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타의 일기 밀리언셀러 클럽 146
척 드리스켈 지음, 이효경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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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게이지 하트라인은 과거 미국 비밀 특수부대의 일급 요원이었으나

작전 수행 중 민간인 아이들을 사망케 한 후,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전역한다.

각국 정보부의 비폭력적인 청부만을 싼값에 의뢰받아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던 중,

유대인 학살의 희생자가 남긴 걸로 추측되는 일기장을 발견한다.

그 내용은 아돌프 히틀러와 연관된 충격적인 진실을 담고 있었다.

본래 주인의 후손을 찾아 일기장을 돌려주려던 게이지의 계획은,

그가 지닌 일기장의 엄청난 가치를 눈치 챈 프랑스 마피아와 정보부에 의해 방해받고,

결국엔 목숨까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른다.

(인터넷 서점의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5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이지만 이야기 구조는 심플합니다.

히틀러의 치명적인 진실이 담긴 일기장을 둘러싼 전형적인 첩보-액션 스릴러인데,

큰 얼개만 보면 본 아이덴티티와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폭력과 절연한 채 소소한 청부업자로 살아가던 전직 특수요원 게이지 하트라인은

일기장을 빼앗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덤비는 프랑스 정보부 요원과 마피아를 상대합니다.

그 과정에 게이지의 연인, 휴가 중인 미국 육군 수사대원 등이 말려들게 되고,

게이지는 수차례 치명적인 위기를 넘긴 끝에 결국 억눌렀던 폭력의 본능을 부활시킵니다.

 

영화로 만들기에 딱 알맞은 소재와 인물 설정 덕분에

읽는 내내 저절로 그림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작품입니다.

인물들의 배치나 사건 전개는 할리우드 액션물의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대략 예상되는 방식과 타이밍에 위기가 찾아오고,

게이지는 주인공다운 포스를 발휘하며 그 위기를 벗어나고, 통쾌한 복수를 감행합니다.

상투적이긴 하지만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탄탄한 서사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레타의 일기’(원제 The Diaries)라는 제목이 알려주듯

이 작품을 다른 할리우드 액션물과 차별화시키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문제의 일기장입니다.

 

그레타가 쓴 일기에는 히틀러의 치명적인 진실이 고스란히 담겨있는데,

게이지는 어떻게든 이 일기를 그레타의 후손에게 전해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하지만 악당들에게 그레타의 일기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물건일 뿐입니다.

, 향후 수십 년간 무한한 부()를 축적시켜줄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것입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약발이 떨어진 히틀러와 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라는 소재를 대체할,

모든 영화사와 출판사가 탐낼 만한 엄청난 원작으로서의 가치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연과 운명이 교차하면서 온갖 악당과 조연들이 일기장 주위로 몰려들게 되고,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이야기는 첩보와 액션의 매력을 구사하며 물 흐르듯 흘러가지만,

히틀러나 홀로코스트에 대해 조금은 구경꾼 같은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는 한국의 독자에겐

그레타가 남긴 일기의 엄청난 충격100% 이입되지 않은 탓에

일기장 주변으로 몰려든 인물들의 욕망이나 감정들이 조금은 낯설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히틀러라면 (일기에 적힌)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위인 아닌가?’,

또는 과연 그 일기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

역사관과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당연한 의문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 낯선 느낌만 극복한다면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첩보-액션물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모두 4편의 게이지 하트라인 시리즈가 나왔다고 하는데,

봉인됐던 폭력의 본능을 되찾은 전직 특수요원 게이지 하트라인이

그레타의 일기이후 또 어떤 사건에 말려들었을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전직 특수요원의 인생역경은 아무리 반복돼도 흥미로운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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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가족놀이 스토리콜렉터 6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로드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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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코로다 료스케라는 이름의 한 남자가 공사 현장에서 잔인한 변사체로 발견된다.

경찰은 수사 끝에 평범한 직장인이자 가장인 것처럼 보였던 도코로다 료스케가

인터넷상에서 '아버지'라는 닉네임으로 '가상가족놀이'를 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마치 가족처럼 아버지, 어머니, , 아들로 연극을 해왔던 것.

진짜 가족을 내팽개친 채 인터넷상의 가상가족에게만 몰두한 피해자.

경찰은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전대미문의 계획을 세운다.

이윽고 진짜 가족이 매직미러 너머로 취조실을 지켜보는 가운데,

피해자와 함께 인터넷상에서 가족놀이를 했던 사람들이 차례로 불려오는데.

