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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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출간된 요시다 슈이치의 많은 작품 가운데 정작 읽은 것은 몇 권 안 되지만,

그의 작품의 공통점은 줄거리는 희미해져도, 그 느낌만은 절대 잊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읽어 줄거리나 인물은 그 윤곽 밖에 기억나지 않더라도,

그 안에 배어있던 정서나 냄새(?)는 지금 막 책장을 덮은 것처럼 생생히 떠오른다는 뜻입니다.

악인분노를 제외하곤 대체로 순하거나 애틋한 느낌들이었는데,

현란하지도, 과한 수식도 없는 문장들이 전해준 그 느낌들은 무척이나 따뜻했습니다.

악인분노는 그와는 정반대로 적나라하게 그려진 악의들이 너무도 생생해서

스토리 자체보다 다 읽은 후에 느낀 섬뜩함으로 기억되는 작품들입니다.

 

이처럼 늘 느낌으로 어필했던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이라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역시 아무런 사전정보도 없이 첫 페이지를 열면서

(단지 제목 때문에) 덴카와 아야의 태양의 노래같은 애틋-따뜻 스토리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작품이 맷 데이먼의 본 시리즈를 뺨치는,

그야말로 초인적인 캐릭터와 비현실적인 스토리로 버무려진 첩보물임을 깨닫곤

책 표지에 적힌 작가의 이름을 새삼 다시 확인해야 했습니다.

 

솔직히 할리우드의 정교하고 거대한 스케일의 첩보전에 익숙해진 상황에서

동아시아를 무대로 최첨단 우주 태양광 발전 시스템을 둘러싼 국제 첩보전이라는 카피는

아무리 요시다 슈이치의 팬이라 하더라도 일단은 주저하게 만들 만한 황당한문구입니다.

중국과 일본이 주연이고 한국도 조연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총도 맘대로 못 쏘는 아시아를 무대로 무슨 대단한 첩보전이 가능하겠어?’라는

일종의 선입견이 들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요시다 슈이치가 만들어낸 한중일 합작 아시아 판 첩보전

본 시리즈처럼 요란한 총격전과 액션 장면 없이도 충분한 재미와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빈틈없이 정교한 설계도, 초인적이지만 분명 어딘가 존재할 것 같은 리얼한 캐릭터,

말빨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하는 순도 100%의 정보전, 적절하고 매력적인 반전 등

첩보물의 미덕도 골고루 갖추고 있습니다.

우주 태양광 발전 시스템이라는 소재도 알고 보면 눈앞에 다가온 현실적인 소재라

결코 공상 속의 이야기로 보이진 않습니다.

물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놀라운 공간 이동이라든가,

앉은 자리에서 사방의 정보를 습득하는 만능 첩보 능력,

, 거의 슈퍼맨 급 스펙을 갖춘 요원들의 다재다능함은 가끔씩 위화감을 줍니다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입니다.

 

첩보물이라는 외양에도 불구하고 요시다 슈이치만의 힘도 분명 살아있는 작품입니다.

그 힘은 그저 총 잘 쏘고, 발차기 잘하는 액션 히어로 대신

그만의 정서가 고스란히 녹아든 상처투성이 캐릭터들을 만들어냈다는 점에 근거합니다.

부모에게 비참하게 버려진 후 조직에 의해 피도 눈물도 없는 요원으로 키워진 첩보원들,

약자로만 살아온 과거를 버리고 강하게 살기 위해 첩보원이 되기를 꿈꾸는 여자,

작전을 위해 위장된 사랑을 택했지만, 그로 인해 평범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된 스파이 등

독자에게 애틋하거나 응원하고 싶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끌어나갑니다.

요시다 슈이치는 이 작품에 관해 목소리(캐릭터)를 희생하고 스토리를 살렸다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스토리만큼이나 캐릭터가 분명히 살아있는 작품이란 것이 제 생각입니다.

 

낯설긴 했지만 이야기꾼 요시다 슈이치의 새로운 면모를 만난 것 같아 반가웠고,

이만한 캐릭터와 배경 설정이라면 시리즈로 만들어도 괜찮겠다는 기대감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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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의 벌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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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자위대에 납품할 최신예 거대 전투 헬기 B’가 최종 시험 비행을 앞두고 피랍된다.

B’는 대량의 폭발물을 실은 채 천공의 벌을 자처하는 범인의 무선 원격 조종에 의해

후쿠이 현 쓰루가 시의 원전 바로 위 800미터 상공을 선회한다.

