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세상에서 커글린 가문 3부작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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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날’, ‘리브 바이 나이트(밤에 살다)’에 이은 커글린 가문 3부작의 마지막 편입니다.

운명의 날1919년 보스턴의 경찰 파업을 다룬 역사소설이었다면,

리브 바이 나이트는 금주법 시대를 무대로 한 폭력과 생존과 사랑의 이야기였습니다.

 

운명의 날에서 어린 소년으로 아버지와 형들의 몰락을 지켜봤던 조 커글린은

금주법 시대를 다룬 리브 바이 나이트에서 플로리다 템파를 거머쥔 갱의 보스로 성장합니다.

무자비한 폭력의 향연 속에 수많은 죽음의 위기를 이겨냈고, 불같은 사랑에 빠지기도 했지만,

리브 바이 나이트에서의 조 커글린의 결말은 불행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3부작의 마지막인 이 작품에서 조 커글린의 어떤 모습이 그려질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 ● ●

 

무너진 세상에서의 핵심 줄거리는 조 커글린에 대한 암살 위협입니다.

모두에게 이익을 제공해왔고, 모든 인종들에게 지지를 받아온 조 커글린으로서는

자신을 향한 암살 또는 배신의 음모가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자신의 목숨 뿐 아니라 이제 9살이 된 아들 토머스에 대한 애착으로 인해

조 커글린은 그답지 않게 공포와 혼란에 빠집니다.

금발의 꼬마 유령을 목격하는가 하면, 암살자를 찾기 위해 무리한 행보에 나서기도 합니다.

그 무렵, 템파를 중심으로 한 갱 조직은 분열과 갈등으로 치닫게 되고

거리 곳곳에서 응징과 보복이 난무하기에 이릅니다.

조 커글린의 발밑 세상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고, 언제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입니다.

 

● ● ●

 

리브 바이 나이트이후 8.

조 커글린이 세운 왕국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아 보였습니다.

패밀리는 공고했고, 분업은 효율적이었으며, ()는 화수분처럼 메마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끝없는 탐욕은 안정된 왕국에서도 왕성하게 번식했고,

그것은 사방에서 작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암살 정보를 들은 조 커글린이 새삼 주위를 돌아보자

아무도 그럴 사람이 없다던 확신은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공포로 급변합니다.

자신이 직접 죽이거나 살해를 지시했던 많은 갱들과 보스들이 그랬듯,

자신에게도 어이없는 죽음이 순식간에 다가올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갱에게 있어 인생의 정점이란 너무나 짧고, 종말은 예고 없이 다가옵니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조 커글린이지만

정작 자신에게 닥친 죽음의 공포를 대하는 태도는 평범한 사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도망쳐야 되나, 몸을 숨겨야 되나, 맞서 싸워야 되나...

적은 내부에 있는 것인가, 외부에 있는 것인가...

9살 된 아들 토머스에 대한 걱정, 언젠가부터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한 의문의 유령,

아내를 잃은 뒤 7년 만에 찾아온, 그러나 위험천만한 금지된 사랑의 댓가,

탐욕과 증오가 촉발시킨 거리의 살육과 패밀리 간의 갈등 등

조 커글린을 둘러싼 세상은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앞선 두 작품이 사건 중심의 이야기였다면

무너진 세상에서는 작품 전반에 걸쳐 조 커글린의 복잡다단한 심리묘사가 주를 이룹니다.

물론 부와 권력의 재편을 코앞에 둔 거대한 전쟁이 긴장감을 조성하긴 하지만,

암살에 대한 공포, 토머스에 대한 걱정, ‘금지된 사랑에의 집착,

그리고 누구를 믿어야할지 확신할 수 없는 혼란 등

이리저리 흔들리는 조 커글린의 심리가 주된 이야기다 보니

독자 입장에서 재미만 따지고 보면 앞선 작품들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앞선 작품들을 읽지 않아 그의 전사(前史)를 잘 모르는 독자 입장에선

그의 심리나 감정이 잘 읽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 커글린이 세운 왕국이 서서히 무너지는 비극을 지켜보는 일이나

태연한 얼굴로 배신과 음모를 꾸미는 패밀리의 비정한 단면을 엿보는 일,

또 거듭된 반전 속에서 배신자의 정체를 추리하는 일은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적절한 시점마다 터지는 무자비한 살육전은 영화를 보듯 생생하고 참혹하며,

날선 대화와 냉정한 처단으로 무장한 패밀리 간의 피도 눈물도 없는 비즈니스는

마치 그 현장에 있는 듯 소름을 돋게 만듭니다.

