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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농장
하하키기 호세이 지음, 권영주 옮김 / 시공사 / 2017년 2월
평점 :
제목이 무척 세고 독한 작품입니다. 어딘가 음산해 보이는 표지도 눈길을 끕니다.
제목과 표지가 풍기는 불온한 기운만 놓고 보면 ‘살육에 이르는 병’에 못지않은 작품이지만,
실제 내용은 포장과는 달리 따뜻하고 묵직하면서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의료행위에 관한 도덕적 딜레마와 인간의 탐욕이 낳은 참극을 다루는 과정에서
몇 차례의 살인사건과 죽음이 등장하는 메디컬 미스터리의 미덕도 충분히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짜릿한 청량음료가 아니라 공들여 오래 우려낸 녹차의 맛”이라는 출판사의 소개처럼
이 작품은 병원 내 정치적 알력, 미스터리한 연쇄살인, 충격적 반전보다는
의료현장에서 맞닥뜨리는 삶과 죽음에 대한 윤리적 고민이라는 주제에 더 충실한 작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짜릿한 청량음료’ 같은 가이도 다케루의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와는
여러 면에서 차별화된 메디컬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햇병아리 간호사가 엿들은 ‘무뇌아’라는 한마디, 모든 것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카피와
‘장기농장’이라는 제목만으로도 대략의 스토리는 짐작이 됩니다.
훌륭한 간호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이제 막 병원 생활을 시작한 노리코가
소아장기이식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병원의 어두운 비밀을 파헤치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병원 안팎의 여러 인물이 각자 다른 이유로 ‘무뇌아를 이용한 소아장기이식’에 가담한 가운데,
노리코를 좋아하는 이식 팀 의사, 간호학교 동기인 절친 간호사 등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으며 노리코와 함께 진실 찾기에 나섭니다.
만일 이 작품의 인물구도가 단순한 선과 악으로 설정됐거나
이야기의 포인트가 범인 또는 진실 찾기에 맞춰졌다면
아마 ‘짜릿한 청량음료’로서의 매력은 훨씬 더 배가됐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작가는 노리코를 통해 독자에게 난감한 질문을 던집니다.
“만일 당신의 아이가 이식수술 없이는 살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을 때,
누군가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무뇌아의 장기 이식을 제안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무뇌아는 인간일까? 인간이 아닐까? 무뇌아에게 삶과 죽음이란 게 존재할까?
뇌가 살아있어야만 인간인가? 아니면, 사지와 장기가 꿈틀대기만 해도 인간으로 봐야 할까?
어차피 하루도 채 못 산다면, 그 장기를 이용하여 여러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은 일 아닐까?”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에 따라 노리코와 그녀의 적들이 구분됩니다.
하지만 누구의 대답도 정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같은 의료인이라도 도덕적 가치관에 따라 대답이 다를 수 있고,
제3자의 입장일 때와 ‘내 아이가 아픈 당사자’일 때의 대답이 다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첫 근무처인 소아과에서 장기이식만이 유일한 대안인 어린 환자들을 대하는 노리코로서는
정답이 무엇인지 더욱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작가는 여기에 한 가지 변수 – 인간의 탐욕 - 를 더 추가함으로써
자칫 윤리적 논쟁만 하다가 그칠 수 있는 서사에 긴장감과 미스터리 극성을 탑재시킵니다.
누군가는 오로지 부와 명예를 위해 무뇌아들을 이용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의사로서 연구 성과에 집착한 나머지 모든 윤리적 판단을 잊기도 합니다.
또 그 과정에서 흘러나오는 단물에 빠져든 사악한 개미떼 같은 캐릭터도 등장합니다.
이런 장치들 덕분에 마지막에 이르러 ‘장기농장’이라는 제목의 진짜 의미가 드러납니다.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한 ‘농장’의 진짜 의미 말입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적잖은 분량 속에 작가는 미스터리와 도덕적 딜레마 외에
이런저런 따뜻한 이야기들을 꽤 많이 담아놓았습니다.
산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벚나무와 연못의 그림 같은 풍광,
출퇴근 때마다 이용하는 오래 된 케이블카의 아날로그 같은 정서,
산꼭대기 레스토랑에서 보이는 어릴 적부터 살아온 바닷가 마을의 정경,
그리고 스무 살을 갓 넘긴 청춘의 설레는 첫사랑 등이 그것인데,
이 모든 것들은 노리코의 진실 찾기와 잘 어우러지면서
앞서 말한 대로 ‘공들여 오래 우려낸 녹차의 맛’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대목에서는 과한 부분도 있어서 분량의 문제가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충격적인 메디컬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라면 좀 싱겁게 읽힐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간결하면서도 탄탄한 서사 속에
휴머니즘과 미스터리가 적절히 배합된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목이나 표지가 자칫 안티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2009년에 국내 출간된 하하키기 호세이의 ‘폐쇄병동’을 곧 읽어볼 생각입니다.
일본에서는 ‘장기농장’보다 늦게 출간됐지만,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받았다고 하네요.
책 소개를 보니 ‘장기농장’과 비슷한 톤의 작품인 것 같은데,
그의 ‘휴먼 메디컬 미스터리’의 또다른 매력을 꼭 맛보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