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코다 이발소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로드 / 201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우울할 땐 오쿠다 히데오를 읽어라!”

공중그네남쪽으로 튀어!’ 같은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모두 동의할 만한 문장입니다.

사실 왁자지껄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유쾌한 에피소드라는 출판사 책 소개를 접하곤

시골 판 공중그네훗카이도 판 남쪽으로 튀어!’를 기대했는데,

의외로 무코다 이발소의 정서는 제법 차분하고 정적입니다.

그것은 이야기의 주 무대인 훗카이도의 작은 마을 도마자와의 분위기와도 흡사합니다.

 

한때 탄광산업으로 번창했지만 이젠 인구절벽에 가로막힌 조그만 시골 마을 도마자와.

음식점마저 주 3일만 영업할 뿐이고, 차도에서 차 소리를 듣기란 무척이나 드문 곳이며,

젊은이들은 인근 대도시 삿포로나 멀리 도쿄로 빠져나가고,

변화 없는 삶에 익숙해진 중장년들만이 겨우겨우 가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곳입니다.

 

젊은 시절, 도시 직장생활에 실패하고 귀향하여 가업인 이발소를 이어받은 무코다 야스히코는

또래의 친구 세가와, 다니구치 등과 함께 하루하루가 엇비슷한 날들을 보내는 중년입니다.

하루에 1~2명에 불과한 손님을 위해 야스히코는 아침부터 이발소 문을 열고 기다립니다.

고색창연한 삼색등이 걸린 그의 이발소는 도마자와의 사랑방이기도 해서,

친구들은 물론 면사무소 직원이나 동네 노인들까지 수시로 드나들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마을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나누곤 합니다.

 

설 명절과 여름 축제를 제외하면 1년 내내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은 도마자와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벌어지고 외지의 사람들이 드나듭니다.

무코다 이발소에 실린 6편의 단편은 그 사건들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멀쩡히 다니던 대도시의 직장을 때려치우고 갑자기 가업을 잇겠다는 아들 가즈마사 때문에

한편으론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겹치는 야스히코의 고민 (무코다 이발소),

병든 노인과 가족이 감당해야 하는 우울한 현실과 유쾌한 반전 (축제가 끝난 후),

중년의 노총각들의 고민과 프라이버시 없는 시골 공동체의 아이러니 (중국에서 온 신부),

귀향한 40대 여자가 차린 새 술집 때문에 벌어지는 도마자와 남자들의 해프닝 (조그만 술집),

유명 여배우 주연의 영화촬영 때문에 잠시 열광의 도가니에 빠진 도마자와 사람들 (붉은 눈),

도쿄에서 성공한 모범 청년이 사기극의 주범으로 밝혀지며 벌어지는 마을의 혼란 (도망자)

모두 6편의 작품이 수록돼있습니다.

 

인구절벽, 고령화, 세대 간의 갈등, 허울뿐인 행정, 관광객 유치를 위한 무리한 투자 등

도마자와가 겪고 있는 문제는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은 전형적인 지방 소도시들의 문제입니다.

도마자와는 왁자지껄하지도 않고, 유쾌한 에피소드가 난무하는 곳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사건이 없을 리도 없습니다.

다만 그 사건이란 대도시의 그것과는 양상 자체가 판이하게 다릅니다.

 

옆집 숟가락 개수와 앞집 장남의 시험성적까지 다 알고 있는 도마자와에서는

기쁨과 슬픔과 분노는 엄청난 속도로 전염됩니다.

도시로 나가 성공한 자식의 이야기는 동네방네 퍼뜨려야 할 자랑거리지만,

마흔이 되도록 결혼 못한 남자나, 범죄자가 된 아들을 둔 부모는

도마자와를 떠나지도 못한 채 이웃들의 가혹한 시선을 견뎌내야 하는 운명에 처합니다.

새로 연 술집의 예쁜 마담은 온 동네 남자들을 들뜨게 한 끝에 주먹다짐까지 벌이게 만들고,

중국에서 돈 주고 데려온신부는 과도한 호기심과 빗나간 애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가족 같은 이웃이라는 선의가 때론 가족 같아서 괴로운 이웃으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쿠다 히데오는 미래도 없고, 변화도 없는 도마자와를 배경으로

그래도 이웃은 고마운 존재이고, 마을은 우리의 삶의 터전이란 따뜻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특히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무코다 야스히코는

언뜻 보면 누구보다 도마자와의 미래를 체념한 비관론자처럼 행세하지만

실은 도마자와의 모든 일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중재자 역할을 하는 인물입니다.