 

읽는 내내 독자를 애태우는 것은 과연 조는 살아남을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무너진 세상에서라는 제목이 풍기는 선명한 비극의 냄새 때문에

이 궁금증은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독자를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토머스와 함께 쿠바에서 여생을 보내기를 바라기도 하고,

전설적인 보스답게 비장한 최후를 맞이하기를 기대하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 됐든 역시 조 커글린답다라는 엔딩이 기다리고 있으니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커글린 가문 3부작은 어느 편이 됐든 영화적 매력을 갖춘 뛰어난 작품들이지만,

그중 가장 대중적인 서사를 자랑하는 리브 바이 나이트가 우선 제작됐습니다.

감독 겸 주인공인 벤 애플랙이 어떤 마법을 부렸을지도 궁금하지만,

부디 영화가 성공해서 무너진 세상에서도 속편으로 제작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원작만 아니라면 조 커글린을 주인공으로 두세 편의 영화도 충분히 만들어질 텐데

리브 바이 나이트가 초대박이 난다면 헛된 바람으로 그치지 않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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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닷컴
소네 케이스케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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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에 가까운 단편집 ’, 재치있는 트릭과 우울한 미래 이야기를 담은 단편집 열대야’,

오쿠다 히데오의 최악을 연상시켰던 장편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그리고 첩보물을 표방한 침저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접하면서

믿고 볼 수 있는 작가중 한 명으로 소네 케이스케를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암살자 닷컴역시 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소네 케이스케의 이야기꾼으로서의 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연작단편집입니다.

 

경찰로도, 가장으로도 모두 실패한 삶을 살면서 부업 삼아 암살자가 된 형사,

노인 도우미였다가 우연히 습득한 휴대폰 덕분에 생계를 위해 암살자가 된 중년의 주부,

전설의 암살범이었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그 위상도 예전 같지 않은 장년의 전문 킬러 등

어딘가 암살자와는 거리가 좀 먼 인물들이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조직은 인터넷 사이트 고로시야닷컴(.com)을 통해 의뢰를 공지하는데,

조직과 계약한 암살자들은 조건이나 암살 대상을 보고 각자 입찰에 응해야 합니다.

가장 낮은 금액을 써낸 암살자가 낙찰 받게 되고,

미션이 마무리되면 우편으로 현금을 받게 되는 구조입니다.

암살자가 늘어나면서 경쟁은 치열해지고, 낙찰가는 점점 하향 추세입니다.

취미형 암살자나 생계형 암살자는 물론

달리 할 줄 아는 일이 없어서 계속 암살자로 활동하는 인물도 있습니다.

문제는 낙찰 받은 의뢰를 처리하지 못했거나 조직의 정보를 누설할 경우

참혹한 응징을 피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조직내에는 실패자나 배신자만 전문 처리하는 암살자도 있는데,

이들에겐 사체 훼손이라는 특별한 미션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아무튼...

수록된 네 개의 에피소드는 연작단편집답게 따로 또 같이전개됩니다.

인물들과 사건들이 서로 정교하게 얽혀있어서, 그 접점을 찾아 읽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앞선 에피소드에서 무심코 언급됐던 사건이 뒤의 에피소드의 중심 스토리가 되기도 하고,

6년이란 시간차를 두고 인물들이 성장하거나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도 있습니다.

 

암살자닷컴이라는, 어딘가 희극적인 냄새를 풍기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무겁고 어두운 암살자들의 세계와 잔혹한 사건을 그린 내용은 아닙니다.

오히려 웃음과 긴장과 공포가 한데 섞인 독특한 블랙유머의 분위기를 풍기는데,

이는 소네 케이스케가 전작들에서부터 과시해온 그만의 특별한 매력입니다.

첩보물을 표방한 침저어를 제외하곤, 대부분 어딘가 나사가 하나 풀렸거나,

삶의 밑바닥을 전전하는 등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들 앞에 주어진 상황과 미션은 정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이상한 일들 뿐입니다.

우여곡절과 반전 끝에 인물들은 행복해지기도 하고, 나락에 빠지기도 하고,

또는 행복한 건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는 기묘한 엔딩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암살자닷컴역시 그런 인물과 상황과 미션으로 채워진 작품입니다.

 

교훈이나 감동이나 여운과는 좀 거리가 멀지만,

짧은 시간 안에 재미와 긴장을 함께 맛보기엔 더없이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언젠가 소네 케이스케가 정색을 하고 묵직한 서사를 내놓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비슷한 맛을 보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을 강추합니다)

아직까지 제게 소네 케이스케는 스트레스 종결자 또는 재능 만점의 엔터테이너이기 때문에,

다음 작품에서도 그만의 그런 특별한 매력을 발휘해주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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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감옥 모중석 스릴러 클럽 41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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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라진 소녀들’, ‘지옥계곡에 이어 세 번째 만난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작품입니다.

