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아드네의 탄환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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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환자들의 하소연 들어주기가 주된 업무인 도조대학병원 신경내과의사 다구치 고헤이는 언제나처럼 다카시나 원장의 꼬임에 넘어가 신설되는 Ai(사후 화상 진단)센터의 센터장으로 임명된다. 방사선을 통한 사체 훼손 없는 해부 방식인 Ai를 도입하자는 취지로 설립되는 Ai센터. 그러나 이를 막으려는 경찰과 사법기관은 도조대학병원에 위협을 가하며 음모를 꾸민다. 그러던 중 병원 내에서 의문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다카시나 원장이 뇌물 수수와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다. 다구치의 초대로 Ai센터 옵서버로 참여한 후생노동성 서기관 시라토리는 다구치를 도와 Ai센터를 무력화하려는 경찰과 사법기관의 음모를 밝혀내는 것은 물론 살인사건의 진상과 진범 찾기에 앞장선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일본출간 기준) 여섯 번째 작품입니다. 최근에 읽은 가이도 다케루의 작품은 (이 시리즈가 아닌) ‘나니와 몬스터였는데, 관료체제와 사법기관에 대한 작가의 과도한 증오심과 의료입국에 관한 혁명적이고 무모한 이상론에 심하게 질렸던 터라 도조대학병원 무대로 한 다구치-시라토리 콤비의 신작이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나이팅게일의 침묵’, ‘제너럴루주의 개선으로 이어진 시리즈는 메디컬과 미스터리가 매끄럽게 조합된 매력적인 이야기들이었고, 이번 작품에서도 그런 부분이 가장 기대된 게 사실입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작품은 기존의 다구치-시라토리 콤비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에 나니와 몬스터의 주제인 의료입국사법에 대한 의료의 우위가 혼재된 이야기입니다. , 가이도 다케루는 의료체계를 자신들의 발밑에 두려는 경찰과 사법기관의 만행(?)을 고발하면서 투명하고 공정한 사인 검사를 위해 Ai라는 독립된 시스템을 강조합니다.

양측의 입장을 요약하면, 경찰과 사법기관은 자신들이 관장하는 메스를 이용한 사법 해부가 최우선이며, 도조대학병원의 Ai는 보조적 역할에 그치되 반드시 경찰이 통제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하지만 도조대학병원은 사법 해부가 경찰의 입맛에 맞게 조작될 수 있다는 주장과 함께 메스 없이도 사인을 밝힐 수 있는 Ai를 병원이 독립적으로 관할해야 한다고 반박합니다.

그 과정에서 도조대학병원과 Ai시스템을 붕괴시킬 계획을 세운 경찰 내 과격파는 Ai센터 준비위원회에 부센터장 자격으로 참여하면서 음모를 진행시킵니다. 한편, Ai센터장인 다구치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시라토리를 비롯하여 Ai시스템의 능력자들을 병원으로 끌어들이지만 병원 내에서 연이은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위기에 봉착합니다.

 

의료와 사법의 갈등과 대립이 전반부라면, 시라토리가 이끄는 미스터리 해법이 후반부인데 분량상으로도 딱 1/2씩 할애됐습니다. 말하자면 전반부는 나니와 몬스터의 재판(再版) 같았고, 후반부는 앞선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의 전형이었습니다.

