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로키언
그레이엄 무어 지음, 이재경 옮김 / 비채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2010년 뉴욕. 해럴드 화이트는 젊은 나이에 셜로키언 모임 중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베이커 스트리트 이레귤러스에 가입합니다.

하지만 가입의 기쁨도 잠시, 해럴드는 의문의 살인사건에 휘말립니다.

피살자는 홈스의 최고 권위자로 다음 날 코난 도일의 사라진 일기를 발표할 예정이었습니다.

사라진 190010월부터 3개월간의 일기는 셜로키언 모두에게 성배와도 같은 존재인데,

이 시기를 전후하여 코난 도일과 셜록 홈스에게 극적인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럴드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살인사건을 해결하고 사라진 일기를 찾고자 분투합니다.

 

7년 전인 1893, 허구의 캐릭터임에도 마치 실존 인물처럼 사랑받고 추앙받는 것은 물론

창조주인 자신을 능가하는 존재감에 질려 소설 속에서 셜록 홈스를 죽게 만든코난 도일은

이후 새로운 주인공을 만들고,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작품에 매진해왔습니다.

190010월 어느 날, 익명의 발신자가 보낸 소포 폭탄을 받은 코난 도일은

런던 경찰을 찾아가지만 그들의 무능함에 질려 직접 사건 해결에 나섭니다.

하지만 사건은 점차 커져 연쇄살인사건으로 확대되고 코난 도일은 용의자로 몰리기도 합니다.

그로부터 3개월 간 코난 도일은 숱한 위기를 겪으며 사건의 진상을 파헤칩니다.

100년 후 셜로키언들의 성배가 된 사라진 일기에는 이 3개월 동안의 일이 담겨 있습니다.

 

● ● ●

 

뭐랄까.. “, 이 작가는 정말 뼛속까지 셜로키언이구나..”라는 느낌이랄까요?

셜록 홈스는 물론 그들을 창조해낸 아서 코난 도일과 그 주변 인물들에 관한 방대한 정보를

엄청난 상상력과 필력을 통해 거대한 팩션으로 빚어낸 작가의 광기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많이는 아니지만) 그동안 읽은 셜록 홈스 또는 셜로키언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대체로 직설적인 방법, 즉 셜록 홈스의 냄새가 너무 강하거나, 거의 그대로 인용하거나,

심지어 분위기만 모사한 1차원적인 서사를 택해왔다면,

셜로키언은 셜록 홈스와 코난 도일에 관한 모든 것을 펄펄 끓는 솥에서 제대로 우려낸 뒤

그것들을 재료 삼아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낸, 말하자면, 차원이 다른 작품입니다.

 

자신이 창조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존재감을 지워버릴 정도로 유명해진 것은 물론

더 이상 통제 불가능한 괴물이 돼버린 셜록 홈스를 증오한 나머지

소설 속에서 그의 최후를 그린 뒤 희희낙락하는 코난 도일의 모습은 신선하고 충격적입니다.

홈스의 죽음에 경악한 런던 시민과 언론의 격한 반발을 겪으며 혼쭐이 난 코난 도일이

우연한 계기로 연쇄살인사건의 탐정 노릇을 하게 된 설정도 재미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창조한 셜록 홈스를 흉내 내며 사건의 진상을 찾는 에피소드들은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재미와 함께 긴장감까지 담뿍 담아내고 있습니다.

특히 셜록 홈스의 지적이고 논리적이지만 냉소적이면서 이기적이고 여성적(?)인 성격이

실은 창조주인 코난 도일의 유전자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여러 번 느낄 수 있습니다.

 

2010, 뉴욕과 런던을 무대로 셜록 홈스에 빙의된 채 살인사건을 쫓는 해럴드 화이트는

셜로키언의 전형을 보여주는 캐릭터입니다.

이 상황에서 셜록 홈스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끊임없이 자문하며

현대의 기술을 이용한 과학수사보다는 아날로그 식 탐정 역할을 자처합니다.

