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남자
박성신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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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실패로 빚더미에 오른 채 고시원을 전전하던 최대국은 어느 날 한 남자의 방문을 받는다.

남자는 최대국의 아버지인 최희도가 총에 맞아 중태라는 소식과 함께,

아버지의 수첩을 찾아주는 조건으로 거액의 보상금을 제시한다.

아버지와 의절한 상태였지만 보상금에 욕심이 났던 최대국은 덜컥 제의를 수락하면서,

거부할 수 없는 아버지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소설은 아들 최대국의 시점과 젊은 시절의 아버지 최희도 시점을 번갈아 보여주며,

아들과 어긋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비밀스러운 과거사를 한발 한발 따라가는 한편,

이를 통해 간첩, 안기부, 요정정치, 납북사건 등

6~70년대 한국 사회의 굵직한 사건을 절묘하게 작품에 녹여낸다.

(출판사의 책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낯선 이름의 작가라 책날개의 작가 소개를 보니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주로 부모와 자식. 그리고 가족이란 관계가

서로에게 구원인가, 원죄인가에 대한 고민을 작품에 담아내려 노력해 왔다.”

그래서 현대를 배경으로 아들 최대국의 시점에서 전개된 첫 챕터와

6~70년대를 무대로 아버지 최희도의 시점에서 전개된 두 번째 챕터를 읽고는

오랜 세월에 걸친 부자간의 갈등을 미스터리 기법으로 푼 작품이라고 지레 짐작을 했습니다.

 

하지만, 초반부, 정확히는 46페이지에서 남조선이라는 단어를 발견하는 순간,

갑자기 두 개의 모순되는 느낌이 확 다가왔습니다.

하나는, 2017년에 간첩 이야기라니, 하는 당혹감과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특별한 이유에 대한 호기심이었습니다.

출판사의 책 소개대로 이 작품은 고정간첩, 중앙정보부, 요정정치, 납북사건 등

옛 향수를 자극하는 시대극에 어울리는 올드한 소재들로 구성돼있습니다.

캐릭터나 이야기 자체도 그런 올드함에서 크게 벗어나진 못한 작품입니다.

그런데도, 첫 페이지를 펼친 뒤로 한 번도 쉬지 않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완주해버렸는데,

그것은 올드하지만 탄탄한 서사, 앞뒤가 빈틈없이 맞아 들어가는 정교한 구성,

그리고 상투적이라 해도 역시 재미있게 읽히는 스파이물의 미덕들 덕분입니다.

 

또한 가족의 문제에 천착해왔다는 작가의 전공이 작품 곳곳에 진하게 배어있어서

이야기의 묵직함을 더한 것도 재미의 한 요인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다 드러낼 수 없는 진실과 상처가 있기 마련이고,

자식은 그런 부모의 음지와 이면을 눈치 채지 못한 채

겉으로 드러난 외연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반항합니다.

그런 점에서만 보면 흙수저로 태어나 비참한 밑바닥 삶을 살고 있는 아들 최대국이

자신에게 아무 것도 물려준 것이 없는 냉전시대의 산물인 아버지 최희도와 겪는 갈등은

여타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자주 봐왔던 익숙한 부자의 갈등일 뿐이지만,

3의 남자는 거기에 덧붙여 아버지의 비밀을 탐색해가는 아들의 이야기를 장착함으로써

가족의 문제와 시대의 문제와 미스터리를 정교하게 맞붙인 작품입니다.

 

아버지의 과거는 벗기면 벗길수록 더 복잡한 미로를 보여줄 뿐이었고,

아버지의 비밀창고 속에 소장됐던 물건들은 아버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때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여가수의 LP, 오래 전 판매됐던 담배 은하수,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젊은 여인의 사진 등...

수첩의 행방은 묘연했고, 탐색의 단서는 너무나도 모호했지만,

최대국은 오직 의문의 사내가 제시한 거액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수첩 찾기에 나섭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위기가 연이어 그에게 닥칩니다.

도대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의 흔적을 찾는 여정이 이렇게 위험한 것인지 최대국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최대국은 문득 아버지가 새겨놓은 한마디를 기억해냅니다.

