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혼자 여행 중입니다 미아&뭉크 시리즈
사무엘 비외르크 지음, 이은정 옮김 / 황소자리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단서들을 통해 사건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특별한 직관력의 소유자인 여형사 미아 크뤼거는

쌍둥이 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마약쟁이 남자를 과잉진압으로 죽인 이후

경찰을 그만두고 거의 폐인이 된 채 외진 섬에 머물며 자살할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경찰대생이던 미아를 특수수사팀으로 스카우트했던 베테랑 형사 홀거 뭉크는

연쇄 소녀살인사건이 벌어지자 섬으로 잠적했던 미아를 설득하여 특수수사팀에 복귀시킵니다.

기대했던 대로 미아는 누구도 포착하지 못했던 사건의 이면을 파헤치기 시작했고,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던 수사는 활기를 띄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범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그 와중에 추가로 두 명의 소녀가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 ● ●

 

본문 중에 미국에서나 벌어질 법한 끔찍한 연쇄살인이라는 표현이 두어 번 등장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화제가 됐던 몇몇 북유럽 스릴러를 돌이켜 보면

스웨덴이나 노르웨이는 미국이나 멕시코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한 곳처럼 묘사되곤 했는데,

이 작품 역시 그런 선입관을 갖기에 충분할만한 연쇄 소녀살인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작가가 애써 노르웨이에서 이런 사건은 무척 특별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비슷한 표현을 두어 번씩이나 동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아무리 잔혹한 스릴러라도 좀처럼 다루지 않는 소재가 미성년자가 피해자가 되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은근슬쩍 안전한 노르웨이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메인 사건은 6살 소녀들을 희생자로 삼은 참혹한 연쇄납치-살해로 설정했습니다.

그런 불편함 때문에 계속 읽기를 뒤로 미루다가,

어쩔 수 없는 호기심 때문에 국내에 출간된 지 거의 1년이 다 돼서야 읽게 됐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드라마-연극 작가라는 대중지향적인 이력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무엘 비외르크는 (적어도 희생된 소녀들에 관한) 불편한 묘사들을 현명하게 자제했고,

이야기의 중심을 노르웨이 경찰 홀거 뭉크와 미아 크뤼거 콤비의 캐릭터 플레이에 맞춤으로써

기대 이상의 재미와 탄탄한 서사를 선보였습니다.

 

미아 크뤼거가 사건과 단서를 바라보는 방법은 여느 경찰들과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직감과 예감에 가까운데, 그래서인지 이 작품에서 과학수사는 별 존재감이 없습니다.

미아가 이미 특유의 직관력을 통해 많은 사건을 해결한 적이 있기 때문에

홀거 뭉크를 비롯한 수사팀 동료들은 소설같기만 한 그녀의 추리를 옹호하고 지지합니다.

미아는 사건현장을 반복해서 방문하거나 집요하게 탐문하는 대신

종이 위에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적으면서 행간에 숨은 진실을 찾아내곤 합니다.

단편적인 단서들을 이리저리 재배열하다 보면 어느 순간 뭔가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을 통해 몇 수를 내다보는 바둑 고수처럼 아무도 예상 못한 추리를 내놓는 것입니다.

 

반면, 54살의 베테랑 홀거 뭉크는 상관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는 타고난 반골기질도 있고,

은근한 카리스마로 오래 호흡을 맞춰온 수사팀 동료들을 장악하는 면모도 있지만,

대체로는 어딘가 느긋한 사람 좋은 중년아저씨처럼 보입니다.

연쇄 소녀살해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대단한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지만,

애초 뛰어난 직관력의 소유자인 미아를 수사팀으로 데려온 것도 그였고,

폐인처럼 살던 미아를 사건현장으로 복귀시켜 수사를 성공적으로 이끌게 만든 것도 그입니다.

그리고 하이에나 같은 언론의 공격과 상부의 부당한 압력에 저항하며

수사팀을 끝까지 지키는 것도 그의 역할입니다. 말하자면 든든한 지원군 역할이라고 할까요?

 

사건 만큼이나 비중 있게 다뤄지는 대목은 미아와 뭉크의 가족사입니다.