(인터넷 서점의 출판사 책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예전에 ‘R.P.G’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던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은 탓에 짤막한 줄거리만 메모로 남긴 적이 있는데,

오랜만에 다시 읽었는데도 (부실한 기억력 때문인지^^) 여전히 새롭고 재미있게 읽혔습니다.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사회적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됐던 2000년대 초반이 배경이라

스마트폰이 대세인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채팅이나 게시판에서의 가상가족놀이는

조금은 올드하게 보일 수도 있는 소재입니다.

하지만 많은 작품을 통해 사회적 이슈를 미스터리 속에 정교하게 녹여냈던 미미 여사는

현실 속 가족가상현실 속의 가짜 가족이라는 극단적인 대비를 동원하여

그 올드함을 무색하게 하는 보편적인 서사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익명성에 의지하여 가상의 세계에 잠복한 채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들을 추구하고 만족과 구원을 느낀다는 것은

인터넷의 맹아기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가상가족놀이에 참여한 네 명의 인물은 (조금씩 성격은 다르지만)

현실의 가족들에게 만족하지 못하거나 상처받거나 분노해온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저 채팅과 메일이 전부이고 딱 한 번 오프라인에서 만난 적 밖에 없지만,

그들은 아무런 보상도, 의무도 강요하지 않는 가상현실 속의 가족들에게서 위로받으며

현실의 가족을 내팽개친 채 그들만의 놀이를 즐겨왔습니다.

하지만 그들만의 놀이는 어느 시점인가부터 가상현실을 벗어나기 시작했고,

비뚤어진 욕망, 시기, 질투라는 현실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비극을 초래하게 됩니다.

 

이야기의 주 무대는 취조실입니다.

살해당한 가장도코로다 료스케를 제외한 세 명의 가짜 가족들이 차례로 불려오고,

매직미러 너머에서는 도코로다의 딸 가즈미가 진범을 확인하기 위해 자리잡고 있습니다.

밀폐된 취조실에서 그들은 더 이상 서로를 친밀한 가족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제 멋대로인 놈, 늘 여리고 착한 척만 아는 철부지, 욕망에 눈 먼 아줌마 등

서로를 날선 말들로 비난하며 자신들이 꾸며온 친밀한 가족을 붕괴시킵니다.

애초 가상현실에서 구원받고 싶어 했던 서로의 처지까지 들먹이면서 말이죠.

매직미러 너머의 가즈미는 자신이 증오했던 아버지가 자신과 어머니를 버려둔 채

저런 사람들과 친밀한 가족을 이뤘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눈치 빠른 분들은 범인의 정체를 쉽게 알아챌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은 누가 범인일까?’라는 미스터리보다

허위와 기만으로 꾸며진 가상의 가족의 양면성에 좀더 방점이 찍혀있기 때문에

미미 여사의 강력한 미스터리 서사를 기대한 분들에게는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붕괴된 가족, 소외된 개인, 인터넷 속 익명성의 유혹, 가상현실에서의 대리만족 등

한데 엮기 쉽지 않은 사회적 이슈를 적절한 규모의 미스터리와 잘 배합한 미미 여사의 필력은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이것저것 생각할 여지와 여운을 깊게 남겨놓습니다.

 

식탁에 마주앉아서도 대화 한마디 없이 각자의 스마트폰만 쳐다보며

진짜 가족을 외면한 채 가상현실에 몰두하는 요즘의 세태를 보면

미미 여사가 창조한 가상가족놀이는 어쩌면 더욱 잔혹하고 비극적인 모습으로

2017년의 현실에 불쑥 나타날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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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저널 - 제38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 수상작
혼조 마사토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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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키구치 고타로는 7년 전 여아 연쇄 납치 사건을 취재하면서 치명적인 오보를 냈었다.

그로 인해 범인이 2인조일 가능성을 제기했던 그의 특종 역시 검증되지 못한 채 묻혀버렸고,

결국 지방으로 쫓겨나 오랜 시간동안 한직을 전전하게 됐다.

어느 날, 7년 전과 비슷한 수법의 사건이 터진다.

세키구치 고타로는 이번 사건이 7년 전 사건과 연관이 있음을 직감하고 취재에 나선다.

하지만 다시 오보 사건에 휘말릴까 봐 동료와 상사들은 몸을 사리기 일쑤고,

수사기관 역시 자신들의 수사에 영향을 미칠까 거짓 정보를 흘려

그의 취재를 방해하는 탓에 진실에 다가가기가 쉽지만은 않다.