도마자와에서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사람들은 야스히코를 찾아옵니다.

해법을 내놓으라고 닦달하기도 하고, 사건을 일으킨 사람을 만나보라고 등을 떠밀곤 합니다.

내키지 않지만 결국 중재와 화해와 해법을 내놓는 것은 사람 좋은 이발사 야스히코입니다.

공중그네의 이라부가 유쾌한 해결사라면,

무코다 이발소의 야스히코는 현명한 중재자라고 할까요?

어딘가 비밀스러운 도쿄 파견관료 사사키가 이라부처럼 맹활약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외지인이 도마자와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애초 이 이야기의 주제와 어울리지 않는데다

결국 희망고문이나 비현실적인 해피엔딩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닫기도 했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소재와 사회적 이슈를 다루고 있지만

무코다 이발소는 지나치게 진지하거나, 지나치게 희화화된 태도 대신

오쿠다 히데오 특유의 문장과 캐릭터를 통해 도마자와 사람들에게 애정과 격려를 보냅니다.

언제까지나 무코다 이발소, 세가와 주유소, 다니구치 전기공업사가 존재하기를 기원하고,

옆집 할아버지가 아프거나, 이웃의 아들이 결혼을 못하거나, 심지어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결국엔 도마자와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돕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웃음이 나기도 하고, 가슴이 훈훈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 도시인의 근거 없는 시골 예찬이라 비난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만한 눈높이의 시선이라면 충분히 공감과 응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공중그네처럼 유쾌하거나 소동이 난무하지도 않고,

남쪽으로 튀어!’처럼 유머와 풍자가 가득하지도 않지만,

무코다 이발소는 따뜻하면서도 안타까움이 배어있는 도마자와의 정서와 함께

현실 직시라는 주제 역시 충실히 구현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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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세상
톰 프랭클린.베스 앤 퍼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1927년 봄, 역대 최악의 폭우로 범람 위기에 직면한 미시시피 강 인근의 작은 도시 하브나브.

이곳에 밀주단속원 햄과 잉거솔이 밀주 제조업자를 찾아내기 위해 찾아옵니다.

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아기를 떠맡게 된 잉거솔은

하브나브에서 입양가정을 찾던 중 딕시 클레이라는 여인과 만나게 됩니다.

문제는 그녀와 그녀의 남편 제시가 이 지역 최고의 밀주 제조업자이자 공급책이란 점입니다.

한편으론 밀주제조업자를 찾아내야 하고,

한편으론 정부 보상을 노리고 제방을 폭파하려는 자들을 저지해야 하는 심각한 상황 속에서

잉거솔은 본연의 임무 대신 딕시 클레이와 아기에게 온 신경을 쏟습니다.

덕분에, 밀주를 앞세워 소도시를 장악한 딕시의 남편 제시의 치명적인 음모도,

제방을 폭파시켜 이익을 보려는 자들의 끔찍한 계획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 ● ●

 

톰 프랭클린의 미시시피 미시시피를 인상 깊게 읽은 덕분에

1927년 수몰 위기에 빠진 미시시피 강 인근의 소도시를 무대로 한 이 작품에 단번에 관심이 꽂혔습니다.

특히 능력 있는 베테랑 밀주단속원, 위스키를 앞세워 소도시를 장악한 밀주제조업자,

제방 폭파를 둘러싸고 갈라선 주민 등 등장인물들 역시 흥미롭게 설정된 것 같아서

미시시피 미시시피이상의 스릴러로서의 매력을 기대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작품은 역사물이면서 미스터리와 스릴러를 차용하긴 했지만

본류는 작품 속 여주인공 딕시 클레이의 독백대로 가족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살인과 밀주 제조, 모래포대 쌓기와 파괴 공작원,

다이너마이트와 폭우에 관한 이야기이다.

(중략) 어울리지 않는 남편과 결혼해서 날마다 조금씩 죽어갔던 여자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자신이 투명인간 같다고 생각했던 남자의 이야기이기도 해.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다.

우리가 어떻게 가족이 되었나를 말해주는 이야기이지.”

 

말하자면 자연의 힘과 인간의 탐욕이 동시에 빚어낸 최악의 참사를 겪어낸 뒤

몸과 마음은 비록 만신창이가 됐지만 결국 사랑의 힘으로 가족을 이뤄낸 이야기라고 할까요?

