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행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모리미 토미히코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읽은 독자라면

이 작품의 제목만 보고도 작가 특유의 밤의 판타지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목부터 인상적이던 전작이 유쾌한 판타지 멜로 소동극을 그려냈다면,

야행은 그 제목만으로도 내밀하거나 신산하거나 또는 마음을 옥죄는 서사를 연상시킵니다.

 

야행은 판타지를 넘어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10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 옛 지인들이 털어놓는 기이한 경험담 속에는

도저히 현실에서는 겪을 수 없는 현상과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집 나간 아내를 찾아 나선 곳에서 만난 아내와 똑같이 생긴 여자,

여행 중에 만난 관상가 할머니로부터 들은 죽음에 대한 예언,

한겨울 늦은 밤의 온천여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동행들,

기차 안에서 만난 기묘한 분위기의 여고생과 스님,

눈밭에서, 터널 앞에서, 무인기차역에서 연이어 목격되는 하얀 옷의 여인들,

설국이나 다름없는 광활한 공터에서 밤의 적막을 깨며 홀로 불타오르던 집 등이 그것입니다.

 

전부 화자가 다른 제각각의 이야기지만, 이 경험담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두 기차나 자동차나 전차를 이용한 깊은 밤의 여행과 관련이 있고,

화자들은 카페, 호텔, 화랑 등에서 불쾌함과 그리움을 자극하는 묘한 동판화를 목격하게 되며,

갑자기 누군가를 만나거나, 갑자기 누군가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사건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괴담에 가까운 이 경험담들에는 공포와는 거리가 먼,

아니, 오히려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애잔함이나 회한이 더 짙게 깔려있습니다.

집 나간 아내를 만나러 갔다가 아내를 닮은 여자를 만나 혼란을 겪게 된 화자는

그 덕분에 아내와 함께 보낸 시간들, 아내와 함께 했던 밤기차 여행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밤의 설국을 만끽하기 위해 일부러 고른 야행열차에서 특별한 경험을 겪은 화자는

기차에서 내린 직후부터 오랫동안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과 조우하게 됩니다.

물론 때론 섬뜩한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들도 있지만,

큰 그림 자체는 애수(哀愁)’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는 수시로 밤의 밑바닥이라는 표현을 동원하는데,

이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명작 설국에서 따온 표현으로,

야행이라는 제목에 담긴, 작가가 그리고 싶었던 정서의 핵심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 그들은 단순히 철로나 도로를 통해 밤길을 달렸던 것이 아니라

내밀한 상처나 드러낼 수 없는 추억을 간직한 채

오직 자기 자신만의 여행을 하듯 밤의 밑바닥을 숨죽인 채 지나갔고,

거기에서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만남과 헤어짐을 겪었다는 뜻입니다.

 

독자에 따라 여러 반응이 나올 수 있는 작품입니다.

온다 리쿠의 아련한 판타지를 떠올리는 독자도 있을 것이고,

맥락을 따라잡기 힘든 연이은 비현실적 상황에 당황하는 독자도 있을 것입니다.

화자들의 경험은 논리적으로는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전개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던 각각의 경험담들이

마지막 챕터에 이르러 예상치 못한 반전과 함께 하나로 수렴되는 대목에서는

대부분 뒤통수를 제대로 한방 맞았다는 느낌을 공유하게 됩니다.

물론 이 대목에서조차 여전히 이야기는 현실성을 배제한 채 전개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호불호가 극명히 갈릴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런 이야기를 구상한 작가의 기발하고 무한한 상상력은 거의 경외심을 일으킬 정도지만,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시즌2처럼 유쾌한 판타지를 기대했던 탓인지,

조금은 어렵고 난해한 서사로 포장된 야행은 당혹스런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 무리해서라도 두 번째 읽기를 강행하곤 했는데,

야행은 잠시 접어놓았다가 겨울이 맹위를 떨칠 내년 2월쯤 다시 읽어볼 생각입니다.

인상 깊었던 수록작 세 번째 밤. 쓰가루2월을 배경으로 한 탓이기도 하고,

왠지 한겨울 심야에 다시 읽는다면 야행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족으로,

모리미 토미히코 특유의 화려하고 색감 있는 문장들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야행은 소설보다는 영상에 더 어울리는 텍스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야행기묘한 이야기같은 옴니버스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소설만의 디테일한 맛과 여운은 잃을지 몰라도,

대중의 공감을 사는 힘은 훨씬 더 강해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 각자의 추억과 상처를 간직한 채 밤의 밑바닥을 떠돌았던 등장인물들의 애틋함이