미아가 쌍둥이 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삶의 희망과 의지를 잃어버렸다면,

뭉크는 바람난 아내와의 이혼, 제멋대로 살다가 19살에 아이를 낳은 딸 등

콩가루가 된 가족의 비극을 모두 자기 탓이라 여기는 남자입니다.

어쩌면 그런 가족사를 지닌 두 사람이기에 6살 소녀들이 연이어 희생되는 사건을 접하면서

경찰 이상의 감정을 이입하게 됐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살짝이든 심하게든 어딘가 망가진 경찰 캐릭터에 비극적인 가족사까지 부여받은 주인공은

영미권이나 북유럽 스릴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상투적인 설정이지만,

어쨌든 미아와 뭉크는 상투성 이상의 매력을 발산하는 캐릭터임은 분명합니다.

 

아쉬운 점을 몇 가지만 꼽자면...

초반에 그려진 미아의 캐릭터 쌍둥이 동생의 죽음의 트라우마와

그로 인해 섬에 숨어든 채 자살을 계획하고 있는 피폐한 삶 에 비해

그녀의 현장 복귀가 너무 쉽고 가볍게 그려졌다는 점입니다.

사건현장으로 돌아온 그녀는 지나치게 쌩쌩했고, 트라우마는 독자의 기억에서 금세 잊힙니다.

물론, 작가는 수시로 그녀의 상처를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곤 하는데,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아의 트라우마는 왠지 장식품같은 느낌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 연쇄 소녀살해사건과 맞먹는 비중으로 병행되는 종교집단의 스토리는

(메인 사건과 접점이 있긴 하지만) 과도한 분량과 지루한 전개로 맥이 빠지는 대목입니다.

마찬가지로, 정보 설명을 맡은 단순 단역 소개에도 지나치게 상세한 묘사가 동원됐는데,

이 역시 여러 번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턴 스킵하듯 페이지를 넘겨버리게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오타들이 무척 눈에 거슬렸습니다.

전문 교정가가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라도 프리뷰를 맡겼다면 충분히 방지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상태로 작품을 시장에 내놓는다는 것이 제겐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목하라! 모던 크라임의 새로운 거장이 나타났다.”라는 화려한 홍보 카피보다

본몬 속의 오타 하나에 더 신경쓰는 것이 출판사의 본연의 자세 아닐까요?

 

작가 소개글을 보니 후속작 올빼미역시 좋은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 작품이 미아-뭉크 콤비의 시리즈 작품이라면 더욱 반갑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국내에 출간된다면 관심을 갖고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벌거숭이들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에쿠니 가오리의 전공을 읽었습니다.

2년 전, 마지막으로 읽은 그녀의 작품이 10대 소녀들의 성장통을 다룬 수박향기였는데,

그녀의 전공인 금지된 사랑과 어긋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것은

7~8년 전쯤의 장미 비파 레몬이 마지막 기억인 것 같습니다.

 

웨하스 의자’, ‘울 준비는 되어 있다’, ‘낙하하는 저녁’, ‘반짝반짝 빛나는

한때 그녀에게 심취하여 밑줄까지 그으며 읽었던 작품들을 떠올려보면

그 무렵이 에쿠니 가오리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벌거숭이들여전히 에쿠니 가오리, 그녀 맞네.”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할 만큼

차분하고 담담한 문장들 속에 실은 꽤나 격한 감정들을 잘 담아낸 수작이라,

아직도 그녀의 전성기가 현재진행형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벌거숭이들에는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크게 보면 30대의 모모와 히비키 두 여자를 중심으로 그 가족 또는 지인들이 등장하는데,

에쿠니 가오리는 그들을 통해 인물 수만큼이나 다양한 애증의 감정들을 풀어놓습니다.