외국작가의 경우 보통 재미와 대중성순으로 국내에 소개되는 탓에

첫 작품에 열광했다가도 뒤로 갈수록 시들해지는 경우가 적잖은데

안드레아스 빙켈만은 (저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입니다.

서평 대신 짧은 메모만 해놓던 시절에 읽은 사라진 소녀들은 별 3.5개 정도였고,

지옥계곡역시 재미있게 읽긴 했어도 별 4개가 적절하다고 생각했지만,

물의 감옥은 전작들에서 느낀 아쉬움들이 많이 해소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하지만 독일 출간은 물의 감옥지옥계곡보다 1년 먼저더군요)

 

희생자를 끌어안은 채 깊은 호수 속에서 춤을 추며익사에 이르게 하는 살인마 물의 정령’,

한때 명성을 날렸지만 이혼 이후 몰락의 길을 걸어온 마초 형사 에릭 슈티플러,

살인사건 수사팀에 갓 배치되어 슈티플러의 파트너가 된 새내기 여경 마누엘라,

동료가 살해된 뒤부터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전직 콜걸 라비니아,

우연한 만남을 통해 알게 된 라비니아를 보호하기 위해 분투하는 택시기사 프랑크 등

모두 5명의 주요 인물들이 한 챕터씩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갑니다.

 

이야기 구조는 심플합니다.

범인은 목표물과 인연이 있는 여자들을 익사시키면서 천천히 복수를 완성해갑니다.

목표물은 범인의 위협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며 심지어 자살을 꾀하기도 합니다.

신참 여경은 상관의 지시보다 자신의 정의감을 앞세워 사건을 해결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각각의 인물들에게 특별한 캐릭터와 전사(前史)를 부여함으로써

단순히 진범 찾기와 진실 파헤치기 이상의 묵직한 서사를 제공합니다.

연쇄살인범의 경우, 왜 스스로를 물의 정령이라 칭하는 것인지,

호수와 수영과 여동생을 사랑했던 그의 어린 시절과 가족들이 어떻게 잔혹하게 파괴됐는지,

그에게 물속에서 춤추며 살해하기란 어떤 의미인지를 긴장감 넘치게 묘사합니다.

마초 형사이자 성차별주의자인 슈티플러의 경우 묘한 이중적 캐릭터를 부여받았는데,

명백한 악인이면서도, 동시에 타의에 의해 인생이 망가진 운 나쁜 중년남이란 면모입니다.

악인이라 망가진 건지, 망가진 탓에 악인이 된 건지,

슈티플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독자에게 양가적 감정을 갖게 만드는 인물입니다.

신참 여경 마누엘라는 상대적으로 평범하고 익숙한 캐릭터인데,

어쨌든 그녀의 돌직구 같은 추진력과 예리한 추리력은

연쇄살인범과 부패한 경찰의 서사의 무게를 감당해낼 만큼 제법 무겁게 설정돼있습니다.

 

작지만 음험해 보이는 검은 물의 호수 고레크,

수시로 몰아치는 천둥과 번개와 강풍과 폭우,

핀란드 태생인 연쇄살인범의 물의 정령이라는 별명 등

물의 감옥은 여러 모로 북유럽 스릴러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입니다.

특히 바닥을 알 수 없는 검은 호수 물속에서 자행되는 연쇄살인은

지금껏 본 그 어떤 수법과도 비교할 수 없는 냉정+잔혹+쾌락의 느낌이 배어있는데,

왠지 독일보다는 스웨덴 등 차가운 북유럽과 어울린다는 느낌을 여러 번 받곤 했습니다.

북유럽 특유의 묘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호감을 가질 만한 설정입니다.

(까마득한 높이의 알프스 계곡에서의 추락사로 연쇄살인의 서곡을 연 지옥계곡역시

북유럽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의 또다른 미덕 중 하나는 이분법적인 시선에서 을 그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런 모호함은 독자에 따라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저로서는 악을 그저 악으로만그렸다면 이 작품의 매력은 반감됐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안드레아스 빙켈만은 적절한 수위를 유지하면서

동전의 양면처럼 선악을 공유한 인상 깊은 캐릭터들을 만들어냈고,

그 덕분에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여러 가지 회한과 여운을 느낄 수 있게 해줬습니다.