좀더 확연하게 마음에 다가올 수 있을 것 같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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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그림자 모삼과 무즈선의 사건파일
마옌난 지음, 류정정 옮김 / 몽실북스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의 전작인 사신의 술래잡기’(2016)를 읽고 쓴 서평을 찾아보니 독특한 설정과 기발한 캐릭터, 흥미로운 연작 구성”, “후속작을 안 볼 수 없게 만들었다.”는 호평이 눈에 띄었습니다. 나름 매력적인 작품으로 기억에 남아서 후속작인 사신의 그림자가 나오자마자 찾아 읽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형님보다 많이 모자란 동생이랄까요? 천재적인 콤비 모삼과 무즈선이 악의 응집체인 L과 벌이는 사투가 전편에 이어 계속되지만 그들 간의 정면 대결을 그린 마지막 수록작 심연의 천사외에는 전작과 크게 다르지 않은 동어반복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약혼녀를 L에게 잃고 본인 역시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던 천재 프로파일러 모삼과 역시 천재적인 법의학자로 모삼과 함께 L의 체포에 모든 것을 건 무즈선. 전작에서 L은 두 사람에게 자신이 지정한 살인사건을 정해진 시간 안에 해결하라고 요구하고, 그러지 못할 경우 3일 이내에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겠다며 황당한 게임을 지시합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전대미문의 토막살해범의 협박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은 L에 의해 새로운 희생자가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사건해결에 전념합니다.

 

전작에서는 두 콤비의 긴박하고 피를 말리는 사건해결 과정이 꽤나 매력적으로 그려졌습니다. 언제 끝날지조차 모르는 게임은 계속 됐고, L의 문제는 점점 난이도가 높아졌습니다. 아마 그런 탓에 후속작을 안 볼 수 없게 만들었다.”는 호평을 했겠지만, 후속작에서 그려진 게임은 전작보다 느슨하고 긴장감도 떨어졌으며, L의 존재감도 어딘가 희미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기대됐던 모삼-무즈선과 L의 정면대결이 그려지지 않은 채 엇비슷한 내용이 반복돼서 2/3정도쯤에서는 중도포기할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물론 마지막 수록작에서 제법 큰 사이즈의 이야기를 통해 L과의 정면대결을 그리고 있지만, 어쩐지 허겁지겁 또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흉내낸 듯한 상투적인 마무리 때문에 지금까지 읽어온 이야기들의 무게감까지 가볍게 만든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름 신선했던 작품의 후속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쉬움은 더 커질 수밖에 없는데, 불필요한 디테일로 모삼과 무즈선의 천재적 지식을 과시하려는 대목들이나, 별로 대단치 않거나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억지처럼 보인 프로파일링에 주변인들이 열광하는 모습은 전작보다 더 과장되고 심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프로파일러 캐릭터가 소개되기 시작한 초창기의 아마추어 식 접근법이랄까요? 여기에 덧붙여 앞서 언급한 엇비슷한 사건들 때문에 맥빠지는 후속작이 됐다는 생각입니다.

내용만큼 아쉬웠던 것은 전작보다 서투른 느낌을 준 번역과 곳곳에서 발견된 오타들입니다. 직역처럼 보이는 문장도 있었고, 형식에 맞지 않는 문장들도 간간히 보였습니다. 전작에서는 거의 못 느꼈던 오타로 인한 불편함은 좀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마지막 수록작의 엔딩을 보면 이후로 사신 시리즈가 더 나올 것 같진 않지만,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형님보다 나은 동생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작품이었습니다. 만일 모삼과 무즈선을 앞세운 새로운 시리즈가 나온다면 적어도 사신의 그림자보다는 성장한 서사로 채워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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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인간
요미사카 유지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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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번역가 김은모 님의 블로그(http://blog.naver.com/kemshadow/221012340340)에서 본

이 책이 국내출간 될 줄이야!!’라는 포스팅 덕분에 알게 된 작품입니다.

제목부터 제 취향과는 거리가 좀 먼 작품이지만,

내용은 흥미진진하고 진상도 특이하지만, 그 특이함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데요.

독특한 본격 미스터리를 접하고 싶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라는 추천사를 보곤

갑자기 호기심이 급 발동하여 읽어보게 됐습니다.

 

● ● ●

 

전기인간이라고 들어 봤어?”

이렇게 시작하는 본 작품은 일본의 한 지방에서 뿌리 깊게 회자되는

기괴한 도시 전설의 진상을 쫓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연속되는 의문사.

경찰들도 포기한 이 기묘한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잡지사의 르포라이터는

특집 기사를 위해서 이 지역의 취재를 시작한다.

죽은 사람들의 가족, 학교 등을 찾아다니면서 탐문을 하던 그는

전기인간의 발생지로 여겨지는 지하호 근처에서 정체불명의 초등학교 소년을 만나고,

그 아이와 함께 어두운 지하호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과연, 이들은 사건의 진상을 밝혀 낼 수 있을까? 과연, ‘전기인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전기인간을 가장해서 연쇄 살인의 완전 범죄를 꿈꾸는 것이었을까?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그 이름을 말하면 나타난다.

사람의 생각을 읽는다.

도체(導體)를 타고 이동한다.

오래 전 군대에 의해 만들어졌다.

전기로 아무런 흔적 없이 사람을 죽인다.

 

이것이 토오미 시에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괴담의 주인공 전기인간의 특징입니다.

