내심 사형 제도를 찬성하는 문제 조사관 배홍태,

사명감 때문에 로펌 대신 인권위에 왔지만 기대한 것처럼 일이 안 풀려 고민 중인 부지훈 등

어느 조직에나 한 명쯤 있을 법한, 드라마로 치면 조연에 가까운 캐릭터들입니다.

 

전형적인 구성이라면 이들의 갈등을 봉합하고 멋진 결론을 내리는 보스가 나올 법도 한데,

작가는 지시와 보고에만 충실하거나 또는 결정 자체를 떠미는 무력한 상사만 등장시킵니다.

말하자면 조사관들 사이의 갈등을 독자 앞에 고스란히 노출시킬 뿐 아니라

그들의 입을 통해서든 작가의 입을 통해서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도 내리지 않음으로써

독자 스스로 각자의 결론을 고민하게끔 만드는 여지를 꽤 많이 남겨 놓습니다.

개인적으론 이 지점이 달리는 조사관의 가장 큰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인권위의 정체성과 본분을 놓고 벌어지는 조사관들 사이의 갈등을 지켜보고 있자면

현장도 모르고 법도 모르는 비전문가에 의한 조사와 판단은 신뢰할 수 있는가?”

과연 국가기관은 당연히 감시받아야 할 수상하고 사악한 존재인가?”

악인의 인권도 보호돼야 하는가?” 등 여러 생각이 복잡하게 떠오르게 됩니다.

 

작품 속에서도 이런 대화들이 숱하게 오갑니다.

인권은 개잡놈들에 의해 발전돼왔고, 그 혜택은 주로 그 개잡놈들이 누리고 있다.”라든가,

“(엄격한 증거가 없어도) 약자의 편에서 인권침해라는 판단을 팍팍 내려줘야지.”라든가,

우리 일이 결국 나쁜 사람들 좋자고 하는 일이었네요.”라는 자조 등이 그것인데,

이런 대목을 읽을 때마다 답 없는 딜레마의 답답함과 고민이 먹먹하게 다가옵니다.

미스터리로만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의미들을 곱씹어가면서 읽는다면 훨씬 더 풍성하고 가치 있는 책읽기가 돼줄 것입니다.

 

이미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을 통해 크지 않지만 촘촘한 서사의 힘을 보여준 송시우 작가가

기대대로 훌륭한 두 번째 작품을 내줘서 반갑고 또 반갑습니다.

인권 문제와 미스터리의 조합이라는 발상도 신선했고

이야기의 전개나 엔딩 모두 상투적이 않은 방식이라 (개운하진 않지만) 마음에 들었습니다.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이후 15개월 만에 신작이 나온 셈인데,

시공사 블로그에 실린 다음 작품은 더 오래 걸릴 것 같다.”는 인터뷰 내용대로라면

빨라야 2017년 하반기나 돼야 신작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http://blog.naver.com/sigongbook/220547694116)

독자 입장에선 기다린 시간만큼 알찬 작품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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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미싱 판타스틱 픽션 화이트 White 2
체비 스티븐스 지음, 노지양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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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느 날 갑자기 납치된 후 1년여 동안 악몽 같은 감금의 날들을 보낸 애니 오설리번은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현실로 돌아오지만 그녀의 정신은 여전히 망가져있습니다.

언론은 그녀의 비극을 선정적으로 포장하여 세상에 퍼뜨리는 중이었고,

할리우드 영화제작자는 집요하게 그녀의 스토리를 사겠다며 수시로 연락해옵니다.

 

한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을 통해 납치 전후의 상황,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관계를 되짚어가며

애니는 왜 자신이 납치돼야 했는지, 왜 악몽 같은 감금을 당해야 했는지를 반추해봅니다.

모든 정황을 종합해볼 때 분명 자기 주위 사람이 연루됐다는 확신을 갖게 된 애니는

아직도 자신의 사건을 집요하게 수사하는 형사 개리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합니다.