성격은 정반대지만 사건에 임하는 자세나 논리적인 추리 능력은 셜록 홈스 그 자체입니다.

 

코난 도일과 해럴드 화이트 못잖게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두 명의 왓슨’, 즉 브램 스토커와 세라라는 캐릭터입니다.

소설 드라큘라의 작가이자 코난 도일의 절친인 브램 스토커는

폭주하는 코난 도일을 적절히 통제하는가 하면 사건 해결에 결정적 공을 세우기도 합니다.

그에 반해 어딘가 의뭉스러운 해럴드의 왓슨세라는

위기에 빠진 해럴드를 여러 번 구해주지만 정작 속내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여인입니다.

100년의 시차를 둔 채 활약하는 두 쌍의 셜록 홈스-왓슨

그 캐릭터만으로도 독자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인물들임에 분명합니다.

 

한 챕터씩 번갈아가며 두 명의 셜록 홈스가 펼치는 추리의 향연은

작가의 정교한 설계도 위에서 기가 막히게 맞물리며 전개됩니다.

해럴드의 챕터가 살인사건의 계기가 된 사라진 코난 도일의 일기를 찾는 이야기라면,

코난 도일의 챕터는 바로 그 일기의 내용인 셈인데,

한 번의 엇박자도 없이 나란히 달려가는 에피소드들을 읽다 보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너무 궁금해져 도저히 중간에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가능하다면 주말에 날을 잡아 한 번에 완독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건이나 캐릭터 못잖게 작가가 공들여 묘사한 것은 1900년 런던의 모습과 정서입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급격한 변동을 겪고 있는 어수선한 런던의 풍광이 있는가 하면,

희미한 가스등에 의존한 채 고유의 낭만을 발산하는 근대의 모습이 애잔하게 그려집니다.

새로운 세기가 열리고, 낯선 문명이 전광석화처럼 일상을 잠식하는 와중에도

런던은 시간이 가도 죽지 않는, 한갓 모더니티가 죽일 수 없는, 그 세기만의 힘을 지닌 채

두 시대의 뒤섞임을 당당하면서도 차분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셜로키언은 여타의 작품들과 달리

독자로 하여금 셜록 홈스와 그의 시대를 그립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읽다 보면 문득문득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픽션인지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워낙 극적이면서도 리얼한 상황이 자주 등장하는데

사실과 픽션의 경계가 무척 모호하다보니 수시로 그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굳이 검색하거나 알려고 들 필요 없이 그냥 즐기면서 읽으면 됩니다.

그래야 이 작품의 묘미를 더욱 진하게 만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궁금한 독자는 책 말미의 작가의 말에서 사실과 픽션의 경계를 설명해주고 있으니

소설의 마지막 장까지 다 읽은 후에 천천히 확인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셜록 홈스라면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던 오만을 단칼에 날려버리는 책이라는 찬사는

약간의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셜로키언을 소재로 한 작품에 다소 실망했던 독자라도

그레이엄 무어의 셜로키언이라면 그동안의 실망과 갈증을 모두 보상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또 다른 셜로키언을 기대하는 것은 저만의 바람은 아닐 것입니다.

출판사의 책 소개 중 이 작품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한 대목을 인용하며 글을 마칠까 합니다.

 

셜록 홈스의 창조자계승자의 구도를 이루는 듯 나란히 늘어선 두 이야기는

100년의 간극을 지닌 주인공들이 각기 홈스의 의미를 되새기며 막을 내린다.

창조자는 한때 홈스를 증오했지만 결국 자신의 일부이기도 한 그를 인정하게 되고,

계승자는 자기 삶에서 홈스가 지닌 가치와 의의에 대해 깨우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스트 케어
하마나카 아키 지음, 권일영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43명의 노인을 살해한 <>4년의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희대의 연쇄살인마임에도 불구하고 법정 안팎의 분위기는 사뭇 특이합니다.

<>에게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 중 일부는, 아니, 대다수는 <>를 증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 살인을 구원으로 받아들이는 유가족도 있습니다.

