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관계 사립탐정 켄지&제나로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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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편인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에서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탐정 일을 접었던 켄지와 제나로는 한 재력가의 저택으로 거의 납치되다시피 끌려간 뒤 사건을 떠맡게 됩니다. 재력가의 의뢰는 실종된 딸을 찾아달라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켄지의 사수였던 명탐정이 같은 의뢰를 받고 조사를 벌이던 도중 홀연히 실종됐다는 점입니다. 어딘가 불온한 냄새가 풍기는 의뢰였지만 두 사람은 오랜만에 의기투합하여 조사에 나서고, 플로리다로 날아가 딸의 행방을 찾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연이은 살인사건과 위기일발의 순간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드러난 재력가와 딸의 엄청난 비밀에 두 사람은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켄지&제나로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데니스 루헤인의 팬이면서도 그의 대표작인 이 시리즈를 아직도 마스터하지 못한 것은 쏟아지는 신작들의 유혹과 저의 게으름이 가장 큰 이유지만, 변명하자면 맛있는 요리를 아껴뒀다가 나중에 먹고 싶어 하는 심리처럼 불과 여섯 편밖에 안 되는 켄지와 제나로의 이야기를 천천히 음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에 데니스 루헤인의 커글린 가문 3부작더 드롭을 읽긴 했지만,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를 읽은 지 2년 반이나 지난 걸 깨닫곤 켄지와 제나로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기 전에 서둘러 신성한 관계를 꺼내들었습니다.

 

무릇 액션스릴러라면 일단 재미있어야 합니다. 주인공도 매력적이어야 하고, 사건은 쉴 틈 없이 몰아치고 그만큼 반전도 거듭돼야 하고, 무엇보다 그럴 듯한리얼리티로 독자에게 어필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데니스 루헤인은 스릴러 작가의 미덕을 완비한 타고난 이야기꾼이 분명합니다.

(사건을 의뢰한 재력가의 말을 빌리면) 켄지와 제나로는 정직하고 잔혹한 탐정입니다. 심플한 설명이지만 단번에 매력이 느껴지는 캐릭터입니다. 사실, ‘정직잔혹은 대부분의 장르물 주인공이 갖고 있는 덕목이긴 하지만, 이들에겐 남녀 파트너라는 설정이 주는 묘한 케미도 있어서 더욱 시선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

 

신성한 관계는 켄지와 제나로의 정직’, ‘잔혹’, ‘케미가 골고루 살아있는 작품입니다. 전편인 어둠이여~’의 경우, 두 사람의 비극적인 가족사가 워낙 많이 소개된 것은 물론 사건 자체에 가족들이 여기저기 연루된 탓에 이야기가 무척 무겁게 느껴졌고, 조금은 모호하거나 혼란스러웠던 연쇄살인의 동기 때문에 약간의 찜찜함이 남았던 반면, ‘신성한 관계는 그와 반대로 깔끔하고 속 시원한 액션 스릴러인데다 남녀 관계로 발전하는 듯한 켄지와 제나로의 모습도 엿보여서 처음부터 끝까지 경쾌한 리듬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수시로 뒤집어지는 반전들이 마지막 장까지 이야기를 오리무중으로 만드는데 그 덕분에 모두가 용의자다.”라는 켄지의 새 좌우명이 여러 번 실감나게 느껴지곤 합니다. 특히 마지막에 범인을 응징하는 장면은 여느 장르물의 엔딩보다 기발하고 잔혹해서 기억에 남을 만한 명장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뒤로 가라, 아이야 가라’, ‘비를 바라는 기도’, ‘문라이트 마일등 세 편이 남았는데, 마음 같아선 내리 읽고 싶지만, 역시나 조금씩 아껴가면서 읽게 될 것 같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읽는 장르물마다 실망을 느끼며 권태를 느낄 때쯤이면 켄지와 제나로가 생각날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저의 권태를 한 방에 날려주겠지만, 동시에 남은 작품이 또 하나 줄어들었다는 아쉬움도 함께 전해줄 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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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농장
하하키기 호세이 지음, 권영주 옮김 / 시공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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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무척 세고 독한 작품입니다. 어딘가 음산해 보이는 표지도 눈길을 끕니다.