경찰의 통제 하에 이뤄지는 메스를 통한 사법 해부와 의료진에 의해 독립적으로 운용되는 Ai 간의 논쟁은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이고 정의에 가까운지 판정 내리기 어려울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됩니다. 작가의 노선은 너무나도 명확해서 경찰과 사법기관을 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독자 입장에선 때론 경찰과 사법기관의 주장이 옳은 것 같기도 하고 때론 경찰의 통제를 벗어난 Ai가 정의롭게 보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속도감과 긴장감을 겸비했고, 밀실과도 같은 MRI실에서 벌어진 사건은 끝까지 진상을 예측하기 어려웠습니다. 주인공 다구치가 상대적으로 무력해 보인 점만 빼곤 캐릭터의 매력 역시 생생했습니다. 시라토리의 괴물 같은 추진력과 추리는 전광석화와도 같았고, 다구치가 끌어들인 Ai 진영은 소위 능력자들로 구성된 지구방위대같았습니다. 덕분에 한 번도 쉬지 않고 한나절 만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니와 몬스터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한 의료 사법의 과도한 갈등 묘사 때문에 애초의 기대감이 제대로 충족되진 못한 게 사실입니다. 물론 병원 내에서 벌어지는 암투나 갈등에 머물지 않고 첨예한 사회적 문제를 끌어들인 가이도 다케루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되지만, 어딘가 다분히 작위적인, 그래서 목적극 같은 냄새가 진하게 풍겼기 때문입니다. , 앞서 언급한대로 Ai 시스템이 왜 필요하며, 왜 사법 해부보다 정의로운 방법인지에 대해 독자를 완벽하게 설득하지 못한 점은 초반부의 책읽기를 난해하게 만든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전 작품들에 비해 그 캐릭터가 왜소해진 다구치가 안쓰러웠고, 시라토리의 추리는 슈퍼울트라 급으로 폭주한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였습니다. 두 주인공이 너무 극과 극의 위치에서 이야기를 끌어갔다고 할까요?

 

아마도 가이도 다케루의 신작이 나온다고 하면 여지없이 찾아 읽을 것 같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도조대학병원 안에서 벌어지는 좀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병원을 둘러싼 사회적 문제를 소재로 삼는 것은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지만, 이젠 가이도 다케루가 경찰 및 사법기관과 더는 각을 세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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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쟁이가 사는 저택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32
황태환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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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성 왜소증 환자인 성국은 좀비로 인해 세상이 멸망한 뒤

자신이 근무하던 병원 건물에 갇힌 채 1년째 힘겹게 생존을 이어가고 있다.

사방이 좀비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 무엇보다 식량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어느 날, 추락한 구조 헬기의 생존자들이 병원 건물로 들어오면서

먹고 사는 문제가 좀비보다 더욱 큰 위기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목숨을 빚졌으면서도 사람들은 작은 체구의 성국을 무시하고 깔보지만

이내 그가 식량의 루트인 좁은 통로를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란 걸 파악하곤

그에게 모든 권력을 넘겨주고 복종하게 된다.

하지만 점차 먹는 입이 늘어 가고, 생존자들의 갈등이 원시적인 폭력으로 발현되면서

식량을 움켜쥐고 있던 성국의 권력은 위태로워진다.

 

● ● ●

 

좀비를 소재로 한 작품이지만, 좀비 자체보다는 위기에 처한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민낯,

즉 공포에 잠식당한 상태에서 권력과 폭력, 배신과 거짓말로 자신만의 생존을 갈구하는

그야말로 날것 그대로의 본능의 밑바닥을 그린 작품입니다.

물론 병원 건물에 갇힌 인물들을 공포와 위기로 몰아넣은 외부의 적은 좀비였고,

좀비를 상대로 한 처절한 싸움이 간간이 그려지긴 하지만,

그보다 더 절실한 문제는 식량을 구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좀비에게 먹히기 전에 굶어 죽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먹는 문제가 인간을 본능의 수준에서 서로 투쟁하도록 부추겼던 것입니다.

 

주인공인 성국은 왜소한 체구 때문에 세상이 멸망하기 전이나 현재나

주위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는 인물입니다.

그 덕분에 소심하고 내향적인 인물이었던 그는 선의로 많은 사람들을 구해주지만

막상 좀비의 이빨에서 벗어난 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성국을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작은 체구 덕분에 유일하게 식량을 구해올 수 있는 인물로 판명나자

사람들은 성국 앞에 무릎 꿇게 되고, 그는 일약 권력자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권력은 수시로 요동치면서 성국에게 안락함과 위기를 번갈아 전해주곤 합니다.