 

당연히 결혼할 것으로 여겨지던 6년 사귄 남자와 헤어진 뒤 9년 연하남을 택한 36살의 모모,

그런 모모를 만나면서 동시에 모모의 절친인 유부녀 히비키를 마음에 품는 27살의 사바사키,

절친의 남자란 걸 알면서도 그의 접근에 낯선 설렘을 느끼는 네 아이의 엄마 히비키 등

세 명의 중심인물은 남녀의 관계, 즉 연애와 결혼 또는 구속과 자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 엄마와 연애를 경멸하며 프리라이터로서 독립적인 삶을 사는 모모의 언니 요우,

그런 딸 요우를 이해 못하며, 여자의 삶의 가치를 안락한 결혼에서 찾는 모모의 엄마 유키,

딸과 아내의 갈등을 알면서도 현명한(?) 중립적 태도로 가족을 지키는 모모의 아빠 에이스케,

황혼에 이르러 가정을 버린 채 진짜 인연 히비키의 엄마 카즈에 을 만난 야마구치,

그런 새 장인야마구치를 증오하면서도 정작 아내 히비키를 건성으로 대하는 하야토 등은

가족이기에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갖가지 희로애락을 이야기합니다.

 

벌거숭이들속의 인물들은 대부분 관계때문에 고민하고, 위로받고, 상처받습니다.

특히 주인공인 모모는 연애문제에서도 가족문제에서도 관계때문에 혼란을 겪습니다.

6년을 만난 이시와와 채 헤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연하남 사바사키를 만났던 모모는

자신과 만나는 와중에 절친인 히비키에게 (심지어 숨기지도 않고) 들이대는 사바사키를 보며

그와 자신의 관계 남편감? 애인? 친구? 섹스 파트너? 에 대해 고민합니다.

그를 구속해야 하는 것인지, 자신이 그의 구속을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히비키를 원망하고 질투해야 하는 것인지, 그냥 모르는 척 지켜봐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콩 샐러드를 뒤적이며 모모는 이시와를 생각했다.

오늘 저녁에 만날 사바사키도.

언제까지일까.

그리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기보다,

어째서 인간은 꼭 누군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걸까.

 

가족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애를 거부하고 엄마를 증오하며 가족과 등 돌린 채 히피 같은 삶을 사는 언니 요우와 달리

모모는 진작부터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며 가족의 일원으로 남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녀 역시 엄마의 집착에 반항하지만, 언니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원하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치과의사가 되어 병원을 물려받는 효녀노릇도 그녀의 몫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성실한 남자와의 결혼에 안착하기를 바라는 엄마가 불편하고,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화해와 용서와 이해와 포용의 의무가 부과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녀에게 관계란 삶을 윤택하게 하는 자양분이 아니라 구속을 위한 명분인지도 모릅니다.

 

모모 외에 다른 모든 인물들도 이와 비슷한 종류의 관계에 대한 고민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에쿠니 가오리는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또 격하지도 무겁지도 않은 간결하고 순한 문장들을 통해

그들이 관계때문에 겪는 감정적 혼란들을 내밀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부드럽게 읽히지만 행간은 온통 치열하고 뜨거운 불덩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거야말로 에쿠니 가오리의 진짜 매력이란 생각입니다.

 

다만, 모모와 히비키는 물론 등장인물 모두 작품의 주제를 위해 기능적으로 역할 한다는 점,

, 지나칠 정도로 적절한 문제를 안고 있고, 지나칠 정도로 적절한 관계로 설정된 점은

(소설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읽는 내내 작위적인 느낌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전작들과는 달리 왠지 에쿠니 가오리가 정교한 설계도를 미리 그려 놓은 뒤

그에 맞춰 캐릭터와 사건들을 배치한 느낌이랄까요?

그런데...

, 막상 생각해보니...

제 주위에 무난하고 평화롭기만 한 관계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전혀 떠오르지가 않는군요.

역시 누구나 다 소설에 어울릴 법한 그런 문제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일까요?

 

번역하신 신유희 님의 후기 중 일부를 인용하며 두서없는 서평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부분일 뿐이며

그래서 편리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것이 인간관계이지 싶다.

