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 죽은 자의 일기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9
정해연 지음 / 황금가지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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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인시()의 유력한 차기 시장 후보인 강호성의 집에서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교살당한 그의 어머니와 투신자살한 그의 아내 주미란이 그들입니다.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온데다 여당의 스타정치인인 강호성의 신분 때문에

경찰은 말기암이던 주미란이 남편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살해하고 자살한 것으로 결론짓고 서둘러 수사를 종결하려 합니다.

하지만 형사팀장 서동현은 곳곳에서 감지되는 위화감 때문에 단독수사를 강행합니다.

정치권과 상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주미란의 행적을 집요하게 탐문하던 서동현은

강호성의 치부와 추악한 비밀, 그에 대한 악의로 가득 찬 주미란의 일기장을 발견하지만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의 압력으로 인해 정의를 구현할 기회는 오히려 점점 멀어져만 갑니다.

 

● ● ●

 

더블로 처음 만났던 정해연 작가의 신작입니다.

독특한 구성과 캐릭터 플레이가 인상적이었던 더블에 비해

악의는 거의 돌직구 스타일의 정통 미스터리에 가깝습니다.

파헤칠수록 수상쩍은 거물 정치인의 당일 행적과 평소 사생활,

의문투성이인 사건 현장, 뭔가 진실을 알고 있는 듯한 가정부의 묘한 태도,

그리고 거대 악에 맞서 무모한 전쟁을 펼치는 중년의 형사팀장의 분투 등

이야기와 캐릭터는 전형적인 형사물 공식대로 설정돼있습니다.

 

이야기는 세 가지 시점에서 전개되는데, 수사를 진행하는 형사팀장 서동현의 시점이 메인이고

그의 수사를 방해하며 진실을 은폐하려는 강호성의 시점,

그리고 일기를 통해 남편에 대한 악의를 폭로하는 죽은주미란의 시점이 그것입니다.

말하자면 진실을 파헤치는 쪽과 그것을 묻으려는 쪽이 맞대결을 펴는 가운데,

죽은 자의 일기가 진짜 진실의 편린들을 조금씩 흘려가는 구도입니다.

범인은 초반에 공개되지만 이런 구성 덕분에 이야기는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경찰과 언론을 쥐락펴락하는 거물 정치인의 폭주와 추악함은 독자들을 열 받게 만들고

그런 거물을 상대하는 일개(?) 형사팀장의 분투는 애처로워 보일 정도라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무척이나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일방적이고 도식적인 정의의 승리만을 풀어놓진 않습니다.

때론 권력은 현실이고 정의는 이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강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사회파 미스터리의 냄새가 물씬 풍기곤 하는데

엔딩을 보면 그런 점을 감안한 작가의 의도가 확실히 드러남을 알 수 있습니다.

 

전작인 더블에서 느낀 아쉬움들 - 내공이 부족한 문장과 캐릭터 등 아마추어적인 풋풋함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악의는 안정적인 작품입니다.

하지만 안정적인 만큼 더블에서 보여줬던 신선함이나 도전적인 패기는 사라졌습니다.

이야기는 공식대로 흘러가고,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캐릭터는 공식에 맞춰 의도적으로 과대포장되기도 하고

(특히 사악한데다 무한권력을 휘두르는 강호성 캐릭터는 좀처럼 이입이 어려운 경우였습니다.)

주제의식을 강조하기 위한 무리한 해프닝과 설정들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요소들 때문에 리얼리티가 현저히 떨어지는 지점도 있습니다.

마지막에 드러난 악을 응징하기 위한 트릭은 가볍고 어설퍼 보였고

어딘가 멋부린 듯한 엔딩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은 독자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단선적인 사건에 풍성함을 얹기 위해 여러 인물과 장치들이 동원됐지만

결과적으론 그것들이 조화롭게 믹스됐다고는 보기 힘들었습니다.

 

솔직히 평하자면 기대에는 조금은 못 미친 작품이었지만,

풋풋하지만 새롭고 독특했던 더블과 안정적이지만 상투적인 악의를 거쳤으니

이젠 두 작품의 미덕만 고루 갖춘 정해연 작가의 후속작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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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관 - 밀실 살인이 너무 많다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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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고 코믹한 형사 듀엣의 좌충우돌 밀실살인사건 해결 일지를 담은 작품집입니다.