제목과 표지가 풍기는 불온한 기운만 놓고 보면 살육에 이르는 병에 못지않은 작품이지만,

실제 내용은 포장과는 달리 따뜻하고 묵직하면서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의료행위에 관한 도덕적 딜레마와 인간의 탐욕이 낳은 참극을 다루는 과정에서

몇 차례의 살인사건과 죽음이 등장하는 메디컬 미스터리의 미덕도 충분히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짜릿한 청량음료가 아니라 공들여 오래 우려낸 녹차의 맛이라는 출판사의 소개처럼

이 작품은 병원 내 정치적 알력, 미스터리한 연쇄살인, 충격적 반전보다는

의료현장에서 맞닥뜨리는 삶과 죽음에 대한 윤리적 고민이라는 주제에 더 충실한 작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짜릿한 청량음료같은 가이도 다케루의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와는

여러 면에서 차별화된 메디컬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햇병아리 간호사가 엿들은 무뇌아라는 한마디, 모든 것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카피와

장기농장이라는 제목만으로도 대략의 스토리는 짐작이 됩니다.

훌륭한 간호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이제 막 병원 생활을 시작한 노리코가

소아장기이식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병원의 어두운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병원 안팎의 여러 인물이 각자 다른 이유로 무뇌아를 이용한 소아장기이식에 가담한 가운데,

노리코를 좋아하는 이식 팀 의사, 간호학교 동기인 절친 간호사 등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으며 노리코와 함께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만일 이 작품의 인물구도가 단순한 선과 악으로 설정됐거나

이야기의 포인트가 범인 또는 진실 찾기에 맞춰졌다면

아마 짜릿한 청량음료로서의 매력은 훨씬 더 배가됐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작가는 노리코를 통해 독자에게 난감한 질문을 던집니다.

 

만일 당신의 아이가 이식수술 없이는 살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을 때,

누군가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무뇌아의 장기 이식을 제안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무뇌아는 인간일까? 인간이 아닐까? 무뇌아에게 삶과 죽음이란 게 존재할까?

뇌가 살아있어야만 인간인가? 아니면, 사지와 장기가 꿈틀대기만 해도 인간으로 봐야 할까?

어차피 하루도 채 못 산다면, 그 장기를 이용하여 여러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은 일 아닐까?”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에 따라 노리코와 그녀의 적들이 구분됩니다.

하지만 누구의 대답도 정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같은 의료인이라도 도덕적 가치관에 따라 대답이 다를 수 있고,

3자의 입장일 때와 내 아이가 아픈 당사자일 때의 대답이 다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첫 근무처인 소아과에서 장기이식만이 유일한 대안인 어린 환자들을 대하는 노리코로서는

정답이 무엇인지 더욱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작가는 여기에 한 가지 변수 인간의 탐욕 - 를 더 추가함으로써

자칫 윤리적 논쟁만 하다가 그칠 수 있는 서사에 긴장감과 미스터리 극성을 탑재시킵니다.

누군가는 오로지 부와 명예를 위해 무뇌아들을 이용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의사로서 연구 성과에 집착한 나머지 모든 윤리적 판단을 잊기도 합니다.

또 그 과정에서 흘러나오는 단물에 빠져든 사악한 개미떼 같은 캐릭터도 등장합니다.

이런 장치들 덕분에 마지막에 이르러 장기농장이라는 제목의 진짜 의미가 드러납니다.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한 농장의 진짜 의미 말입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적잖은 분량 속에 작가는 미스터리와 도덕적 딜레마 외에

이런저런 따뜻한 이야기들을 꽤 많이 담아놓았습니다.

산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벚나무와 연못의 그림 같은 풍광,

출퇴근 때마다 이용하는 오래 된 케이블카의 아날로그 같은 정서,

산꼭대기 레스토랑에서 보이는 어릴 적부터 살아온 바닷가 마을의 정경,

그리고 스무 살을 갓 넘긴 청춘의 설레는 첫사랑 등이 그것인데,

이 모든 것들은 노리코의 진실 찾기와 잘 어우러지면서

앞서 말한 대로 공들여 오래 우려낸 녹차의 맛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대목에서는 과한 부분도 있어서 분량의 문제가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충격적인 메디컬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라면 좀 싱겁게 읽힐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간결하면서도 탄탄한 서사 속에

휴머니즘과 미스터리가 적절히 배합된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목이나 표지가 자칫 안티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2009년에 국내 출간된 하하키기 호세이의 폐쇄병동을 곧 읽어볼 생각입니다.

일본에서는 장기농장보다 늦게 출간됐지만,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받았다고 하네요.

