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이가라시 다카히사 지음, 이선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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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자기애와 순수한 악의,

인간의 심연 속에만 존재할 것 같은 악의 정령,

스티븐 킹의 미저리의 간호사 애니와 미쓰다 신조의 작품 속 초현실적 악령의 조합...

 

전편인 리카의 서평에서 리카의 캐릭터를 제 나름대로 지칭했던 표현들입니다.

그녀는 사랑에 관한 한 독점과 소유밖에 모르는 광기에 사로잡힌 스토커이며,

자신의 사랑을 거부하거나 방해하는 자들을 눈 하나 깜짝 않고 토막 내는 연쇄살인마입니다.

두드러지는 큰 키에 뼈만 남은 듯한 흙색 피부, 온몸에서 풍기는 썩은 냄새 등

어디에서도 눈에 띌 수밖에 없는 특징을 가졌지만,

10년 전, 사랑하던 남자의 토막난(그러나 여전히 살아있던) 몸통을 들고 사라졌던 그녀는

경찰력이 총동원된 수사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자신의 존재를 감춰왔습니다.

 

● ● ●

 

그랬던 그녀가 다시 돌아옵니다.

리카는 10년간 애지중지 사랑했던, 하지만 이젠 죽어버려 쓸모가 없어진

한 남자의 토막난 몸통을 야산에 내다버림으로써 자신의 복귀를 알립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두 명의 경시청 여형사 나오미와 다카코가 리카의 뒤를 쫓습니다.

 

경시청 콜드케이스 수사반, 즉 미제사건 수사반에 근무하며 리카의 흔적을 조사해온 나오미는

10년 전 리카를 추격하다가 그녀의 참혹한 범죄에 충격을 받고 쓰러진 뒤로

지금까지 의식을 잃은 채 병상에 누워있는 노형사 스가와라의 애제자이기도 합니다.

나오미와 다카코는 상부의 지시와 무관하게 그녀들만의 수사를 전개시키고,

끝내 리카의 눈길을 끄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사랑의 대상을 찾기 위해 10년 만에 돌아온 리카는 예전보다 더 난폭해졌고,

그녀의 일그러진 자기애와 순수한 악의는 더욱 날카롭게 벼려졌습니다.

나오미와 다카코의 집념과 의지 같은 건 리카에겐 하찮고 손쉬운 먹잇감에 불과합니다.

 

● ● ●

 

사실 리카의 복귀는 무척이나 기대됐던 이야기입니다.

단순한 소시오패스를 넘어 그야말로 악의 순수한 응집체 같던 리카가

10년 만에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과연 무슨 참극이 벌어질까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일단 출발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야산에서 발견된 몸통이 10년 전 리카의 마지막 범행대상이었던 남자라는 점,

그 남자가 몸통만 남은 채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었다는 점,

그리고 리카가 새로운 사랑을 찾기 위해 또다시 만남사이트를 전전한다는 점 등

그녀의 복귀는 예상을 뛰어넘는 파격으로 시작됩니다.

 

, 리카로 인해 자책과 자괴에 빠진 끝에 식물인간처럼 망가진 스가와라 형사의 애제자이며

미제사건 수사팀에서 10년 간 리카를 추적해온 나오미의 캐릭터는 매력적입니다.

나오미와 다카코가 조직의 방침을 무시하고 따로 리카에게 접근하겠다는 발상이라든가,

그를 위해 기발한 유인책을 쓰는 대목은 긴장감을 극적으로 유발하는 설정들입니다.

리카는 여전히 잔혹한 방법으로 희생자를 해체하고,

눈에 띄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눈은 물론 촘촘한 CCTV도 무력하게 만듭니다.

수사 도중 위기에 처한 나오미의 모습은 읽기 불편할 정도로 참혹합니다.

리카의 복귀에서 기대됐던 덕목들이 곳곳에서 풍성하게 발견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제가 내린 한 줄 평은 너무 허술하고 안이했던 후속편입니다.

300페이지를 갓 넘길 정도의 짧은 분량임에도

작가는 다카코의 연애 등 엉뚱한 묘사에 적잖은 분량을 할애한 반면,

정작 리카에 관해서는 인색할 정도로 분량을 아꼈습니다.