(인터넷 서점의 출판사 책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강력사건을 대하는 사회부 기자의 업무와 태도는 경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범인 체포가 1순위인 경찰 입장에서는

세상에 알리는 것1순위인 사회부 기자가 때론 적군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형사물에서 기자들이 얄미운 비호감 캐릭터로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죠.

하지만 사회부 기자가 주인공인 작품에선 무조건 숨기기만 하는경찰이 밉상이 됩니다.

또 경찰보다 유능하고 집요한 사회부 기자가 사건의 진실에 먼저 다가가기도 합니다.

유능한 기자에겐 경찰 못잖은 이 있기 마련인데, 그건 대부분 조직 내부의 인물들입니다.

정치적인 이유에서든, 시기와 질투 때문이든 유능한 기자의 활약은

조직 내부의 복잡다단한 갈등 때문에 여러 번 제동이 걸리기 마련입니다.

 

미드나잇 저널은 이런 성격의 작품 중 거의 교과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특종 사냥꾼이자 유능한 기자지만, 도무지 융통성 없는 성격에 독재적인 업무 스타일,

, 선후배를 막론하고 가혹하고 냉정한 태도로 일관하는 반골세키구치 고타로는

조직의 입장에선 버릴 수도, 품을 수도 없는 골치 아픈 존재이고

후배나 동료 입장에선 미워할 수도, 존경할 수도 없는 참 애매한 존재입니다.

조금이라도 기자의 본분에서 어긋날 것 같으면 위아래를 막론하고

넌 저널(journal)이 아니야!”라며 가차 없이 몰아세우곤 합니다.

 

읽는 내내 저 역시 이 인물에게 호감을 느껴야 하는 건지 아닌지 꽤 혼란스러웠습니다.

내가 데스크라면, 내가 후배라면 과연 세키구치 고타로를 모범 기자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내가 데리고 있고 싶거나, 내가 존경하고 닮고 싶은 인물이라고 여길 수 있을까?

이런 주인공의 설정은 처음엔 좀 불편했습니다.

주인공은 좀 괴팍하더라도 나름 호감을 발산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왜 작가가 자신의 주인공을

굳이 호감과 비호감의 경계선에 올려놓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작품은 모든 미덕을 갖춘 슈퍼 능력 기자를 앞세운 영웅 서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다큐에 가까울 정도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기자들의 세계를 그린 작품입니다.

편집국장부터 말단 신입기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고,

경찰 또는 희생자 유족과의 관계 등 그들만이 사는 세상의 속살을 가감 없이 그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낡은 것으로 치부되는 종이신문의 가치와 기자들의 책임감이 진지하게 그려졌고,

기자들의 숙명 - 정확성과 속보성, 알려야 할 것과 알리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고민

이제는 인터넷 뉴스에 익숙해진 세대들도 공감할 수 있게 묘사돼있습니다.

작가는 이런 서사들을 위해 굳이 호감형 주인공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 좀 비호감이더라도, 전쟁터 같은 취재현장에서 갖은 위험과 비난을 무릅쓰면서

자신의 본분을 다 하는 (일종의 판타지지만) 이상적인 기자를 그리려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픽션이다 보니 극적인 캐릭터들이 다수 등장하기도 합니다.

여전히 세키구치 고타로를 지지하며 그의 취재를 돕는 후배도 있고,

오보 사건의 여파로 그와 절연한 뒤 까지 버린 후배도 있습니다.

세키구치 고타로를 못마땅해 하지만 그의 기자정신을 높이 사는 노회한 베테랑 기자도 있고,

그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직속상관도 있습니다.

교과서 같고 다큐 같은 냄새를 풍기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캐릭터들 덕분에 독자는 드라마틱한 재미를 만끽하며 페이지를 넘길 수 있습니다.

흉악한 사건을 소재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트릭이나 충격적인 반전은 없지만

범인을 쫓고 진실을 밝히려는 미스터리의 미덕이 잘 배어있다는 점 역시 장점 중 하나입니다.

 

작가의 이력을 보니 20년 간 기자생활을 하다가 소설가로 전업했다고 합니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기자의 이력이 멋지게 발휘됐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후속작이 나온다면 관심을 안 가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사족으로..

사회부 기자가 등장하는 장르물 중에 단 한 편의 추천작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요코야마 히데오의 클라이머즈 하이를 꼽곤 하는데,

그 작품의 주인공 유키 가즈마사 역시 유능하지만 원칙주의와 반골로 똘똘 뭉친 캐릭터입니다.