추리소설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평범한 사건까지 과대 해석하다 번번이 놓친 탓에

미궁 경감이라는 별명과 함께 시라오카라는 벽촌으로 좌천된 구로호시 히카루 경감과

툭하면 큰일 났습니다!”라며 호들갑을 떨면서도

구로호시보다 먼저 밀실사건을 해결하는 3년차 젊은 형사 다케우치 마사히로가 그들입니다.

 

존 딕슨 카의 작품에 푹 빠져 마니아의 경지에 오른 구로호시 경감은

그가 창조한 밀실트릭의 대가 기드온 펠 박사나 헨리 메리베일 경처럼

기괴한 밀실살인의 비밀을 멋지게 해결하려 애쓰지만 매번 헛다리만 짚고 맙니다.

구로호시 경감의 실수를 짚어내며 대부분의 사건을 해결하는 다케우치 역시

명민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우연과 계시(?) 덕분에 명탐정이 되는 캐릭터라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말 그대로 덤 앤 더머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처음엔 오리하라 이치의 유쾌 발랄 미스터리 단편집이라는 홍보카피가 무척 낯설었는데

대체로 무겁거나 서술트릭이 빛나는 그의 작품들만 봐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소개글을 더 보니 그의 출발점을 알 수 있는 작품집이라는 부연설명이 눈에 띠었고,

갑자기 그의 초기 성향을 맛볼 수 있겠다는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사건이라곤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시라오카에서 벌어진 7건의 밀실살인을 다루고 있는데

밀폐된 체육관, 폐허가 된 저택, 미스터리 작가의 서재, 공중의 리프트 등

사건의 무대인 밀실도, 동원된 소재도 다양하고 그 해법도 흥미진진합니다.

다만, 오리하라 이치의 초기작이 대부분이다 보니 어딘가 좀 억지스럽기도 하고

더 이상 새로움을 추구하기 어려운 밀실 설정의 한계도 곳곳에서 눈에 띠곤 합니다.

오리하라 이치의 명성 때문에 기대감을 가졌던 독자들은 100% 만족하긴 어렵겠지만,

몇몇 작품은 나름의 반전을 통해 오리하라 이치다운 매력을 발산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존 딕슨 카를 읽은 사나이들와키혼진 살인사건이 마음에 들었는데

전자가 존 딕슨 카에 대한 오마주가 은근히 깔려있는 작품이라면

후자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혼진 살인사건을 연상시키는 작품입니다.

그 외의 수록작들도 대부분 밀실트릭을 다룬 특정 작품의 패러디라는 인상이 짙은데

이 작품을 읽은 뒤 원작을 찾아 읽어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를 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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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1-04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ㅡ잘 읽고 갑니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랭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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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버지의 나이에 이른 작가가 자신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담담하게 기록한 작품입니다.

표제작인 첫 수록작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은 고향이나 다름없는 소도시 트랑을 배경으로

부모와 레몽의 10명의 형제의 행복과 불행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는 정치적, 사회적 격변을 겪던 1960년대 후반을 무대로

파리, 퀘벡, 로마, 알제리에서 요동치는 삶을 살았던 레몽의 청년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자전적인 회고록이지만 소설만큼이나 롤러코스터 같은 주인공의 삶을 지켜보고 있으면

사람은 누구나 일정 부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자신이 태어날 시대, 자신과 함께 성장할 형제, 생명의 원천이자 갈등의 상대인 부모 등

어느 하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

누군가는 혹독한 시대, 잔인한 형제들, 남보다 못한 부모를 만나기도 하겠지만,

누군가는 풍요의 시대, 다정한 형제들, 애정과 존경을 공유하는 부모를 만나기도 하겠죠.

누군가는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며 크게 모나지 않은 삶을 추구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한탄하고 자책하고 반성하고 깨닫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운명에 맞서기도 합니다.

 

레몽에게 있어 운명은 별로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맑고 순수했던 유년기의 행복은 부모의 반목으로 인해 산산조각 났고,

웃음으로 가득 찼던 트랑의 2층집은 언젠가부터 낯선 냉기가 지배하게 됩니다.

그저 두렵고 낯선 존재였던 아버지의 죽음은 뒤늦은 자책과 한탄을 불러왔고,

기숙학교에서의 고립된 삶은 레몽의 삶의 방향을 크게 흔들어놓는 계기가 됩니다.