연애도 결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부분이 전부인 양 기대어 사랑하다가도

어느 순간 또 다른 부분에 절망하여 등을 돌리기도 하는 것을 보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예구 나와 23인의 노예 2 - 소설
오카다 신이치 지음, 이승원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치아교정기를 닮은 SCM(Slave Control Method)을 착용한 사람끼리 게임을 벌여 이긴 사람은 주인이 되고, 진 사람은 그()의 노예가 된다는 독특한 설정 덕분에 이 시리즈의 1편을 찾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말초적이고 폭력적인 장면들이 많아서 때론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지만, ‘통제 가능한 인간 노예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근원적인 욕망을 집요하게 묘사함으로써 그 나름의 미덕도 갖춘 작품이었습니다.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했지만 어쩌다 보니 2년 만에 2편을 읽게 됐는데, 무엇보다 SCM이라는 기발한 도구를 만들어낸 창조주의 실체와 목적이 궁금했고, 1편에서 주인과 노예로 갈라선 인물들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도 기대됐습니다.

 

하지만, 새롭게 등장한 인물들이 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갔고, 1편의 인물들은 몇몇을 제외하곤 병풍처럼 등장하기만 한데다, 1편을 읽지 않았거나 읽었더라도 저처럼 꽤 공백이 긴 독자들로서는 전체 그림을 파악하기 쉽지 않아서 여러 가지로 곤혹스러웠습니다.

이야기 역시 확장이라기보다는 연재를 위한 연장처럼 느껴지곤 했는데, 하나의 큰 줄기 없이 개별적인 사건의 나열로 구성된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인물들의 목표가 불분명하다 보니 뒷이야기에 대한 기대감도 감소되고, 결국 누구와 누구의 싸움인지, 선과 악의 대결인지, 그저 판타지인지도 모호해집니다. 덧붙여 1편의 프리퀄 격인 에피소드들이 간간이 소개되는데, 그 역시 명료하게 정리되지 않았다는 느낌입니다.

 

어쩌면 서사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 때문에 이런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인물들이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춘 메인 스토리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고전적 혹은 정통 서사에 익숙한 독자와 달리 굳이 큰 줄기의 스토리가 없더라도 개별 에피소드만 재미있다면 얼마든지 소비할 수 있는, 말하자면 파편적인 서사에 익숙한 독자에겐 흥미롭게 읽힐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SCM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과정이라든가, 1편에서 절대적 주인으로 이름만 거론됐던 류오우의 정체가 드러나는 대목, 또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두 여자 캐릭터의 활약을 예고한 후반부 등은 따로따로 떼어놓고만 보면 긴장감도 높고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좀 읽어보려 했는데 인터넷 서점이나 장르물 카페에선 찾기 어려웠고, 블로그는 대부분 만화판에 대한 언급들이라 좀 아쉬웠습니다. 아무래도 이후에 나온 3편과 외전을 읽을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아직 이 시리즈를 접하지 못한 분께 1편만큼은 추천하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일본스러운기발한 상상력과 판타지의 조합을 맛볼 수 있는 정말 특이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레이크하트힐
토머스 H. 쿡 지음, 권경희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7년 3월
평점 :
품절


2013년 가을, ‘채텀 스쿨 어페어로 토머스 H. 쿡과 처음 만났고,

2015년 봄, ‘밤의 기억들로 재회한 이후 또다시 2년이 지나 그의 신작을 만났습니다.

그의 초기작 또는 대표작인 심문붉은 낙엽을 읽어야지, 몇 번씩 생각만 하다가

매번 다음에...’라며 기약 없이 뒤로 미루곤 했는데,

그 이유는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 찾아오는 감당하기 힘든 후유증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그의 초기 장편이지만) 신간 소식에 쿡의 이름이 보이자마자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덥석 손이 나가고 말았습니다.

 

● ● ●

 

1962년 여름, 미국 앨라배마 주 촉토 마을의 브레이크하트 힐 아래에서

16살의 아름다운 고등학생 켈리 트로이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발견된다.

평온함이 일상이던 마을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다.

사건 현장에서 마을의 건달인 라일이 목격되고 그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소녀 켈리에게 재앙이 덮친 이후 30년이 지났지만

사건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아직 진행형이다.

켈리의 친구였던 벤과 루크는 켈리의 비극 속에 진실이 감춰져 있음을 감지한다.

그리고 진실의 씨앗은 켈리의 첫사랑 속에 있었음이 서서히 드러난다.