거기에 절묘하게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서사를 끼워 넣음으로써

작가는 영미권 특유의 가족애를 강조한 스릴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만, ‘미시시피 미시시피의 매력을 기대했던 독자에겐 좀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

다 읽은 후에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남자 주인공 잉거솔의 챕터는 톰 프랭클린이,

여주인공 딕시 클레이의 챕터는 그의 아내 베스 앤 퍼넬리가 집필했다고 합니다.

읽다 보면 곳곳에서 문장의 색깔이나 페이지 넘어가는 속도가 차이나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된 셈입니다.

아무래도 잉거솔의 챕터가 사건 중심으로 전개되고,

딕시 클레이의 챕터가 심리 중심으로 집필된 탓에 그렇게 읽힐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현재의 이야기만큼이나 두 사람의 과거사가 비중 있게 그려지고 있는데,

그로 인해 초반부가 느린 템포를 지니게 된 것은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아무튼...

밀주와 흑백 갈등과 전근대성이 어지럽게 뒤얽혀있던 1927년을 배경으로

두 부부 작가는 상상을 초월한 폭우와 홍수, 금주법이 몰고 온 빛과 그림자,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사상 최악의 참사, 그리고 그 안에서 우연과 운명 속에 피어난 사랑을

때론 스릴러처럼, 때론 대하소설처럼, 때론 멜로나 가족소설처럼 다양한 형태로 그려냈습니다.

 

주류 서사 외에도 당시의 풍경이나 풍습에 대한 꼼꼼한 묘사가 눈길을 끌었는데,

건축, 패션, 음악, 교통 등 마치 눈앞에 펼쳐져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진

1927년 미국 남부 소도시의 민낯은 때론 이야기 자체보다도 매력적으로 읽히는 부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톰 프랭클린 식의 빠르고 묵직한 서사를 좋아하는 편이라

베스 앤 퍼넬리의 시적인 언어로 집필된 부분들이 약간은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밀주와 폭우와 살인이 뒤엉킨 기울어진 세상을 헤쳐 나온 잉거솔과 딕시의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흥미로운 20세기 초반의 미시시피의 묘한 분위기와 잘 어우러져 있어서

혹 스릴러를 기대했다가 실망한 독자라도 충분히 빠져들 만한 힘과 매력을 지녔다는 생각입니다.

 

(마지막 장을 다 읽고 다시 표지를 살펴보니

거대한 물결 속에 처연히 노를 젓는 한 사람의 모습이 새삼 더 애틋하게 보였습니다.

이야기를 잘 함축한, 최근 들어 손에 꼽을 만한 표지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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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오어 데스 스토리콜렉터 50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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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인간에게 한치 앞이라도 내다볼 줄 아는 능력이 있다면

세상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겠죠.

행복과 불행은 한치 앞을 못 보는 인간을 조롱하듯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치곤 합니다.

그리고 찰나 같은 한순간에 그 인간의 미래를 훅 바꿔놓습니다.

어처구니없거나 믿어지지 않는 방식으로 말이죠.

 

라이프 오어 데스의 주인공 오디 파머는 찰나 같은 순간에 들이닥친 행복과 불행덕분에

삶 자체가 누더기처럼 조각조각, 또는 롤러코스터처럼 업다운을 거듭해온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가 만끽할 수 있었던 행복은 너무 짧았고,

그가 감내해야 했던 불행은 너무도 크고, 깊고, 길었습니다.

만일 오디 파머에게 한치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었다면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불행이란 영원히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너무도 안타깝고 애틋한 일입니다.

 

● ● ●

 

10년 전, 현금수송차 강도사건으로 700만 불이란 거액이 사라진 현장에서

오디 파머는 경찰의 총격에 머리를 다친 채 생포됐습니다.

공범들은 죽거나 도주했고, 700만 불은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모두가 700만 불의 행방을 궁금히 여겼고, 오디만이 답을 알고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수감 기간 내내 오디는 갖은 폭력과 협박에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러던 그가 만기 출소 하루를 앞두고 홀연히 교도소를 탈출합니다.

상원 의원과 유력인사 등 거물급들이 나서서 오디의 행방을 뒤쫓는가 하면,

연방수사국 요원은 물론 10년 전 사건 현장에 있던 보안관까지 추격전에 나섭니다.