책 소개를 보니 장기농장과 비슷한 톤의 작품인 것 같은데,

그의 휴먼 메디컬 미스터리의 또다른 매력을 꼭 맛보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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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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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하고 부유물처럼 살다가 외롭게 죽어 간 아버지,

그에 대한 원망과 증오로 삶을 견디다가 끝내 치매에 힘입어 기억을 지워버린 어머니,

진작 자신의 출생을 결정할 수 있었다면 마씨 집안에 태어나기를 거부했을 것만 같은,

그래서 결국 발목 잡는 것도 없고, 인연도 없는삶을 택해 멀리 남태평양으로 도망친 형,

그리고 그런 가족들에게 달라붙지도, 도망치지도 못한 채

그들이 남긴 슬픔과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그저 남루한 삶을 이어갈 뿐인 동생...

서로를 당기기도 밀쳐내기도, 서로에게 상처주기도 상처받기도 하면서

가족이라는 끈에 묶여 60여 년을 살아온 마씨 집안의 신산스러운 삶...

 

● ● ●

 

지금까지 읽은 김훈의 소설 가운데 (단편을 제외하고) 가장 작은 소설입니다.

작가 스스로 후기를 통해 작은 소설이라 표현하기도 했지만,

그냥 뼈대만 추려서 말하면 공터에서는 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남루한 가족의 이야기이고,

좀더 보태려고 해도 서사 자체만으로는 크게 확장해서 설명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후기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김훈은 왜 이 이야기를 쓴 것일까?

 

이 작은 소설은 내 마음의 깊은 바닥에 들러붙어 있는 기억과 인상의 파편들을 엮은 글이다.

그 기억과 인상들은 오랫동안 내 속에 서식하면서 저희들끼리 서로 부딪치고 싸웠다. (중략)

모두 버리고 싶었지만 마침내 버려지지 않아서 연필을 쥐고 쓸 수밖에 없었다. (중략)

이 글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나는 그 기억과 인상들이 이제는 내 속에서 소멸하기를 바란다.”

(작가 후기 )

 

다른 독자들의 소감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아쉬웠다는 평이 제법 눈에 띄었습니다.

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막상 작가의 후기를 읽고 나니,

마씨 집안 연대기의 진정성과 인물들의 존재감이 조금은 묵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기억과 인상의 파편이라 칭한 것은

실제 현실에 존재했던 작가 주변의 인물이나 사건이 남긴 흔적일 수도 있고,

전작들에서 미처 다 말하지 못한 아쉬움 또는 쓰고 남은 상상력의 잔재들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됐든 작가 스스로 세상에 내놓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숙제였다는 점에서

그가 마씨 집안의 60여년의 시간을 그린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만주, 길림, 상하이를 전전하다

한국전쟁 중의 부산에서 아내 이도순을 만난 마동수는

평생을 바람처럼 사라졌다가, 바람처럼 나타나곤 했던 부평초 같은 남자입니다.

이도순은 흥남 철수 길에 전 남편과 딸을 잃은 뒤 마동수를 만나 두 아들을 낳았지만,

마동수를 만난 일도, 두 아들을 낳은 일도 평생 후회하면서 살아온 여자입니다.

장남 마장세는 그런 부모들을 원망하고 증오한 끝에

베트남 참전 직후 괌으로 도망치듯 날아가 그곳에서 모든 가족의 연을 끊고 살아갑니다.

차남 마차세는 마씨 집안의 불온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무력한 인물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고, 요양원의 어머니를 모시며

자신을 닮은 여자 박상희를 만나 누니라는 딸을 낳으며 또다시 일가를 이룹니다.

그들은 서로를 용서하지도, 서로에게 화해를 권하지도 않습니다.

선을 긋거나 투명인간 취급하거나 또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대상으로 여길 뿐입니다.

그것은 시대의 탓만도 아니고, 그들의 타고난 인격 탓만도 아닙니다.

숙명일 수도 있고, 업보일 수도 있고, 시대와 인격의 잘못된 만남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작가는 그냥 그렇게 마씨 집안의 60여년을 담담하게 들여다보듯 풀어놓고 있습니다.

 

캐릭터도 스토리도 새로움과는 거리가 먼 설정이고,

서사는 김훈이라는 이름이 예고한 깊이나 무게에 비해 작고 가벼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훈 특유의 은유와 상징은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어느 작품에서나 그랬듯 그의 문장은 곱씹을수록 향기가 짙어졌고,

극단적인 감정은 오히려 짧고 평범한 언어로 쓰인 탓에 더 절절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역시 어딘가 허허로운 뒷맛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 뒷맛은 김훈의 서사에 대한 기대감이 배반당한 탓일 수도 있고,

거점이나 발 디딜 곳을 잃고 부초처럼 살아온 마씨 집안의 내력 탓일 수도 있습니다.