하지만 개리는 전혀 상상도 못한 수사결과를 애니에게 알려줍니다.

 

● ● ●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고통스런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 정신과 의사를 찾은 애니의 진술이 하나이고,

납치 전후의 상황과 1년 동안의 감금 생활에 대한 묘사가 나머지 하나입니다.

탈출에 성공한 후에는 그녀를 향한 언론과 이웃의 횡포, 주변 사람들과의 불안정한 관계,

왜 자신이 납치됐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과 추리가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애니 오설리번은 납치 피해자가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경험합니다.

폭행은 말할 것도 없고 인적 없는 깊은 산속에서 그녀의 모든 일상은 범인에게 지배당합니다.

입어야 할 옷, 화장실에 가는 시간, 먹는 음식 등등...

1년 동안 그녀를 지배한 범인의 규칙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그녀의 의식을 점령했고,

극적으로 탈출하여 현실로 돌아온 후에도 그녀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고통의 무대였던 침대는 여전히 공포 그 자체여서

애니는 좀처럼 침대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옷장 속에서 겨우 잠을 청하곤 합니다.

 

사실 납치와 감금이라는 소재는 미스터리 마니아인 저로서도 조금은 불편한 소재입니다.

차라리 피가 난무하는 살육극은 감당할 수 있어도

산 채로 매장당하는 듯한 공포를 안겨주는 납치와 감금은

그것이 아무리 픽션이라도 피하고 싶은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납치 직전, 납치와 감금 기간, 탈출 후의 패닉 등

애니의 심리를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디테일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작가 자신이 여성이라서 그런 묘사가 가능했을 수도 있겠지만,

캐릭터에 대한 끈질긴 연구와 정교한 설계, 캐릭터와의 동일시의 노력이 없었다면

애니의 불행은 독자의 공감을 얻지 못한 채 픽션 속 이야기에 그쳤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책 읽는 내내 가시를 삼킨 것처럼 불편함을 떨쳐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덕분에 엔딩의 반전과 충격이 그만큼 크게 다가왔겠지만요.

 

억지로라도 아쉽게 느껴진 점을 꼽아보자면, 우선은 분량의 문제입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왜 작가가 사소한 디테일에까지 충실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의 1/4정도는 동어반복 또는 과도한 디테일에 소모됐다는 느낌입니다.

좀더 이야기를 슬림하게 만들었다면 중간중간의 피해갈 수 없는 지루함은 없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납치 미스터리가 해결되는 과정에서 미약하게 느껴진 작위성인데,

잘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을 조금은 우격다짐으로 맞춰놓은 느낌이랄까요?

나름 납득이 가면서도 범인의 의도나 범행 계획이 100% 공감되거나 이해되진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사건보다 심리에 좀더 포커스가 맞춰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작품들이 훨씬 더 기억 속에 오래 남고 여운도 짙은 것 같습니다.

체비 스티븐스의 네버 노잉을 소장하고 있으면서도

스틸 미싱을 먼저 봐야 된다는 강박에 계속 뒤로 미뤄두고만 있었는데

작가의 필력까지 제대로 확인했으니 조만간 네버 노잉을 책장에서 꺼내야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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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살인게임 - 왕수비차잡기 밀실살인게임 1
우타노 쇼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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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죽이고 싶은 인간이 있어서 죽인 게 아니라 써보고 싶은 트릭이 있어서 죽였지.”

 

작품 속 등장인물 중 한 명이 내뱉은 이 대사는 이 작품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만나 화상채팅을 통해 탐정놀이를 벌이는 다섯 명은

각각 두광인, 044APD, aXe, 잔갸 군, 반도젠 교수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으며

각각 특이한 가면을 쓰거나 흐릿한 화면 효과로 자신의 얼굴을 감춘 채 채팅에 참가합니다.