목숨을 건 오디의 탈주극이 전개되는 동안

그를 영원히 묻어버리려는 자들과 그의 진실을 알아내려는 자들이 대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10년 전 강도사건의 충격적인 실체가 서서히 드러납니다.

 

● ● ●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긴박하게 전개되는 오디의 탈주극이 하나이고,

유년기부터 현재까지 행복과 불행이 교차했던 오디의 삶에 대한 회고가 나머지 하나입니다.

두 이야기는 10년 전 오디를 파멸시켰던 강도 사건의 진실에서 교차합니다.

 

두 이야기는 전혀 다른 뉘앙스의 서사들입니다.

전자가 전형적인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다면,

후자는 평범하고 모범적인 한 청년이 어떻게 밑바닥으로 추락했는지,

그 밑바닥에서 만난 한 여인을 향해 얼마나 진실하고 깊은 사랑을 쏟아 부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사랑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됐는지 등 묵직한 연대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릴러 대가들이 만들어낸 매력적인 서사의 공통점은

단지 사건에만 몰입하지 않고 삶의 무게와 희로애락을 잘 버무려냈다는 데 있습니다.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가 그렇고,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가 그렇습니다.

그들에 비해 라이프 오어 데스의 오디 파머는 지극히 평범하기 그지없는 캐릭터지만

그의 삶의 궤적이 스릴러와 만나면서 일으킨 화학반응의 강도는 결코 그들에 못지않습니다.

그만큼 오디 파머의 희로애락이 리얼하고 치열하게 그려졌다는 뜻입니다.

스티븐 킹이 범죄소설들이 자꾸 잊어버리는 영혼을 가진 스릴러라고 호평한 것도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이리라 생각됩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같은 이유 때문에 작가의 대표작인 조 올로클린 시리즈에 비해

페이지가 넘어가는 속도나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스릴러 부분에서는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긴박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오디의 삶을 회고하는 부분에서는 그가 겪은 모든 감각과 감정들을 디테일하게 그리기 위해

적잖은 분량의 문장들이 동원되기 때문입니다.

그가 바라보는(바라봤던) 풍경들, 그의 가슴을 스치는(스치고 갔던) 설렘과 고통들,

그리고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해 운명처럼 겪어야만 했던 행복과 불행들...

 

속도감 있는 스릴러를 기대했던 독자에겐 좀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는 대목들이지만

결말부에 가서 독자를 울컥하게 만들고 긴 여운을 드리우게 만드는 것은

결국 작가가 오디 파머라는 한 개인의 삶과 사랑에 대해 정성스레 쌓아온 서사의 힘입니다.

저 역시 좀처럼 잘 넘어가지 않는 페이지 때문에 예상보다 하루이틀 시간이 더 걸렸지만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는 왜 그 많은 분량들이 필요했는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오디 파머가 겪은 찰나의 순간에 들이닥친 불행은 그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일입니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겪어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겪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운명입니다.

어쩌면 이 서평을 채 마무리 짓기도 전에 제게 그 순간이 닥칠 수도 있는 일이겠죠.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고, 다 읽은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이야기처럼만 읽힌 여느 스릴러보다 큰 공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라이프 오어 데스는 한순간에 종이 한 장 차이로도 갈릴 수 있는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운명을 단적으로 잘 표현한 제목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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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읽는 남자
안토니오 가리도 지음, 송병선 옮김 / 레드스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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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역사소설가가 중국 송나라 때의 법의학자 송자를 주인공으로 쓴 역사소설입니다.

태생(?) 자체가 무척 특이한 작품입니다.

산업공학을 전공한 현직 공대 교수면서 역사소설가라는 작가의 이력은 더욱 이채롭습니다.

 

시체 읽는 남자는 제목 그대로 법의학을 다룬 작품입니다.

역사상 최초의 법의학서라 불리는 세원집록을 집필한 송자는

의술 자체가 천대받던 13세기 송나라에서 중국 최고의 명판관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입니다.

(비록 대부분 픽션이긴 하지만) 작가는 고난으로 얼룩진 송자의 젊은 시절부터 시작하여

수없이 많은 죽음의 위기를 넘기면서 기어이 판관의 자리에 오르는 그의 성장-성공 스토리를

법의학 + 법정 미스터리라는 긴장감 넘치는 서사 속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송자가 겪는 젊은 날의 시련은 좀 지나칠 정도로 혹독합니다.