범인은 일본 전역의 원전을 모두 폐기하지 않으면 헬기를 추락 시키겠다고 협박한다.

그리고 자신의 요구 사항과 현장 상황을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할 것을 요구한다.

남은 시간은 8시간. 일본 열도는 순식간에 일촉즉발의 공포에 휩싸인다.

헬기의 연료는 시시각각으로 소진돼 가고, 원전 주변 주민들의 엑서더스가 벌어지는 가운데

정부와 자위대, 경찰, 원전 관계자들이 우왕좌왕하며 범인의 요구에 대책 없이 끌려 다닌다.

(출판사 책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원전을 소재로 해서 그런지 남의 이야기처럼 그저 재미로만 읽히지는 않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집필된 1995년에만 해도 이 이야기는 일본에서조차 공상으로 치부됐을지 모르지만,

세상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후쿠시마 원자로의 종말을 똑똑히 지켜봤고,

올해 경주 지진으로 한국에서도 원전에 대한 두려움이 생생한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군가 원전을 볼모삼아 다른 원전의 폐기를 주장한다면

과연 사람들은 그 누군가를 지지할까요, ‘안전한 원전을 외치는 정부를 지지할까요?

이 딜레마가 천공의 벌전체를 지배하는 주제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원전에 대한 찬반론을 비교적 중립적인 위치에서 조망합니다.

당연히 원전은 이고 원전은 이라는 이분법 따윈 전개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에는 없으면 곤란하지만 똑바로 바라보기는 싫은 게 있어.

원전도 그런 것들 중 하나야.”라는 문장은 이런 관점을 잘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원전 자체가 가진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그런지,

독자는 천공의 벌을 읽는 내내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원전을 볼모로 삼은 범인을 응원해야 할지,

그 범인을 잡기 위해 분투하는 자들을 응원해야 할지, 말이죠.

 

사실 범인을 잡기 위해 분투하는 자들모두가 원전 세력은 아닙니다.

그들은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

즉 헬기의 추락으로 원전이 파괴되고 사람들이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 애쓸 뿐,

원전에 대한 찬반의 철학까지 작가로부터 부여받진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심정적으로는 원전에 반대할 수도 있지만,

현실에선 참극을 막아야한다는 사명감으로 바쁘게 움직인다고 할까요?

독자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깊이 이입되어 이야기를 따라가게 됩니다.

 

더불어, 마지막 장까지 독자를 궁금하게 만드는 것은 범인들의 의도입니다.

일찌감치 정체를 드러낸 범인들은 아무리 봐도 원전의 투사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투사로 설정됐다면 이야기의 힘도 떨어지고, 뻔한 블록버스터에 머물렀겠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원자로는 인류에게 미소를 보내는가 하면 송곳니를 드러낼 수도 있다.

미소만을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다. 침묵하는 군중이 원자로를 잊도록 해서는 안된다.”

라는 메시지를 통해 범인들의 캐릭터와 의도를 훨씬 고급스럽게설정하고 있습니다.

 

원전에 관한 전문적 지식이 꽤 많이 등장하지만 그리 골치 아프진 않습니다.

7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지만 금세 완독이 가능한 작품입니다.

히가시노의 작품답게 쉽고 간결한 문장들과 선명한 캐릭터로 이뤄져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적잖이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이유 때문에 얕고 가볍게 읽히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물론 그것이 히가시노 작품의 특징이긴 하지만,

(또 이 작품이 거의 20년 전에 집필된 점을 감안하더라도)

좀더 묵직한 여운이 남았더라면 작품의 의미가 더 커지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그런 여운을 느낄 틈도 없이 이야기를 (과할 정도로) 급하게 마무리한 것도

아쉬움을 남기게 한 큰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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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파수꾼
켄 브루언 지음, 최필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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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아이리시 하드보일드 누아르라 지칭한 출판사의 소개글은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아일랜드, 하면 떠오르는 어딘가 불온하거나 음울한 기운이 작품 전반에 녹아있고,

주인공 잭 테일러의 캐릭터는 냉소적이다 못해 신랄하기까지 합니다.