모처럼 세상 밖으로 나왔는데 나쁜 짓(예상보다) 별로 안 하고,

복귀한 이유나 목적도 제3자의 추측으로만 설명될 뿐이라 존재감이 미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편에서도 의문이었지만) 특히 투명인간처럼 모든 감시망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신통력은

이번 작품에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반복적으로 묘사되어 현실감을 떨어뜨렸습니다.

나오미와 다카코의 수사는 복잡하지도 않고 별 난관도 없이 순조롭게 전개될 뿐만 아니라

10년 차 미제사건 수사팀이라는 이력이 무색할 정도로 단순-초보에 가깝습니다.

그런 그녀들의 수사조차 못 따라가는 경시청 수사1과는 한심해 보일 정도입니다.

 

리얼 호러물과 판타지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극도의 공포심을 발휘했던 전편에 비해

리턴11년 만에 쓰인 후속편으로서는 여러 면에서 자격 미달이라는 생각입니다.

3편인 후속작 리버스가 리카의 비기닝 또는 프리퀄 스토리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봤는데,

부디 리턴의 아쉬움을 털어낼 수 있는 작품이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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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프 보이스 - 법정의 수화 통역사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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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사무직을 그만두고 수화 통역사가 된 아라이 나오토는

자신이 근무하던 경찰서 관할지역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소식에 크게 놀랍니다.

살해된 자는 농인(聾人) 재활시설의 대표로,

17년 전, 같은 시설의 대표로 있던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방법으로 살해됐기 때문입니다.

당시 체포된 범인은 농인이었고, 말단 경찰 아라이는 그의 수화 통역을 맡은 바 있습니다.

통역 도중 사건 수사에 뭔가 오류가 있음을 감지했지만

강압적인 상부의 지시 때문에 이의 제기 한 번 못했던 아라이는

17년이 지나 똑같은 방법으로 그 아들이 살해된 사건을 접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경찰은 17년 전 사건의 범인인 몬나 데쓰로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쫓지만,

아라이는 농인이 연루된 두 사건의 이면에 전혀 다른 비밀과 진실이 숨어있다고 확신합니다.

 

● ● ●

 

데프 보이스속 인물들은 세 개의 캐릭터 – ①농인(聾人, 들리지 않는 사람),

청인(聽人, 들리는 사람), 그리고 농인과 청인의 경계에 있는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세 번째 캐릭터의 대표적 사례는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청인인데

이들을 가리켜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라고 부르며,

주인공 아라이 나오토가 바로 이 경우에 속하는 인물입니다.

 

부모와 형이 모두 농인이지만 본인만 청인이었던 어린 시절의 아라이에게

들린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트라우마였습니다.

그는 세상과 가족을 연결하는 통역사였지만 정작 가족 안에서는 늘 외톨이였습니다.

농인인 부모와 형은 아라이는 끼어들기 힘든 자신들만의 유대로 뭉쳐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장하면서 가족과 멀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농인의 세계와도 연을 끊으려 했지만,

경찰 사무원이 된 뒤에도, 또 경찰을 그만둔 뒤에도

들리지 않는 사람과의 인연은 좀처럼 그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데프 보이스는 농인과 청인의 경계에 선 아라이 나오토의 트라우마와

17년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동일한 수법의 살인사건을 엮은 미스터리입니다.

더불어, 농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물론 농인들 간의 갈등과 딜레마까지 다룸으로써

300여 페이지의 분량 안에 다양한 서사를 선보입니다.

 

사실, 미스터리 자체만 놓고 보면 그리 크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설정이지만,

작가는 아라이를 통해 농인 대 농인의 갈등, 농인 대 청인의 갈등을 정교하게 그려냄으로써,

또 가족-이웃-사회가 어떻게 그 갈등을 촉발시키고, 부추기고, 억누르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미스터리 이상의 여운과 감동을 전해줍니다.

 

아저씨는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카피는

17년 전 아라이가 통역을 맡았던 농인 용의자의 막내딸이 던진 수화 질문입니다.

아라이는 당혹스러운 표정만 보여줬을 뿐 소녀에게 분명한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 순간만이 아니라 아라이는 그때까지 평생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회피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날 이후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들리는 사람인가, ‘들리지 않는 사람인가?

나는 누구의 편이며, 누구의 적인가?

