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의 사각 1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 3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 / 검은숲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문신살인사건파계재판에 이어 만난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입니다.

그의 집필 시기가 일본의 패전 직후부터 1960년대에 이르다 보니

정서적으로 낯설고 어딘가 날것 같은 느낌을 자주 받을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아날로그 풍의 시대극을 읽는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대낮의 사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천재적인 경제 사기범의 이야기입니다.

 

● ● ●

 

쓰루오카 시치로를 비롯 도쿄대 재학생 4명은 패전 직후의 경제적 혼돈 속에서

실현 불가능한 부를 손아귀에 넣고자 사금융회사를 차립니다.

애초 리더였던 스미다가 지나친 천재성과 이기적 리더쉽으로 막장으로 치닫는 것은 물론

주색에 빠져 판단력이 흐려지자 쓰루오카는 독립을 선언하고 본격적인 사기행각에 나섭니다.

완벽한 작전 계획, 적절한 먹잇감 확보, 거침없는 실행능력을 앞세운 쓰루오카는

기업, 은행, 외국공사관 등을 상대로 무패의 사기극을 벌입니다.

경찰과 검찰은 번번이 쓰루오카에게 무릎을 꿇고, 야쿠자마저 그의 언변에 말려듭니다.

 

● ● ●

 

요즘의 디지털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쓰루오카의 사기극은 오히려 애교에 가깝습니다.

전략과 전술은 아날로그적이며, 그의 진짜 무기는 상대를 휘어잡는 심리전일 뿐입니다.

상대는 항상 어수룩하거나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하는 위기에 빠져있고,

쓰루오카가 만들어놓은 무대 위에서 그의 각본대로 움직여주기 바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초점은 얼마나 치밀하고 완벽한 사기극을 벌였는가?’가 아니라,

패전 직후의 혼란, 즉 경제적 가치관은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고,

법은 사방에 허점과 사각지대를 노출한 상태에서

채 서른도 안 된 젊은이들이 추구했던 탐욕과 그들 나름의 정의에 맞춰져 있습니다.

 

쓰루오카에겐 남의 돈을 부당하게 빼앗는다는 죄책감도 없고,

딱히 그 돈으로 뭘 하겠다는 목표도 없습니다.

오히려 힘 있는 자들을 위한 법을 혐오하며, 자신 역시 힘으로 법을 짓밟겠다고 공언합니다.

또한 성공한 재벌에겐 누구도 축재 과정의 악행을 비난하지 않는다며 자신을 정당화 합니다.

부도 직전의 회사를 상대로 거액의 사기를 벌이면서도 연민 따위는 느끼지 않습니다.

피해를 당한 회사의 간부가 자살을 해도 그다지 동요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사기에 관한 한 타고난 사이코패스라고 할까요?

 

쓰루오카가 처음부터 사이코패스였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초대 리더였던 스미다의 일그러진 천재의 폭주를 비난했던 쓰루오카였지만,

그로부터 독립한 후 연이어 사기에 성공하면서

쓰루오카는 어느새 스미다의 일그러진 면모를 닮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반성 대신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자신을 채찍질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이런 쓰루오카의 진화를 작가는 개인의 문제와 함께 사회의 책임으로도 묘사합니다.

그래서 수시로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 대한 설명을 부연하곤 합니다.

물론 그런 설명이 결코 쓰루오카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시대가 어떻게 비정상적인 천재를 폭주시키는지를

작가는 쓰루오카 본인을 비롯한 주변 인물과 상황들을 통해 강조하는 것입니다.

 

대낮의 사각의 주인공은 쓰루오카지만

사실 주변 인물들의 역할 역시 분량이나 재미 면에서 만만치 않습니다.

거짓말과 배신, 사랑과 증오가 난무하고 비극적인 죽음들이 쓰루오카를 둘러싸게 됩니다.

어쩌면 쓰루오카의 사기극보다 그의 폭주 속에 개입된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가

더욱 독자의 관심을 끌지도 모를 일입니다.

 

주간지에 연재됐던 작품을 편집하다 보니 2권으로 된 적잖은 분량이 됐지만,

웬만한 책 한 권 정도와 비슷한 시간이면 충분히 완독할 수 있습니다.