얄미울 정도로 톡톡 쏴대는 비아냥 섞인 말투는 상대에게 말할 수 없는 모욕감을 주지만

독자에겐 짜릿한 승리감 같은 기분을 선사하여 이내 호감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조금은 수다스럽고 경망스럽기도 한 잭 테일러를 정통 하드보일드 캐릭터로 볼 순 없지만,

그의 언행이나 그가 처한 환경,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지켜보면

묘하게도 알코올중독에 걸린 필립 말로가 연상되곤 합니다.

누아르라는 부분 역시 독자에 따라 의견이 갈릴 수 있는데,

작품 전체를 놓고 보면 분명 그런 냄새가 물씬 풍기지만,

문장 하나하나, 챕터 하나하나를 뜯어놓고 생각해보면

과연 누아르라 불릴 만한가, 라는 점에서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초반부는 경쾌한 속도감과 함께 잭 테일러의 매력이 마구마구 발산됩니다.

냉소와 비아냥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여자라면 무조건 들이대고 보는 한량 기질,

고위공직자를 눈 하나 깜짝 않고 엿 먹이는 과도한 정의감,

술에 관대한 아일랜드 경찰마저 두 손 들게 만드는 두주불사,

그리고 결국 술로 인해 웬만해선 잘리지 않는다는 아일랜드 경찰에서 쫓겨난 뒤

단골 술집에서 의뢰인을 찾는 사립탐정이 된 발군의 반골 캐릭터가 잭 테일러입니다.

 

그런 그에게 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달라는 미모의 의뢰인이 찾아옵니다.

드디어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되는구나, 싶었는데,

왠지 이야기는 자꾸 외곽으로만 돌뿐, ‘탐정 잭 테일러의 활약은 좀처럼 전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잭 테일러 주변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늘어나고,

사건은 점점 이야기의 중심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며,

알코올중독의 진창에서 잠시 헤어났다가 다시 그 진창 속으로 빠져드는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어딘가 수상쩍기만 한 잭의 술친구 서튼,

딸의 죽음의 진상을 밝혀달라면서 잭과 묘한 관계로 발전하는 의뢰인 앤,

길거리 노숙자면서 잭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패드릭,

잭에게는 큰형 또는 아버지 같은 존재인 술집 바텐더 숀 등

잭의 주변은 어딘가 음흉하거나 묘하거나 이방인 같은 존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무엇보다 작품을 읽는 동안 여러 번 들었던 생각은

이 작품이 스릴러 또는 출판사 소개대로 아이리시 하드보일드 누아르라는 장르물이라기보다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연상 시키는 작품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경찰에서 쫓겨난 뒤 푼돈 수준의 수임료로 사건을 맡아 생계를 이어가고,

그나마 안식을 주던 집에서도 주인에게 쫓겨나는가 하면

힘겹게 끊은 술의 유혹에 다시 넘어가 폐인이 되기를 자처한 끝에

사건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도리어 그의 발목을 잡는 지경에 이릅니다.

 

물론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주인공 니콜러스 케이지가

죽기 위해 술병을 들고 라스베가스를 찾는 것과는 반대로

잭은 살기 위해 아일랜드를 떠나 런던으로 갈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와 분위기는 냉소적인 잭이라는 차이점만 빼곤

거의 비슷한 느낌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아일랜드 스릴러에 대한 기대감이 컸기 때문이었는지

개인적으론 저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 작품이었지만,

켄 브루언이 창조한 잭 테일러 이야기가 이 작품을 시작으로 11편이나 집필된 걸 보면

이후 잭이 알코올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탐정이 됐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제 첫 편이 소개된 터라 앞으로도 국내에 후속작들이 계속 소개될지 모르겠지만

잭 테일러가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며 좀더 사건에 집중하는 탐정으로 활약한다면

첫 편에서의 아쉬움을 털어낼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켄 브루언의 대표작 런던대로를 오래 전 구매해놓고 책장에만 고이 모셔두고 있었는데,

밤의 파수꾼으로 첫 인연을 맺었으니, 이제 조만간 쌓인 먼지를 털어내야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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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 넥스트 도어
알렉스 마우드 지음, 이한이 옮김 / 레드박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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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남부의 허름한 아파트 23번지.

그곳에는 고독한 독신남 토머스, 친절한 이란인 망명자 호세인, 은둔형 외톨이 제라드,

가출 소녀 셰릴, 그곳에서 칠십 평생을 산 베스타, 그리고 도망자 콜레트까지 6명이 산다.

우연히 그곳에 이사 오게 된 콜레트는 첫날부터 음침한 기운을 느끼며 떠나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살인사건에 연루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웃들과 한배를 타게 된다.