 

이야기는 4년 전으로 돌아가, <>가 오랜 기간에 걸쳐 저지른 연쇄살인,

일명 로스트 케어 사건의 전말을 여러 인물의 시각을 통해 세세히 묘사합니다.

<>는 과연 무기력한 노인들을 상대로 살인을 즐긴 사이코패스였는가?

<>가 수십 명의 노인을 살해한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를 기소한 검사도, <>에게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도 <>를 증오하지 않는가?

 

● ● ●

 

수십억의 돈으로 고급 실버타운에서 극진한 서비스를 받는 노인이 있는가 하면,

자식의 전 재산을 탕진시키고도 병과 노화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노인이 있습니다.

엄청난 돈을 들여 부모를 안전지대에 모셔놓곤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는 자식이 있는가 하면,

병들고 치매에 걸린 부모를 돌보는 하루하루가 지옥 그 자체인 자식이 있습니다.

국가는 오래 전부터 이런 상황을 예측했음에도 불구하고

별 쓸모없는 시스템을 만들기만 했을 뿐 참담한 현실은 개인의 문제로 떠넘겨왔습니다.

병든 부모를 모시는 일이 더 이상 미풍양속이 아닌 고통스런 참극이 된 현실에서

<>는 죽음을 통해 부모와 자식 양쪽을 모두 구원하는 길에 나섭니다.

과연 누가 <>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번역자인 권일영 님은 이 소설을 옮기며 전체적으로 느낀 것은 절망입니다.”라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아마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생로병사 현상이 이 참극의 배경이라는 점,

, 누구나 가해자도 될 수 있고, ‘피해자도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인 것 같습니다.

, 지금은 병든 부모 때문에 고통 받는 자식의 입장이지만,

언젠가는 스스로가 자식에게 고통을 줄 병든 부모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공포에 가까운 절망감 그 자체란 뜻입니다.

 

과거와 달리 현대는 장수(長壽)가 더 이상 축하할 일도, 축하받을 일도 아닌 세상입니다.

초고령사회의 부작용은 장수 선진국 일본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낯익은 현상입니다.

로스트 케어는 그런 부작용 가운데 실제로 현실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높은 비극을 그립니다.

 

로스트 케어는 노인 연쇄살인을 다룬 미스터리이면서

동시에 정면으로 초고령사회의 문제를 제기하는 다큐멘터리의 미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앞서 발간된 침묵의 절규를 통해 초호황기와 버블시대, 동일본 대지진 등을 거치며

불행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삶을 살았던 한 여자의 일생을 비판적으로 그렸던 작가답게

하마나카 아키는 로스트 케어를 통해 일본 사회의 또 다른 그늘진 단면을 진단합니다.

 

이야기의 큰 얼개를 초반부터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나

약간은 목적극의 냄새가 풍기는 점, 또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한 인공적인 캐릭터의 설정은

다소 아쉬운 대목이긴 합니다.

때문에 침묵의 절규에 비해 미스터리의 밀도나 반전의 충격은 느슨한 것은 사실이지만,

피부에 와 닿는 리얼리티만큼은 압도적인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지금 당장 <>가 현실에 나타난다고 해도 전혀 놀랄 것 같지 않을 정도로

하마나카 아키가 그려낸 지옥은 생생하고 사실적이기 때문입니다.

 

사족으로..

비슷한 소재지만 좀더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픽션을 읽고 싶은 독자라면

가난한 나라로 전락한 2030년대의 일본을 배경으로 초고령사회의 문제를 파격적으로 그린

소네 케이스케의 결국에...’ (단편집 열대야에 수록)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바 1 - 제152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4
니시 카나코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사라바는 아쿠스 아유무라는 한 남자의 30여년에 걸친 성장기이자

동시에 한 가족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해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얽매인 탓에 깊은 사랑과 더 깊은 증오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던

네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소심, 진지, 정직, 포용의 분위기를 풍기지만 어딘가 비밀을 간직한 듯한 아버지,

이기심과 허영, 강고한 의지로 똘똘 뭉친 대찬 성격의 어머니,

모두에게 주목받고 싶은 욕망이 너무 강했던 나머지

유년기부터 온갖 엽기적인 행동과 가출, 등교 거부 등으로 온 가족을 힘들게 만들었던 누나,

그리고 좋게 말해서 중용, 실제로는 눈치와 방관이라는 처세술을 통해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자신만의 생존법을 터득하며 살아온 나, 아쿠쓰 아유무.

