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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 여행 중입니다 ㅣ 미아&뭉크 시리즈
사무엘 비외르크 지음, 이은정 옮김 / 황소자리 / 2016년 8월
평점 :
단서들을 통해 사건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특별한 직관력의 소유자인 여형사 미아 크뤼거는
쌍둥이 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마약쟁이 남자를 ‘과잉진압’으로 죽인 이후
경찰을 그만두고 거의 폐인이 된 채 외진 섬에 머물며 자살할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경찰대생이던 미아를 특수수사팀으로 스카우트했던 베테랑 형사 홀거 뭉크는
연쇄 소녀살인사건이 벌어지자 섬으로 잠적했던 미아를 설득하여 특수수사팀에 복귀시킵니다.
기대했던 대로 미아는 누구도 포착하지 못했던 사건의 이면을 파헤치기 시작했고,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던 수사는 활기를 띄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범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그 와중에 추가로 두 명의 소녀가 변사체로 발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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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에 ‘미국에서나 벌어질 법한 끔찍한 연쇄살인’이라는 표현이 두어 번 등장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화제가 됐던 몇몇 북유럽 스릴러를 돌이켜 보면
스웨덴이나 노르웨이는 미국이나 멕시코보다 몇 배는 더 위험한 곳처럼 묘사되곤 했는데,
이 작품 역시 그런 선입관을 갖기에 충분할만한 연쇄 소녀살인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작가가 애써 ‘노르웨이에서 이런 사건은 무척 특별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비슷한 표현을 두어 번씩이나 동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아무리 잔혹한 스릴러라도 좀처럼 다루지 않는 소재가 미성년자가 피해자가 되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은근슬쩍 ‘안전한 노르웨이’를 강조하면서도
정작 메인 사건은 6살 소녀들을 희생자로 삼은 참혹한 연쇄납치-살해로 설정했습니다.
그런 불편함 때문에 계속 읽기를 뒤로 미루다가,
어쩔 수 없는 호기심 때문에 국내에 출간된 지 거의 1년이 다 돼서야 읽게 됐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드라마-연극 작가라는 대중지향적인 이력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무엘 비외르크는 (적어도 희생된 소녀들에 관한) 불편한 묘사들을 현명하게 자제했고,
이야기의 중심을 노르웨이 경찰 홀거 뭉크와 미아 크뤼거 콤비의 캐릭터 플레이에 맞춤으로써
기대 이상의 재미와 탄탄한 서사를 선보였습니다.
미아 크뤼거가 사건과 단서를 바라보는 방법은 여느 경찰들과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직감과 예감에 가까운데, 그래서인지 이 작품에서 과학수사는 별 존재감이 없습니다.
미아가 이미 특유의 직관력을 통해 많은 사건을 해결한 적이 있기 때문에
홀거 뭉크를 비롯한 수사팀 동료들은 ‘소설’같기만 한 그녀의 추리를 옹호하고 지지합니다.
미아는 사건현장을 반복해서 방문하거나 집요하게 탐문하는 대신
종이 위에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적으면서 행간에 숨은 진실을 찾아내곤 합니다.
단편적인 단서들을 이리저리 재배열하다 보면 어느 순간 ‘뭔가’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을 통해 몇 수를 내다보는 바둑 고수처럼 아무도 예상 못한 추리를 내놓는 것입니다.
반면, 54살의 베테랑 홀거 뭉크는 상관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는 타고난 반골기질도 있고,
은근한 카리스마로 오래 호흡을 맞춰온 수사팀 동료들을 장악하는 면모도 있지만,
대체로는 어딘가 느긋한 ‘사람 좋은 중년아저씨’처럼 보입니다.
연쇄 소녀살해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대단한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지만,
애초 뛰어난 직관력의 소유자인 미아를 수사팀으로 데려온 것도 그였고,
폐인처럼 살던 미아를 사건현장으로 복귀시켜 수사를 성공적으로 이끌게 만든 것도 그입니다.
그리고 하이에나 같은 언론의 공격과 상부의 부당한 압력에 저항하며
수사팀을 끝까지 지키는 것도 그의 역할입니다. 말하자면 든든한 지원군 역할이라고 할까요?
사건 만큼이나 비중 있게 다뤄지는 대목은 미아와 뭉크의 가족사입니다.
미아가 쌍둥이 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삶의 희망과 의지를 잃어버렸다면,
뭉크는 바람난 아내와의 이혼, 제멋대로 살다가 19살에 아이를 낳은 딸 등
콩가루가 된 가족의 비극을 모두 자기 탓이라 여기는 남자입니다.
어쩌면 그런 가족사를 지닌 두 사람이기에 6살 소녀들이 연이어 희생되는 사건을 접하면서
경찰 이상의 감정을 이입하게 됐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살짝이든 심하게든 어딘가 망가진 경찰 캐릭터에 비극적인 가족사까지 부여받은 주인공은
영미권이나 북유럽 스릴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상투적인 설정이지만,
어쨌든 미아와 뭉크는 상투성 이상의 매력을 발산하는 캐릭터임은 분명합니다.
아쉬운 점을 몇 가지만 꼽자면...
초반에 그려진 미아의 캐릭터 – 쌍둥이 동생의 죽음의 트라우마와
그로 인해 섬에 숨어든 채 자살을 계획하고 있는 피폐한 삶 – 에 비해
그녀의 현장 복귀가 너무 쉽고 가볍게 그려졌다는 점입니다.
사건현장으로 돌아온 그녀는 지나치게 쌩쌩했고, 트라우마는 독자의 기억에서 금세 잊힙니다.
물론, 작가는 수시로 그녀의 상처를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곤 하는데,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아의 트라우마는 왠지 ‘장식품’ 같은 느낌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또, 연쇄 소녀살해사건과 맞먹는 비중으로 병행되는 종교집단의 스토리는
(메인 사건과 접점이 있긴 하지만) 과도한 분량과 지루한 전개로 맥이 빠지는 대목입니다.
마찬가지로, 정보 설명을 맡은 단순 단역 소개에도 지나치게 상세한 묘사가 동원됐는데,
이 역시 여러 번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턴 스킵하듯 페이지를 넘겨버리게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오타들이 무척 눈에 거슬렸습니다.
전문 교정가가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라도 프리뷰를 맡겼다면 충분히 방지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상태로 ‘작품’을 시장에 내놓는다는 것이 제겐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목하라! 모던 크라임의 새로운 거장이 나타났다.”라는 화려한 홍보 카피보다
본몬 속의 오타 하나에 더 신경쓰는 것이 출판사의 본연의 자세 아닐까요?
작가 소개글을 보니 후속작 ‘올빼미’ 역시 좋은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 작품이 미아-뭉크 콤비의 시리즈 작품이라면 더욱 반갑겠지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국내에 출간된다면 관심을 갖고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