 

청년기에 접어든 레몽은 신부가 되는 수업을 받으며 세계를 돌아다니던 중

세계관과 가치관의 변화를 겪으며 혼돈의 1960년대 후반을 살아갑니다.

적극적인 정치적 활동은 물론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자성의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했던 그 나이에 이른 레몽은

모든 기억의 원천이던 트랑의 집과 낡은 흑백사진 같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폭풍 같은 성장과 구도의 길을 기록하게 됩니다.

 

번역자의 해설대로 이 작품은 소설을 구성하는 이야기보다

삶의 진실에 대한 의문과 진정한 삶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혀

분류처럼 세차게 달려온 그 젊은이의 내면적 에너지에 초점이 맞춰진 작품입니다.

딱히 극적이지도, 충격적이거나 반전이 있는 이야기도 아니지만

하나의 인격이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선택과 결정을 통해

어떻게 극적으로 성장하는지를 지켜보는 일은 나름 흥미진진한 맛이 있습니다.

문화적 차이와 조금은 멀리 떨어진 시대적 배경 때문에

한국의 (특히 젊은) 독자들에게는 생소하거나 공감대가 떨어질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시대와 지역을 떠나 누구나 겪게 되는 젊은 날의 통과의례에 관한 자전적 회고록이란 점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훌륭한 텍스트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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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숲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권수연 옮김 / 포레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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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선’, ‘미세레레’, ‘늑대의 제국에 이어 네 번째로 읽은 그랑제의 작품입니다.

꽤 오래 전, ‘검은 선에 열광한 이후 뒤로 갈수록 만족도가 떨어진 바람에

그랑제의 최신간(비록 현지 출간은 2009년이지만)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막심 샤탕의 악의 3부작이나 테스 게리첸의 의사 3부작을 연상시키는

극도로 잔혹한 파리 연쇄살인 사건이 오프닝을 화려하게 장식한 것을 보곤

검은 선이상의 긴장감과 속도감이 느껴졌고, 남은 분량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어올랐습니다.

 

● ● ●

 

원시의 식인 풍습을 모방한 엽기적인 연쇄 살인사건이 파리 한복판에서 벌어집니다.

심각한 우울증과 실연의 후유증으로 약에 의존하고 있는 낭테르 지법 수사판사 잔 코로바는

각각의 살인이 자폐, 생식(유전), 원시라는 주제에 따라 이뤄진 점을 파악하곤

피살자들의 주변을 샅샅이 탐문하며 그들 간의 연결고리를 찾아내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던 중 한 정신과 의사의 도청 파일 속에서 범인으로 추정되는 자의 정체를 파악합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면서 잔 코로바는 수사팀에서 제외 당하게 됩니다.

잔 코로바는 명백히 자신을 노린 용의자의 치명적인 위협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수사를 위해 사건의 진원지로 드러난 중남미를 향해 무모한 여정을 추진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신분석과 신화, 중남미의 잔혹한 현대사, 원시의 비밀이 얽히고설킨

끔찍한 진실의 실체를 발견하는 것은 물론 그 모태인 악의 숲과 마주하게 됩니다.

 

● ● ●

 

그랑제의 방대한 지적 자산과 풍부한 서사, 거침없는 필력이 여지없이 반영된 작품입니다.

더구나 이번에는 정신분석(자폐와 분열), 생식과 유전, 원시의 신화와 풍습에다가

독재정권이 고문과 학살을 일삼던 중남미의 현대사까지 버무려낸 덕분에

소설이라기보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믹스된 종합선물세트를 읽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악의 숲은 기대만큼이나 큰 실망을 안겨주고 말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소설의 중심에 있어야 할 이야기가 제자리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리수가 확연한 우연의 남발, 개연성보다는 작위가 점령한 설정들,

(어느 분의 서평처럼) 달나라로 간 스토리와 다큐멘터리 같은 강의가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이야기는 연쇄살인에서 시작되지만 엔딩은 작가의 철학 강변으로 끝난 느낌이랄까요?