 

네 사람이 이룬 아쿠쓰 가()30여년의 스토리는 사실 막장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쉼 없이 부딪히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자신에게도 상처를 줍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 생활은 느닷없는 균열로 무너지기 시작했다가 결국 파국을 맞았고,

엽기적인 누나와 자존감 강한 어머니 간의 극단적인 충돌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어머니는 이혼한 아버지가 보내준 돈으로 무위도식하면서도 상대를 바꿔가며 연애에 빠졌고,

시한폭탄 같던 누나는 어느 날 갑자기 종교에 귀의하면서 더욱 기괴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아유무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적당히 방관자 역할을 하는 것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편임을 유년기부터 깨닫습니다.

필요에 따라 귀여움과 애교를 떨면 아버지나 어머니는 자신의 우군이 돼준다는 것을,

상황에 따라 갈등의 한복판에서 슬그머니 도망치면 누구도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갈등에 휘말려도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면 자신에겐 피해가 없다는 것을

아유무는 본능처럼 터득하고 자신의 삶의 방편으로 삼습니다.

말하자면 남들이 좋아하는, 남들이 싫어하지 않는 로 살아가는데 익숙해진 나머지

자신의 의지대로 나의 삶을 설계할 생각 같은 건 해보지도 않은 채 성인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성인이 된 아유무는 한때 인생의 절정기를 보내기도 했지만,

유년기부터 취해온 그의 삶의 방편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그에게 돌아옵니다.

시간은 괴물처럼 흘러 그를 30대라는 연배에 올려놓았으며,

타고난 외모는 망가지고, 자신만의 의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삶은 좌표를 상실합니다.

특히 자신의 존재감을 지탱해줬던 친구들, 언제까지 자신과 함께 할 거라 믿었던 그들이

실은 다들 자신만의 인생을 견고히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은 아유무는 패닉에 빠집니다.

덧붙여 이미 해체됐던 가족의 공습이 다시 시작되면서

아유무는 문득 지나온 자신의 30여년의 시간을 돌아보게 됩니다.

 

사라바는 가족 이야기지만 끝내 모든 것이 가족으로 귀결되는,

그러니까 가족만이 모든 미덕의 정점이라고 미화하지 않는 작품입니다.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인 가족의 이면 때론 추악하고, 때론 남들보다 못한 면모 -

아유무라는 한 남자의 성장기와 함께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물론 아유무의 가족은 고통스런 여정을 겪은 후에 나름의 방식으로 봉합되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시작을 의미할 뿐입니다.

아유무의 가족에겐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아있으며

새로운 고통과 갈등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유무와 그의 가족의 30여년을 지켜본 감회는 독자가 어떤 세대냐에 따라 퍽 다를 것입니다.

10, 20, 30, 그리고 그 이상의 세대에게 각각 다른 의미로 읽힐 작품이란 뜻입니다.

내게 다가올 시간, 내가 지나고 있는 시간, 내가 떠나보낸 시간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

공감과 저항, 회한과 외면 등의 감정이 세대마다 특별하고 색다르게 떠오를 것이고,

지금 자신과 함께 하고 있는 가족에 대한 시선도 세대마다 달리 되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1,2권에 걸쳐 900여 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에 담긴 아유무와 그의 가족의 이야기는

극적인 재미나 속도감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담담한 작품이라

자극적인 이야기에 길든 독자에겐 때론 지루함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론 작가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약간은 강요처럼 느껴지는 대목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누군가의 가족의 이야기를 엿봄으로써

지금 나의, 내 가족의 민낯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의 미덕은 충분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사실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의 시작이라는 사라바의 가장 큰 미덕이자 주제가

