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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러기들 ㅣ 토라 시리즈
이르사 시구르다르도티르 지음, 박진희 옮김 / 황소자리 / 2016년 12월
평점 :
고백하자면, ‘북유럽 느와르의 여왕’이라는 출판사의 홍보를 보고도 읽기를 꽤 주저했었는데,
그 이유는 작년에 읽다가 중도 포기했던 오사 라르손의 ‘화이트 나이트’ 때문이었습니다.
‘여왕’이라 칭해진 작가에 대한, 과도하지만 확인할 길 없는 찬사와
주인공이 수사 비전문가인 여자 변호사(‘화이트 나이트’의 레베카는 세무 변호사이고,
‘부스러기들’의 토라 역시 초라한 로펌의 민사(?) 변호사입니다)라는 공통점 때문에
(정말 근거 없는 선입관이었지만) 중도 포기라는 불편한 트라우마가 떠올랐고,
그래서 다른 독자들의 평을 살펴본 뒤 읽을지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작가의 데뷔작이자 토라 시리즈의 첫 편인 ‘마지막 의식’이 출간됐다는 소식을 듣곤
괜한 기대감과 함께 ‘아니면 말고’ 식의 편한 마음으로 ‘부스러기들’을 읽기로 결심했습니다.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르사 시구르다르도티르의 ‘토라 시리즈’는 출간 되는대로 찾아 읽고 싶어졌습니다.
일단 캐릭터 플레이가 좋고, 구성도 촘촘하게 잘 짜였고,
스릴러 코드들은 쉽고 간결한 문장들 속에서도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습니다.
장점에 대한 설명이 좀 두루뭉술하게 보일 수 있지만,
평점 별이 4개에 그친 이유와 함께 아래 서평에서 좀더 상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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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의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 항구.
초호화 요트 한 대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돌진하다가 방파제에 충돌합니다.
문제는 3명의 선원과 4명의 가족이 사라진 채 빈 요트만 항구로 돌아왔다는 점입니다.
복사기 교체할 비용에도 전전긍긍하는 소규모 로펌의 중년 여변호사 토라 구드문즈도티르는
요트에서 사라진 가족의 노부모로부터 생명보험금을 수령할 수 있게 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가족들이 ‘실종이 아니라 사망했음’을 확인하기 위해 조사에 뛰어듭니다.
그러던 중 해변으로 신원불명의 시신이 흘러들어오고,
요트 선장이 마지막 교신을 통해 요트 안에 여자의 시신이 있다고 연락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여전히 가족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고 조사는 시간이 갈수록 미궁에 빠지지만,
토라는 ‘가족의 사망 확인’이라는 당초의 미션을 넘어
요트 안에서 벌어진 참극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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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경찰에 압류된 요트를 조사하고, 승객과 선원의 지인들은 물론
요트의 전 주인 등 관련자들과 단서들을 탐문하는 토라의 이야기가 하나이고,
요트에 탔던 아이에르의 시점으로 그려진 며칠간의 기이한 참극 이야기가 또 하나입니다.
아이에르는 전 주인의 파산으로 요트를 인수받게 된 조정위원회 위원이었지만
이런저런 사연으로 인해 가족들 – 아내와 쌍둥이 딸 – 과 함께 요트에 승선하게 됐습니다.
선장과 선원들은 불친절했고, 바다는 출발과 동시에 요동을 치기 시작합니다.
이내 끔찍한 비극이 요트에서 발생하고, 요트 안의 사람들은 동요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아이슬란드에 도착하고 싶은 아이에르 가족들의 희망은
요트의 발목을 잡은 부유하던 컨테이너 박스와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 때문에 좌절됩니다.
그 와중에 연이어 비극은 발생하고, 사실상 밀실이나 다름없는 망망대해의 요트 안에서
아이에르와 가족들의 공포는 극에 달합니다.
토라는 요트 위에서 벌어진 일을 진술할 생존자 한 명 없는 상태에서
망망대해의 밀실에서 벌어진 참극을 추리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곤혹스럽습니다.
또한 애초 그녀가 받은 의뢰가 ‘보험금 수령을 위한 사망 확인’이기 때문에
대놓고 경찰의 수사에 개입할 수 없다는 점도 한계입니다.
하지만 토라는 빈약한 단서를 꼼꼼히 체크하고 주변 인물들을 탐문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놓친 부분까지 파악하는 개가를 올립니다.
현재 벌어지는 토라의 조사와 수일 전의 과거에 벌어진 요트에서의 참극은
정교하게 직조된 구성에 의해 미스터리의 힘을 한껏 발휘합니다.
독자들은 토라와 아이에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희망과 절망을 번갈아 경험하게 됩니다.
토라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아이에르와 그의 아내, 쌍둥이 딸의 생존을 기대하게 되지만,
요트에서 벌어지는 참극을 읽다 보면 비극 외엔 달리 탈출구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마지막 챕터까지 독자의 긴장감을 한껏 고조시키는데,
설마 하면서도 쉽게 예상하기 어려웠던 범인의 정체도 놀라웠지만,
독자의 기대를 배반한 엔딩은 한편으론 억지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아쉬운 점을 세 가지만 꼽자면,
하나는 어딘가 사족처럼 느껴지는 토라 가족의 이야기가 적잖은 분량을 차지했다는 점입니다.
시리즈 중 어느 작품에선가는 가족들이 꽤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작품에서 토라 가족의 이야기는 긴장감과 속도감을 저하시키는 대목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때때로 만연체 또는 중언부언처럼 읽히는 문장들입니다.
특히 토라의 탐문 과정을 묘사한 지점에서 자주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그래서인지 마음 급한 독자들에겐 간혹 건너뛰고 싶은 문장들이 눈에 띄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은 (사건의 특수성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어딘가 모호한 ‘마지막 총정리’입니다.
토라가 설명하는 사건의 전체 그림은 언뜻 이해는 되지만 추론에 기댄 부분이 많은 탓에
깔끔하고 명료한 엔딩을 좋아하는 독자에겐 약간의 찜찜함을 남길 수도 있습니다.
처음 만난 아이슬란드의 ‘스릴러 여왕’이 100% 만족감을 준 것은 아니지만,
조만간 만날 토라 시리즈 첫 편인 ‘마지막 의식’에 대한 기대감을 심어준 것만은 분명합니다.
아이슬란드의 중년 여변호사 토라가 어떻게 화려하게 데뷔했는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