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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를 뒤흔든 암살 사건 뒤에는 항상 설계자들이 있다.
설계자들은 권력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고도의 지적 능력자들이다.
그들의 설계가 자객들에게 떨어지고, 자객들은 설계를 실행한다.
일제시대 이래, ‘개들의 도서관’은 가장 강력한 암살 청부 집단이었다.
도서관에는 20만 권의 장서가 가득하지만,
아무도 책을 읽지 않고 죽음을 설계하는 장소라 하여 ‘개들의 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래생(來生)은 도서관장인 너구리 영감의 양자이자 최고의 암살자 중 한 명이다.
민주화와 함께, 도서관은 설계와 암살의 중심부에서 밀려난다.
대신 기업형의 보안 회사로 성공리에 탈바꿈한 한자의 회사가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른다.
한자는 도서관 출신으로, 유학파 경영인이다.
한자의 회사와 너구리 영감의 도서관은 충돌하기 시작하고 걷잡을 수 없는 갈등이 빚어진다.
설계로 아버지를 잃은 여주인공 미토는
래생에게 설계의 세계를 전복할 계획을 세워 접근해오면서 엄청난 사건들이 꼬리를 잇는다.
(출판사의 책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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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 출간된 ‘뜨거운 피’에 매료되어 김언수의 전작 ‘설계자들’을 읽게 됐습니다.
2010년에 출간됐으니 ‘뜨거운 피’보다 6년 앞선 작품입니다.
‘설계자들’을 먼저 읽었다면 ‘뜨거운 피’를 통해 김언수의 성장을 생생하게 느꼈겠지만,
거꾸로 읽다 보니 (문장은 역시 단단하고 매력적이었지만) 아무래도 ‘치기’라고 할까,
어느 정도는 감정적이고, 어느 정도는 순진한 김언수의 일면을 발견한 책읽기가 됐습니다.
사실 주인공인 래생(來生)은 설계와 암살의 프로세스 가운데
가장 하위에 자리 잡은 실무 자객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의 제목은 어쩌면 ‘설계자들’보다는 ‘자객들’이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실제 설계에 나서는 인물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암살의 총책인 너구리 영감이나 한자, 그림자(정보통)인 정안,
그리고 래생처럼 실무를 맡은 이발사와 추, 털보 등이 주요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식민지시대와 군부독재시절부터 정치-기업-관료의 세계에서 일어난 수많은 의문의 죽음들은
대부분 설계자들에 의해 기획되고 자객들에 의해 자행된 ‘완벽한 암살’의 결과물입니다.
오랫동안 빈틈없는 일처리로 설계자들에게 신뢰받던 너구리 영감의 도서관은
시대가 변하고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 빈자리를 파고든 한자의 기업형 암살조직은 너구리 영감의 도서관과 전면전을 기획합니다.
그리고 그 전쟁터의 한복판으로 우리의 주인공 래생이 내던져집니다.
수녀원의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뒤 너구리 영감의 양자로 입적되어 자객이 된 래생은
17살에 첫 암살을 실행했고, 그로부터 15년 동안 완벽한 자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의 이름은 ‘어차피 이번 생은 글렀으니, 다음 생에서나 잘해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너구리 영감이 지어준 이름이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에 담긴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무척이나 염세적입니다.
남을 죽이는 일에도, 자신의 삶을 꾸리는 일에도 ‘냉정’ 대신 ‘무관심’으로 일관합니다.
하지만 한자와의 전쟁이 본격화되고, 동료와 절친을 잃게 되면서 래생은 변합니다.
언제든 자신의 옆구리에 칼이 박혀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그였지만,
또, 늙고 병들었거나, 실수를 했거나,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자객들이
과거 자신들을 고용했던 설계자들에 의해 냉정하게 제거된다는 사실도 잘 아는 그였지만,
그는 점점 감정적인 인간이 되고, 생각이 많은 자객으로 변해갑니다.
결국 ‘설계자들’은 암살계의 구조조정과 조직 간의 전쟁을 이야기의 배경으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래생이라는 말단 실무 자객의 굴곡으로 가득 찬 인생기이면서
어딘가 영화 ‘박하사탕’ 같은 향기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래생과 너구리 영감 외에도 설계-암살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피해자이자 설계자이자 자객인 여주인공 미토, 전설적인 칼잡이 ‘이발사’,
암살대상을 살려준 탓에 자신이 설계의 대상이 된 추, 시체소각처리 담당 털보,
환상적인 정보통 정안, 래생의 라이벌이자 악역인 한자 등은
판타지 같은 암살 이야기 속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리얼한 캐릭터들을 지니고 있어서
읽는 내내 강렬한 흡인력과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중반부까지만 해도 김언수의 문장은 단단하고 묵직한 깊이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래생이 감정적인 인간이 되고, 생각이 많은 자객으로 변신하면서
김언수의 문장 역시 조금은 덜 단단해지고, 깊이보다는 속도에 더 신경을 쓰기 시작합니다.
래생 못잖게 어딘가 조급해 하는 것 같고, 다분히 비극적인 영웅서사의 기운이 감지됩니다.
특히 후반부와 엔딩은 ‘설계자들’과 ‘뜨거운 피’의 밀도의 차이를 확연히 느끼게 합니다.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문장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던 ‘뜨거운 피’와 달리
‘설계자들’의 마지막은 김언수의 의지보다는 대중성에 부응한 느낌이 강합니다.
사실, ‘설계자들’의 래생과 너구리 영감은 ‘뜨거운 피’의 희수와 손영감과 많이 닮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두 작품 속 인물들을 비교하면서 읽는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노회함이라든가 세상에 대처하는 자세에 있어서만큼은 희수와 손영감이 한 수 위지만,
어딘가 날것 같고 불온한 분위기에 관한 한 래생과 너구리 영감이 압도적입니다.
능구렁이 같은 노인과 염세적인 중년의 조합이 주는 색다른 매력이랄까요?
어쩌면 김언수의 다음 작품에서도 이들을 떠올리는 커플 주인공이 등장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시 한 번 거슬러 올라가 김언수의 데뷔작(?)인 ‘캐비닛’을 읽는다면
어떤 느낌을 받게 될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치기일지, 신선함일지, 무모한 도전정신일지...
동시에, 다음 작품에서 김언수의 문장이 얼마나 더 단단해지고 묵직해질지,
또, 얼마나 센 이야기를 들고 나올지도 마찬가지로 궁금해지고 기대가 되는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