제겐 오히려 부담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오히려 한 남자와 그의 가족의 이야기라는 컨셉과

그것을 담담하게 풀어간 서사 그 자체가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이야기가 내내 아유무의 1인칭 시점으로만 전개됐다는 점인데,

개인적으론 한 챕터씩 번갈아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기술됐다면

훨씬 더 다양한 감정들을 맛볼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워낙 극과 극의 정서들을 갖고 있는 인물들이라 그들 역시 할 말이 무척 많았을 것이라는,

그래서 같은 상황이라도 그들의 입장에서 설명됐더라면

아유무 가족의 이면을 좀더 상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 사라바(サラバ).

안녕을 뜻하는 아라비아어 맛살라마와 일본어 사라바(さらば)’

아쿠쓰 아유무가 이집트에서 살던 유년 시절의 절친 야곱과 함께 멋대로(?) 조합한 단어.

내일도 만나자’, ‘약속이야’, ‘굿럭’, ‘갓 블레스 유’, ‘우리는 하나야등의 의미를 가졌지만

단순히 그 의미를 넘어 힘들 때나 그리울 때, 기쁨을 공유하거나 슬픔을 나눌 때,

타인 혹은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을 때 무심결에 입에 담게 되는 일종의 주문 같은 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적 사적 잭 S & M (사이카와 & 모에) 시리즈 4
모리 히로시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몇몇 대학의 시설에서 여대생들이 잇달아 살해당한다.

옷이 벗겨지고 복부에는 칼로 그은 상흔이 있는 시신으로 발견되는데,

살인 현장은 문과 창문 모두 안에서 잠겨 있는, 이른바 밀실 상태.

한편, 니시노소노 모에는 N대학 학생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록 가수 유키 미노루의 ‘Jack the Poetical Private (시적 사적 잭)’이라는 곡의 가사가

연쇄 살인사건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아챈다.

또 다른 이유로 유력 용의자로 유키 미노루를 지목한 경찰 역시 그의 뒤를 쫓기 시작하는데..

(인터넷 서점 소개글 요약, 편집)

 

● ● ●

 

N대학 건축학과 조교수 사이카와 소헤이와 그를 흠모하는 제자 니시노소노 모에가 활약하는

이른바 S&M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으로, 이번 역시 다수의 기괴한 밀실이 등장합니다.

속옷만 입은 상태에서 복부에 특이한 자상을 남긴 채 발견된 희생자들,

특별한 기교 없이 현실적으로 설계됐지만 도무지 그 의도를 알 수 없는 정교한 밀실들,

경찰 수사를 혼선으로 몰고 가는 랜덤하기 짝이 없는 현장 상황과 단서 등

모리 히로시는 앞선 시리즈들과 마찬가지로 난해함으로 가득 찬 발단부를 선보입니다.

 

수년 전, 우발적으로 찾은 고립된 섬에서 연쇄살인과 마주치고(모든 것이 F가 된다),

견학 갔던 연구소에서 밀실살인에 휘말렸던(차가운 밀실과 박사들) 사이카와와 모에 콤비는

이번에도 이런저런 우연이 겹치면서 사건의 중심부에 서게 됩니다.

말하자면 가는 곳마다 사건을 몰고 다니는(?) 셈인데,

이번에도 여지없이 대학 내에서 벌어진 연쇄 밀실살인사건에 본의 아니게 휘말리게 됩니다.

사이카와가 우연히 출강하게 된 타 대학교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는데

알고 보니 사이카와를 초빙한 교수가 그 사건 현장의 최초 목격자였습니다.

또한 그의 N대학 제자이자 세간의 인기를 얻고 있는 록스타가 유력한 용의자로 등장하고,

록스타의 형과 매니저는 모에가 속한 N대학 미스터리 연구회의 대선배들입니다.

우연치곤 좀 과한 설정이지만 어쨌든 사건 마니아이자 현경 본부장을 숙부로 둔 모에가

적극적으로 사건에 관심을 가지면서 사이카와는 도저히 발을 뺄 수 없는 상황에 빠집니다.