(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 ● ●

 

비슷한 시기에 집필된 채텀 스쿨 어페어의 경우

소도시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서 브레이크하트 힐과 공통점이 있지만,

전자의 주된 서사가 어른들의 치정과 파멸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브레이크하트 힐은 몸과 마음이 언제든지 폭발할 준비가 돼있던

1960년대의 10대들이 겪은, 보다 날것 같은 치정과 파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살인사건이 등장하고,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누가?’, ‘?’라는 의문이 불온하게 마을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미스터리 혹은 스릴러로 분류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뼈대가 16살 소년, 소녀 벤 웨이드와 켈리 트로이의 치명적인 첫사랑이기 때문에

왠지 장르물과는 어울리지 않는 하이틴 로맨스의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쿡이 그린 벤과 켈리의 로맨스는 포장10대의 치기 어리고 순수한 아름다움이지만,

그 안에 담긴 알맹이는 심연을 그린 듯한 잔혹심리극에 다름 아닙니다.

모든 것이 눈부시고 미래에 대한 흥분으로 가득해야 할 16살의 소년과 소녀는

쿡의 잔인하기 그지없는 문장들 속에서 계속 엇갈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사랑은 아름다운 판타지가 아니라 왜곡된 감정으로 진화할 뿐입니다.

번역하신 권경희 님 표현대로 사랑은 어떻게 미움이 되고 증오가 되는가,

사랑이 얼마나 깨지기 쉬우며, 편견이 얼마나 무모하고, 증오가 얼마나 처참할 수 있는가,

토마스 H. 쿡이 이 작품에서 그린 10대 소년, 소녀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쿡이 우울한 10대 로맨스 이야기에서 머문 것은 아닙니다.

30년 전에 벌어진 살인사건은 어딘가 불완전하게 마무리됐고,

희생된 켈리와 각별한 관계였던 벤과 루크는 여전히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켈리를 사랑했던 벤, 그런 벤을 곁에서 지켜봤던 루크,

그리고 함께 10대를 보냈지만 이젠 중장년에 이른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브레이크하트 힐에서 벌어졌던 참사를 잊지 못하면서 여전히 진실을 궁금해합니다.

이야기는 진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인 벤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고,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을 오가며 켈리의 비극의 진실을 아주 느린 속도로 풀어놓습니다.

안 그래도 어둡고 습하고 탁하기 이를 데 없는 쿡의 문장들이 슬로비디오처럼 늘어진 덕분에

읽는 내내 마음에 돌덩이 하나가 들어앉은 듯한 기분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역시 쿡의 작품답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아쉬움이 많이 남기도 했는데,

무엇보다, 끝까지 진짜 모습 인격도, 감정도 을 알 수 없었던 켈리의 캐릭터가 모호했고,

마지막에 드러난 30년 전 사건의 진실이 예상보다 덜 충격적이었으며,

특히 반전이 (설명 부족인지 제 이해력 부족인지 모르겠지만) 납득되지 않는 점 때문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집필된 채텀 스쿨 어페어를 읽은 후에도

사건의 실체가 강하거나 충격적이지 않을뿐더러, 개운치 못한 느낌이란 서평을 남겼는데,

브레이크하트 힐의 모호함과 개운치 못함은 아마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쿡 특유의 감당하기 힘든 후유증은 제법 만끽할 수 있었지만,

채텀 스쿨 어페어와 마찬가지로 브레이크하트 힐역시 초기 장편이란 점에서

아직 그의 미덕이 만개하지는 못했다는 느낌이었고,

아무래도 그의 진짜 후유증과 진면목을 맛보기 위해서는

쿡의 팬들이 열광하는 붉은 낙엽심문을 찾아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빨 자국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매듭과 십자가’, ‘숨바꼭질이후 거의 1년 반 만에 읽은 존 리버스 3편입니다.