가끔 반복되는 사기행각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다카기 아키미쓰의 팬이라면 전작들에 비해 재미 면에서 소소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앞서 말한대로 사건 자체보다 심리에 초점을 맞춘다면 꽤 재미있는 책읽기가 돼줄 것입니다.

 

사족으로..

이 작품에서 여성에 대해 비하하는 대목들이 상당 부분 나오는데,

남자인 제가 봐도 지나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점은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에서 매번 느끼는 점인데,

그 때문인지 출판사에서 작품 서두에 이런 문구를 미리 실어놓았습니다.

 

이 작품에는 오늘날 인권 보호 견지에 비추어 부적합한 어구나 표현이 있습니다만,

작품 발표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문학성을 고려하여 원문대로 살려두었음을 밝힙니다.”

 

부적합한 어구나 표현이 꽤 많은 편인 작품이지만

그 점 때문에 작품 자체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문구입니다.

저 역시 충분히 공감하며, 혹 일부러 요즘 정서에 맞춰 번역됐더라면

오히려 당시의 시대상이나 성적 차별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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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걸스
에마 클라인 지음, 정주연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폭력과 약물, 반전운동이 열병처럼 번지던 1969년 남부 캘리포니아.

부모의 이혼으로 촉발된 외로움과 분노, 혼란스러운 감정에 힘들어하던 열네 살 소녀 이비는

공원에서 히피 소녀 무리를 목격한다.

그녀는 소녀들의 야하고 경박한웃음소리, 자유로운 행동과 옷차림에 시선을 빼앗기고,

특히 수전이라는 소녀에게 맹렬히 이끌린다.

수전과 소녀들은 버려진 목장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러셀의 지휘에 따라 살아가고 있었다.

이비는 수전에 대한 동경과 사랑 때문에 소녀들과 행동을 함께 하고,

태어나 처음으로 겪는 자유와 우정에 취해 범죄를 저지르면서

자신도 그들 중 하나가 되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러셀을 중심으로 한 소녀들의 일상이 위태로워지면서 불안한 공기가 떠돌고,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끔찍한 기억으로 남은 그날 밤이 찾아온다.

(출판사 책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 ● ●

 

아무리 학교와 학원과 부모의 억압으로 인해 통제된 삶을 살았더라도,

10대로 보낸 시간들은 대체로 억압과 관련된 쪽으로 기억되기 마련입니다.

자유와 구속, 혼란과 일탈, 비밀과 거짓말,

그리고 두려움과 주저 속에 정작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로망...

 

더 걸스의 주인공 이비는 () 14, 우리로 치면 그 무서운(?) ‘2’의 나이입니다.

14살의 이비가 살던 1969년과 지금의 2016년 사이에는 무려 50년에 가까운 간극이 있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10대의 정체성은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폭발하지 않으면 도저히 못 견딜 것처럼 불안해지거나,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불온하고 불공정하다고 확신하거나,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 되기 위해 그 어떤 극단적인 방법도 기꺼이 선택하고 싶어 하는,

그런 불순(?)하고 불안정한 욕망들 말이죠...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를 갈망했고, 혼란 속에서도 일탈을 꿈꾸던 14살의 이비의 눈에

공공장소에서 가슴을 드러내고, 태연히 쓰레기통에서 음식을 찾는 반사회적 소녀 집단

그야말로 자신의 로망을 구현시켜줄 롤 모델처럼 비칩니다.

그녀들이야말로 자신이 갖지 못했던, 또는 두려움 때문에 실행에 옮기기를 주저했던

모든 욕망들을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가치관을 부정하는 터질 것 같은 자신감,

모두가 옳다라고 말하는 것들에 대해 가차 없이 냉소를 던질 수 있는 우월감,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겠다는 무제한의 자유로움 등...

 

물론 이비의 판타지는 폐 목장에서의 공동생활 속에서 얼마 못가 산산이 부서지고 맙니다.

소녀들은 몸과 마음 어느 것도 완성되지 않은 말 그대로 소녀들일 뿐이었고,

그녀들의 자신감과 우월감은 대부분 술과 마약의 힘을 빌었던 것이며,

무제한의 자유란 무분별한 폭력, 문란한 성관계, 대책 없는 게으름과 같은 뜻일 뿐이었습니다.