모르는 사람이 너를 찾아와 내 이름을 대면, 그대로 도망가라.”

그리고 죽음의 위기를 몇 차례 넘긴 후에야 아버지가 남긴 한마디의 진실을 알아냅니다.

 

소설 속 아버지 최희도가 겪은 파란만장한 삶은 허구이지만 허구처럼만 보이지 않습니다.

그 무렵 대한민국 어딘가에는 실제 최희도 같은 인물이 여럿 존재했을 것만 같고,

그가 사랑했던 여인 김해경, 그의 절친 김환, 그의 멘토 강춘식, 그의 숙적 서중태 등도

시한폭탄 같던 그 시대 어딘가에 분명 실존했을 것만 같은 인물들입니다.

물론, 6~70년대는 너무나 먼 시대이고, ‘간첩이란 단어 자체가 발산하는 긴장감이나 위기감은

아무리 미사일 문제로 시끌시끌한 2017년의 대한민국이라 하더라도 생경하게 다가옵니다.

적어도 1987년의 KAL기 폭파사건을 조금이라도 기억하는 독자라면 모를까,

그 아래의 세대에게는 딴 나라 이야기처럼 읽힐 수도 있겠지만,

작가는 나름의 친절한 방식으로 그 시대를 이해시키기 위해 애쓴 것은 물론,

혹시 그 시대를 모르더라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비극적인 가족사와 팽팽한 스파이물의 미덕을 잘 섞어놓았습니다.

 

46페이지에서 본 남조선이라는 단어가 준 당혹감과 호기심이라는 모순된 감정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자연스럽게 해소됐고,

결과적으로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특별한 이유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외국의 첨단 스파이물에 익숙한 독자라면 아날로그 수준의 스파이놀이가 아쉽겠지만,

그 점만 제외한다면 3의 남자는 꽤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 돼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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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티스맨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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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살자의 이마에 두 발의 총알자국을 남겨놓는 희대의 연쇄살인이 벌어집니다.

패닉에 빠진 검찰과 경찰이 전혀 감도 못 잡고 있는 사이,

한 인터넷 카페에 살해된 자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확한 정보와 함께

그들이 잔혹하게 살해당해도 마땅한 인물들이었다는 기막힌 사연들이 게시됩니다.

살해된 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타인에게 유무형의 끔찍한 폭력을 휘둘렀던 자들이고,

그 폭력의 희생자들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깊은 상처 속에서 살아가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 카페의 운영자 저스티스맨은 추정또는 각색이라고 전제했지만,

마치 직접 살인을 저지른 킬러의 고백 기록처럼 너무나 완벽하고 사실적인 스토리에

카페 회원들은 저스티스맨=킬러라고 의심하면서도 그의 정의구현에 열광합니다.

 

● ● ●

 

어딘가 복수와 응징의 냄새가 느껴지는 총기에 의한 연쇄살인,

연쇄살인의 정확한 판세를 읽어내는 인터넷 카페 운영자 저스티스맨의 가공할 추리,

저스티스맨에게 열광하며 희대의 연쇄살인마 킬러를 숭배하는 익명의 네티즌들의 광기,

그리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릴 것 없이 사회 전체에 만연한 잔혹한 폭력에 대한 고발 등

저스티스맨은 다루는 내용이나 그것을 풀어가는 형식 모두 독특하고 도발적인 작품입니다.

 

피살자들이 어떤 식으로 서로 연관된 인물들인지,

그들이 살해되기 전 어떤 악행을 저질렀고,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했는지 등

저스티스맨이 올린 연쇄살인의 전말을 읽으면서 독자는 계속 위화감을 갖게 됩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 모든 디테일을 알고 있는 것일까?

정말 그가 범인일까? 아니면 범인과 특별한 관계이거나 아니면 공범일까?

독자 역시 소설 속 카페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저스티스맨을 의심할 수밖에 없지만,

작가가 그렇게 선선히 미스터리의 열쇠를 줄 리는 없으니,

분명 후반부에 가서 엄청난 반전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 죽어 마땅한 인물들을 상대로 한 냉정하고 빈틈없는 사적 복수는

일반적인 감정적 사적 복수와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이입을 경험하게 만드는데,

덕분에 절대 잡히지 말기를’, ‘마지막 장에서도 킬러가 무사하기를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작가는 연쇄살인 미스터리 서사 속에 폭력에 대한 꽤 묵직한 담론도 함께 담았습니다.