 

처음엔 왜 주인공 성국을 굳이 왜소증 환자로 설정했는가, 싶었는데

작가는 여러 국면을 통해 성국의 왜소증을 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왜소증은 성국의 심신을 피폐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유일한 생존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또 소심하고 내향적이던 그가 식량을 매개로 권력을 쥔 뒤

복수심에 사로잡힌 캐릭터로 변해가는 과정 역시 왜소증 덕분에 설득력을 얻게 됩니다.

그가 상대하는 인물들은 모델처럼 잘 빠진 바람둥이, 신체 건장한 군인,

자기 살 길만 모색하는 엘리트, 간호사였던 미녀 등 왜소증과는 대척점에 선 인물들입니다.

그래서인지 성국이 복수심에 사로잡힌 지독한 이기주의자로 변모하는 과정은

통쾌하면서도 때론 애틋한 마음까지 갖게 만들곤 합니다.

 

영상이든 문학이든 좀비라는 소재와 별로 친하지 않은 취향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와 반전을 통해 인간의 민낯을 그린 매력적인 설정 덕분에

(분량도 길지 않아서) 책을 편 뒤 한 번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약간은 거칠고 투박한 문장들이 자주 목격된다는 점입니다.

성국이 위기를 모면하는 장면은 때론 너무 쉽고 안이하게 처리되고,

일부 인물의 캐릭터가 변하는 장면 역시 개연성이 부족한 경우가 종종 보였습니다.

전체적으로 뼈대만 있고 살집은 허약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을 보면

작가의 문학적 고민이 부족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매력적인 소재와 뛰어난 구성에도 불구하고

작품 자체의 깊이는 얕고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여러 면에서 영상화의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좀비에게 둘러싸인 채 폐허가 된 병원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여러 인물이 본능에 따라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는 듯한 설정은

비주얼 면에서 꽤나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보지 못했지만 영화 부산행의 성공을 비춰보면

조만간 이 작품의 영상화 소식이 들려올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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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이었던 소녀 스토리콜렉터 41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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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임상심리학자 조 올로클린은 전작인 산산이 부서진 남자에서 자신이 관여한 사건으로 인해 현재 가족과 별거 중입니다. 파킨슨병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아온 조를 사랑했던 아내 줄리안이지만 가족의 목숨까지 경각에 빠뜨린 그의 오지랖 넓은 정의감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조는 어떻게든 가족들과 재결합하기 위해 간절히 노력하지만, 또다시 치명적인 사건이 운명처럼 조를 찾아옵니다. 조의 큰딸 찰리의 절친인 시에나가 전직 경찰인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됩니다. 심리적 불안 상태에 빠진 시에나를 상담한 조는 경찰의 주장과 달리 그녀가 범인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 누군가 시에나를 조종하여 그녀의 몸과 마음을 망쳤으며, 바로 그 누군가가 살인사건의 진범이라고 믿습니다.

 

내 것이었던 소녀조 올로클린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입니다. 2005년에 출간된 용의자1, 미출간작인 ‘The Drowning Man’2, ‘산산이 부서진 남자3편입니다. 마이클 로보텀과 처음 만난 산산이 부서진 남자에서는 크게 못 느꼈던 점인데, 이번 작품을 통해 그의 글빨이 대단하다는 것을 여러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가족의 위기와 지독한 심리전 등 피와 살이 튀는 잔혹한 스릴러 이상의 다양한 코드들을 너무나도 잘 버무려 놓았습니다. 비유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정도로 적절하고, 유머는 촌철살인에 가깝습니다. 캐릭터도, 구성도, 사건의 전개도 매력적이고 절묘합니다. 딱 한 가지, 전혀 연관 없어 보이던 사건들을 한 줄의 실에 꿰기 위해 이야기 막판에 약간의 무리수를 둔 점은 다분히 작위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것이었던 소녀는 전작보다 확실히 진화한 작품임에 분명했습니다.