다만 인간미에 있어서는 세키구치 고타로보다는 좀(많이?) 따뜻한 인물입니다.

혹시 미드나잇 저널을 통해 사회부 기자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독자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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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뼈
송시우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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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아이의 뼈를 비롯 모두 9편의 단편이 실린 송시우 작가의 작품집입니다.

장편 라일락 붉게 피던 집과 연작 단편 달리는 조사관이후 세 번째 작품인데,

수록작 중 잃어버린 아이에 관한 잔혹동화

황금가지에서 출간한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5’에 실렸던 단편이기도 합니다.

 

달리는 조사관출간 후 송시우 작가가 다음 작품은 더 오래 걸릴 것 같다.”라고 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후속작이 빨리 나와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다만, ‘라일락~’처럼 굵직한 서사의 장편을 기대했던 터라 약간의 아쉬움도 남았습니다.

수록작 모두 30페이지 안팎의 단편인데다 쉽고 간결한 문장들 덕분에

주말 한나절이면 금세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입니다.

 

캐릭터의 힘이 강하거나 반전의 맛을 살린 작품들이 눈에 띄었는데,

20년 전 살해된 딸의 유골을 찾으려는 한 노파의 집념과 복수를 그린 아이의 뼈’,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진 일상 속의 분노를 의외의 반전과 함께 그린 사랑합니다, 고객님’,

진정한 복수는 계속 살게 하는 것이란 역설적인 메시지가 인상적인 누구의 돌등입니다.

잃어버린 아이에 관한 잔혹동화역시 서늘한 공포를 발산하는 무척 매력적인 단편입니다.

 

거의 모든 작품들이 선명하고 똑 떨어지는 엔딩 대신

긴 여운을 느끼게 하는 독자 판단형 엔딩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단편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매력이기도 합니다.

다루는 사건은 복잡하거나 큰 스케일들은 아니지만

역으로 일상성이 강조된 탓에 훨씬 더 주위에서 벌어질 것 같은 사건이란 느낌을 줍니다.

 

사건을 해결하는 캐릭터도 평범한 인물들이거나 피로에 찌든 전형적인 형사들인데,

그 덕분에 멋 부리지 않은 사실적인 설정과 전개가 돋보였던 것 같습니다.

두 편의 전작들에서도 송시우 작가의 이런 매력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는데,

일상 속의 관찰자(‘라일락~’) 또는 평범하지만 열정적인 조사관(‘달리는 조사관’)의 힘은

화려한 서사 속에 등장하는 슈퍼 주인공보다 더 강렬하고 인상 깊었습니다.

 

작품마다 약간의 편차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단편의 한계를 느낀 작품도 있었지만,

어쨌든 만족스러운 책읽기였습니다.

다만, 다음엔 꼭 송시우 작가의 장편과 만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좀더 길어지더라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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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와 수잔 버티고 시리즈
오스틴 라이트 지음, 박산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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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중간에 두어 번 중도포기를 고민했던 작품입니다.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고, 기대감이 충족되지 않아서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냥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뭔가가 분명 있었고,

무엇보다 토니와 수잔 두 사람의 엔딩이 궁금했기 때문에 기어이 끝까지 달리긴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독자들의 평이 궁금해서 알라딘에 들어가 봤는데,

저의 독후감과는 달리 대체로 호평 일색이라 무척 놀랐습니다.

역시 제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고, 아니면 고고한 서사에 대한 몰이해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 ● ●

 

수잔은 20년 전 이혼한 에드워드에게 녹터널 애니멀스라는 소설을 받습니다.

신혼 시절, 에드워드는 법학을 포기하고 글쓰기에 매진했지만

수잔은 그에게 재능이 없음을 알아봤고, 냉정한 혹평을 날리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둘은 씁쓸하게 이혼했고 그로부터 20년이 흘렀습니다.

 

에드워드가 보낸 소설의 주인공이 토니입니다.

그는 여름 별장으로 가던 도중 불량배들에게 가족을 잃는 대참사를 겪습니다.

삶은 어찌어찌 이어지지만 껍데기만 남았을 뿐, 모든 것은 불안정하고 위태롭습니다.

용의자가 체포됐다는 소식에 먼길을 달려갔지만 그곳엔 또다른 비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재능 없고 혹평 받아 마땅하던 그의 글솜씨가 일취월장한 것에 놀라던 수잔은

소설 속에서 서서히 붕괴돼가는 토니를 지켜보며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 사실에 더욱 놀라게 됩니다.