 

가족의 정체가 드러날까 두려워 경찰직 중에도 일부러 사무직을 택했고,

농인 자녀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결혼마저 파탄에 이르게 방치한 것을 보면

아라이의 무의식은 ’, 그러니까 들리는 사람의 자리에 안주하고 싶어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운명은 그의 삶을 계속 뒤흔들었고,

결국 경찰 퇴직 후 수화 통역사가 되어 또다시 농인들에게 돌아오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 온전히 우리 편이 될 수 있을까요?

작가는 마지막까지 이 곤란한 딜레마를 아라이에게 끊임없이 던집니다.

 

일본 내 농인 사회의 갈등과 딜레마를 강조하기 위해

조금은 과도한 분량을 할애하여 전문 정보와 주제의식을 설명한 점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동시에, 흥미로운 미스터리 속에 농인의 문제를 현실감 있게 풀어낸 작가의 필력 덕분에

제대로 알지 못했던 농인들의 고민과 실상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눈치 빠른 분들은 중간에 사건의 진상을 알아낼 수도 있지만,

데프 보이스는 누가 범인이고, 무엇이 진실인지보다

작품의 밑바닥을 흐르는 좀더 큰 서사와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따라가는 작품이라

미스터리가 좀 쉬워 보이더라도 마지막 장까지 천천히 음미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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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고 말해 스토리콜렉터 52
마이클 로보텀 지음, 최필원 옮김 / 북로드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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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산산이 부서진 남자내 것이었던 소녀에 이어 한국에 소개된 조 올로클린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마이클 로보텀의 홈페이지를 보면 산산이 부서진 남자앞에 ‘The Suspect’(한국 출간 2005, ‘용의자’), ‘The Drowning Man’이 있으니, 전체로 보면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3년 전, 흔적도 없이 사라진 두 소녀 태쉬와 파이퍼 사건이고, 또 하나는 세미나 때문에 옥스퍼드에 들른 조가 본의 아니게 휘말린 부부살해사건이 또 하나입니다. 사라진 소녀 파이퍼가 쓴 일기장 같은 기록엔 외모도, 집안도, 성향도 전혀 다른 두 소녀가 가족, 학교, 이웃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그들에게 되갚아줬던 복수가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톡톡히 대가를 치러야 했고, 그에 대한 반발로 옥스퍼드를 떠날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런던에서의 그림 같은 삶을 꿈꾸던 그녀들은 어느 날 갑자기 세상과 단절됩니다. 한편, 조는 부부살해사건 때문에 옥스퍼드 경찰에 협조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돼 소녀실종사건과의 접점 - 피살된 부부의 농장 인근의 얼어붙은 호수 밑에서 발견된 소녀의 시체 - 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이내 수사팀의 중심이 되어 두 사건을 동시에 조사합니다.

 

이번에 조가 맡은 사건은 (여전히 잔혹하긴 하지만) 규모나 복잡성 면에서 단순한 편입니다. 사건에 개입하는 과정 역시 본인 또는 가족이 고통스럽게 연루되는 방식이 아니라 출장지에서 우연히 협조요청을 받는 식으로 한 발 떨어진 상태에서 출발합니다.