 

굳이 아쉬운 점을 꼽아보면,

연쇄살인범 물의 정령의 복수심의 원천, 즉 과거의 상처 묘사가 조금 약했다는 점과

살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는 그의 모습이 과도하게 판타지처럼 그려져

때론 정말 정령처럼 느껴진 나머지 현실감을 잃곤 한다는 점 정도입니다.

 

별로 매력 없는 형사와 범인’(사라진 소녀들), ‘뜬금없는 범인과 범행동기’(지옥계곡)

전작들에 대해 비우호적인 평을 했던 터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캐릭터, 사건, 정서 등 여러 면에서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진수를 맛본 작품이 돼준 물의 감옥이었습니다.

 

사족으로..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홈페이지를 보니 아직 국내에 소개 안 된 작품들이 있더군요.

킬게임(Killgame)’, ‘데스북(Deathbook)’, ‘사육(Die Zucht)’ 등이 눈에 띄었는데,

안드레아스 빙켈만이 국내에서 조금만 더 분발(?)해준다면

미 출간작품 전부를 머지않아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요?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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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밀리언셀러 클럽 147
야쿠마루 가쿠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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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나이프하드 럭에서도 그랬지만

야쿠마루 가쿠는 이야기를 빙빙 돌리지 않고 민감한 사회적 문제,

특히 개인의 복수 또는 구조적으로 코너에 몰린 약자의 이야기를 정면으로 파고듭니다.

악당역시 가해자와 피해자, 복수와 증오, 화해와 용서 등을 다룬 작품입니다.

 

주인공 사에키 슈이치는 15살 생일날 참혹한 범죄로 인해 누나를 잃습니다.

누나의 죽음에 영향을 받은 그가 선택한 길은 경찰이었지만,

죄책감 없는 악당들을 향해 치솟는 분노를 자제하지 못해서 제복을 벗어야 했고,

지금은 조그만 탐정사무소에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록된 7편의 연작 단편은 그가 의뢰받은 건의 조사 과정을 다루고 있는데,

의뢰 자체가 과거 범죄를 저질렀던 자의 현재를 알고 싶다는 내용들이라

여전히 누나의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에키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의뢰인은 피해자, 유족, 변호사 등 다양하지만

그들이 알고 싶은, 또 고민하는 지점들은 거의 비슷합니다.

, 가해자는 진정으로 갱생했는가? 피해자나 유족에게 사죄하고 있는가?

설령 갱생하고 사죄한다 해도 피해자와 유족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상처를 잊을 수 있는가?

만일 그 자가 죄책감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안락과 행복을 누리고 있다면 어찌 해야 되는가?

 

피해자나 그 유족들이 멀쩡히 살아있는 가해자와 마주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그 자신이 범죄 피해자의 유족인 사에키는 누구보다 잘 압니다.

각기 다른 에피소드들 속에서 사에키는 자신이 해결한 일들 때문에

대부분의 의뢰인들이 오히려 더 큰 고통에 빠지는 모습들을 지켜보게 됩니다.

상처는 절대 치유되지 않고, 속죄란 허울 좋은 변명에 불과할 뿐입니다.

피해자와 유족은 평생을 악몽과 상실감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가해자는 터무니없이 가벼운 형벌만 받곤 당당하게 일상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에키는 의뢰를 받을 때마다, 또 미션을 완수할 때마다 새로운 고통을 맛봅니다.

당연히 그 일로 밥벌이를 하는 자신을 혐오합니다.

 

하지만 그는 탐정으로 일하면서 틈나는 대로 누나를 능욕하고 살해한 범인들을 쫓습니다.

그 자신이 의뢰인이자 탐정이 되어 복수를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설령 복수가 완성된다 해도 그것으로 모든 악몽이 지워지진 않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아갈 이유도, 힘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독자는 사에키의 딜레마 때문에 공분과 좌절을 함께 느끼게 되는데

이런 감정은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경험하게 되는 씁쓸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미나 여운 모두 수록작마다 조금씩 편차는 있지만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제3자의 시선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다루고 있어서

단순히 개인의 복수를 다룬 작품들과는 차별화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탐정 사에키뿐 아니라 피해자이자 추격자 사에키의 비극적인 이야기 역시

작가의 전작들에서 맛봤던 특유의 긴장감과 안타까움을 발산하고 있어

역시 야쿠마루 가쿠라는 호평이 저절로 나오게 만듭니다.

 

다만, 연작 형태이긴 해도 단편이다 보니 이야기의 규모나 깊이가 부족한 건 사실입니다.