배신, 사기, 모함 등으로 인해 온 가족을 잃는가 하면,

고향을 떠나 도망자 신세가 된 뒤에는 추격자를 뿌리쳐야 하는 위기의 순간들을 넘깁니다.

한가닥 희망을 안고 도착한 도성에서는 예기치 못한 좌절을 겪으면서

공부에 대한 열망마저 접은 채 공동묘지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이 과정에서 송자는 보통 사람 같으면 적어도 5~6번은 죽고도 남을 고비를 겪게 됩니다.

송자의 성공을 빛나게 하기 위한 작가의 기초공사였겠지만

어떤 때는 이렇게까지 주인공을 괴롭혀야 되나?’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작가는 송자를 절벽 끝까지 수도 없이 밀어붙입니다.

 

하지만 그 시련들은 송자에게 또다른 세상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특히 공동묘지에서 여러 종류의 시신들을 접하면서

송자는 책이나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생생한 경험을 하게 되고,

그를 통해 검시관으로서의 스펙을 차곡차곡 쌓아가게 됩니다.

좀 장황하게 묘사되긴 하지만 송자가 겪는 시련들은 그를 타고난 천재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단련시킨 노력형 천재로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돼줍니다.

 

CSI 등의 미드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는 송자가 선보이는 검시, 해부, 법의학적 판단이

그리 새롭거나 대단하게 보이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방대한 자료조사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13세기 송나라의 상황을 감안하면

당시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송자의 법의학에의 열의와 노력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여곡절 끝에 궁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맡게 된 송자가

참혹한 시체들과 사건 현장에서 미세한 단서들을 찾아내며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는 대목은

CSI도 부럽지 않은 세밀함과 정교함을 자랑합니다.

 

작가는 송자를 시체를 통해 많은 정보를 알아내는 법의학자에 머물게 하지 않고

뛰어난 추리력을 지닌 현명한 판관의 캐릭터까지 발전시킵니다.

마지막 절정부에서 황제를 앞에 두고 적들과 벌이는 한판의 법정 대결은

현대 영미권의 뛰어난 법정물을 연상시킬 정도로 팽팽한 승부로 묘사됩니다.

송자는 자신이 찾아낸 단서들을 통해 상대의 모함을 하나하나 깨부수는가 하면,

아무도 예상 못한 범인의 정체를 밝힘으로써 황제를 비롯한 궁 전체를 발칵 뒤집어놓습니다.

 

물론 송자의 뛰어난 추리력에 대해서는 독자의 호불호가 갈릴 수 있습니다

시체 읽는 남자, 즉 검시관의 영역을 뛰어넘어 수사관 역할까지 해내는 송자가

이때만큼은 작위적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너무 완벽한 스펙을 발산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워낙 스피디하게 전개되는데다 긴장감으로 꽉 차 있어서

그 정도의 위화감은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13세기 동양의 법의학자라는 소재도 흥미로웠고,

오래 전 방영된 허준이라는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극적인 서사도 매력적이었습니다.

젊은 날의 송자에게 주어진 시련이 좀 과한 느낌이 들었고,

구성 면에서도 많은 분량이 할애되어 초중반까지 약간의 지루함을 주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런 아쉬움은 중반부터 발휘되는 속도감과 긴장감,

그리고 마지막에 터지는 반전으로 충분히 상쇄될 수 있었습니다.

진실을 밝힘으로써 황제의 인정을 받은 송자가

본격적인 판관으로 역할하게 될 후속작을 기대하는 것은 비단 저만의 바람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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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구애 - 2011년 제42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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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순서대로 읽기를 시작한 게 2014년인데,

이제 세 번째 작품을 읽었으니 꼭 1년에 한 편씩인 셈입니다.

사실 출간 순서대로 치면 저녁의 구애전에

장편 재와 빨강이 있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두 번째 단편집인 사육장 쪽으로아오이 가든에 비해 순화(?)된 느낌을 줬다면,

저녁의 구애는 좀더 일상성이 강조된, 즉 좀더 현실적인 이야기로 구성돼있습니다.

 

캐릭터 면에 있어서는 사육장 쪽으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인공들은 어딘가 마이너의 성향이 강하거나 또는 일부 문제적 인간들로 보이지만

실은 상실감과 익명성, 단절과 고립이 몸에 배어버린 대다수 현대인의 자화상입니다.