 

밀실의 트릭이라든가 희생자들의 복부에 새겨진 기이한 자상의 비밀은

그리 까다롭지도 않고 충분히 예상 가능한 상식 수준에서 밝혀지지만

사이카와를 끝까지 애먹인 것은 범인의 의도입니다.

정신이상자의 소행이라고 보기엔 너무 치밀하게 준비된 범행이고,

면식범의 소행이라고 보기엔 굳이 필요 없는 밀실을 지나치게 공들여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경찰과 모에가 밀실 트릭의 비밀과 현장의 단서들에 초점을 맞춰 수사하는 동안

사이카와는 의도를 가졌을 법한 사건 관련 인물들에게 더 집중합니다.

어떻게?’보다 ?’가 더 중요한 요인이 된 덕분에

시적 사적 잭은 일반적인 미스터리와는 조금은 다른 색깔을 띠게 됩니다.

 

사건에는 관심 없다는 듯 귀차니즘과 방관자적 태도로 일관하던 사이카와는

예의 천재적인 추리와 발상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고

모에 역시 자꾸만 사건에서 도망치려는 사이카와를 꽁꽁 붙잡아두는 것과 동시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명탐정 역할을 열심히 수행해냅니다.

그와 함께 사이카와를 향한 모에의 연모가 적잖은 분량에 걸쳐 노골적으로 묘사되면서

이후 시리즈부터는 사건 해결 이외에 알콩달콩한 재미까지 기대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지극히 필수적인 인간관계만 유지한 채 보통 사람들에겐 선문답처럼 들리는 대화를 나누며,

시끄러운 소음과 불필요한 오지랖을 혐오하는, 이른바 자폐적인 천재 캐릭터인 사이카와는

그 어떤 장르물의 주인공보다 특별하고 매력적인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때론 그 도가 지나친 경우가 종종 보이고,

무엇보다 천재적 발상과 추리력이 독자가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비약이 심해

심정적으로 공감하거나 이입하기엔 좀 쉽지 않은 캐릭터입니다.

물론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인 모에가 사이카와의 비현실적인 부분을 보완해주고 있지만

시마다 소지의 천재 캐릭터 미타라이 기요시를 연상시키는 사이카와의 비약적 추리는

앞으로도 내내 따라가기 어려운 대목일 것 같습니다.

 

10편의 시리즈 가운데 이제 4편까지 나왔는데,

남은 작품들에서 모리 히로시가 또 어떤 밀실과 트릭, 어떤 해법과 결말을 선보일지,

사이카와와 모에의 파트너쉽은 어떻게 롤러코스터를 탈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공계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독특함과 사이카와의 천재적 캐릭터 때문에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지만 묘한 중독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액스맨의 재즈 밀리언셀러 클럽 144
레이 셀레스틴 지음, 김은정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19195, 본격적인 여름을 앞둔 뉴올리언스에서 참혹한 도끼 연쇄살인이 벌어집니다.

희생자들이 이탈리아 마피아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탓에

사건을 맡은 형사 마이클 탤벗은 유력 마피아 가문인 마트랑가 일가를 주목합니다.

또한 수년 전 마이클의 밀고로 교도소에 수감됐다가 모범수로 석방된 전직 형사 루카는

마트랑가 가문의 협박에 가까운 요청으로 본의 아니게 진범 찾기에 나서게 됩니다.

한편, 혼혈에 여성이라는 핸디캡 때문에 탐정이 되고 싶은 꿈을 억눌렸던 아이다 데이비스는

우연히 도끼 살인마에 관한 정보를 접하곤 친구 루이스와 함께 위험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마이클-루카-아이다는 거의 접점 없이 각자의 방향대로 수사를 진행하지만

진실을 향한 그들의 노력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점차 한곳으로 수렴되기 시작합니다.

 

● ● ●

 

1918년부터 1919년에 걸쳐 뉴올리언스에서 일어났던 실제 도끼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대하급 스릴러이자 당시의 뉴올리언스를 생생하게 그려낸 역사소설이기도 한 작품입니다.