작가의 후기를 읽고 나름 위로(?)받은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쨌든 다음 작품에서는 김훈만이 남길 수 있는 깊은 후유증을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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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의 노래 버티고 시리즈
댄 시먼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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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르 이후 인도 최고의 시인으로 불리는 M.다스가 행방불명된 지 8년 만에 다시 나타났다.

시인이자 프리랜서 작가인 로버트 루잭은 다스에게서 신작 원고를 입수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위험천만한 캘커타로 향한다.

하지만 아내 암리타와 어린 딸 빅토리아까지 동반한 여행은 끔찍한 악몽으로 변하고 만다.

숨 막히는 더위와 몬순 폭풍, 악취가 진동하는 오물과 하수,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로 뒤섞인 아비규환의 도시.

루잭은 가족과 함께 캘커타를 벗어나려 하지만

받기로 한 원고는커녕 다스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다.

다스의 행방을 쫓을수록 서서히 엄습하는 공포는 루잭의 목을 조여 오는데..

(인터넷 서점의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 ● ●

 

여섯 개의 팔과 다리를 가진 파괴와 죽음의 여신 칼리,

그 여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아비규환의 도시 캘커타와 그 여신을 떠받드는 잔혹한 폭력세력,

평생 평화를 노래했지만, 8년 만에 부활하며 그 여신의 악마성을 칭송하는 당대의 시인,

그리고 그 시인을 찾아 캘커타로의 위험한 여정을 택한 한 미국인 가족이 겪는 악몽의 시간..

 

칼리의 노래는 요약하자면 캘커타를 배경으로 한 호러물입니다.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고, 신의 광기와 인간의 공포가 극단까지 치닫는 작품입니다.

폭력은 엄연히 현실에서 벌어지고 피해자의 피와 살이 난무하지만,

폭력의 근원이 신의 분노인지 인간의 잔혹함인지,

심지어 실제로 폭력을 휘두르는 주체가 신인지 인간인지조차 모호합니다.

 

폭우와 오물과 악취로 뒤범벅인 캘커타의 지옥도 같은 풍경은

이런 근원 모를 공포와 난데없는 폭력의 강도를 훨씬 더 강렬하게 만듭니다.

마치 파괴와 죽음의 여신 칼리가 현실에 재림하여 여섯 개의 팔과 다리를 휘두르며

무자비한 향연을 벌이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사실, 준비된 재료들만 놓고 보면 여전히 신비함이 남아있는 인도,

그것도 캘커타라는 곳을 무대로 완벽한 호러물이 기대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척이나 혼란스럽게 읽힌 작품이었습니다.

파괴와 죽음의 여신 칼리가 이 작품에서 어떤 상징이었는지도 잘 모르겠고,

칼리를 섬기는 잔혹한 세력이 무자비한 폭력을 통해 추구하는 욕망도 잘 모르겠고,

죽은 줄 알았던 시인 M.다스가 칼리를 칭송하는 시를 지은 이유도 잘 모르겠고,

주인공 루잭에게서는 M.다스를 반드시 찾아내야 하는 절실함도 잘 안 보이고,

M.다스의 정보를 알려주겠다며 루잭에게 접근한 의문의 사내들의 목적도 잘 모르겠고,

궁극적으로는 칼리와 폭력세력과 의문의 사내들이

왜 루잭과 그의 가족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번역하신 김미정 님의 후기를 봐도 이해에 도움이 되진 않았고,

결국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 남은 것은 혼란스러운 상징들과 불편한 공포심뿐이었습니다.

오히려 이 작품 속에 문학과 예술과 가족과 삶의 의미가 녹아있다는 해설을 읽곤

꿈보다 해몽인가 싶을 정도로 억지스러운 해석의 느낌까지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일본의 대표적 호러작가인 미쓰다 신조의 작품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편이지만,

칼리의 노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단지 문화적 차이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호러물에서 개연성논리적 연결성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모순된 행동이겠지만,

주인공의 의지, 조연들의 정체와 목적, 폭력의 근원과 주체,

()과 시()가 상징하는 바 등 많은 것들이 납득 또는 추정할 수 있게 설명되지 않은 탓에

이런 모호한 서평을 남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만, 다른 분들의 서평을 보니 저만 이 작품을 잘못 읽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고, 오독의 결과일 수도 있으니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제 서평만 보신 분이라면

인터넷 서점이나 블로그를 통해 다른 분들의 서평을 꼭 참고하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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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사이드
앤서니 오닐 지음, 이지연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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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전설적인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명반 중

‘The Dark Side Of The Moon’이 있습니다.