그런데 이들 중 한 명은 자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연쇄 살인마!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그 무엇도 예측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과연 이들은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까?

(출판사 책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내 옆집에 사는 연쇄살인마라는 설정만으로도 일단 눈길을 끄는 작품입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면서도 이웃의 이름은 물론 얼굴조차 모르는 세태 속에

낯선 이웃이 연쇄살인마로 밝혀진다면 그야말로 식은땀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하지만 작품 속 허름한 아파트에 함께 사는 이들은 의외로 잘 어울리는 이웃들입니다.

(물론 등장만 할 뿐 얼굴 한 번 제대로 안 비치는 기이한 인물이 있긴 합니다만..)

친근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나름 서로에게 관심 정도는 갖고 있다고 할까요?

이들에겐 세상과 거리를 두려 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사장의 돈을 들고 도망친 끝에 런던 남부에 숨어든 주인공 콜레트,

망명을 신청했지만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은 중동 출신 이방인 호세인,

종일 클래식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채 한 발짝도 집에서 나오지 않는 제라드,

청소년보호소를 빠져나와 15살의 나이를 숨긴 채 좀도둑질로 연명하는 셰릴,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임대아파트에서 하루하루 늙어가는 노파 베스타 등...

 

이야기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됩니다.

제목대로 이 6명 안에 숨어있는 연쇄살인마의 잔혹하고 엽기적인 범죄행각이 하나이고,

치매에 걸린 노모 때문에 추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런던으로 돌아온 콜레트가

이웃들과 함께 살인사건의 공범으로 전락하는 어이없는 사건이 또 하나입니다.

, 자신이 수집한 희생자들을 엽기적인 방식으로 사랑하는 연쇄살인마의 이야기와

경찰과 마주쳐선 안 되는 입장 때문에 살인사건의 공범을 자처한 이웃들의 이야기가

어딘가 불온한 기운을 내뿜는 아파트를 무대로 펼쳐집니다.

 

사실 연쇄살인마와 이웃들의 이야기는 별개의 이야기처럼 전개됩니다.

물론 후반부에 가서 두 이야기가 접점을 갖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분량 면에서도 이웃들의 이야기에 좀더 많은 양이 할애됐고,

연쇄살인마의 살인동기나 이웃들과의 긴장감이 명쾌하게 묘사되지 않은 탓도 있는데다

결정적으로는, 작가가 챕터마다 여러 이웃들의 시점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그들의 기구한 사연들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연쇄살인마를 앞세운 스릴러라기보다

런던 남부의 허름한 아파트에 사는 이방인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협소하고 허름한, 일종의 밀실의 느낌까지 풍기는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온갖 잔혹하고 기이한 사건들에 대한 세부적 묘사라든가

감당하기 힘든 사건에 말려든 여러 캐릭터의 불안정한 심리묘사는

이 작품의 스릴러로서의 미덕을 충분히 살려주는 요소들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작품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아무래도 번역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2015 매커비티 상 최고의 미스터리 소설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이야기의 밀도나 캐릭터의 매력 모두 괜찮았지만,

읽는 내내 직역 또는 비문처럼 읽힌 문장들 때문에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분명 한국말인데 아무리 읽어도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공간 설명이나 심리묘사에서 그런 경우가 많았는데,

출간 전에 좀더 꼼꼼하게 교정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띠지에는 이 작품의 영화화가 결정됐다고 하는데,

밀실 같은 허름한 아파트에 사는 이웃들의 이야기와 엽기적인 연쇄살인마의 이야기가

왠지 책보다는 영상에서 좀더 제대로 힘을 발휘할 것 같다는 기대가 듭니다.

예정대로 제작되고 국내에도 개봉된다면 꼭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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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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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은 피 냄새에 잠에서 깬다. 발작이 시작되기 전 그에겐 늘 피비린내가 먼저 찾아온다.

유진은 매일 먹어야 하는 ''을 며칠간 끊은 상태였고,

늘 그랬듯이 약을 끊자 기운이 넘쳤고, 그래서 전날 밤 '개병'이 도져 외출을 했었다.

(아침이 되어) 일어난 유진은 피투성이인 방안과, 피범벅이 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핏자국을 따라, 아파트 복층에 있는 자기 방에서 나와 계단을 지나 거실로 내려온 유진은

끔찍하게 살해된 어머니의 시신을 보게 된다.