 

사실 이런 문제는 늑대의 제국에서도 비슷하게 느꼈던 점인데,

잃어버린 기억, 국가의 폭력, 끔찍한 연쇄살인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인간의 자유정신터키 역사의 비극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소설 대신 작가의 인문학 강의가 스토리의 주류를 차지한 끝에

결국엔 주인공은 사라지고 엉뚱한 인물들이 엔딩을 장식하는 지경에 이르고 맙니다.

악의 숲은 다행히(?) 그런 상황까지 가진 않았지만

여러 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전개와 설정들, 과도한 우연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엄청난 분량의 종합선물세트를 통해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지식을 주입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인의 캐릭터나 범행 동기는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범인의 과거사는 부족한 개연성을 보충하기 위해 수시로 동어반복의 설명이 덧칠 됐고,

범행 동기 역시 과연 무엇을 위해 그토록 고생스런 살인을 저질렀는지 모호할 뿐이었습니다.

이런 모호함은 자폐-생식(유전)-원시라는, 아직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은 코드들을

살인자의 주요 동기로 설정한 덕분에 더욱 그 심오함을 더해갑니다.

 

초반에 장황하게 묘사된 잔 코로바의 우울증과 실연 후유증은

결국 정신과 의사를 도청하게 만든 뒤 범인과 우연히만나게 하기 위한 억지 설정입니다.

당초 자신의 사건도 아닌 끔찍한 연쇄살인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만들기 위해

어린 시절 참혹하게 살해된 언니 스토리를 트라우마처럼 부여하는가 하면,

무력과는 거리가 먼 30대 여자 수사판사가 홀로 중남미로 날아가는 무모함을 설명하기 위해

작가는 그녀가 과거 1년 동안 중남미를 단독 여행했다는 이력을 설정해줍니다.

군인이 지키는 혈액원, 살인사건이 벌어진 이국의 건물을 기막힌 요행으로 출입하는 장면이나

마치 등장 순서를 기다렸다는 듯 때맞춰 나타나주는 조력자들에게 결정적 도움을 받는 장면은

가끔은 조악한 수준까지 느껴져 웃음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야기는 심플한 권선징악 액션과 함께 어, 하는 순간에 속전속결로 마무리됩니다.

자폐와 생식과 원시와 중남미 현대사 등 앞서 500여 페이지에 걸쳐 차곡차곡 쌓여온 토대가

그 존재감이 의심될 정도로 허망하게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모든 것은 이해 불가능한 신비의 영역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니 알아서 이해하라.” 식의

작가의 해명이 환청처럼 들리면서 늑대의 제국의 엔딩에서 느낀 당혹스러움이 밀려옵니다.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보니 대체로 호평이 많았는데,

어쩌면 그랑제에 대한 롤러코스터 같은 열광과 불신을 겪은 저만의 선입관이

악의 숲을 이토록 혹평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방면에 걸친 광대한 지식과 신비주의를 발산하는 픽션의 조합이라는 그랑제만의 주특기가

이제 더는 저에겐 먹히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젠 줄거리조차 잘 기억 안 나지만 검은 선에 열광했던 이유가 스스로도 궁금해집니다.

만일 순수한 스릴러의 매력에 홀딱 반했던 것이라면

그랑제의 다른 작품들을 기대할 여지가 남아있다는 뜻이겠지만,

혹시라도 그 무렵 뭐에 씌운 듯 그랑제만의 주특기에 빠져들었던 것이라면

이제 더는 그랑제의 작품을 읽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직 책장에 황새돌의 집회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꽂혀있는데,

먼저 검은 선을 다시 한 번 읽어볼지,

아니면 못 읽은 두 작품부터 읽을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후자라면, 어쩌면 그랑제의 초기작들이라 조금은 어깨에 힘이 덜 들어간,

그러니까 순수한 스릴러의 매력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일 것입니다.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작품들 (현지 출간년도)

황새 (1994)

크림슨 리버 (1998)

돌의 집회 (2000)

늑대의 제국 (2003)

검은 선 (2004)

미세레레 (2008)

악의 숲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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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조르는 로맨티스트 - 인간실격.제로자키 히토시키, Faust Novel 헛소리꾼 시리즈 2
니시오 이신 지음, 현정수 옮김 / 학산문화사(라이트노벨)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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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첫 편인 잘린 머리 사이클이 기이한 캐릭터들로 가득 찬 독특한 작품이긴 했어도

절해고도에서 벌어진 밀실살인사건의 진상 밝히기를 다룬 제대로 된미스터리였다면

목 조르는 로맨티스트는 화자인 나, 헛소리꾼 이짱의 정신세계 해부에 중점을 둔 반면

연쇄교살사건이라는 미스터리 코드는 상대적으로 서브 스토리처럼 다뤄진 작품입니다.