가족과 친구에게서 받지 못했던 사랑과 존중을 기대했고,

무한한 자유와 즐거운 일탈, 그리고 용서받을 수 있는 방종을 통해

자신의 삶을 사랑하기를 바랐던 이비의 판타지와는 거리가 먼 일상이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비는 어떻게든 그녀들이 되고자 발버둥쳤지만,

끝내 감당하기 힘든 비밀과 거짓말만을 끌어안은 채 그해 여름의 종장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실 더 걸스의 이야기를 아주 거칠고 낮은 수준으로 정리하자면,

범생이도, 문제아도 아닌 채 어정쩡하게 경계선에 서서 세상을 증오하던 한 10대 소녀가

껌 좀 씹는 애들과 한 패가 되고 싶었지만,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평생 짊어지고 갈 상처만 가득 안게 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비가 만난 껌 좀 씹는 애들가운데에는 정말 무뇌아 같은 캐릭터도 있지만,

반대로,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을 겪은 듯한, 그 또래답지 않은 캐릭터도 있습니다.

 

이비가 진심으로 꽂혔던 수전이 바로 그런 캐릭터인데,

이비를 그녀들속으로 끌어들인 것도, 이비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 것도,

끝내 이비를 그녀들에게서 축출한 것도 수전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이야기는 수전을 향한 이비의 감정 또는 심리의 변화를 따라갑니다.

이비는 공동생활을 시작한 이래 수전에게 몸과 마음 모두 급속히 빠져들지만,

동시에 수전 자체가 지극히 위험한 금단의 영역이라는 것도 금세 깨닫게 됩니다.

애초 이비의 눈을 멀게 했던 수전의 자신감과 자유로움이

이비의 몸과 마음에는 너무 크거나, 너무 꽉 끼는, 안 맞는 옷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그 을 자신에게 맞춰보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이비의 몸은 엉망이 되고, 마음은 황폐해져 갔습니다.

 

사실, 수전을 향한 이비의 사랑, 집착, 원망, 아쉬움은

세상을 향한 이비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혼한 부모를 증오하고, 통제된 기숙학교를 거부하고, 자신을 내친 친구를 원망하면서도

그 대척점에 서있는 자유로운 수전에게도 모든 것을 걸 수 없는 이비의 혼란은

그녀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10대 소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수적인 가족주의가 지배적 가치관으로 작동하면서도

동시에 반전, 히피, 폭력, 약물이 범람하던 1969년의 미국의 사회상에 기인하기도 합니다.

이 작품이 단지 철없는 소녀의 불장난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서 읽히게 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비의 삶을 가장 아이러니하게 만드는 사건은

이젠 중년이 된 이비가 10대 시절의 자신을 꼭 빼닮은 새셔라는 소녀를 만난 일입니다.

더구나 자신이 수전 일당의 광란의 살인극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알곤

일종의 경외감까지 드러내는 새셔를 지켜보는 일은 이비에겐 너무나도 힘든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새셔를 통해 과거를 되돌아보며 회한에 젖는 이비를 지켜보는 독자 역시

무척이나 안쓰럽고 애틋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10대를 먼 옛날의 이야기로밖에 떠올릴 수 없는 나이의 독자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족으로 아쉬움 한 가지만 지적하자면,

원작과 번역 중 어느 쪽에 기인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쉽게 읽히지 않는 문장들과 수식이 과한 문장들이 종종 눈에 띄었습니다.

400페이지 정도의 분량임에도 마지막 장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몇 번씩 되읽어도 그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거나,

수식과 비유가 너무 지나쳤던 문장들 때문이었습니다.

사건이 아니라 심리를 더 강조한 작품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난독은 비단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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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증명 - 추억이 만들어지는 시간 증명 시리즈
정석화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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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찰청 보안 4는 경찰이면서 경찰이 아닌 독립적인 조직입니다.

경찰청장은 물론 국정원 등 그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으며 고유의 임무를 수행할 뿐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프레데터, 즉 인간사냥꾼이라 불리는 특급 연쇄살인마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수사 과정에 기괴한 살인사건들이 끼어들면서 수사는 혼선을 겪게 됩니다.