(출판사 책 소개글 인용)

 

● ● ●

 

정유정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는 독자라면

이 작품의 정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원고 형태로 읽었더라도

금세 .. 정유정이겠군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처럼 세고, 독하고, 불편합니다.

특히 종의 기원이라는, 어딘가 음모론적인 냄새를 풍기는 제목은 평범한 진화이상의 것,

즉 피로 얼룩진 진화에 관한 이야기라고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26살의 청년 한유진은 어머니와 이모라는 두 여자의 궁둥이에 깔린 방석처럼 살아왔습니다.

의사인 이모는 7살의 유진으로부터 평범하지 않은 면모를 발견했고,

어머니는 이모의 강요(?)에 의해 유진의 성장기를 전방위적으로 통제해왔습니다.

간질 발작을 억제하는 약 때문에 유진의 삶은 엉망인 채 영위됐고,

어릴 적 가족 여행 때 아버지와 형을 잃은 상처는 내내 그의 무의식 속에 잠재해있습니다.

그는 자신만의 탈출구, 즉 수시로 옥상의 비상계단으로 빠져나가

미친 듯 거리를 달리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해방구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깊숙한 곳에 내재돼있던 의 기운을 발견합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피웅덩이 속에서 발견한 어머니의 시신을 처리하며

유진 스스로 누가?’, ‘?’라는 질문의 해답을 찾는 현재의 이야기가 한 축이고,

어머니의 일기를 통해 의식과 무의식 속에 숨어있던 과거사를 회상하는 것이 또 한 축입니다.

그 과정에서 현재와 과거에 걸쳐 수많은 피의 향연이 벌어지고,

유진은 때론 긍정하고, 때론 부정하거나 분노하며 자신의 진화에 혼란을 느낍니다.

 

작가 스스로 고백했듯, 예전의 작품들에서 이 조연에 머물렀다면

악의 기원에서의 은 주연의 자리에 등극하여 좀더 강한 이입감을 전해줍니다.

작가는 내 안의 악이 어떤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점화되고,

어떤 방식으로 진화해 가는지 그려 보이기 위해라고 1인칭 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작가의 의도대로 주체로 설정된 은 예전의 객체였던 들과는 무게감이 전혀 다릅니다.

 

다만, 두 가지 점에서 아쉬움이 느껴졌는데,

우선은 전작들에 비해 정유정 식 스토리텔링이 파괴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심플하게 이야기하자면 의도에 너무 힘을 준 스토리가 힘을 얻지 못했다고 할까요?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라든가

피식자에서 포식자로 변화해가는 과정, 즉 평범했던 한 청년이

살인자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악인의 탄생기라는 작가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 의도에 함몰되어 독자들이 기대한 정유정 식 스토리의 재미가 반감됐다는 느낌입니다.

결과적으로, 주인공 유진의 복잡다단한 심리를 묘사하기 위해 너무 많은 분량이 할애됐고,

그 때문에 지금껏 정유정의 작품을 읽으면서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지루함이

몇 번씩이나 거듭되곤 했습니다.

 

두 번째는, 의도 자체에 대한 애매모호함인데,

평범했던 한 청년이 살인자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악인의 탄생기라는 의도와

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이라는 의도가 상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 즉 한유진의 악은 타고난것이라는 느낌이 강했는데,

천천히 복기해보면 작가는 평범했던 한 청년이 살인자로 태어나는 과정’,

, 어떤 계기로 내재된 이 발현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작품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었고,

그래서 어딘가 위화감 또는 애매모호함이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작가는 종종 유진에게 자신의 행동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망각을 부여하곤 하는데,

어쩌면 이런 모호함 유진의 이 타고난 것인지 발현된 것인지 을 뭉뚱그리기 위한

일종의 의도적 장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정유정의 작품이라 반갑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아쉬움도 많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독자들이 기대했던 정유정 작품의 미덕 세고, 독하고, 불편한 정서 은 살아있지만

손에 진땀나게 하는 극강의 스토리는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반 독자의 지나친 기우일지도 모르겠지만,

작품 곳곳에서 전작보다 심오하게 을 다뤄야 한다는 부담감이 느껴진 것도 사실입니다.

정유정의 신작이라면 언제든 무조건 찾아 읽겠지만

그녀만의 스토리텔링의 힘이 느껴지는, 그런 작품으로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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