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스톰
매튜 매서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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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크리스마스를 눈앞에 둔 어느 날, 거대한 눈폭풍과 함께 사이버 테러가 뉴욕을 공격합니다.

대규모 정전 사태,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열차 사고, 급작스런 조류독감의 창궐 등

예기치 못한 상황 속에 모든 문명의 이기들이 일시에 중지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집니다.

통신은 두절되고, 일상생활을 지배하던 인터넷이 끊기면서 뉴욕은 공황상태에 빠집니다.

맨해튼의 아파트에 살던 마이클은 평소 광적인 전쟁 대비론자인 친구 척 덕분에

추위와 허기를 모면하며 가족들을 지켜내고 있었지만,

눈폭풍과 사이버 테러가 장기화되면서 결국 종말과도 같은 지옥도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 ● ●

 

뉴욕을 덮친 사이버 테러와 거대한 눈폭풍, 인류의 종말을 그린 서사 등

할리우드가 좋아할 만한 다양한 코드들을 지닌 작품이지만,

실은 사이버 스톰은 영웅 스토리도, 악을 쳐부수는 액션 스토리도 아닙니다.

오히려 재난의 상황을 리얼하게 그린 암울한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그 재난이 지구와 운석의 충돌이라든가 갑작스레 찾아온 빙하기 등

일어날 가능성이 별로 없는 영화적이고 비현실적인 상황이 아니라,

오늘 당장이라도 벌어질 수 있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피부에 와 닿는 상황이란 점입니다.

 

거대한 눈폭풍이라는 보조 설정 덕분에 더욱 극한의 상황이 연출되긴 하지만

사이버 스톰이 그린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근원은

이제는 너무나 친숙해져 도저히 일상에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인터넷입니다.

인터넷의 단절 또는 왜곡은 결코 미래의 일도, 남의 일도 아닙니다.

당장 오늘 내 계좌의 잔고가 전부 사라지고, 갖고 있던 주식이 휴지조각이 된다면?

출근길 신호등이 모두 파란불로 바뀌면서 모든 방향의 차들이 교차로 중심으로 달려온다면?

마트의 POS 시스템이 고장나면서 아무런 물건도 살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그런 상황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몇 달, 몇 년을 간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인류는 과연 인터넷이 단절되고, 스마트폰이 먹통이 된 세상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이제 맹아기에 있는 사물인터넷과 자율 주행차까지 보편화된다면

인류의 일상은 거의 100% 인터넷에게 지배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 클릭 한 번으로 인터넷을 왜곡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핵폭탄보다 더 큰 위력으로 인류를 절멸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인터넷의 단절이 폭력과 약탈, 살인과 식인에 이르는 과정이 언뜻 쉽게 연상되진 않지만,

사이버 스톰은 그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지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방대한 분량 속에 비슷한 상황이 동어반복처럼 이어지고,

그 덕분에 지루하고 느슨해진 전개가 독자를 힘들게 하는 점이 옥의 티이긴 하지만

사이버 스톰은 그 어떤 재난 또는 종말의 스토리보다 사실적인 힘을 가진 작품입니다.

오늘 하루도 저의 일상을 지배할 인터넷을 가만히 떠올려보면

사이버 스톰속의 인물들이 겪은 엄청난 참극이

결코 먼 미래의 일도, 나와는 무관한 남의 일도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을 읽은 뒤 조금은 불편했던 아날로그의 시대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은

비단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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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가 켜켜이 쌓인 밤
마에카와 유타카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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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여름, 한 남자가 여섯 여자와 집단자살을 한다.

남자는 1년 동안 열 명의 살인에 관여한 기우라 겐조.

여자들은 그의 밑에서 일하던 매춘부였다.

기우라가 벌인 살인과 집단자살은 30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의문으로 가득하다.

목숨을 잃은 사람이 스무 명에 달하지만 제대로 된 증언은 거의 없다.

한 저널리스트가 진상을 밝히기 위해 사건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고,

30년 전 악몽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여성의 행방을 좇는다.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터져나온 충격적인 진실은?

(책 뒷표지에 실린 줄거리입니다)

 

● ● ●

 

명문 도쿄대를 졸업한 앞날이 창창한 젊은 국립대 교수,

야쿠자 두목의 딸인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만기 출소한 뒤 매춘알선업으로 성공한 사업가,

열 명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여섯 여자를 동반자살하게 만든 끔직한 살인마,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심과 경외감을 동시에 갖게 만드는 무적의 카리스마...

 

이 모든 것이 기우라 겐조라는 한 남자의 캐릭터입니다.