권력에 의한 폭력, 약자에 대한 쾌락적 폭력, 욕망 분출을 위한 폭력, 학교 폭력 등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연쇄살인의 출발점, 즉 피살자들의 로 설정해놓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킬러를 숭배하며 피살자들을 증오하던 카페 회원들은

댓글로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그들끼리 폭력을 주고받게 됩니다.

닉네임 뒤에 숨어 욕설과 비아냥으로 범벅된 언어적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물론,

현피까지도 서슴지 않는 그들의 온라인 폭력은 사실 피살자들의 와 다를 게 없습니다.

오프라인의 폭력을 증오하면서도 온라인의 폭력을 무감각하게 여기는 그들을 통해,

또 하이에나 무리처럼 집단의 폭력성에 길들여진 그들을 통해

작가는 미세한 입자의 안개처럼 사회 곳곳에 스며든 폭력의 광기를 대놓고 비판합니다.

 

이 지점에서 그럼, 킬러의 연쇄살인은 용서받을 수 있는 폭력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는데,

작가는 초반부에 에 대한 킬러의 자기 철학을 장황하게 묘사함으로써,

킬러의 살인과 피살자들의 폭력이 어떻게 다른지 미리 변명 아닌 변명을 풀어놓습니다. ,

 

태초의 정통성을 지닌 악은 인간을 속박과 굴레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강렬한 힘을 지녔는데,

언제부턴가 그것이 비열하게 뒤틀린 모습으로 세상 곳곳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 비열한 악이 바로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끊임없이 자행되는 폭력이다.

하여 킬러는 비열한 악을 응징하고 진짜 악을 실행하는 순간을 자신의 프레임에 담는다.”

(알라딘 책 소개글에서 인용, 수정했습니다)

 

말하자면, 킬러의 순수한 악의또는 악의 정통성

피살자들의 비열하게 뒤틀린 악과는 분명히 다른 차원의 문제이며,

그렇기에 킬러의 연쇄살인을 비난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작가의 변명은 약간은 난해하고 과대포장지처럼 느껴진 것도 사실입니다.

킬러는 운명적으로 순수 악을 지니고 태어난 신적 존재도 아니었고,

, 엄청난 내공을 지닌 판타지 서사 속의 영웅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비열하게 뒤틀린 악에게 분노하는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인데,

작가가 지나치게 신비하고 화려한 외피를 입힌 셈이랄까요?

 

폭력에 대한 약간의 과한 주제의식과 막판에 힘이 좀 빠진 점만 제외한다면,

저스티스맨은 지금껏 맛보지 못한 색다른 미스터리의 성찬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적 복수를 담고 있어서 더 매력적으로 읽혔고,

두어 번쯤 되읽어야 그 의미를 음미할 수 있는 화려한 수사와 문장들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무튼...

도선우라는 대단한 이야기꾼을 발견한 반가움과 함께 후속작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됐습니다.

저스티스맨보다 불과 몇 달 앞서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한 스파링도 궁금하고,

그가 앞으로 내놓을 미스터리는 어떤 새로움을 선사할지도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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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먼트 - 복수를 집행하는 심판자들, 제33회 소설추리 신인상 수상작
고바야시 유카 지음, 이영미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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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XX, 범죄가 날로 급증해 가는 일본에서 복수법이 제정된다.

재판에서 이 법의 적용을 인정받으면, 피해자 또는 그에 준하는 사람은

종래의 법에 따른 형벌이나 복수법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 복수법을 선택한 사람은 자기 손으로 형벌을 집행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도리타니 아야노는 복수집행자를 보호하고, 집행하는 현장을 감찰하고,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역할을 맡은 복수감찰관이다.

어느 쪽에도 감정을 이입해서도 안 되고, 집행에 영향을 주는 판단을 해서도 안 되지만,

도리타니는 맡은 사건이 하나둘 늘어갈수록 정답 없는 자문 복수법은 최선인가? 올바른가?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가? 과연 피해자와 유족을 치유할 수 있는가?