장기가 모두 사라진 채 살해된 사람들,

참혹하게 토막살해 됐지만 피 한 방울 발견되지 않은 변사체들,

지문과 기억이 사라진 채 외진 국도에서 발견된 여자,

그녀를 보호하면서 사랑에 빠지지만 그로 인해 보안 4과에 의해 프레데터로 지목받는 남자...

밑그림이 다른 수많은 퍼즐 조각들이 한데 뒤섞인 것처럼 혼돈 그 자체이던 인물과 사건들은

수사가 진행되면서 점차 그 끔찍한 악연의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 ● ●

 

제가 봐도 참 모호한 줄거리입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모티브를 공개적으로 언급할 수 없다 보니

이렇게 앞뒤 맥락도 없는 어정쩡한 줄거리가 나오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 모티브를 언급한다 하더라도 이 작품의 인물과 사건은

일반적인 서평을 쓰기에는 거의 곤란할 정도로 무척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물의 경우 크게 보면,

프레데터를 쫓는 보안 4과의 멤버들,

지문과 기억을 잃은 채 사라라는 이름을 불리게 된 여자와

그녀를 사랑하게 됐지만 그로 인해 보안 4과의 레이더에 걸린 중혁,

보안 4과가 쫓는 프레데터와 거대한 어둠의 조직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들이 쫓거나, 연루되거나, 일으키는 사건들은 단지 현재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수십 년 전의 비극과도 닿아 있어서 이야기 구조를 더욱 복잡하게 만듭니다.

 

단순히 겉멋을 부리기 위해 뒤엉키게만든 수준이 아니라,

어떻게 이렇게 연결시킬 생각을 했을까?”라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정교하고 빈틈없이 설계됐다는 뜻입니다.

후반부에 이르러 뒤엉킨 가닥들이 하나씩 풀리면서 일으키는 반전들은

(때론 작위적인 대목도 분명 있지만) 단순한 반전 이상의 느낌을 전해주기도 합니다.

특히 인물들의 관계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밝혀지는 부분은 압권이었습니다.

또한 더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기 어려울 것 같은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전작들과는 다른 낯선 방식으로 접근한 참신한 아이디어도 호평을 받을 만하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힘든 부분은 초반부입니다.

인물 소개나 사건 묘사 과정에서 조금은 설익은 느낌의 문장들이 툭툭 튀어나오기도 했고,

국정원도 못 건드린다는 보안 4과 멤버들의 수준은 평범한 형사와 별 다를 바 없었으며,

별로 중요하지도 놀랍지도 않은 상황에 대해 작가 혼자 심각해하는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스케일을 키우기 위한 전략이었겠지만

중후반부에 밝혀지는 어둠의 조직의 실체라든가 일부 인물들의 정체 폭로 과정 역시

작위적이거나 허술해 보인 것은 물론 지나치게 과대 포장된 나머지 현실감을 잃었습니다.

종합하자면, 아이디어와 구성은 훌륭한데 그것을 글로 구현하는 과정이 부족했다고 할까요?

 

소재라든가 문장에 대한 취향 때문에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지만,

몇몇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면에서는 분명 장점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춤추는 집을 아직 읽지 못했는데

어떤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담긴 작품일지 일단은 궁금해집니다.

한국추리문학상 대상까지 받은 작품이라니 더욱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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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여름 스토리콜렉터 43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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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2015년에 출간된 여름을 삼킨 소녀의 후속작입니다.

여름을 삼킨 소녀가 세 번의 여름을 거치는 동안 무자비하고 잔혹한 성장통을 겪었던

셰리든 그랜트에게 나름 희망을 품은 엔딩을 주며 마무리됐다면,

끝나지 않은 여름은 제목에서 연상되는 그대로 여전히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만 하는

셰리든의 그 후의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 ● ●

 

셰리든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그랜트 저택을 뒤로 한 채

끔찍한 유년의 추억만을 남겨준 고향 페어필드를 떠나 뉴욕으로 먼길을 떠납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난 직후 그랜트 저택에서 끔찍한 총기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네 명이 죽고 두 명이 큰 부상을 입은 그 사건으로 인해 셰리든은 경찰에 체포됩니다.