 

조 올로클린 시리즈가 여타 스릴러 시리즈들과 가장 차별화되는 점은 임상심리학자라는 그의 직업에 있습니다. ‘산산이 부서진 남자의 서평에서 범인은 사람의 마음을 부수는 반면, 조는 부서진 사람의 마음을 이어 붙여 온기가 되돌아오게끔 도와줍니다.”라고 쓴 적이 있는데, ‘내 것이었던 소녀에도 역시 누군가의 마음을 움켜쥔 채 마음껏 조종하며 유린하는 희대의 악마가 등장하고, 조는 그의 심리를 파악하여 과거와 현재의 행동의 양태를 밝혀냅니다.

물리적 수사만으론 밝혀내기 힘든 범인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그의 머릿속에 든 생각과 행동의 양식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희생자들의 무너진 마음이 재건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때론 그런 과정들이 빠르고 독한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마이클 로보텀은 사건과 심리를 적절히 안배하여 그런 지루함을 사전에 차단해놓습니다.

 

가족의 문제역시 이 시리즈에서 중요한 모티브 중 하나인데, 조는 매력적인 사건 해결사지만 동시에 가족을 잃은 가장, 큰딸에게 단절감을 느끼는 아버지, 그리고 파킨슨병과 중년의 위기로 심신을 다친 무력한 남자이기도 합니다. 마이클 로보텀은 단순히 가족주의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조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와 솔직하게 대면하게 함으로써, 또 자신 때문에 벌어진 아내와 딸과의 간극을 통렬히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공감과 연민을 이끌어냅니다. 어쩌면 스릴러 자체보다 조의 인간적인 갈등에 더 매력을 느끼는 독자가 많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전혀 연관 없어 보이던 두 개의 사건을 무리하게 연결시킨 부분은 앞서 얘기한대로 이 작품의 유일한 아쉬움입니다. 아무래도 단선적인 스토리를 극복하기 위한 설정으로 보이는데, ‘산산이 부서진 남자에서도 이런 작위성이 살짝 엿보인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로보텀의 신작들이 계속 기대되는 이유는 매력적인 글빨과 너무나도 인간적인 조의 캐릭터, 그리고 개성 강한 그의 도우미들 여경감 베로니카와 퇴직 경찰 빈센트 때문입니다. 절판됐거나 아직 소개되지 않은 시리즈 첫 두 편은 물론 해외에서 출간된 신작들도 빠른 시일 안에 국내에 소개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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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 럭
야쿠마루 가쿠 지음, 민경욱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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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5년 전쯤 천사의 나이프를 통해서였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을 읽고 소년범죄에 관심이 있어 찾아본 작품이었습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이라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차분한 문장 속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심리를 잘 그려냈다는 인상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사건을 풀어가는 솜씨 역시 현란하진 않지만 무척 리얼했던 것 같구요.

 

하드 럭은 야쿠마루 가쿠와 두 번째로 만난 작품인데

이야기는 전혀 다르지만 받은 인상은 천사의 나이프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실감 넘치는 사회파 스타일의 소재,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된 주인공의 상황,

정통 미스터리이면서 사건 못잖게 인물들의 심리를 지켜보게 만드는 서사의 힘 등

미스터리에 문외한이라도 한번 잡으면 마지막 장까지 달리게 하는 필력을 갖춘 작품입니다.

 

● ● ●

 

주인공 아이자와 진은 그야말로 사회의 밑바닥을 전전하는 절망적인 청춘입니다.

그런 그가 마지막 한탕을 위해 일면식도 없는 자들을 동료 삼아 범죄를 기획합니다.

하지만 거사(?) 당일 모든 계획이 틀어지고 맙니다.

실명도 모르던 동료들은 모두 현장에서 사라졌고,

눈앞에서는 세 구의 시신과 함께 저택이 불타오릅니다.