어느 쪽이 됐든 그들은 그 뒤로도 여전히 불행할 것이 분명하다.”는 암울한 인상을 남깁니다.

사육장 쪽으로의 인물들은 닭장이나 사육장처럼 도망칠 수 없는 갇힌 환경에 처한 채

출구 없는 먹먹한 삶을 살다가 잠시 희망에 들떠 모종의 일을 벌이지만

어이없는 실수로 망가지거나 진창을 헤매며 끝없는 늪으로 사라져버립니다.

그에 비해 저녁의 구애의 인물들은 오전과 다를 게 없는 오후, 어제와 다를 게 없는 내일 등

다람쥐 쳇바퀴 같은 동일성의 지옥에 빠진 채 무의미한 현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수록작 동일한 점심

이런 주제 의식을 가장 선명하고 이해하기 쉬운 텍스트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하 복사실을 운영하는 는 매일 정오 구내식당에서 늘 비슷한 메뉴로 점심을 해결합니다.

매일 아침 똑같은 시간의 전철을 타고, 새로울 것 없는 복사로 하루를 보냅니다.

누구도 에게 복사에 관한 주문 외엔 말을 건네지 않으며,

역시 누구에게도 2m 이내의 거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의 복사된 일상을 깨뜨리는 사건이 벌어진 날, 그는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그 외에도 매일 무의미한 서식만 작성하는 남자 (토끼의 묘),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고 계속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남자 (정글짐),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기계적으로 통조림을 밀봉하는 사람들 (통조림 공장)

소통과 관계가 단절된 채 동일하게 반복되는 복사된 삶에 매몰된 인물들의 비극은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특이하고 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는 아닙니다.

물론 누군가는 내겐 미래가 있고, 지금의 삶 역시 변화무쌍하며 의미 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이야말로 특별한 소수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저녁의 구애아오이 가든에 비해 한층 순화된 듯 보이지만

현실을 직시하는 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더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작품집입니다.

 

동일하게 복사되는 무의미하고 반복적인 삶저녁의 구애의 대표 정서지만,

어느 날 갑자기 자의반, 타의반으로 찾아온 불행을 다룬 작품들도 눈에 띕니다.

반복적이고 무의미하지만 나름 무탈하게 유지돼온 일상들은

입과 귀로 파고드는 하루살이 떼, 내 곁에서 벌어진 갑작스런 자살이나 실종이나 교통사고,

낯선 이국땅에서 길을 잃은 당혹감, 사소한 자동차의 고장 등에 의해 순식간에 파열됩니다.

상사의 지시에 따라 정체불명의 자루를 운반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 (관광버스를 타실래요?),

세든 집의 덩치 큰 개, 불온한 숲의 멧돼지의 울음, 만삭의 아내에게 둘러싸인 남자 (산책),

본사 발령을 받고 서울로 오는 길에 폭우와 폭력에 노출된 남자 (크림색 소파의 방)

전작인 사육장 쪽으로의 수록작들을 연상시키는 작품들이 그것입니다.

 

말미에 수록된 평 가운데 저녁의 구애의 두 가지 미덕을 한마디로 잘 정리한 대목이 있는데,

편리하고 안온한 일상이 소름 끼치는 불안과 암흑,

그리고 끝 모를 공포로 탈바꿈해가는 순간을 집요하게 파고든다.”라는 부분입니다.

편혜영의 작품들이 서사의 힘과 현실감을 동시에 획득하는 이유를 잘 설명한 평이 아닐까요?

 

다만, 몇몇 작품에서는 이런 주제의식을 위해 다분히 의도적으로 설정된 장치들 때문에

오히려 현실감보다는 작위적인 느낌, 즉 멋을 부린 듯한 개운치 않은 느낌도 받게 됩니다.

또 누군가의 분석이나 설명 없이는 작가의 의도를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전작에서도 이런 느낌은 분명 있었지만,

저녁의 구애의 경우 전작보다 현실감이 강한 수록작들이 많아서 그런지

역설적으로 위화감 역시 강하게 느껴진 탓일 수도 있습니다.

 

1년에 한 편 꼴로 읽고 있는 상황에서 편혜영의 다음 작품을 언제쯤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씩 색깔을 바꿔 가며 독자를 당혹시키는 그녀의 글이

다음 작품에선 어떤 모양새로 제 앞에 나타날지 궁금해집니다.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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