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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선택 ㅣ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는 1956년~2005년에 걸쳐 57편이 출간된 경찰소설로,
그야말로 반세기에 걸친 엄청난 시리즈입니다.
‘살인자의 선택’은 그 가운데 5번째 작품으로, 1957년에 출간된 작품입니다.
(오래 전 출간됐다가 절판된 작품을 제외하고, 현재 한국에는 모두 9편이 출간된 상태인데,
피니스아프리카에에서 7편, 검은숲과 황금가지에서 각각 1편이 나왔습니다.)
출간시기만 봐도 요즘의 미스터리나 스릴러와 달리
아날로그적인 수사 기법과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작품임을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마치 21세기 ‘CSI 시리즈’와 20세기 ‘수사반장’을 비교한 느낌이랄까요?
한국에 출간된 9편 가운데 이 작품까지 겨우 4편 밖에 읽지 못한 상태라
시리즈 전체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평하기는 어렵지만,
경찰소설에 관한 한 명불허전의 고전이란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엽기에 가까운 참혹한 사건도, 과학수사를 동원한 최첨단 수사도 없지만
‘87분서 시리즈’는 스티브 카렐라를 비롯한 다양한 경찰 캐릭터들을 집단주인공으로 내세워
발로 뛰고, 머리로 고민하는 진짜 경찰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살인자의 선택’에 등장하는 두 건의 살인사건과 그 해결 과정은
요즘의 미스터리나 스릴러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무척 심심하고 평이하게 보일 것입니다.
특별한 반전도 없고, 과학수사의 개가도 없고, 영웅적인 원톱 주인공도 없고,
오로지 미련하게 탐문과 단서에 집착하는 클래식한 경찰들의 활약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번 읽기 시작하면 단숨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리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아마도 ‘다양하고 생생한 경찰 캐릭터’와 ‘리얼리티의 힘’,
그리고 ‘에드 맥베인 특유의 톡 쏘는 블랙유머’를 그 이유로 꼽을 수 있는데,
‘살인자의 선택’은 이 세 가지 매력이 잘 배어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봐도 시리즈를 이끄는 것은 따뜻한 품성과 예리한 추리력을 겸비한 스티브 카렐라지만,
에드 맥베인은 영웅적인 원톱 주인공 대신 87분서의 여러 경찰들을 적절하게 중용합니다.
직전 작품인 ‘사기꾼’에서 스티브 카렐라와 그의 아내 테디가 종횡무진 활약한데 비해,
‘살인자의 선택’에서는 신참 형사인 버트 클링과 새로 전근 온 코튼 호스가
스티브 카렐라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맡아 이야기를 이끌고 있습니다.
비교하자면, ‘CSI 시리즈’에서 반장 혼자 모든 걸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돌아가며 사건의 중심에 위치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그 덕분에 모든 캐릭터에게 따뜻한 애정을 갖게 되고,
누가 사건 해결의 주도권을 갖더라도 응원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87분서 경찰들의 아날로그적인 수사는 CSI의 과학수사보다 더 리얼하게 다가옵니다.
실험실에서 화학약품을 뒤섞고, CCTV를 판독하고,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하는 CSI보다
용의자나 관련자를 반복해서 탐문하고,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을 검토하는 87분서 형사들이
훨씬 더 진짜 경찰처럼 보이는 것은 아마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캐릭터와 리얼리티의 힘을 뒷받침하는 것은 에드 맥베인의 촌철살인 같은 블랙유머입니다.
때론 능청스러운 아재 개그로, 때론 라임(Rhyme)처럼 반복되는 리드미컬한 유머로,
때론 상대방의 말문을 막히게 하는 정신없는 속사포 유머로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가끔은 책을 읽다가 혼자서 빵 터지게 만드는 대목들도 등장하곤 합니다.
진지와 유머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의 필력에 페이지는 쉴 새 없이 넘어갑니다.
서평을 쓰다 보니 정작 ‘살인자의 선택’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을 못했네요.
붉은 머리 여인이 네 발의 총을 맞고 사망한 주류매장 살인사건이 메인 사건이고,
87분서의 악역 경찰 로저 하빌랜드 피살사건이 서브 사건으로 전개됩니다.
메인 사건은 신참인 버트 클링이, 서브 사건은 새로 전근 온 코튼 호스가 담당하는데,
분량 면에서는 당연히 메인 사건이 압도적이지만,
더욱 호기심을 끄는 것은 향후 주인공 스티브 카렐라의 입지를 위협할(?) 것으로 보이는
87분서의 ‘뉴 페이스’ 코튼 호스의 첫 등장 부분입니다.
(이렇게 된 사연은 에드 맥베인의 ‘분노에 찬 작가 후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부유하고 안락한 관할지역만 맡던 ‘범생이+도시 깍쟁이’ 캐릭터 코튼 호스가
하루도 조용할 날 없는 87분서에 부임하여 스티브 카렐라와 한 팀이 된 뒤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치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진짜 경찰이 되기 위해 성장통을 겪는 신입의 스토리’처럼 읽혀서 무척 흥미롭습니다.
그에 비해 버트 클링이 맡은 메인 사건은 아날로그 경찰수사의 깨알 같은 재미를 주지만,
규모도 소소하고, 해법이나 결말 모두 심플하게 설정돼서 임팩트 자체가 좀 약한 편입니다.
그런 점 때문에 ‘살인자의 선택’을 통해 ‘87분서 시리즈’를 처음 접한 독자라면
‘중간부터 보기 시작한 탓에 이야기의 흐름도 잘 모르겠고, 인물들의 성격이나
아날로그 수사의 재미도 느낄 수 없는 연속극의 한 회’처럼 읽힐 수도 있습니다.
혹시 ‘87분서 시리즈’를 시작하는 독자라면 앞서 출간된 1~4편인
‘경찰혐오자’, ‘노상강도’, ‘마약밀매인’, ‘사기꾼’을(또는 이 가운데 한 권 정도라도)
먼저 읽은 후에 이 작품을 읽으시기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살인자의 선택’의 참맛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초기작 가운데 못 읽은 작품들이 꽤 있는데,
시리즈 6~7편인 Killer's Payoff(1958)와 Lady Killer(1958)가 출간되기 전에
(출판사의 행보로 보아 이제부터는 순서대로 출간할 것 같아서 이렇게 추정해봅니다^^)
더는 미루지 말고 빨리 마스터해야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