남자에 환장한 창녀, 근친상간을 일삼은 미성년자 등 갖은 오명을 쓴 채

그랜트 저택으로 돌아온 셰리든은 또다시 악몽 같은 나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그랜트 저택을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신은 그녀에게 결코 순탄한 삶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끔찍한 만남과 이별, 폭력과 도주, 노숙에 가까운 참담한 생활 등

셰리든은 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지옥과도 끝나지 않는 여름을 겪게 됩니다.

 

● ● ●

 

전작 여름을 삼킨 소녀를 읽지 않은 독자라도 대략의 정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넬레 노이하우스는 친절한 설명을 곳곳에 배치해놓았지만

사실 여름을 삼킨 소녀를 읽지 않은 독자는 셰리든과 그 주변 인물들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왜 셰리든은 홀로 멀고 먼 뉴욕으로 떠나려 했던 것인가?

그랜트 집안에서 벌어진 총기살인사건의 실체와 동기는 무엇인가?

또다시 집을 떠난 셰리든이 미국 전역을 떠돌며 갖은 고생을 감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녀에게는 제대로 된 친구, 제대로 된 사랑이 찾아오지 않는 것일까?

그녀는 왜 자꾸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같은 오판을 반복하는가?

 

아마 여름을 삼킨 소녀를 건너뛰고 이 작품을 먼저 읽은 독자는

이런 모호한 의문들과 더불어 셰리든을 이상한 소녀로 오해할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또 셰리든 가까이에서 애증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인물들의 진심이나 속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정이 허락한다면 여름을 삼킨 소녀를 읽은 후에 이 작품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미성년자인 채 작품에 등장한 셰리든은 작품 말미에는 21살에 이릅니다.

페어필드와 그랜트 저택을 떠난 후 그녀는 겨우겨우 삶을 이어가며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하지만 셰리든에게 좋은 사람을 만나는 행운 따위는 여전히 주어지지 않습니다.

소녀 시절에도 그랬듯 그녀 주위엔 겉과 속이 다르거나, 포악하거나,

그녀의 몸을 탐내기만 할 뿐인 저속하고 나쁜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녀의 여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성장통이라 치부하기엔 너무 가혹하고, ‘픽션이니까하고 넘기기엔 너무 리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넬레 노이하우스가 셰리든을 무조건 보호받아야 하고

동정 받아야 할 캐릭터로 그린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늘 손가락질 받는 사랑, 허락되지 않은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만 집착했고,

이전의 사랑에서 배운 교훈을 깡그리 무시하고 늘 감정이 가는 대로 자신을 내맡겨왔습니다.

언제나 온몸에 가시를 곤두세운 채 기꺼이 싸움을 받아들였고,

때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도, 진실을 은폐하기도 해왔습니다.

그런 그녀가 조금씩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할 줄 알게 되면서 성장하는 과정이

끝나지 않은 여름의 큰 줄기입니다.

 

후반부에 이르러 그녀 스스로 이렇게 자기 암시를 겁니다.

네 행복은 네 손에 달려 있어. 목표를 세우고 그걸 따라가. 언젠가는 이루어질 테니!”

굉장히 상투적이고 진부한 자기 암시입니다만,

여름을 삼킨 소녀부터 셰리든을 지켜봐온 독자 입장에선

이 상투적이고 진부한 말이 셰리든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과연 셰리든이 행복을 이루어내는지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야 알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롤러코스터 같은 스토리가 강점이었던 여름을 삼킨 소녀가 본방이었다면

끝나지 않은 여름은 그 인기에 힘입어 긴급 편성된 스페셜같은 느낌이었다는 점입니다.

초반 총기살인사건 직후 셰리든이 그랜트 저택에서 고난을 겪을 때만 해도 몰입도가 높았는데

그녀가 저택을 떠난 후로는 약간은 동어반복 같은 느낌을 자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여름을 삼킨 소녀를 다시 한 번 읽고 싶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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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5
우타노 쇼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지방 소도시의 대형 슈퍼마켓 보안책임자 히라타 마코토는

어느 날 물건을 훔치는 이십대 여성 스에나가 마스미를 붙잡는다.

평소라면 이유 불문하고 바로 경찰에 넘기겠지만,

신분증을 확인하고는 웬일인지 마음이 움직여 좀도둑을 눈감아주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은 친구가 되고, 서로의 마음속 얘기를 털어놓는다.

하지만 두 사람을 잇는 운명의 실타래는 잔혹한 결말로 치닫는데...