또한, 먼저 출간된 두 작품에 비해 미안하다고 말해의 조는 비교적 안정적인 컨디션입니다. 파킨슨병은 그의 애정행각(?)에 전혀 영향을 못 미칠 정도로 미미한 증상만 보입니다. 별거 중인 아내 줄리안이나 딸 찰리와도 큰 트러블 없이 오로지 사건에만 매진합니다. 앞선 두 작품에서는 가족들이 사건에 워낙 깊이 말려든 바람에 긴장감은 높아졌지만, 심연 같은 상심에 빠진 조를 지켜보는 일이 꽤나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 조의 가족들은 안전지대(?)에 머물며 독자들이 조의 활약에만 매진하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미안하다고 말해는 전작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지닌 작품입니다. 전작의 범인들은 조 못잖은 심리전문가들로 피해자를 마음껏 좌지우지했고, 그런 만큼 조의 수사는 임상심리학자로서의 특별한 능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안하다고 말해의 조는 심리학자라기보다는 명탐정에 가까운 캐릭터입니다. 물론 여전히 용의자들의 심리를 날카롭게 분석하고, 자신의 경험과 직관을 통해 경찰의 1차원적인 수사의 허점을 밝혀내고 있지만, 이미 여러 건의 위험천만한 사건을 겪으면서 탐정의 기질까지 익힌 덕분인지 찰떡궁합의 파트너인 전직 경찰 빈센트 루이츠보다도 훨씬 더 예리한 추리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런 조의 새로운 면모는 한편으론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아쉽게 읽히는 대목입니다. 다른 스릴러 주인공들과 차별화됐던 심리학자의 미덕이 무뎌진 느낌 때문일까요? 그래서인지 용의자들에 대한 그의 심리학적 진단들이 대부분 그냥 볼 땐 몰랐지만,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생각하고 보니 그는 이런이런 이상심리를 가진 게 분명합니다.”라는 식의 결과론처럼 읽히곤 했는데, 조 올로클린과 마이클 로보텀의 팬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아쉬움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마이클 로보텀의 글빨은 이런저런 아쉬움을 충분히 상쇄시켜줍니다. ‘산산이 부서진 남자가 소름 돋도록 서늘한 런던의 빗방울 같은 문장들이었다면, ‘내 것이었던 소녀는 살인극 속에 깃든 냉소적인 블랙유머가 빛났고, ‘미안하다고 말해는 짧고 간결한 문장 속에 정통 스릴러의 맛이 묻어난 작품입니다. 괜히 현란하고 난해한 문장들로 독자의 눈을 어지럽히지도 않고, 과도한 감정 묘사나 불필요한 선정적 묘사로 분량을 잡아먹지도 않습니다. 방대한 분량을 놓고 이 작품을 번역한 최필원 님께서 흉기라는 비유를 쓰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론 마이클 로보텀의 문장이 갖는 매력 덕분에 금세 마지막 장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심리학자 조대신 명탐정 조를 만난 것이 아쉽다고 평하긴 했지만, 그만큼 마이클 로보텀의 정통 스릴러의 묘미를 맛봤던 것은 나름 색다른 재미였습니다. 현재의 사건을 통해 과거의 미제 사건을 해결한다는 구성도 매력적이었고, 파이퍼의 기록에서 드러난 10대의 폭주, 문제적 가족, 소도시 마초들의 집단적 폭력성도 읽는 내내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오랜 파트너이자 천재적인 기억력을 가진 빈센트 루이츠는 언제나처럼 반가웠고, 전작에서 악연으로 만났지만 이번 작품에서 조와 미묘한 관계로 발전한 미모의 심리학자 빅토리아 나파르스텍의 향후 행보도 관심을 끌었습니다.

 

다음에 읽을 마이클 로보텀의 작품이 어떤 작품이 될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시리즈 첫 작품인 ‘The Suspect’일지, 최신작인 ‘Close Your Eyes’일지, 아니면 또 다른 스탠드얼론일지 모르겠지만, 어떤 작품이 됐든 마이클 로보텀의 작품이라면 이젠 확실히 must-read 목록의 최상단에 자리 잡은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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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러기들 토라 시리즈
이르사 시구르다르도티르 지음, 박진희 옮김 / 황소자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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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북유럽 느와르의 여왕이라는 출판사의 홍보를 보고도 읽기를 꽤 주저했었는데,

그 이유는 작년에 읽다가 중도 포기했던 오사 라르손의 화이트 나이트때문이었습니다.

여왕이라 칭해진 작가에 대한, 과도하지만 확인할 길 없는 찬사와

주인공이 수사 비전문가인 여자 변호사(‘화이트 나이트의 레베카는 세무 변호사이고,

부스러기들의 토라 역시 초라한 로펌의 민사(?) 변호사입니다)라는 공통점 때문에

(정말 근거 없는 선입관이었지만) 중도 포기라는 불편한 트라우마가 떠올랐고,

그래서 다른 독자들의 평을 살펴본 뒤 읽을지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작가의 데뷔작이자 토라 시리즈의 첫 편인 마지막 의식이 출간됐다는 소식을 듣곤

괜한 기대감과 함께 아니면 말고식의 편한 마음으로 부스러기들을 읽기로 결심했습니다.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르사 시구르다르도티르의 토라 시리즈는 출간 되는대로 찾아 읽고 싶어졌습니다.

일단 캐릭터 플레이가 좋고, 구성도 촘촘하게 잘 짜였고,

스릴러 코드들은 쉽고 간결한 문장들 속에서도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습니다.