언뜻 보면 다중인격자인가 싶을 정도로

한 인물의 캐릭터라 하기엔 상반되고 극단적인 모습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수많은 끔찍한 사건들을 저지른 이 기이한 인물의 심리와 동기에 대한 의문이

이 작품의 모티브이자 주인공인 저널리스트의 취재 목적이기도 합니다.

 

저널리스트는 아직 생존해있는 당시 수사관들이나 목격자를 인터뷰하며 취재노트를 만듭니다.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소설 형식으로 사건을 재구성합니다.

(그래서 취재노트와 소설이 한 챕터씩 번갈아 등장하는데, 구성의 재미를 위해서인지

떡밥을 먼저 던져놓고 그것을 천천히, 긴장감 있게 풀어 보이는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생존자들의 진술을 통해 기우라의 성장 과정과 그가 겪은 우여곡절들을 설명하지만,

사실 이런 설명들을 다 읽고도 기우라의 캐릭터와 동기를 100% 이해하긴 어렵습니다.

오히려 계속 ?”라는 질문을 증폭시킬 따름입니다.

 

왜 그는 명문대 출신의 국립대 교수면서 야쿠자의 딸과 결혼했을까?

왜 그는 아내를 목 졸라 살해해놓고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은 채 수형 기간을 채웠을까?

중년의 나이에 만기 출소한 뒤 (가업이긴 해도) 매춘알선업에 나선 것도 이상하지만,

도쿄로 진출하여 자리를 잡기 위해 무수한 목숨을 잔인하게 살해한 이유는 무엇인가?

충분히 살아남거나 도망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는 왜 집단자살이라는 선택을 한 것일까?

 

작가는 상투적인 방법, 즉 성장기의 트라우마나 부모의 학대 등으로 인해

어느 순간부터 인격이 삐뚤어지기 시작했다는 식의 뻔한 코드를 거부합니다.

물론 유일한 생존자인 한 여자의 진술을 통해 그의 충격적인 개인사가 밝혀지긴 하지만

작가는 그것을 끔찍하게 일그러진 캐릭터의 근원으로 설명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독자는 ?”에 대한 선명한 대답을 얻진 못합니다.

심지어 번역하신 이선희 님도 옮긴이의 말을 통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물음표로 시작해서 물음표로 끝난다는 점이다.”라고 서술합니다.

 

모든 것이 깔끔하게 설명되는 엔딩을 선호하는 독자들에겐 분명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기우라의 삶 가운데 어떤 순간, 어떤 사건, 어떤 인물이

그를 그토록 불가지한 인격으로 만들었는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줬기 때문이기도 하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에도 한참동안 적잖은 여운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마 작가가 작위적으로라도 그의 트라우마를 설정했더라면

마지막에 이르러 무척이나 김빠지는 작품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입니다.

 

마에카와 유타카의 국내 첫 출간작 크리피도 좋은 평을 들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작품 정도의 완성도라면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리라는 기대가 듭니다.

무엇보다 캐릭터를 구축하고 끌고 가는 힘만큼은 여느 기성작가 못잖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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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티야의 여름
트리베니언 지음, 최필원 옮김 / 펄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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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 젊은 의사 장 마르크 몽장은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 카티야 트레빌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마을 사람들과 벽을 쌓은 채 살고 있는 그녀의 가족과도 인연을 맺게 된 몽장은

카티야에 대한 불같은 사랑을 키워가면서

동시에 어딘가 평범치 않은 카티야 가족들의 비밀에도 서서히 다가가게 됩니다.

자신과 카티야의 만남을 강하게 반대하는 쌍둥이 남동생,

세상과 절연한 채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지만 가벼운 치매기를 보이는 그녀의 아버지,

열정으로 가득 찬 듯 보이지만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카티야...

마을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카티야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몽장은 사랑을 키워가지만

결국 그가 마주하게 된 것은 카티야 가족의 엄청난 비밀과 비극적인 가족사입니다.

 

● ● ●

 

트리베니언의 이름은 여러 차례 들어봤어도 작품으로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펄스에서 출간된데다 최필원 님께서 번역을 하셨고 작품 분류 역시 스릴러로 돼있어서

내심 스케일이 크거나 복잡다단한 사건들이 얽히는 스릴러 스토리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카티야의 여름은 그와는 거리가 먼 작품이었습니다.

굳이 유사한 톤의 작품을 꼽자면 넬레 노이하우스의 여름을 삼킨 소녀정도랄까요?

비극적인 결과가 예정된 로맨스, 비밀과 상처로 가득 찬 가족사,

충격적이지만 가슴 아픈 반전 등이 이야기의 주된 코드들입니다.

 

하지만 카티야의 여름은 그에 덧붙여 복잡한 심리극의 요소들을 더하고 있습니다.

작품 속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프로이트의 이론들은 그저 겉멋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스토리의 가장 중요한 토대 중 하나입니다.