존 리버스의 과거사와 캐릭터 설명에 치중하느라 밋밋한 스릴러로 읽혔던 매듭과 십자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다가 정작 중심 서사가 흔들렸던 숨바꼭질이 준 실망감 때문에

이후로는 한동안 존 리버스 시리즈를 외면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인터넷 서점을 검색하던 중 문득,

이빨 자국에서 이언 랜킨의 재능이 폭발하기 시작한다.”는 어느 분의 서평이 생각나면서,

, 이번 한 편만 더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다시 존 리버스와 만나게 됐습니다.

 

뼛속까지 스코틀랜드 인이며, 자신의 근거지인 에든버러를 사랑하는 존 리버스가

이번에는 런던을 무대로 끔찍한 연쇄살인사건 수사에 나섭니다.

에든버러의 연쇄 소녀살인사건을 해결한(‘매듭과 십자가’) 점을 높이 평가한 런던 경찰이

소위 울프맨이라 명명된 런던의 연쇄살인범 체포를 위해 존 리버스를 초대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런던 경찰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리버스를 외국인취급하며 무시합니다.

전문가로 초빙된 그를 노골적으로 비아냥대는가 하면, 수시로 돌아가라는 압력을 가합니다.

그와 파트너가 된 조지 플라이트 경위만이 존 리버스를 공정한 태도로 대해주는데,

두 사람은 수사기법도, 성격도 전혀 다르지만 좌충우돌을 겪으면서도 협력을 이어갑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언 랜킨은 잠시 런던에 머물던 시절 꽤나 스트레스를 받았었고,

무슨 심보인지 자신의 주인공 존 리버스에게도 그 스트레스를 겪게 해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런던의 모든 것 사람, 교통, 날씨, 건축물 등 을 못 마땅히 여기는

존 리버스의 짜증과 한탄을 작품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언 랜킨은 숨바꼭질에서도 런던과 런던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는데

이빨 자국에 숨어있는 그의 직선적인 스코틀랜드 기질을 엿보는 것도 특별한 재미였습니다.

 

아무튼...

존 리버스 시리즈가 3편인 이빨 자국에 와서 한단계 업그레이드 된 것은 분명합니다.

번역하신 최필원 님도 후기를 통해 “‘매듭과 십자가숨바꼭질이 풋풋했다면,

이빨 자국에서는 전에 없던 무게감과 원숙미가 뚜렷이 느껴진다.”라고 언급하셨는데,

일단, 특수부대 생활이 남긴 엄청난 트라우마, 어린 시절부터 각인된 불행한 가족의 기억,

주변 동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 이혼이 가져다 준 엉망진창의 생활 등

심신 모두가 삐딱하던 존 리버스가 이젠 제법 성숙한 경찰이 됐다는 점이 가장 눈에 띕니다.

, 전작들에서 순간적인 깨달음과 결정적 제보에만 의존했던 존 리버스가

느리지만 꼼꼼한 자신만의 추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는 점도 개선점(?) 중 하나입니다.

 

다만, “‘이빨 자국에서 이언 랜킨의 재능이 폭발하기 시작한다.”는 어느 분의 서평은

한편으로 수긍이 갔지만, 한편으론 아직 폭발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예상 밖의 범인은 충격이나 반전보다는 독자의 예상을 따돌리려는 억지처럼 보였고,

리버스의 수사와 탐문은 왠지 슬로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한없이 느린 만연체였습니다.

깨달음과 제보대신 그가 구사한 무기는 범인 약 올리기인데,

그것 외에는 리버스가 멀고 먼 런던까지 와서 보인 활약이 크게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전처와 딸이 등장한 대목은 이혼남 경찰이면 당연히 등장하는 상투적 에피소드였고,

리버스에게 조언과 애정을 함께 쏟은 심리학자 리사는 어정쩡한 모습만 보이다 말았습니다.

 

결론적으로, 1~2편 이후 존 리버스를 포기하지 않았던 건 괜찮은 선택이었지만,

여전히 그의 폭발적 매력을 느끼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원석 같은 상태에서 점차 보석으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인 점은 다행스럽게 여겨지지만,

에든버러로 복귀한 존 리버스가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스트립 잭을 통해

제대로 된 폭발을 만끽하게 해줄지 기대 반, 우려 반인 것도 사실입니다.

부디 스트립 잭에서 이언 랜킨의 대폭발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