오히려 집행자를 평생 고통 속에 빠지게 하는 것은 아닌가? - 때문에 혼란스러울 뿐이다.

(출판사의 책 소개글 일부가 포함된 줄거리입니다)

 

● ● ●

 

개인적으로 사적 복수라는 주제를 무척 좋아해서 관심을 가진 작품입니다.

더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것이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사적 복수를 다룬 작품이 많아서

과연 어떻게 풀어갔을까 궁금했는데, 작가는 복수법이라는 신무기(?)를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사적 제재를 허용한 복수법 자체보다 더 흥미를 끈 것은

피해자 또는 그에 준하는 인물이 자기 손으로 직접’,

그것도 피해자가 당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복수를 실행해야 한다는 설정입니다.

말하자면 흉기로 죽였으면 흉기로, 굶겨 죽였으면 굶겨서,

생매장 시켰으면 생매장으로 직접 가해자를 응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적 복수 자체가 어쩔 수 없이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 고통스런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공개적이고 합법적으로 살인자가 된다는 것은 은밀한 사적 복수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복수를 마친 자들 가운데 일부는 피해자의 원한을 조금이라도 갚았다고 기뻐하는 반면,

일부는 스스로 살인자가 됐다는 악몽에 시달리며 복수를 후회하기도 합니다.

복수법 반대 운동을 하다가도 정작 자신이 피해자가 되자 복수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고,

복수법에 찬성하다가도 막상 살인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자 고민에 빠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법부 안에서도 강력범죄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는 찬성론자가 있는 반면,

범인과 피해자의 인권을 말살한다는 반대론자도 있습니다.

이렇듯 복수법은 정의라고도 패륜이라고도 할 수 없는 딜레마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화자(話者) 겸 주인공으로 복수감찰관 도리타니를 내세웠습니다.

그녀는 복수법을 선택한 실행자들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

복수의 전 과정, 합법적인 살인을 감찰해야 하는 인물입니다.

자신의 개인적 신념과 무관하게 정당한 법 집행을 수호해야 하는 공무원이지만,

매번 복수가 실행되는 현장을 지켜보는 것은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작가는 그런 도리타니를 앞세워 복수법의 다양한 딜레마에 대해 풀어놓습니다.

복수는 과연 최선인가? 복수는 과연 피해자와 유족을 치유할 수 있는가?

제도적 사형과는 명백히 차원이 다른 개인에 의한 합법적인 살인은 용인될 수 있는가?

복수를 실행한 자들이 평생 악몽으로 간직해야 하는 살인의 기억은 치유될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 만족감이 높았던 작품을 꼽자면,

아들의 복수를 실행하는 아버지의 고뇌를 다룬 사이렌

묻지마 살인극의 피해자들이 복수법 실행을 놓고 갈등하는 앵커입니다.

그 외의 작품들 모두 정답 없는 딜레마를 품고 있는 이야기들이라

독자 입장에서는 내내 긴장감을 갖고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작위적인 느낌이 강한 스토리 때문에

기발한 발상과 특별한 소재의 힘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몇몇 수록작은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범인과 피해자의 감정을 지나치게 강요한 나머지

마치 독자에게 훈계교훈을 주려 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순전히 반전을 위해 사건이나 캐릭터를 비현실적으로 설정하기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진작 법정에서 드러났어야 할 사건의 진상

복수법 실행 현장에서 느닷없이 폭로되면서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입니다.

명백히 주제를 위해 스토리나 캐릭터가 희생(?)된 셈입니다.

 

도리타니라는 복수감찰관을 관찰자로 설정한 것 역시 역효과를 냈다는 생각인데,

작가가 그녀의 감정이나 갈등을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표현한 탓에

독자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원천봉쇄했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오히려 그녀를 복수법의 지독한 찬성론자나 반대론자로 그렸다면

독자 입장에서 사적 제재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요약하자면,

무척 흥미로운 소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제의식과 감정의 과잉, 너무 말이 많았던 화자,

꽤 묵직한 주제지만 그것을 담아내기엔 좀 아쉬웠던 단편의 한계 때문에

이야기의 확장성이 살지 못한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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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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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역사를 뒤흔든 암살 사건 뒤에는 항상 설계자들이 있다.