야쿠마루 가쿠의 매력은 그가 다루는 소재 자체에도 있지만

후벼 판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깊게 파고드는 서사의 힘에 기인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단편보다는 장편이 더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통쾌함이나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먼 그의 작품들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그의 작품을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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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성 스토리콜렉터 51
혼다 테쓰야 지음, 김윤수 옮김 / 북로드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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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도쿄 외곽의 한 맨션에서 발견된 잔혹한 살육의 현장.

그리고 그곳을 탈출한 10대 소녀와 그곳에서 체포된 중년의 여자.

두 여자의 증언을 통해 드러난 악마나 다름없는 조종자의 정체와

그의 조종에 의해 서로를 고문하고, 살해하고, 토막냈던 수많은 사람들의 비극.

증언은 엇갈리고 조종자의 행방은 오리무중.

조종자의 지시대로 참혹한 살육을 벌인 자들은 왜 무기력하게 그에게 굴복했던 것일까?

그들은 왜 도망치지도,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던 것일까?

살아남은 두 여자의 눈에서 읽히는 조종자에 대한 존경과 욕정의 빛은 무엇을 뜻하는가?

과연 그 맨션 안에서 벌어진 참극의 진실은 무엇일까?

 

● ● ●

 

읽는 내내 이런저런 단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살육에 이르는 병’, ‘외과의사’, ‘종의 기원’, ‘살인의 추억’, ‘추격자’...

 

, 이런저런 질문들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인간을 짐승으로 만드는 기질은 타고난 것일까, 습득된 것일까?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먹잇감으로 삼으려는 욕망은, 특수하다 해도, 결국 자연의 섭리일까?

그 욕망은 언젠가는 포만감과 함께 소멸되는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허기진 상태로 남아 끝없이 새로운 먹잇감을 요구하는가?

혹시, 그 욕망은 강한 전염성을 지닌 것은 아닐까?

 

사실, 잔혹하고 엽기적인 묘사에 대해서는 워낙 사전정보를 많이 접한 탓에

그다지 충격적으로 읽히진 않았습니다. 예상보다는 훨씬 약했다고 할까요?

꽤나 충격적이고 심각하게 비위를 건드리는 장면들임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으로 어떤 을 넘지 않고 필요한 팩트만 묘사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만일 작가가 작심했다면 아마 한 사람의 해체를 위해 한 챕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대한 간결하고 담담한 투로 그려진 고문-살인-해체-처리과정은,

어쩌면 잔혹함에 가려 주제가 희석될 수도 있다는 작가의 우려(?)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혼다 테쓰야가 실화를 바탕으로 굳이 이런 끔찍한 서사를 기획한 것 자체가

주제를 강조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지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 주제란 앞서 언급한 질문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악의 기원과 정체, 전염성과 생명력에 대한 근원적 고민이 그것입니다.

혼다 테쓰야는 탐문과 취조를 맡은 경찰들을 통해 이런 주제를 거침없이 드러냅니다.

때론 그 수위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작위적으로 읽힐 때도 있습니다.

결국 짐승의 성은 미스터리, 트릭, 반전보다 악에 대한 보고서의 기운이 강한 작품입니다.

 

문제는, 캐릭터나 스토리마저 주제에 맞춰 전개된다는 의심(?)이 들게 만든 점입니다.

먹잇감을 좌지우지하는 조종자의 전능함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가?

먹잇감들은 왜 도망치지도, 저항하지도 않은 채 조종자의 뜻대로 참극을 연출했는가?”

물론 지속적인 악의 폭력은 먹잇감을 길들이거나 자포자기하게 만들거나 전염시킨 끝에

결국 자기방어에 대한 의지마저 잃어버리게 만들 수 있겠지만,

위의 의문은 작품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의문 자체가 이 작품의 모티브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 혼다 테쓰야가 기타큐슈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조사하면서 똑같은 의문을 가졌고,

그 의문이 이 작품의 출발점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혼다 테쓰야는 그와 그녀와 그들이 폭력에 굴복하고 전염된 끝에

스스로 악으로 진화한 실제 사건을 보곤 의문을 가진 끝에 이 작품을 기획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와 그녀와 그들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조종하여 짐승의 성에 가둔 악의 전능함도 제대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비록 추정이지만, 그러지 않곤 이 작품의 모든 것을 순순히 납득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혼다 테쓰야가 강조한 내용 중 하나가 짐승은 내 주위 어디에도 존재 가능하다입니다.

말하자면 나의 옆집이나 앞뒷집이 짐승의 성일 수도 있다는 얘기죠.

재미있게 읽긴 했어도 몸과 마음 어딘가에 끈적끈적함과 불편함도 함께 남는 작품입니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는 그것들이 저절로 사라지거나 잊히길 바라지만,

그렇게 호락호락 기억에서 물러나주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은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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