누군가 자신들의 계획에 끼어들어 모든 것을 망쳐놓은 것입니다.

유일하게 실명과 얼굴이 노출된 자신은 살인강도에 방화범으로 몰리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아이자와 진은 경찰에 쫓기게 되지만, 끝까지 진범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 ● ●

 

전형적인 사기부터 음험한 범죄중개, 개인정보 매매 등 다양한 범죄가 등장하지만

야쿠마루 가쿠는 그 현상 자체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물론 나름 빈부의 문제, 가족의 문제 등 일본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긴 하지만,

그것을 교훈적이거나 선언적인 투로 강요하진 않습니다.

즉 사회적인 병폐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범죄 등 구조적인 문제를 강조하기보다는

철저하게 개인 하나하나의 행동과 심리와 동기에 천착하면서 이야기를 전개시킵니다.

그래서인지 (경찰 외에) 선한 인물이라곤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상황에서

악인들마저 악인처럼 보이지 않는 묘한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한때는 선한 시민이자 억울한 피해자였지만

결국엔 남의 돈을 탐낸 명백한 범죄자로 전락하는 주인공의 삶을 지켜보면서

구조의 문제개인의 문제라는 두 가지 차원의 담론을 혼돈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했지만 결국 탈출구는 범죄밖에 없었다는 참혹한 구조적현실,

그렇지만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경찰의 눈을 피해 도망치면서 사건의 진실을 캐야만 하는 아이러니한 개인의상황이

정교하게 직조되어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제발 잡히지 말고 진범을 찾아내줘!”라고 응원하다가도,

, 이 친구는 어쨌든 범죄를 저질렀잖아?’라는 자문과 맞닥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나머지 한 축으로 등장하는 경찰들의 활약은 상대적으로 좀 심심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애초부터 주인공의 진실 찾기를 위한 조연으로 설정된 바,

그 나름대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점에서는 크게 일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절한 분량 속에 현실적인 소재와 미스터리 구성을 잘 버무린 하드 럭

재미와 함께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기는 작품입니다.

좀더 현란한 문장과 자극적인 설정을 갖고 왔다면

야쿠마루 가쿠는 진작에 더 큰 이름을 얻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금은 담담한 느낌이 들면서도 알차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필력은

오히려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고 싶게 만드는 매력의 근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런 점에서 악당어둠 아래등 아직 읽지 못한 그의 작품들이 더욱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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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 7 7 시리즈
케리 드루어리 지음, 정아영 옮김 / 다른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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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법정에서 피고인을 재판하는 사법 제도가 폐지되고, 국민이 직접 재판하는 제도가 도입된다.

특히 살인을 저지른 피고인은 7일 동안 TV 뉴스쇼에 신상이 공개되고,

시청자들은 전화, 문자, 인터넷을 이용해 무죄 혹은 유죄에 투표한다.

그리고 7일째 날 최종 집계 결과 유죄가 나오면 즉시 사형을 집행한다.

빈민가 출신의 열여섯 살 소녀 마사 허니듀가 전 국민의 사랑을 받던

유명인 잭슨 페이지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1번 수용실에 수감된다.

마사는 최초의 10대 여성 수감자, 투표가 이루어지는 7일 동안

매일 수용실을 옮기며 전기의자가 있는 7번 수용실로 향한다.

마사는 자신이 잭슨 페이지를 죽였다고 자백하여 사실상 사형이 확실시되지만,

마사의 상담을 맡은 이브 스탠턴은 마사가 뭔가 감추고 있음을 직감하고 비밀을 추적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브는 소름끼치는 음모를 마주하게 된다.

(출판사 줄거리를 일부 수정하여 인용하였습니다)

 

● ● ●

 

중세의 마녀사냥 이래 대중의 광기는 시대를 막론하고 가공할 독성을 지녀왔습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터넷이나 미디어의 힘과 뒤섞여 거친 화학반응을 일으킬 경우

대중의 광기는 그 어떤 합리적 논리와 이성적 판단까지도 마녀로 몰아세울 수 있게 됐습니다.