장점에 대한 설명이 좀 두루뭉술하게 보일 수 있지만,

평점 별이 4개에 그친 이유와 함께 아래 서평에서 좀더 상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 ● ●

 

늦은 밤의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 항구.

초호화 요트 한 대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돌진하다가 방파제에 충돌합니다.

문제는 3명의 선원과 4명의 가족이 사라진 채 빈 요트만 항구로 돌아왔다는 점입니다.

복사기 교체할 비용에도 전전긍긍하는 소규모 로펌의 중년 여변호사 토라 구드문즈도티르는

요트에서 사라진 가족의 노부모로부터 생명보험금을 수령할 수 있게 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가족들이 실종이 아니라 사망했음을 확인하기 위해 조사에 뛰어듭니다.

그러던 중 해변으로 신원불명의 시신이 흘러들어오고,

요트 선장이 마지막 교신을 통해 요트 안에 여자의 시신이 있다고 연락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여전히 가족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고 조사는 시간이 갈수록 미궁에 빠지지만,

토라는 가족의 사망 확인이라는 당초의 미션을 넘어

요트 안에서 벌어진 참극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 ● ●

 

이야기는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경찰에 압류된 요트를 조사하고, 승객과 선원의 지인들은 물론

요트의 전 주인 등 관련자들과 단서들을 탐문하는 토라의 이야기가 하나이고,

요트에 탔던 아이에르의 시점으로 그려진 며칠간의 기이한 참극 이야기가 또 하나입니다.

 

아이에르는 전 주인의 파산으로 요트를 인수받게 된 조정위원회 위원이었지만

이런저런 사연으로 인해 가족들 아내와 쌍둥이 딸 과 함께 요트에 승선하게 됐습니다.

선장과 선원들은 불친절했고, 바다는 출발과 동시에 요동을 치기 시작합니다.

이내 끔찍한 비극이 요트에서 발생하고, 요트 안의 사람들은 동요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아이슬란드에 도착하고 싶은 아이에르 가족들의 희망은

요트의 발목을 잡은 부유하던 컨테이너 박스와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 때문에 좌절됩니다.

그 와중에 연이어 비극은 발생하고, 사실상 밀실이나 다름없는 망망대해의 요트 안에서

아이에르와 가족들의 공포는 극에 달합니다.

 

토라는 요트 위에서 벌어진 일을 진술할 생존자 한 명 없는 상태에서

망망대해의 밀실에서 벌어진 참극을 추리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곤혹스럽습니다.

또한 애초 그녀가 받은 의뢰가 보험금 수령을 위한 사망 확인이기 때문에

대놓고 경찰의 수사에 개입할 수 없다는 점도 한계입니다.

하지만 토라는 빈약한 단서를 꼼꼼히 체크하고 주변 인물들을 탐문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놓친 부분까지 파악하는 개가를 올립니다.

 

현재 벌어지는 토라의 조사와 수일 전의 과거에 벌어진 요트에서의 참극은

정교하게 직조된 구성에 의해 미스터리의 힘을 한껏 발휘합니다.

독자들은 토라와 아이에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희망과 절망을 번갈아 경험하게 됩니다.

토라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아이에르와 그의 아내, 쌍둥이 딸의 생존을 기대하게 되지만,

요트에서 벌어지는 참극을 읽다 보면 비극 외엔 달리 탈출구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마지막 챕터까지 독자의 긴장감을 한껏 고조시키는데,

설마 하면서도 쉽게 예상하기 어려웠던 범인의 정체도 놀라웠지만,

독자의 기대를 배반한 엔딩은 한편으론 억지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아쉬운 점을 세 가지만 꼽자면,

하나는 어딘가 사족처럼 느껴지는 토라 가족의 이야기가 적잖은 분량을 차지했다는 점입니다.

시리즈 중 어느 작품에선가는 가족들이 꽤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작품에서 토라 가족의 이야기는 긴장감과 속도감을 저하시키는 대목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때때로 만연체 또는 중언부언처럼 읽히는 문장들입니다.

특히 토라의 탐문 과정을 묘사한 지점에서 자주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그래서인지 마음 급한 독자들에겐 간혹 건너뛰고 싶은 문장들이 눈에 띄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은 (사건의 특수성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어딘가 모호한 마지막 총정리입니다.