설계자들은 권력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고도의 지적 능력자들이다.

그들의 설계가 자객들에게 떨어지고, 자객들은 설계를 실행한다.

일제시대 이래, ‘개들의 도서관은 가장 강력한 암살 청부 집단이었다.

도서관에는 20만 권의 장서가 가득하지만,

아무도 책을 읽지 않고 죽음을 설계하는 장소라 하여 개들의 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래생(來生)은 도서관장인 너구리 영감의 양자이자 최고의 암살자 중 한 명이다.

민주화와 함께, 도서관은 설계와 암살의 중심부에서 밀려난다.

대신 기업형의 보안 회사로 성공리에 탈바꿈한 한자의 회사가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른다.

한자는 도서관 출신으로, 유학파 경영인이다.

한자의 회사와 너구리 영감의 도서관은 충돌하기 시작하고 걷잡을 수 없는 갈등이 빚어진다.

설계로 아버지를 잃은 여주인공 미토는

래생에게 설계의 세계를 전복할 계획을 세워 접근해오면서 엄청난 사건들이 꼬리를 잇는다.

(출판사의 책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2016년에 출간된 뜨거운 피에 매료되어 김언수의 전작 설계자들을 읽게 됐습니다.

2010년에 출간됐으니 뜨거운 피보다 6년 앞선 작품입니다.

설계자들을 먼저 읽었다면 뜨거운 피를 통해 김언수의 성장을 생생하게 느꼈겠지만,

거꾸로 읽다 보니 (문장은 역시 단단하고 매력적이었지만) 아무래도 치기라고 할까,

어느 정도는 감정적이고, 어느 정도는 순진한 김언수의 일면을 발견한 책읽기가 됐습니다.

 

사실 주인공인 래생(來生)은 설계와 암살의 프로세스 가운데

가장 하위에 자리 잡은 실무 자객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의 제목은 어쩌면 설계자들보다는 자객들이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실제 설계에 나서는 인물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암살의 총책인 너구리 영감이나 한자, 그림자(정보통)인 정안,

그리고 래생처럼 실무를 맡은 이발사와 추, 털보 등이 주요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식민지시대와 군부독재시절부터 정치-기업-관료의 세계에서 일어난 수많은 의문의 죽음들은

대부분 설계자들에 의해 기획되고 자객들에 의해 자행된 완벽한 암살의 결과물입니다.

오랫동안 빈틈없는 일처리로 설계자들에게 신뢰받던 너구리 영감의 도서관은

시대가 변하고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 빈자리를 파고든 한자의 기업형 암살조직은 너구리 영감의 도서관과 전면전을 기획합니다.

그리고 그 전쟁터의 한복판으로 우리의 주인공 래생이 내던져집니다.

 

수녀원의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뒤 너구리 영감의 양자로 입적되어 자객이 된 래생은

17살에 첫 암살을 실행했고, 그로부터 15년 동안 완벽한 자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의 이름은 어차피 이번 생은 글렀으니, 다음 생에서나 잘해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너구리 영감이 지어준 이름이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에 담긴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무척이나 염세적입니다.

남을 죽이는 일에도, 자신의 삶을 꾸리는 일에도 냉정대신 무관심으로 일관합니다.

하지만 한자와의 전쟁이 본격화되고, 동료와 절친을 잃게 되면서 래생은 변합니다.

언제든 자신의 옆구리에 칼이 박혀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그였지만,

, 늙고 병들었거나, 실수를 했거나,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자객들이

과거 자신들을 고용했던 설계자들에 의해 냉정하게 제거된다는 사실도 잘 아는 그였지만,

그는 점점 감정적인 인간이 되고, 생각이 많은 자객으로 변해갑니다.