 

이짱의 주변에서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제로자키라는 길거리 살인마에 의한 무차별 토막 살인사건이 하나이고,

같은 과 여학생 미코코를 통해 알게 된 동급생들이 연이어 교살되는 사건이 또 하나입니다.

사실 이짱이 진실 찾기에 나서는 메인 스토리는 후자이고,

제로자키라는 잔혹한 살인마는 이짱의 정신세계 해부를 위한 소품으로 등장할 뿐입니다.

 

처음 등장한 잘린 머리 사이클에서의 이짱은 제법 평범한 캐릭터였던 걸로 기억하지만,

이 작품 속의 이짱은 그야말로 소시오패스의 전형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실천합니다.

소시오패스라고 해서 무차별로 사람을 죽이는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지만,

이짱은 타인의 감정이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도 이입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애정은 말할 것도 없고 혐오는 할지언정 증오는 하지 않는,

즉 타인과의 그 어떤 커뮤니케이션이나 감정적 교류도 거부하는 캐릭터로 묘사됩니다.

또 여기저기서 모순된 사고와 행동을 하면서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자기변호를 하거나, 심할 정도로 자학에 빠지기도 합니다.

 

살아있는 것이 고통이니 지금 당장 죽어도 괜찮다며 염세주의의 극단을 달리기도 하고,

매사에 시니컬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때론 자기도 모르게 사건에 깊이 개입하기도 합니다.

외진 곳에서 만난 길거리 살인마와는 격투 중에 근거 없는 동질감을 느끼는가 하면,

심지어 거울 속의 자신 같다는 공명까지 주고받으며 긴밀한 사이가 되기도 합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조울증 캐릭터라고 할까요?

 

미스터리에 비해 턱없이 많은 분량이 할애된 이짱에 대한 이런 종잡을 수 없는 묘사들 때문에

독자들은 무수한 현학적 표현과 쓴 사람만 알 수 있는 모호한 표현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 모든 것들은 결국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나면 그동안 묘사된 이짱의 정신세계가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굳이 그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길거리 살인마를 소품으로까지 등장시키면서까지

이짱의 소시오패스적인 기질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회의도 듭니다.

 

오히려 연이어 교살된 이짱의 동급생들의 미스터리에 충실했더라면

훨씬 더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잘린 머리 사이클은 그런 부분에서 제대로 된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평들을 살펴보면 잘린 머리 사이클에 비해 상대적으로 혹평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는데

대부분이 비슷한 이유를 근거로 한 내용들입니다.

이 작품이 출간된 2007년에 제다이 님이 네이버 카페 일본 미스터리 즐기기에 올린 서평은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세상천지의 누구도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어 고독하기만 한 이짱의 심리와 헛소리는

비슷한 생각을 품고 사는 십대에겐 공감 가는 부분이 많을 거다.

그러나 질풍노도의 시기는 지난 본인 같은 독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씨나락 까먹는 소리다.

나는 철저하게 미스터리의 관점에서만 이 작품을 보았고, 사용된 트릭에 충분히 만족했다.

사실은 만화 같은 인물들이나 헛소리를 아예 빼고,

250페이지 내외의 콤팩트한 추리소설로 만들어졌으면 더욱 열광하겠지만...

(http://cafe.naver.com/mysteryjapan/3567)

 

물론 제다이 님은 여전히 헛소리꾼 시리즈에 대한 애정을 표하면서 글을 마쳤지만,

저는 다음 작품을 계속 읽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중입니다.

동급생 연쇄교살사건은 동기는 좀 억지스러웠지만 트릭은 나름 신선했고,

이짱 주변의 기이한 캐릭터들은 비현실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매력들을 맛보기 위해 기나긴 헛소리를 견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중고로 구매한 헛소리꾼 시리즈를 다시 중고시장에 내놓을지, 어떻게든 계속 읽을지는

다음 작품인 목매다는 하이스쿨100페이지까지 읽고 결정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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