7’은 그 광기가 사법의 영역까지 장악한 우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습니다.

법정은 문을 닫았고, 법조인들은 다른 직업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목격자도, 증거도 필요 없고 단지 대중의 증오심만으로 인명을 빼앗는 시대가 도래합니다.

미디어는 끊임없이 도발적인 영상과 멘트로 용의자의 흉포함을 강조하고,

대중은 비디오게임처럼 미친 듯 유료투표를 하며 무자비한 사형집행을 갈망합니다.

 

정치권력은 이런 사법제도를 통해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를 능가하는 힘을 갖게 됩니다.

대중은 누군가의 죽음을 갈망하면서 희열을 느끼지만,

동시에 자신이 그 쇼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와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권력에 반하는 말과 행동은 금지되며, 독재자에게는 무한한 애정만을 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언제든 사형당할 확률이 99%’1번 수용실로 끌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6살의 소녀 마사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 체제를 붕괴시키기로 마음먹습니다.

문제는, 그 방법이 스스로 사형수가 되는 길이었다는 점입니다.

독자는 체제에 대한 정면 공격이 아니라 스스로 사형수가 되는 것

어떻게 이 견고한 디스토피아를 무너뜨리게 될까 궁금히 여기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작가는 수용실에 갇힌 마사의 최후의 1주일과 살인이 일어나기 전 과거의 사건들을

주요 인물들의 관점을 통해 교차 편집하듯 보여줍니다.

그를 통해 마사가 감추고 있는 비밀을 조금씩 흘리는 것과 동시에

어처구니없는 사법제도를 둘러싼 다양한 개인/집단 간의 극단적 갈등을 세세히 묘사합니다.

 

새롭고 독특한 소재인데다, 선명한 스토리 때문에 페이지는 쉽게 넘어갑니다.

우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리기 위해 현학적인 문장들이나 모호한 철학을 동원하지도 않습니다.

사형수가 된 마사, 그녀를 도와주려는 상담사 이브, 직업을 잃은 전직 대법관,

피에 굶주린 듯한 쇼의 진행자 등 다채롭고 호기심 넘치는 캐릭터들도 쉽고 매력 있습니다.

적절한 미스터리와 반전, 교훈적이지도 이분법적이지도 않은 엔딩 역시 괜찮은 미덕입니다.

 

다만, 이런 심플함7’의 장점이면서 동시에 단점이기도 합니다.

7’이 그린 디스토피아는 조금은 과장되거나 단순하게 도식화된 면이 분명 있습니다.

그런 세상이 오게 된 과정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보니 사실감이 떨어지기도 하고,

마사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미디어나 대중의 광기 역시 쉽게 공감하기 어렵게 됩니다.

디스토피아 이야기가 독자에게 어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은

안 살아봤지만 직접 살아본 것처럼 생생히 느껴지는 어떤 세상에 대한 공포의 공유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좀더 깊고 세세한 설명이 있었다면,

그 세상에 만연한 대중의 광기가 내뿜는 공포에 대해 좀더 독자의 공감을 끌어냈더라면

위에서 언급한 아쉬움들이 많이 덜어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또한, 견고한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주인공이 10대이다 보니

사건의 규모나 극성(劇性)은 물론 철학적인 깊이가 얕아질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한계는 후반부에 이야기가 급물살을 타기 전까지 내내 느껴지곤 했는데,

그래서인지 또래의 주인공들이 등장했던 헝거 게임이나 배틀 로열처럼

좀더 독한 설정이 첨가됐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랬다면 재미와 함께 철학적인 의미도 획득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물론 이 작품을 쓴 의도와는 거리가 먼 얘기일 수도 있지만요..)

 

7’의 뒷이야기를 다룬 데이 7’이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후속작에서는 좀더 피부에 와 닿는 디스토피아의 진면목이 그려지기를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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