외지인이라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 당하는 카티야 가족들의 상황들이나

그런 분위기를 대변하는듯한 낡고 음산한 분위기의 저택,

꿈과 유령에 대한 지속적인 언급 등도 이 작품의 심리극적 특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후반부에 드러나는 카티야와 그녀 가족의 비극이 더욱 서늘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가장 큰 뼈대는 25세 청년의 열정 가득한 로맨스입니다.

갖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카티야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는 몽장의 스토리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인지 카티야의 여름은 딱히 장르를 명명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입니다.

심리학적 로맨스? 사이코 스릴러? 고딕 로맨스?

한 마디로 쉽게 구분 지을 수 있는 단순한 소설이 절대 아니다.

이 소설은 무척이나 로맨틱하며, 동시에 잔혹하다.”라는 출판사의 소개글도

아마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좀 억지이긴 하지만 심리 로맨스 스릴러정도가 적당한 분류가 아닐까 합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긴 분량은 아니지만 모든 비밀과 반전이 후반부에 쏠려 있어서

세고 독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좀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심리극의 요소가 가미된 비극적 가족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물 흐르듯 전개되는 스토리의 재미와 반전의 쾌감을 모두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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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죽이기 죽이기 시리즈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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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본 살인사건이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된다면?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연쇄살인처럼 계속 이어진다면?

더구나 자신이 그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받게 되고

정해진 시간 안에 진범을 찾지 못할 경우 꿈과 현실 모두에서 목숨을 잃을 상황에 처한다면?

그야말로 초난감한 상황입니다.

그나마 꿈속의 인물들이 현실에서도 그 모습 그대로 나와 준다면 금세 진범을 찾겠지만,

만일 꿈속의 인물들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캐릭터들이라면 문제는 정말 심각해지겠죠.

 

대학원생 아리는 자신의 꿈속에서 앨리스로 등장합니다.

꿈속에서 연쇄살인범으로 몰린 앨리스는 현실에서도 똑같은 상황에 처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마침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이모리(꿈속의 도마뱀 빌’)의 도움을 받게 된 아리(앨리스)

꿈과 현실 두 세계를 오가며 진범 찾기에 나섭니다.

 

하지만 꿈에 등장하는 다른 캐릭터들이 현실 속의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습니다.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캐릭터 그대로 괴팍하거나 엉뚱하거나 4차원을 헤매고 있어서

도저히 현실 속의 누구인지 판명해낼 수가 없습니다.

아리는 이모리와 함께 사건 관련자들을 하나씩 체크하며 꿈과 현실의 캐릭터들을 맞춰봅니다.

그와 동시에 정해진 시간 안에 꿈과 현실을 오가며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려 합니다.

 

엄청난 상상력과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구성이 필요한 이런 스토리를

작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키는 특유의 언어유희와 캐릭터 플레이를 통해

맛깔나게 풀어냅니다. (때론 복잡하고 어지럽기도 하지만요..^^)

얄미울 정도로 냉소적이다가도 한편의 재미난 만담처럼 급변하는 꿈속의 분위기와

정해진 시간 안에 연쇄살인의 진범을 찾아내야만 하는 긴장감 넘치는 현실의 분위기가

적절한 타이밍마다 챕터를 바꿔가며 독자의 마음을 휘어잡습니다.

 

사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아주 오래 전 동화 버전으로 읽은 기억밖에 없어서

앨리스 죽이기를 읽기 전에 다시 한 번 읽어봐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론 굳이 재독 없이도 술술 읽히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캐릭터와 사건들을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면

앨리스 죽이기역시 좀더 재미있게 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특유의 언어유희가 때론 말장난 같아서 약간의 짜증을 유발하기도 하고,

어떤 대목에서는 구성의 무리수가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판타지가 끼어든 미스터리를 싫어하는 독자들에겐 쉽게 읽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의외의 간식이라고 편하게 생각하고 접한다면

이런 재미를 맛보기가 쉽지 않다는 의외의 만족을 얻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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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잠 밀리언셀러 클럽 145
가노 료이치 지음, 엄정윤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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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다쓰미 쇼이치는 폐허가 된 호텔 촬영을 위해 쇠락한 소도시 다카하마를 찾았다가

공항건설 반대모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던 한 여성 저널리스트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본의 아니게 사건에 휘말린 다쓰미는 과거 잠시 탐정 일을 했던 경험을 발휘하여

현지 신문기자이자 피해자의 남편인 안비루와 함께 진상 파악에 나섭니다.

하지만 공항건설을 둘러싼 찬반파의 갈등으로만 보이던 사건은 캐면 캘수록 복잡해졌는데,

폐쇄적인 소도시 특유의 복잡한 인간관계와 속내를 알 수 없는 관련 인물들의 태도는 물론,

살인사건과 연관 있는 것으로 보이는 5년 전의 호텔 방화사건, 조직폭력단의 은밀한 개입 등

사건의 외연을 키우는 변수들이 시간이 갈수록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기 때문입니다.