결국 설계자들은 암살계의 구조조정과 조직 간의 전쟁을 이야기의 배경으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래생이라는 말단 실무 자객의 굴곡으로 가득 찬 인생기이면서

어딘가 영화 박하사탕같은 향기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래생과 너구리 영감 외에도 설계-암살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피해자이자 설계자이자 자객인 여주인공 미토, 전설적인 칼잡이 이발사’,

암살대상을 살려준 탓에 자신이 설계의 대상이 된 추, 시체소각처리 담당 털보,

환상적인 정보통 정안, 래생의 라이벌이자 악역인 한자 등은

판타지 같은 암살 이야기 속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리얼한 캐릭터들을 지니고 있어서

읽는 내내 강렬한 흡인력과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중반부까지만 해도 김언수의 문장은 단단하고 묵직한 깊이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래생이 감정적인 인간이 되고, 생각이 많은 자객으로 변신하면서

김언수의 문장 역시 조금은 덜 단단해지고, 깊이보다는 속도에 더 신경을 쓰기 시작합니다.

래생 못잖게 어딘가 조급해 하는 것 같고, 다분히 비극적인 영웅서사의 기운이 감지됩니다.

특히 후반부와 엔딩은 설계자들뜨거운 피의 밀도의 차이를 확연히 느끼게 합니다.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문장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던 뜨거운 피와 달리

설계자들의 마지막은 김언수의 의지보다는 대중성에 부응한 느낌이 강합니다.

 

사실, ‘설계자들의 래생과 너구리 영감은 뜨거운 피의 희수와 손영감과 많이 닮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두 작품 속 인물들을 비교하면서 읽는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노회함이라든가 세상에 대처하는 자세에 있어서만큼은 희수와 손영감이 한 수 위지만,

어딘가 날것 같고 불온한 분위기에 관한 한 래생과 너구리 영감이 압도적입니다.

능구렁이 같은 노인과 염세적인 중년의 조합이 주는 색다른 매력이랄까요?

어쩌면 김언수의 다음 작품에서도 이들을 떠올리는 커플 주인공이 등장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시 한 번 거슬러 올라가 김언수의 데뷔작(?)캐비닛을 읽는다면

어떤 느낌을 받게 될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치기일지, 신선함일지, 무모한 도전정신일지...

동시에, 다음 작품에서 김언수의 문장이 얼마나 더 단단해지고 묵직해질지,

, 얼마나 센 이야기를 들고 나올지도 마찬가지로 궁금해지고 기대가 되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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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수첩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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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존 리버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첫 편인 매듭과 십자가이래 일부러 순서대로 읽어왔지만,

공교롭게도 바로 앞의 스트립 잭을 못 읽은 상태에서 검은 수첩을 먼저 만나게 됐습니다.

 

고백하자면, 시리즈 1~2편 이후 3편인 이빨 자국을 읽기까지 1년 반 정도 공백이 있었는데,

그것은 존 리버스를 계속 읽어야 하나?’라는 회의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빨 자국에서 이언 랜킨의 재능이 폭발하기 시작한다.”는 어느 분의 서평 때문에

큰맘(?) 먹고 존 리버스와 재회하기로 결심했고, 그 덕분에 검은 수첩까지 만나게 됐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 스트립 잭을 못 보긴 했지만),

검은 수첩은 제가 존 리버스 시리즈에게 기대했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종합선물세트입니다.

어딘가 뻣뻣하고 빈틈도 많은데다, 수사마저 외부의 제보에 주로 의존하던 존 리버스는

이제 치고 빠지기에도 능숙하고, 위아래 사람들을 다루는 솜씨도 일취월장한 것은 물론,

복잡다단한 사건 속에서 어디를 파고들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아는 멋진 형사로 성장했습니다.

물론 여전히 일상의 삶(연애나 가족문제 등)에 관한 한 그는 서툴거나 실수투성이입니다.