1970년대 발매된 음반이지만 지금 들어도 혁명적이고 전위적이며

달의 뒷면에 숨은 서늘함과 기괴함이 느껴지는 명곡들이 수록돼있습니다.

 

앤서니 오닐의 다크 사이드에 펼쳐진 달의 뒷면은

핑크 플로이드가 음악으로 그린 그 서늘함과 기괴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 무대인 퍼거토리(purgatory, 연옥)

기이한 백만장자 플레처 브라스가 소유하고 있는 무법천지 도시로,

지구에서 흉악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나 어두운 과거가 있는 사람들이

쾌락을 좇아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찾아가는 곳입니다.

살인과 폭력, 마약과 섹스 등 온갖 범죄가 난무하지만 경찰은 형식적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이런 음험한 곳에 지구에서 추방당한 형사 유스터스가 부서장으로 부임합니다.

자신이 수사하던 범죄조직이 들이부은 산() 때문에 얼굴의 반은 녹아 내렸고,

모종의 음모에 의해 지구에서 추방당하기까지 했지만,

그는 어떤 권력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당당함과 청렴함을 가진 유능한 경찰입니다.

하지만 우연의 일치인지 그가 퍼거토리에 도착하자마자 기이한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유스터스는 일련의 사건들이 퍼거토리의 최상위 권력을 놓고 벌어진 충돌의 결과임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서지만 서장을 포함한 나머지 경찰들은 그런 그를 비웃거나 방관할 뿐입니다.

 

한편 퍼거토리와 멀리 떨어진 또다른 달의 뒷면 어딘가에서도 참혹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새로 프로그래밍 된 안드로이드 한 대가 퍼거토리를 향해 폭주하며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거나 돕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로 무차별 살인극을 벌이는 것입니다.

왕과 정복자가 되겠다며 퍼거토리를 향하는 안드로이드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

그 미스터리는 퍼거토리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스터스가 수사 중인) 연쇄살인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유스터스와 안드로이드는 서로 한 챕터씩 번갈아가며

퍼거토리 안팎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참극들의 진실을 드러냅니다.

 

작가 스스로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L.A 컨피덴셜을 뒤섞었다고 말할 정도로

다크 사이드SF와 하드보일드 미스터리가 뒤섞인 독특한 형식미를 가진 작품입니다.

하지만 SF는 전혀 낯설지도, 먼 미래의 이야기 같지도 않은 현실감을 지니고 있고,

유스터스가 발산하는 냉정하고 올곧은 형사 캐릭터와 그가 대적하는 의 캐릭터들 역시

현실의 미스터리만큼 팽팽하고 리얼하게 그려져서

때때로 이곳이 달의 뒷면임을 잊게 만들곤 합니다.

 

하지만 역시 인간이 결코 볼 수 없는 달의 뒷면이 지닌 신비한 이미지와 함께

그곳에 세워진 음험하기 짝이 없는 무법천지의 1인 독재 왕국이 내뿜는 긴장감은

현실의 지구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와는 분명 다른 매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달의 곳곳을 마치 직접 가본 것처럼 생생하게 그린 점이라든가,

지구와는 다른 중력 덕분에 전혀 색다른 모습의 추격전이 벌어지는 점,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뒤섞인 듯한 소돔을 닮은 퍼거토리의 풍경 등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채 SF영화를 보는 듯한 아찔함을 선사합니다.

 

다만, 사건의 진상과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과정은 상대적으로 단순합니다.

복잡한 미로라고 할 수도 없고, 대단한 반전이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유스터스의 매력은 추리보다는 대쪽 같은 경찰로서의 태도에 더 의지하고 있고,

미친 안드로이드의 엽기 행각 역시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결과로 판명납니다.

그래서, 미스터리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짜릿한 블록버스터 한 편을 본 듯한 만족감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비주얼과 캐릭터의 매력 때문에 진작에 영화 제작이 결정됐다고 들었는데,

과연 달의 뒷면이 어떻게 영상화될지, 누가 유스터스 역을 맡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핑크 플로이드의 ‘The Dark Side Of The Moon’을 연상시키는 OST까지 맛볼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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