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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미싱 ㅣ 판타스틱 픽션 화이트 White 2
체비 스티븐스 지음, 노지양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어느 날 갑자기 납치된 후 1년여 동안 악몽 같은 감금의 날들을 보낸 애니 오설리번은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현실로 돌아오지만 그녀의 정신은 여전히 망가져있습니다.
언론은 그녀의 비극을 선정적으로 포장하여 세상에 퍼뜨리는 중이었고,
할리우드 영화제작자는 집요하게 그녀의 스토리를 사겠다며 수시로 연락해옵니다.
한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을 통해 납치 전후의 상황,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관계를 되짚어가며
애니는 왜 자신이 납치돼야 했는지, 왜 악몽 같은 감금을 당해야 했는지를 반추해봅니다.
모든 정황을 종합해볼 때 분명 자기 주위 사람이 연루됐다는 확신을 갖게 된 애니는
아직도 자신의 사건을 집요하게 수사하는 형사 개리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합니다.
하지만 개리는 전혀 상상도 못한 수사결과를 애니에게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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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고통스런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 정신과 의사를 찾은 애니의 진술이 하나이고,
납치 전후의 상황과 1년 동안의 감금 생활에 대한 묘사가 나머지 하나입니다.
탈출에 성공한 후에는 그녀를 향한 언론과 이웃의 횡포, 주변 사람들과의 불안정한 관계,
왜 자신이 납치됐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과 추리가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애니 오설리번은 납치 피해자가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경험합니다.
폭행은 말할 것도 없고 인적 없는 깊은 산속에서 그녀의 모든 일상은 범인에게 지배당합니다.
입어야 할 옷, 화장실에 가는 시간, 먹는 음식 등등...
1년 동안 그녀를 지배한 ‘범인의 규칙’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그녀의 의식을 점령했고,
극적으로 탈출하여 현실로 돌아온 후에도 그녀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고통의 무대였던 침대는 여전히 공포 그 자체여서
애니는 좀처럼 침대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옷장 속에서 겨우 잠을 청하곤 합니다.
사실 납치와 감금이라는 소재는 미스터리 마니아인 저로서도 조금은 불편한 소재입니다.
차라리 피가 난무하는 살육극은 감당할 수 있어도
산 채로 매장당하는 듯한 공포를 안겨주는 납치와 감금은
그것이 아무리 픽션이라도 피하고 싶은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납치 직전, 납치와 감금 기간, 탈출 후의 패닉 등
애니의 심리를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디테일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작가 자신이 여성이라서 그런 묘사가 가능했을 수도 있겠지만,
캐릭터에 대한 끈질긴 연구와 정교한 설계, 캐릭터와의 동일시의 노력이 없었다면
애니의 불행은 독자의 공감을 얻지 못한 채 픽션 속 이야기에 그쳤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책 읽는 내내 가시를 삼킨 것처럼 불편함을 떨쳐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덕분에 엔딩의 반전과 충격이 그만큼 크게 다가왔겠지만요.
억지로라도 아쉽게 느껴진 점을 꼽아보자면, 우선은 분량의 문제입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왜 작가가 사소한 디테일에까지 충실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의 1/4정도는 동어반복 또는 과도한 디테일에 소모됐다는 느낌입니다.
좀더 이야기를 슬림하게 만들었다면 중간중간의 피해갈 수 없는 지루함은 없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납치 미스터리가 해결되는 과정에서 미약하게 느껴진 작위성인데,
잘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을 조금은 우격다짐으로 맞춰놓은 느낌이랄까요?
나름 납득이 가면서도 범인의 의도나 범행 계획이 100% 공감되거나 이해되진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사건보다 심리에 좀더 포커스가 맞춰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작품들이 훨씬 더 기억 속에 오래 남고 여운도 짙은 것 같습니다.
체비 스티븐스의 ‘네버 노잉’을 소장하고 있으면서도
‘스틸 미싱’을 먼저 봐야 된다는 강박에 계속 뒤로 미뤄두고만 있었는데
작가의 필력까지 제대로 확인했으니 조만간 ‘네버 노잉’을 책장에서 꺼내야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