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베를린 누아르 1 : 3월의 제비꽃 (북스피어X) ㅣ 개봉열독 X시리즈
필립 커 지음, 박진세 옮김 / 북스피어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원제인 ‘March Violets’, 즉 ‘3월의 제비꽃’은 1933년 히틀러가 독재자의 자리에 오르자
앞 다투어 나치당에 입당했던 기회주의자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이들 기회주의자들이 작품의 주요 캐릭터나 소재는 아닙니다.
작가 필립 커는 전쟁준비에 광분한 당시 독일의 폭압적 분위기와
맹목적이든 공포에 기인한 것이든 오직 복종만이 생존을 보장했던,
언뜻 보면 코미디 같은 독재의 참상을 은유하기 위해 이 제목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작가 스스로도 말했듯 이 작품의 주인공 베른하르트 귄터는
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한 하드보일드 캐릭터의 대명사 필립 말로를 떠올리게 합니다.
히틀러의 독재도, 공산주의의 망령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경찰(크리포)을 그만두고 사립탐정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38살의 남자입니다.
타고난 반골기질, 짜릿짜릿한 냉소와 비아냥, 집요하고 지칠 줄 모르는 탐문,
그리고 마초 기질과 훈남을 뒤섞은 듯한 언행은 베른하르트 귄터를 대표하는 캐릭터들입니다.
평범한 세상이었다면 그는 꽤 짭짤한 수입을 올리는 유능한 탐정으로 살아갔겠지만,
불평 한마디만으로도 인생이 끝장날 수 있었던 1930년대의 독일에서는
탐정 업무 자체보다 사방에 깔린 경찰이나 정보기관과의 충돌을 더 염려해야만 했고,
특히 권력자와 부자가 연루된 사건이라면 목숨을 걸 정도로 위협을 감내해야 했으며,
실제로 이 작품에서 귄터는 히틀러의 하수인들과 부딪히며 결정적인 위기를 겪곤 합니다.
그리고, 그 대목이야말로 이 작품을 평범한 탐정 이야기와 차별시키는 최고의 미덕입니다.
이미 사살되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진 것이 분명한 유대인 실종자 수색을 주로 다루던 귄터는
어느 날 독일의 유력 철강 재벌에게 은밀한 의뢰를 받습니다.
그의 딸과 사위가 총에 맞은 뒤 불에 탄 채 발견된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들 부부의 금고에서 사라진 엄청난 보석들을 찾아달라는 것이 주된 의뢰 내용입니다.
경찰에게도 보석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던 철강 재벌은 귄터에게 엄청난 사례를 약속합니다.
하지만 수사를 진행할수록 귄터는 보석보다 더 중요한 뭔가가 사건의 이면에 있으며,
그 ‘뭔가’의 주변에 독일 권력의 상층부가 깊이 관련돼있음을 알아내게 됩니다.
당연히 그의 수사는 권력기관의 레이더에 걸려들게 되고,
게슈타포는 물론이고 폭력집단과 암살자까지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습니다.
‘3월의 제비꽃’의 매력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앞서 충분히 언급했던) 주인공 베른하르트 귄터의 캐릭터이고,
또 하나는 불온하고 공포로 가득 찬 당시 독일의 분위기에 대한 리얼한 묘사입니다.
특히 생소하면서도 두려움마저 자아내는 1930년대 독일에 대한 묘사는 압권입니다.
약간의 화장만 해도 무조건 창녀로 취급되는 세상,
누군가 위대한 독일을 찬양하는 노래를 선창하면 당연히 따라 불러야 하는 세상,
가족사진 대신 ‘2+1 기획상품’으로 판매된 독재자의 사진을 거실에 걸어놓아야 하는 세상 등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나 어울릴 것 같은 코미디 같은 설정들이 수시로 묘사되지만,
그것은 엄연히 히틀러와 나치가 지배하고 있던 1930년대 독일의 현실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로랑 비네의 ‘HHhH’(황금가지)가 나치 권력층 내부를 상세히 묘사했다면,
‘3월의 제비꽃’은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거리의 숨 막히는 일상에 주력함으로써
장르물 이상의 역사소설로서의 미덕도 함께 갖춘 작품입니다.
번역하신 박진세 님께서 “독일 내 좌파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귄터의 시각을 통해
당시 독일 시민이 느꼈을 공포와 타성과 무지에서 기인한 나치에의 묵종을
체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라고 평한 것도 이런 맥락일 것입니다.
두 가지 매력을 이야기했으니 이젠 두 가지 아쉬운 점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우선, 선명하게 정리되지 않는 미스터리 구도입니다.
귄터의 탐문은 그 방법이나 순서 모두 너무 정직할 정도로 일직선입니다.
물론 수사 시작 단계에서 그가 손에 쥔 정보가 너무 빈약했고,
그 때문에 기초적인 탐문이 불가피했다는 점은 이해되지만,
그 과정이 ‘A를 만나 B얘기를 듣고, B를 만나 C의 정보를 얻고, C를 만나...’ 등으로 전개되다 보니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정말 중요한 인물은 언제 나오나?”라는 불만이 터질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습득한 정보와 추리의 결과를 독자에게 알리는 과정 역시 그다지 친절하지 않아서
독자에 따라 ‘메모하며 읽기’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렇듯 선명하지 않거나 불친절한 미스터리 구도는 엔딩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못하지만, 조금 찜찜한 기분으로 마지막 장을 덮었다는 정도만 언급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는 -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 과도한 직유와 은유가 섞인 문장들입니다.
초중반까지만 해도 작가의 비유는 위트도 느껴지고, 촌철살인의 매력으로 읽히곤 했지만,
거의 모든 사물과 풍경과 인물을 ‘지칠 줄 모르는 직유와 은유’로 수식한 문장들은
후반부로 갈수록 피로감만 전해줄 뿐, 굳이 그 의미를 되새기고 싶지 않게 됐습니다.
이 과도한 비유를 ‘3월의 제비꽃’의 최고 미덕으로 꼽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반쯤만 줄였다면 좀더 편한 책읽기가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번역하신 박진세 님의 후기를 보니 베른하르트 귄터 시리즈는 모두 11편이 나왔다고 합니다.
3부까지 ‘베를린 누아르’라는 이름으로 출간됐고, 이어 8편이 더 나왔는데,
7부까지는 나치 치하를 배경으로, 8부부터는 냉전시대가 배경이라고 합니다.
베른하르트 귄터의 캐릭터만 보면 그만한 시리즈가 나올 정도로 매력적이란 게 이해되지만,
미스터리로서의 미덕이라든가 복잡하게 꼬인 문장들을 떠올려보면
후속작들을 계속 읽어야 될지 고민되는 게 사실입니다.
과거의 경험(?)으로 비춰보아 분명 두 번째 베를린 누아르까지는 읽을 가능성이 높긴 한데,
첫 작품에서 느낀 아쉬움들이 조금만 줄어든다면
아마 11부까지의 완간을 응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