이들의 탐정놀이는 한 명이 살인사건에 관한 문제를 내고

나머지 네 명이 탐정이 되어 진상을 밝히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문제는 그 살인사건이 가상이 아니라 실제로 벌어진,

더구나 문제를 낸 사람이 직접 저지른 살인이라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문제를 내기 위해 살인을 하고,

거기에 개입된 트릭 밀실, 알리바이, 미싱링크 등 을 탐정들이 맞히는 게임입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를 구상한 작가의 상상력에 놀랐고,

가벼운 톤으로 묘사된 픽션임에도 불구하고 섬뜩한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써보고 싶은 트릭을 몇 가지씩이나 갖고 있는 다섯 명의 참가자는

때론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서, 때론 말 그대로 유희를 즐기기 위해서

장난치듯 무수한 살인사건을 저지릅니다.

이런 설정 자체에 거부감이 있다는 뜻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런 식의 살인이 유행처럼 번진다면?”이라는 생각만으로도 끔직한 느낌이 들더군요.

 

밀실살인게임의 트릭은 이중으로 설정돼있습니다.

우선 탐정놀이에 가담한 다섯 명이 낸 문제 속에 숨어있는 다양한 트릭이 하나이고,

후반부에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메인 트릭이 또 하나입니다.

탐정놀이에 등장하는 트릭은 밀실, 알리바이, 미싱링크 등 종류는 물론 난이도도 다양합니다.

때론 작위적인 느낌이 들거나 단순해 보이는 트릭도 있지만,

정말 프로페셔널 사이코패스만이 실행 가능한 고난이도의 트릭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우타노 쇼고가 설정한 메인 트릭이 가장 매력적입니다.

어느 정도 반전을 예상한 독자도 적잖을 것 같지만

과연 이 이야기의 반전과 엔딩을 어떻게 장식할 것인가?”라는 의문에 대해

우타노 쇼고는 그다운 매력적인 엔딩으로 답해줬습니다.

물론 To be Continued라는 메시지가 조금 아쉽긴 했지만요.

 

우타노 쇼고의 작품에 관한 한 개인적으로는 조금은 묵직한 서사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렇듯 똘끼 충만한 천재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편이나 연작집도 좋아합니다.

호불호가 좀 갈릴 수도 있겠지만 그리 부담스러운 분량이 아닌 만큼

우타노 쇼고의 다양한 트릭을 한 번에 맛보고 싶은 독자라면 괜찮은 선택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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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소도중
미야기 아야코 지음, 민경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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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6년 제5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R-18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제가 장르물 일본소설 가운데 베스트로 꼽는 작품 중 하나인 구보 미스미의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에 실린 단편 '미쿠마리' 역시 2009년에 이 상을 받았는데, 심사위원이나 선정기준이 아무래도 저와는 궁합이 잘 맞는 문학상 같아 앞으로도 이 상의 수상작에는 관심을 가지게 될 것 같습니다.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연작 형태로 구성돼있는데 표제작인 화소도중(花宵道中)’'아름답게 차려입은 유녀가 꽃이 핀 밤거리를 거니는 모습'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나머지 다섯 편 역시 모두 이 작품집의 애잔한 정서에 어울리는 소제목들을 갖고 있습니다.

 

에도의 대규모 유곽 요시와라에 자리 잡은 작은 기루 야마다야는 본문에 묘사된 것처럼 좋게 말하면 아담하고 정이 가는, 나쁘게 말하면 가난하고 어정쩡한 느낌의 유곽입니다. 간혹 납치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가난을 견디지 못한 가족들의 손에 의해 팔려온 소녀들이 계약이 끝나는 20대 후반 즈음까지 유녀로서 몸과 웃음을 팔며 살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그녀들의 일은 낮과 밤도 없이, 여름과 겨울의 구분도 쉴 새 없이 이어집니다. 누군가가 부르면 늘 달려가야 하고, 누군가가 지목하면 그가 야차라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녀들은 자유의 신분이 될 때까지 유곽 요시와라의 대문 밖으로 나갈 수도 없습니다. 예외라고는, 죽어서 관에 실려 나가거나 목숨을 걸고 몰래 도망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나가라고 해도 그녀들은 주저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과 요시와라 유곽 외에 그녀들이 아는 곳은 아무데도 없기 때문입니다. 도망치고 싶은 욕망과 바깥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그녀들을 주저앉히고 맙니다.