다쓰미의 조사가 장벽에 막혀 지지부진할 무렵,

또 다른 희생자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소도시 다카하마는 패닉에 빠집니다.

 

● ● ●

 

환상의 여자이후 거의 1년 만에 다시 만난 가노 료이치의 작품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두 작품은 비슷한 얼개를 지니고 있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주인공(변호사, 사진작가)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가 하면,

폐쇄적이고 쇠락한 소도시의 개발 과정에서 벌어진 비극을 다루고 있으며,

과거의 사건이 마치 나비 효과처럼 현재의 사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때 화려한 시절을 보냈지만 이젠 곳곳에 폐허만 남은 바닷가의 소도시에서

유년기부터 함께 성장해온 주민들은 공항건설 계획을 둘러싸고 극단적으로 대립합니다.

이들은 복잡한 애증 관계로 얽혀있지만 동시에 비밀을 공유한 사이이기도 합니다.

다쓰미는 공항건설을 둘러싼 주민들 간의 갈등에 주목하면서도

5년 전에 벌어진 의문의 호텔방화사건이 사건해결의 열쇠라고 확신하지만

소도시 주민 누구도 그에게 당시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비밀은 치명적인 힘을 갖고 있고, 그것이 공개되는 순간 공동체는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다쓰미처럼 외부인이 아니라면 누구도 사건해결에 앞장 설 상황이 아닙니다.

하지만 동시에 누구도 외부인 다쓰미에게 소도시의 비밀을 쉽게 털어놓지 않습니다.

 

창백한 잠이 독자를 끝까지 긴장하게 만드는 가장 큰 힘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미스터리도 미스터리지만 가노 료이치는 폐쇄적인 소도시 특유의 분위기,

즉 피가 섞이지 않았을 뿐 가족이나 다름없는 소도시 주민들 사이의 애증과 시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다치게 할 수 있는 비밀을 공유하는 일그러진 유대감 등을

살인, 실종, 폭력이라는 극단적인 사건 속에 잘 녹여내고 있습니다.

위험을 무릅쓴 다쓰미의 탐문이 밝혀낸 사건의 진상 역시

이런 다카하마의 특별한 분위기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앞서 환상의 여자와 비슷한 얼개를 지녔다고 언급했는데,

공교롭게도 아쉬운 점 역시 비슷한 이유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가노 료이치는 다쓰미의 개인사, 즉 일찌감치 붕괴된 가족의 트라우마를 비중 있게 다루는데

이 대목을 다카하마에서 벌어진 사건이나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연결 짓는 과정에서

조금은 무리하게, 또 약간은 과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건에 휘말린 다쓰미의 심리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그의 개인사를 소개한 것인데

굳이 그러지 않았어도 충분히 이야기를 끌고 갈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환상의 여자에서는 주인공의 개인사가 지나치게 많은 분량을 차지했던 것이 아쉬웠는데,

창백한 잠은 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짧은 분량이라 크게 거슬리진 않았습니다.)

 

또 한 가지는 주인공의 천재적이고 비약적인 추리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부분입니다.

환상의 여자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때 서평을 인용하면,

독자들이 따라잡기에는 무리일 정도로 스모토의 추리가 폭주합니다.

한 장의 사진과 한 줄의 진술을 통해 진상을 알 것 같다.”는 모습이 종종 나오는데

충분한 단서나 개연성이 제공되지 않은 채 방대한 진실을 설명하는 스모토의 추리는

몇 번을 되읽어도 왜 저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이해하기 힘들 만큼 홀로 앞서갑니다.

 

다쓰미 역시 비슷한 경로를 밟습니다.

물론 작가는 다쓰미가 어떤 근거로 그런 추리에 이르렀는지 부연 설명을 해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 입장에서 충분히 납득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잠시 탐정 일을 경험했을 뿐, 본업은 사진작가라는 다쓰미가

어지간한 명탐정보다 더 뛰어나게 느껴진 것은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가노 료이치의 가장 큰 미덕은 도저히 풀 수 없어 보이는 복잡한 실타래를

주인공이 끈질기고 집요하게 한 가닥씩 풀어가도록 정교하게 설계했다는 점입니다.

주인공의 폭주와 비약만 아니라면 그 정교한 설계에 여러 번 놀라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늘 아쉬움이 남으면서도 그의 작품을 기다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를 연상시키는 설정 속에 개인의 욕망을 녹여내는 가노 료이치의 공식이

다음 작품에서는 어떤 형식과 스토리로 발휘될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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