현실에서는 영국의 잭 더 리퍼처럼 뉴올리언스의 도끼 살인마 역시 미제 사건으로 남았지만,

작가는 팩트와 픽션을 절묘하게 뒤섞은 것은 물론 뛰어난 캐릭터 플레이를 통해

묵직하면서도 재미와 긴장감을 놓치지 않은 수작을 만들어냈습니다.

 

스토리나 캐릭터 등 작품 속의 모든 극적 요소들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디테일까지 생생하게 묘사된 ‘1919년의 뉴올리언스라는 배경 덕분입니다.

미국이지만 미국 같지 않은 도시, 흑백은 물론 혼혈과 이민자까지 가세한 팽팽한 인종 갈등,

마피아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자 재즈의 흥이 골목골목까지 만연한 곳,

만성화된 부패와 은밀한 폭력이 판을 치고 이제 곧 금주법 시행을 목전에 둔 불안정한 거리,

거기에 거대한 태풍과 불벼락 같은 혹서가 번갈아 도시를 휘갈기는 잔인한 자연환경 등

말 그대로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화약고 같은 뉴올리언스라는 무대는

도끼 살인마의 공포를 극대화시키기에 제격인 곳입니다.

 

그에 덧붙여 이 사건의 진실을 찾기 위해 뛰어든 세 명의 주인공 역시

뉴올리언스라는 배경의 영향을 톡톡히 받은 것으로 설정돼있습니다.

마이클은 부정과 비리에 연루된 자신의 멘토 경찰 루카를 고발한데다

당시 뉴올리언스에서는 불법이었던 흑인 아내와 자식들이 있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합니다.

온 도시가 흑인이 범인이라고 주장하지만 마이클은 거꾸로 백인 마피아에 주목합니다.

루카는 석방 후 뉴올리언스에 대한 미련을 접고 고향인 이탈리아로 돌아가려 하지만

한때 자신을 후원했던 유력 마피아에게 발목을 잡혀 사건에 휘말리고 맙니다.

뉴올리언스는 유능한 형사이자 향수병에 사로잡힌 루카를 만신창이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흑백 혼혈인데다 여성이라는, 당시로서는 약자 중의 약자인 아이다 데이비스는

자신의 핸디캡을 이겨내고 셜록 홈즈의 마니아답게 명탐정이 되려는 꿈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이 극심한 뉴올리언스는 그런 그녀를 쉽게 받아들여주지 않습니다.

 

경로는 달라도 세 주인공이 치명적인 위기를 수차례 넘기면서 진실에 도달하는 과정은

뉴올리언스의 5월의 끈끈한 공기나 느릿한 재즈의 리듬을 닮았습니다.

속도 빠른 현대의 미국식 스릴러와는 전혀 다른 전개를 보이고 있어서

그런 을 기대한 독자들에게는 조금은 만연체 같은 지루함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특히 초중반까지 이어지는 뉴올리언스의 분위기나 재즈에 대한 디테일하고 친절한 설명은

정통 연쇄살인마 이야기를 기대한 성미 급한 독자에겐 쉽게 읽히지 않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늦추고,

완벽할 정도로 앞뒤가 잘 맞아 떨어지는 깔끔한 스토리에 대한 미련을 조금만 버린다면,

, “누가 진범이냐?”보다 주인공들의 기구한 삶과 뉴올리언스의 특별한 정서에 집중한다면,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의외의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물론

큰 여운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작품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도시 전체를 궤멸시킨 태풍 카트리나로만 기억됐던 재즈의 고향의 100여 년 전의 과거,

, 본문의 표현대로 폭력적이고 용서가 없고 서로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의심을 놓지 않는

범죄자와 이민 사회가 넘쳐나는 곳. 하지만 끌어당기는 힘이 있고 눈부시게 빛나는

엄청난 매력을 가진 곳이기도한 뉴올리언스의 1919속살을 맛보기 위해

이만한 텍스트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