(출판사 책소개를 수정, 인용하였습니다)

 

● ● ●

 

우타노 쇼고의 작품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많은 선입관을 줍니다.

아마 그중에서도 반전이 끝내주는 미스터리라는 기대 섞인 선입관이 가장 클 것입니다.

번역하신 권남희 님의 후기를 보면 이 작품의 일본 원서 띠지에는

마지막 5페이지에서 세계가 반전한다!”라는 자극적인 카피가 있다고 합니다.

우타노 쇼고의 반전 섞인 미스터리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고조시킬 대목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기대감에 고양된 독자들에겐 약간의 배신감(?)만 던져줄 뿐입니다.

중후반부까지 이 작품의 메인 스토리는 비극적인 사고로 가족을 잃은 뒤

허무감에 빠져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한 중년 남성의 자조 섞인 독백 같기 때문입니다.

분명 어디쯤인가부터는 우타노 쇼고의 진면목이 등장할 것 같은데

분량이 얼마 남지 않은 지점까지도 도무지 반전과 미스터리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원서의 띠지대로 마지막 5페이지를 남겨놓고서야 우타노 쇼고 식 반전이 급전개됩니다.

다만 이전의 작품들과 다른 점이라면 깔끔하게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 아니라,

마음을 무척이나 착잡하게 만드는 양날의 검 같은 반전을 선사했다는 점입니다.

우타노 쇼고 스스로도 인터뷰를 통해 이 특이한 반전에 대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어느 쪽일 수도 있는 결말을 시도해보았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반응을 기다리는 저의 감정 역시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합니다.

저는 즐거운 것일까요, 두려운 것일까요?”

 

과거의 비극에 얽매여 현재를 포기한 채 살아가는 중년 남자가

어느 날 눈앞에 나타난 딸 또래의 여자를 만나 잠시 온기를 회복하지만,

그 애틋한 인연이 우연과 운명에 의해 악연으로 변질된다는 스토리는

사실 상투적이다 못해 평범하고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클리셰입니다.

하지만 우타노 쇼고는 거기서 딱 한발을 더 나아갑니다.

, 독자들이 .. 그렇게 된 스토리군.’하며 마음을 놓을 즈음

예상 밖의 전개를 통해 뒤통수를 치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어느 쪽도 옳다고 할 수 없는 딜레마를 툭 던져놓은 채 이야기를 마무리함으로써

독자에게 깊고 진한 여운을 남겨놓습니다.

그제야 , 우타노 쇼고답군!’이라는 안도(?)가 천천히 밀려들어옵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책을 막 덮었을 때보다 하루나 이틀쯤 지난 뒤에

진짜 여운과 먹먹함이 찾아온다는 점입니다.

비밀과 거짓말, 오해와 회한, 돌이킬 수 없는 시간 등

히라타와 스에나가를 힘들게 한 그 모든 것들이

마치 나의 일인 것처럼, 내 가까운 사람의 일인 것처럼 느껴지면서 말이죠...

 

개인적으로는 그의 작품 중 집의 살인 시리즈밀실살인게임등의 미스터리보다

늘 그대를 사랑했습니다’, ‘세상의 끝, 혹은 시작을 좋아하는데,

담백하거나 또는 심연 같이 어두운 사람의 마음을 잘 포착한 서사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역시 좋아하는 목록 상단에 오르긴 하겠지만,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앞부분의 장황하고 중복되는 묘사를 줄여

중편 정도로 발표했더라면 훨씬 더 단단한 작품이 됐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꽤 오랫동안 책장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던 작품이었는데,

마침 하루가 다르게 서늘해지는 가을에 읽은 덕분에 더욱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사족으로..

우타노 쇼고의 반전이 끝내주는 미스터리를 기대했다가 실망한 독자들을 위해

번역하신 권남희 님의 후기 중 한 대목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소설을 읽을 때는 작가에 대한 아무 선입견 없이, 작품에 대한 희망사항 없이,

머릿속을 깨끗이 비운 상태에서 읽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띠지의 카피 따위 당연히 무시하고.

나는 (중략) 우타노 쇼고에 대해 아직 그닥 정통하지 않아서인지,

뭐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이 다 있나 하며 진심으로 즐겁게 작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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