토라가 설명하는 사건의 전체 그림은 언뜻 이해는 되지만 추론에 기댄 부분이 많은 탓에

깔끔하고 명료한 엔딩을 좋아하는 독자에겐 약간의 찜찜함을 남길 수도 있습니다.

 

처음 만난 아이슬란드의 스릴러 여왕100% 만족감을 준 것은 아니지만,

조만간 만날 토라 시리즈 첫 편인 마지막 의식에 대한 기대감을 심어준 것만은 분명합니다.

아이슬란드의 중년 여변호사 토라가 어떻게 화려하게 데뷔했는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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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 대하여
아리요시 사와코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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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죽은 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나를 잘 알던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얘기한다면,

그래서 그 진술을 한 권의 책으로 묶는다면 그건 나의 진실에 얼마나 가까울까요?

미묘한 차이를 넘어 사람에 따라서는 정반대의 기억을 토로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나의 진실이란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악녀에 대하여는 젊은 나이에 엄청난 부를 축적했지만 의문의 죽음을 맞은 신비한 여인

도미노코지 기미코의 27명의 지인들이 유력 주간지 기자와 가진 인터뷰 형식의 소설입니다.

지인 중에는 그녀를 거쳐 간 남자들도 있고, 가족도 있고, 호불호가 갈리는 타인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녀를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현명하고 주관이 뚜렷한 여자로 기억하는 반면,

누군가는 그녀를 희대의 사기꾼에 두 얼굴을 가진 악녀로 기억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그녀가 잠자리에서 비명에 가까운 고성을 지른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평범한 수준 또는 오히려 수줍어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그녀에게 분에 넘치는 응원과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누군가는 그녀로부터 평생 치유되지 못할 깊은 상처를 받았다고 분노합니다.

심지어 몇몇 남자들은 그녀가 낳은 두 아들의 아버지가 자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단순한 기억의 오류라고 하기엔 그들의 진술은 일관되고 앞뒤가 딱딱 들어맞습니다.

하지만 10대에서 40대에 이르는 긴 세월에 걸쳐 기미코가 주변사람들에게 보인 모습은

(그들의 진술을 믿자면) 그야말로 팔색조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제각각이었고,

그것도 다중이에 버금갈 정도로 극과 극을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가 대낮에 화려한 빨간 드레스를 입은 채 7층에서 추락사한 정황을 놓고도

그녀다운 자살이다’, ‘그만큼 죄를 지었으니 타살당한 게 분명하다며 공방이 벌어집니다.

 

지인들의 진술이 한 챕터씩 이어질 때마다

독자는 첫 페이지 이후부터 나름 머릿속에 그려온 기미코의 캐릭터를 계속 수정해야 합니다.

희대의 악녀타고난 팜므 파탈사이를 오락가락하며

그녀에게 분노하다가, 그녀를 동정하다가, 때론 그녀의 매력에 푹 빠져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도대체 마지막 페이지에서 드러날 기미코의 진실이 무엇인지,

그녀는 왜 그렇게 영화 같은 죽음을 맞이한 것인지,

자살이라면 왜? 타살이라면 누가 범인인지?, 너무너무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드라마로만 봐서 원작소설에서는 어떻게 묘사됐는지 잘 모르지만

읽는 내내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의 여주인공 유키호가 생각났습니다.

참혹한 유년기와 빛과 그늘이 교차한 성장기, 그리고 비극적인 엔딩까지

이상하게도 유키호의 그림자가 기미코의 삶 여기저기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결코 꿈꿀 수도, 실행할 수도 없는 희비극 같은 삶을 살았던 기미코.

과연 27명의 진술 가운데 어떤 것들이 그녀의 진실을 제대로 가리키고 있을지,

아니, 그런 진실에 관한 진술이란 게 애초에 가능한 일이기나 한 것인지,

작가는 독자에게 무척이나 어렵고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동시에 독자 스스로 정답 없는 자문을 하게끔 만듭니다.

 

내가 죽은 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나를 잘 알던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얘기한다면,

그래서 그 진술을 한 권의 책으로 묶는다면 그건 나의 진실에 얼마나 가까울까요?

미묘한 차이를 넘어 사람에 따라서는 정반대의 기억을 토로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나의 진실이란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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