자신을 연상시키는 캐릭터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둘만의 과거사를 언급한 대목도 없지만,

수잔은 토니를 통해 겉모습과는 달리 사방에 균열 투성이인 자신의 삶을 돌이켜봅니다.

그리고 자문합니다. 왜 에드워드는 내게 이 책을 보낸 거지?

책과 함께 보낸 편지 속의 이 퍼즐에서 빠진 조각을 찾아봐.”라는 말은 무슨 의미지?

 

● ● ●

 

처음엔 이 작품의 제목이 토니와 수잔이라고 해서

당연히 두 인물이 현실 속의 캐릭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소설 속 캐릭터이고 한 사람은 그를 읽는 독자로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소설 속 토니와 현실의 수잔의 교집합이 이 작품의 테마라는 뜻인데,

개인적으로는 바로 그 지점이 저를 이해시키지도, 공감시키지도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소설 속 소설인 녹터널 애니멀스와 주인공 토니의 캐릭터는 무척 매력적입니다.

느닷없이 찾아온 불행, 가족을 잃고도 식욕과 성욕을 느끼면서 살아가야 하는 절망감,

바닥을 알 수 없는 참혹하고 아주 느린 속도의 파멸 등

자비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서늘한 스릴러의 미덕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반면, 현실의 수잔을 그린 대목은 중반을 지나면서부터 점점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에드워드의 소설을 읽으면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는 수잔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대목을 읽었기에, 또는 소설에서 어떤 분위기를 감지했기에

수잔이 이토록 동요하고, 자책하고, 분노하는 것인지 결국 마지막까지 알 수 없었습니다.

 

토니는 책과 함께 보낸 편지에 이 퍼즐에서 빠진 조각을 찾아봐.”라는 말을 남깁니다.

, ‘이 소설은 어떤 식으로든 너와 연관이 있고,

그래서 난 분명한 의도를 갖고 이 책을 너에게 보내는 거야.’라는 뜻입니다.

그 의도란 복수일 수도 있고, 괴롭힘일 수도 있고, 소소한 자랑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과 수잔의 연관에드워드의 의도도 제 눈엔 잘 읽히지 않았습니다.

토니의 픽션이 수잔의 현실을 잠식한다는 것은 비평가들의 억지스러운 분석이란 느낌입니다.

세상에는 토니의 픽션보다 더 세고 독한 콘텐츠들이 많습니다.

수잔이 픽션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며 괴로워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픽션이 에드워드의 소설이란 사실이 수잔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쳤을까요?

수잔이 그저 에드워드의 글솜씨가 상당해졌네.’라고만 느꼈다면 모르겠지만,

수잔은 억지스러울 정도로 에드워드의 의도를 자신의 삶과 결부시키려 애씁니다.

마치 (어떤 경로로든) 자신의 삶이 불안정하고 위태롭다는 정보를 얻은 에드워드가

과거를 복수하거나 현재를 조롱하기 위해 이 소설을 보냈다는 식으로 알아서반응합니다.

소설을 보면 딱히 그럴만한 단서도 흔적도 없는데 말이죠.

(두 차례에 걸친 막간챕터에서 난해한 문장들로 묘사된 수잔의 심리는

에드워드의 책에 대한 수잔의 반응을 강조하려는 부연설명처럼만 보입니다)

 

몇몇 분의 서평을 몇 편 읽다보니, 좀 심하게 말하면, ‘꿈보다 해몽이란 말이 생각났습니다.

소설에선 채 깨닫지 못했던 점들이 꽤 상세하게 분석돼있었는데

어떤 부분은 , 이렇게 해석되는 거였나?’ 싶을 정도로 생소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토니와 수잔의 접점만큼은 끝까지 이해 안 되는 대목이었습니다.

에드워드가 던진 수수께끼 같은 질문 - “이 퍼즐에서 빠진 조각을 찾아봐.” - 에 대해서도

수잔은 답을 찾은 것처럼 행동하지만, 저로서는 질문과 답 사이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어쨌든 앞서 말한 대로 취향의 문제또는 독해능력 부족중 한 가지가 이유겠지요.

(어쩌면 톰 포드가 연출한 영화를 보면 저의 몰이해가 해결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족으로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이 작품 역시 예외 없이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를 홍보 문구에 삽입했더군요.

부부가 등장하고, 한쪽이 어딘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 설정만 나오면

너도나도 나를 찾아줘의 승계자(?)인 것처럼 자처하는데,

이젠 그 홍보 문구가 보이면 오히려 기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스스로의 완성도와 함량만으론 독자에게 어필할 자신이 없다는 뜻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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