 

이렇듯 막장 같은 삶을 감내해야 하는 유녀들이 모여든 곳이지만 그곳에도 사랑과 증오, 미운 정과 고운 정, 시기와 질투, 욕망과 절망 등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존재하는 다양한 관계들과 복잡한 감정들이 산재해있습니다. 누군가를 절절히 사모한 나머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고, 화려한 기모노와 머리 장식을 만끽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즐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캐릭터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캐릭터도 종종 등장합니다. 진상 같은 손님 때문에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는가 하면, 오래 전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손님으로 맞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여러 에피소드가 전개되지만 이야기의 알맹이는 사랑입니다. 유곽에서는 유녀들이 정부(情夫)를 두는 일을 엄격히 금지시키고 있지만 누구나 한 명쯤은 마음속에 깊이 간직해두고 사모하는 남자를 갖고 있습니다. 금지된 사랑이기에 오히려 더 절절하고 애틋하지만 그 끝은 대부분 비극입니다. 유곽에 불을 질러 사람들의 이목을 끈 뒤 운 좋게 동반 도주에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뤄지지 못한 사랑에 자살을 하거나, 시름시름 앓다가 병사하거나, 지키지 못할 공수표만 믿고 있다가 배신당한 끝에 마음의 병을 얻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인지 마음을 주지 않는 여자가 요시와라에서 출세한다.”는 말이 금언처럼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운명처럼 다가오고, 그녀들은 기꺼이 열병과 후유증을 감내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자신에게 돈을 지불한 남자와 첫날밤을 치러야만 하는 동생 유녀에게 언니 유녀는 이런 말을 건네줍니다.

 

“(첫날밤은) 눈을 감고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으로 생각하며 다른 남자에게 안기는 거야.”

 

그렇게라도 자신의 사랑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키우려는 것이 유녀들의 작은 소망입니다. 언니나 동생이 죽어나가도 몸을 팔고 웃음을 팔아야 하는 상황에서 그 소망만이 그녀들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고, 무모한 희망이나마 잃지 않게 만들어주는 불씨이기 때문입니다.

 

화소도중은 아주 노골적인 성애소설이 맞습니다. 하지만 민망할 만큼 적나라하게 묘사된 은 오히려 그녀들을 애잔하게 바라보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남자와 몸을 섞든, 구역질나는 남자에게 농락당하든, 참혹하게 능욕당하든 그녀들의 몸과 행위를 묘사한 상스러운문장들을 읽고 있으면 흥분 따위와는 거리가 먼, 애틋해서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또는 그녀들의 무력함에 분노가 치밀 뿐입니다. 19금 소설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이 작품에 호기심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는 예상치 못한 감정들이 더 강하게 남게 될 것입니다.

 

저릿할 정도로 섬세한 심리묘사와 찰나의 화려함을 잘 포착한 문장들을 보면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게 호기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절묘한 구성이나 캐릭터를 만들고 포장하는 힘도 매력적입니다. ‘화소도중이 호응을 얻어 미야기 아야코의 다른 작품들도 빠른 시간 안에 한국에 소개되기를 기대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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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위원회 모중석 스릴러 클럽 20
그렉 허위츠 지음, 김진석 옮김 / 비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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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특수부대 출신의 LA 연방법원 부집행관 티모시 랙클리(이하 팀)7살 된 딸 지니를 잃은 후

윌리엄 라이너 교수가 이끄는 소위 위원회에 초대받습니다.