하지만 어설픈 남자 존 리버스의 모습은 애든버러의 반골형사 존 리버스가 갖지 못한

인간적이고 따뜻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어서 더욱 그를 응원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초기에 몸과 마음이 트라우마로 쩔어있던 존 리버스는 상상도 잘 안 되는군요.^^)

 

검은 수첩의 또 한 가지 재미는 마치 중간결산 스페셜처럼

앞선 시리즈에서 조연 또는 단역으로 등장했던 인물들을 다시 만나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언 랜킨은 서문을 통해 그 이유를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는데,

경제적인 글쓰기를 위해 (중략) 머리를 싸매고 새 인물을 창조하는 것보다

그들을 다시 불러내 쓰는 편이 훨씬 낫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리버스와 호흡이 잘 맞는 동료이자 엄청난 헤비 스모커인 잭 모튼,

연쇄 소녀유괴살인 수사 당시 용의자로 몰렸던 소심한 악당 앤드류 맥페일,

그리고 최면술사이자 마약에 손을 댔다가 폐인이 된 채 돌아온 동생 마이클 등이 그들인데,

머리를 싸매고 창조한 새 인물보다 훨씬 더 적절히 활용된 것은 물론,

오랜만에 재회해서, 또는 이번에는 제대로 혼내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반갑기만 했습니다.

 

타이틀인 검은 수첩은 리버스의 파트너인 브라이언 홈스의 수첩을 뜻합니다.

여친과 다툰 후 카페에 들렀던 홈스는 괴한으로부터 습격을 당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는데,

리버스는 홈스가 지니고 있던 검은 수첩에서 암호가 섞인 두 개의 문장에 주목합니다.

그것은 5년 전에 벌어진 센트럴호텔 화재사건에 관한 내용으로,

화재의 원인, 당시 호텔에 있던 인물들, 불에 탄 채 발견된 신원불명의 시신 등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정보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리버스는 윗선의 방해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홈스의 수첩에 있던 두 개의 문장을 발판으로 5년 전 사건의 진상파악에 나섭니다.

문제는, 리버스의 수사가 거듭될수록 여기저기서 예상 못한 사건들이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정리해놓고 보니 무척 간단한 내용이 돼버렸는데,

사실 검은 수첩은 인물도 많고, 사건도 많아서 꽤나 복잡하게 읽히는 작품입니다.

물론 이언 랜킨은 이야기가 차곡차곡 정리되도록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언뜻 보면 서로 무관해 보이는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서

도대체 리버스의 몸이 몇 개가 필요한가, 의구심이 드는 독자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건들이 결국 하나로 수렴될 것이란 점은 익히 예상 가능한 일이고,

이언 랜킨은 그 수렴을 전혀 억지스럽지 않게, 긴장감과 재미를 겸비하여 요리합니다.

 

5년 전 호텔 화재사건과 함께 병행되는 에피소드는

애든버러 최대의 악당 모리스 제럴드 캐퍼티, 일명 빅 제르 검거 작전입니다.

경찰과 공정거래원까지 합류한 이 작전에 대해 리버스는 무척이나 회의적입니다.

누구보다 빅 제르를 잡아넣고 싶은 리버스지만,

수십 번을 잡아넣어도 결국 그는 능구렁이처럼 법원을 빠져나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 파트너 쇼반 클락을 투입해놓은 채 자신은 비공식 수사(호텔 사건)에만 매달리지만,

그 과정에서 빅 제르가 호텔 사건과도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 리버스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빅 제르와 담판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형사 리버스와 악당 빅 제르가

(적절한 비교인지 모르겠지만) 때론 홈스와 뤼팽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어딘가 주고받는 사이또는 앙숙이면서 감싸주는 사이의 느낌이랄까요?

번역하신 최필원 님의 후기에 따르면, 시리즈 20황야의 얌전한 개들에서는

은퇴한 리버스가 킬러의 표적이 된 빅 제르를 보호하는 내용이 나온다고 하니,

앞으로 둘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엎치락뒤치락 할지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시리즈 가운데 순서대로 읽어야 좋은 경우

대표작부터 읽은 뒤 처음으로 돌아가 순서대로 읽는 것이 좋은 경우가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존 리버스 시리즈는 후자에 속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처음 읽을 대표작을 추천하라면, 적어도 지금까지는, ‘검은 수첩을 꼽고 싶습니다.

그런 뒤에 조금은 어설프고 뻣뻣한 초창기 존 리버스를 읽는다면

여러 가지 아쉬움이 남더라도 다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앞으로 돌아가 아직 못 읽은 스트립 잭을 읽을 계획입니다.

존 리버스 시리즈가 꽤 빠른 호흡으로 출간되고 있어서

어영부영 미루다가 또다시 신작에게 밀릴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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