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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이웃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5월
평점 :
그러고 보니 6월의 첫날입니다.
올해는 1987년 6월 항쟁으로부터 꼭 30년이 흐른 해입니다.
독재자의 시대가 막을 내린 뒤에도 어둠과 불의로 가득 찼던 1980년대는
그해 6월을 기점으로 거대한 하나의 시퀀스를 마무리했습니다.
비록 그 결과는 미미했고, 대중은 그 미미한 결과에 만족하면서 더 이상의 싸움을 포기했지만
어쨌든 새로운 시대를 연 전기가 됐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선한 이웃’은 그해 6월을 전후로 한 1980년대의 비극을 다룬 작품입니다.
작가는 후기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답지 못한 시대를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가능할까?
87년을 살아낸 사람들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준다.
그해 여름 시민들은 최루탄에 얼룩진 광장에서 희망의 노래를 불렀고,
진압경찰에게 쫓기면서도 삶을 찬미했다.”
‘선한 이웃’에는 그 시대를 상징하는 극적인 캐릭터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부도덕한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키워진 끝에 정보요원으로 살아야만 했던 남자,
운동권의 살아있는 전설로 회자되며 정보기관을 희롱하는 신출귀몰한 남자,
시저의 암살을 다룬 연극 공연 직후 정보기관의 먹잇감이 된 신인 연극연출가,
그리고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선과 악마저 자신이 설계한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관리관 등...
그 가운데에는, 생존을 위해 악에 부역할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눈앞의 삶을 위해 자신의 운명을 팔아넘긴 죄”(267p)를 저지른 자도 있고,
자신이 추구하는 정의가 진짜 ‘정의’인지 아니면 정교하게 설계된 ‘악’인지도 구분 못하거나
지금 누리는 삶이 자신의 것인지 타인에 의해 조작된 것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스스로 괴물이 됐다는 사실마저 눈치 채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선한 이웃이지만 결국엔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 자들입니다.
작가의 말대로 ‘인간답지 못한 시대’였기에 존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지만,
어쩌면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시대’와 ‘사람’은 여전히 같은 얼굴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작가의 말을 한번만 더 인용을 하겠습니다.
“나는 80년대의 분위기를 지금 독자들에게 전달하려 애썼다.
최종 수정을 막 끝낸 시점에 국정농단 사건이 터졌고 블랙리스트 사건이 뒤를 이었다.
마치 1987년에서 시간의 필름을 잘라 2017년에 이어붙인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이야기가 1987년이 아닌 지금, 2017년의 이야기로 느껴지기도 한다.”
소설은 여러 사람의 시점을 번갈아 앞세우며 전개됩니다.
인물들은 시대의 광풍에 휩쓸리며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살게 되고,
그 안에서 어떻게든 자신이 정의라고 믿는 가치를 위해 혹은 생존을 위해 분투합니다.
그들은 각자의 챕터를 통해 자신의 삶과 신념과 목표를 강변하면서도
동시에 그것들에 대해 회의하기도 하고 변명하기도 하고 비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의 운명은 조금도 자신의 의지대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동시에 작가는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을 기반으로 한 연극 ‘엘렉트라의 변명’을
꽤 비중 있는 소재로 끌어들입니다.
한쪽에서 신출귀몰한 운동권의 전설을 체포하기 위한 집요한 첩보전이 벌어지는 동안
한쪽에선 치열한 연극 논쟁이 벌어집니다.
쫓는 정보원과 쫓기는 연극연출가,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여배우라는 설정 때문에
연극 ‘엘렉트라의 변명’은 첩보전 못잖은 분량과 비중을 부여받았는데,
어떤 때는 첩보전이 연극처럼 보이고, 어떤 때는 연극이 첩보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 ‘엘렉트라의 변명’은 괴물과 악, 정의와 저항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작가의 지적 허세’나 ‘상징의 과잉’이 낳은 무리수로 읽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굳이 그렇게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감정이입을 요구해가면서까지,
그리스-로마의 연극과 셰익스피어에 무지하거나 낯선 독자들에게 혼란을 줬어야 할까요?
엘렉트라와 클리타임네스트라의 갈등과 파국의 어느 지점을
‘선한 이웃’의 주제의식과 연결시켜야 할지 혼란스러웠던 것은 저만의 경험일까요?
개인적인 의견을 솔직히 털어놓자면,
일체의 비유 없이 돌직구처럼 80년의 광주를 그린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떠올려 보면,
꽤 많은 상징과 은유를 동원하여 광주 이후의 80년대를 그린 ‘선한 이웃’은
어쩌면 연극 ‘엘렉트라의 변명’ 때문에 주제 자체가 흔들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정명의 전작을 읽었던 독자로서 솔직히 고백하자면,
80년대라는 ‘인간답지 못한 시대’를 그린 작품이었기에
통속적이라도 좋으니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극적인 이야기를 기대한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80년대의 분위기를 지금 독자들에게 전달하려 애썼다.”는 작의는 전달됐겠지만,
예상보다 훨씬 큰 비중으로 그려진 연극 관련 내용 탓에
왠지 빠른 돌직구를 기다리고 있다가 어이없는 느린 변화구에 헛방망이질을 한 타자처럼
조금은 당혹스러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 시대의 이야기는 어떻게 그려도, 어떻게 풀어도 여전히 아프게 읽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달라진 것 없어 보이는 오늘날,
그 시대를 통찰하는 작가들이 있어서 고맙고 반갑게 느껴집니다.
예상치 못한 막판 반전은 1987년과 2017년이 그리 다르지 않음을 통렬히 보여줬고,
그 시간동안 늙고 변질돼버린 주요 인물들의 현재의 모습은
때론 공감을, 때론 탄식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입니다.
아쉬운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 시대를 오늘의 독자에게 전하려 했던 시도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를 보내고 싶은 ‘선한 이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