전직 폭약전문가, 전직 FBI 과학수사원, 전직 경찰 등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재판기록과 수사 자료를 토대로 회의를 거쳐 유죄라고 판단된 범죄자를 처단합니다.

팀은 이런 방식의 사적인 복수에 대해 회의와 갈등을 겪지만 딸 지니를 살해하고도

어처구니없는 법과 제도의 허점을 통해 유유히 빠져나간 범인을 응징하기 위해

위원회의 사형집행인 역할을 수락합니다.

실제로 처단은 집행되고 LA 시민들의 열광과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팀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위원회의 태도,

일부 멤버들의 광기에 서린 복수심 등으로 인해 점점 위원회의 방식에 회의를 갖게 됩니다.

결국 위원회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팀은 오히려 경찰에 쫓기는 처지에 이르고 맙니다.

 

● ● ●

 

법망을 빠져나간 범죄자에 대한 개인의 복수는 장르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소재입니다.

철저히 개인의 힘으로 복수하는 경우도 있고, 교차살인이라는 방식도 종종 봤지만

가족을 잃은 비슷한 상처를 지닌 출중한 능력자들이 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직적으로 범죄자를 처단한다는 형식은 제 기억으론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배심원이 되어 범죄자의 재판 기록과 수사 자료를 토대로 판정을 내립니다.

그러면서 보통 자경단은 법 테두리 밖에 있지만 자신들은 법과 함께 한다.”,

법의 갈라진 틈을 메우는 모르타르 역할을 자청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합니다.

참혹하게 딸을 잃은 팀의 입장에서 이들의 룰은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인의 복수를 다룬 이야기들이 대체로 그렇듯

주인공 팀은 전지전능함을 표방하며 사형을 집행하는 위원회의 방식에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위원회가 유죄를 선언한 범죄자의 눈빛 속에서 진정한 참회를 엿보거나

살인을 위한 살인을 저지르는 광기에 사로잡힌 멤버들을 지켜보면서

팀은 정의란 무엇인가?’ 또는 정당한 살인이란 존재하는가?’라는 정답 없는 화두와 함께

깊은 갈등에 빠지고 맙니다.

 

어쩌면 제대로 된 개인의 복수를 맛보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겐 아쉬운 대목일 수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이나 시즈쿠이 슈스케의 검찰 측 죄인

개인의 복수를 다룬 작품들은 심정은 이해하나 당신의 행동은 잘못이라는 판정을 내리거나

잘 해야 오픈된 결말로 이야기를 끝맺곤 합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정말 속이 시원한 개인의 복수 이야기를 선호하는 취향 때문인지

사회적 규범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엔딩을 보면 아쉬움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구로타케 요의 그리고 숙청의 문을은 최고의 카타르시스를 준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위원회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수많은 캐릭터들의 외양과 감정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가의 뛰어난 필력 때문입니다.

자식을 잃은 대다수의 부부들처럼 갈등과 화해, 상처주기를 반복하는

팀과 그의 아내 드레이의 모습은 절절할 정도로 공감을 느끼게 합니다.

제각각 나름의 정의를 간직한 위원회 멤버들 하나하나의 고통과 상처, 복수심에 대한 묘사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듯한 사실감 있는 설정과 문장들 덕분에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리얼리티를 만끽하게 해줍니다.

덧붙여 긴장감과 밀도를 지닌 액션 스릴러로서의 미덕까지 잘 배합한 덕분에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도중에 책을 내려놓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반전은 어느 정도 예상한대로 전개되고, 엔딩은 어정쩡한 타협으로 포장됐지만

개인의 복수라는 결코 쉽지 않은 주제를 작가는 나름의 방식으로 잘 끌어나갔습니다.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동시에 할리우드 액션물의 재미도 함께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라

두 가지 맛을 함께 맛보고 싶은 독자들에겐 강력히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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