괴이라는 것은 미쓰다 신조의 작품에서 그려진 것처럼

시대를 불문하고 어딘가 토속적이거나 혼령 같은 모습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전기인간이라는 컨셉은 괴이 중에서도 정말 독특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호러, 괴이, SF, 미스터리 등 다양한 장르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한 여대생의 민속학 리포트 취재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여대생의 애인, 형사, 민속학 교수, 르포라이터, 추리소설가 등이 차례대로 등장하면서

점차 전기인간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들은 언제, 왜 지어진 것인지 모르는,

하지만 전기인간과 관련 있어 보이는 지하시설에 접근하게 되고,

, 그곳을 늘 배회하는 의문의 초등학생과 마주하게 됩니다.

다들 전기인간이라는 괴이에 대해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진 채,

공포심과 호기심이 뒤섞인 기이한 모험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계속 머릿속에 미쓰다 신조의 노조키메작자미상이 떠올랐습니다.

성격은 분명 다른 작품들이지만 왠지 닮은꼴의 서사를 구사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써둔 두 작품의 서평을 읽어보니 전기인간과는 사뭇 다르긴 하지만,

괴이라는 것 자체가 받아들이는 사람의 주관과 사고에 의해

정의되고, 변질되고, 존재감을 획득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논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스터리 외에 전기인간에서 흥미롭게 읽히는 대목은

민속학 교수의 도시괴담 및 괴이에 대한 해박한 강의

중반 이후로 전기인간의 진실을 파헤치는 르포라이터와 추리소설가의 논쟁입니다.

그야말로 괴이에 대한 다채로운 의견의 장이랄까요?

 

번역가 김은모 님의 서평대로 이 작품의 결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기작또는 졸작으로 호불호가 극명히 갈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발간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라고 블로그에 글을 남기신 것 같은데,

어쨌든 엄청 색다른 간식을 먹은 느낌 정도는 충분히 맛보실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라면, 너무 큰 기대와 예상치 못한 반전, 충격적인 결말 등을 기대하기보다

독특한 일본괴담 한 편 읽어보겠다는 정도의 소소한 욕심으로 이 작품을 대하셔야

의외의 재미와 맛을 느끼실 수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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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비너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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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줄거리 정리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작품입니다.

이야기 자체가 방대한 탓도 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행방을 감춘 동생 찾기를 중심으로

쇠락한 명문가의 지저분한 유산상속전, 윤리적 문제를 내포한 위험한 뇌 연구,

오래 전 의문사한 어머니의 비밀 등 다양한 서사가 한데 엮여 있어서

어디서부터 줄거리를 정리해야할지 곤란한 지경이기 때문입니다.

 

위험한 비너스는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심지어 띠지나 뒷표지조차 읽지 않고 바로 본 내용부터 시작했는데,

고백하자면, 이 작품이 과학의 영역을 다룬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아마 라플라스의 마녀처럼 애초에 목록에서 제외시켰을 것입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작품마다 편차가 큰 편이라

신작이 나올 때마다 주위의 평을 참고한 뒤에야 읽을지 여부를 결정하곤 했지만,

특히 과학이나 SF를 소재로 삼은 경우에는 워낙 저와 코드가 맞지 않아서

어지간히 재미있다는 소문이 돌기 전에는 다시는 읽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사전 정보가 없었다고 해도 이 작품을 끝까지 읽게 된 이유는,

거의 절반 이상의 분량이 지나도록 이 작품의 핵심 미스터리가 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간혹 프랙털 도형이나 서번트 증후군 등 수상한(?) 개념들이 언급되긴 했지만

여전히 이야기의 중심은 사라진 동생의 미스터리와 지저분한 유산상속전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또 다른 목표,

, 어머니의 죽음의 비밀이라든가 유상상속전을 벌이는 쇠락한 명문가와의 갈등,

그리고 동생의 아내라 자처한 여인에 대한 부도덕한 호기심에 쏠려 있어서

이 이야기의 끝이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 탓에 어느 새 절반 넘게 페이지가 넘어가버렸고,

드디어 히가시노 게이고가 하려던 과학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에는

이대로 덮기엔 읽어온 게 아까워서라도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결론은?

역시 히가시노의 이과적 상상력은 저와는 절대 맞지 않는다, 였습니다.

후천성 서번트 증후군, 프랙털 도형, 울람 나선, 리만 가설, 뇌 과학 등 난해한 소재들이

막판에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면서 꽤 심오한 주제를 피력하고 있는데,

동생 찾기, 유산상속전, 어머니의 비밀 등 다양한 서사들의 조합이

어떻게 이런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밝혀진 모든 사건의 진상은 왠지 억지로 끼워 맞춘느낌이 강했고,

범인의 수법이나 목표 모두 허술하거나 공허하게 읽혔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는 왜 이런 제목이 붙었나, 궁금했는데,

번역하신 양윤옥 님의 친절한 설명을 읽고도 저의 몰이해는 여전했습니다.

 

인위적으로 천재를 만들어내려는 인류의 꿈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미의 여신 비너스를 동경하는 것처럼 매혹적이고도 위험한 일이다.

 

뭐랄까, ‘꿈보다 해몽같은 느낌이랄까요?

그런데, 히가시노가 정말 이런 취지에서 위험한 비너스라는 제목을 붙였다면

그건 과욕이거나 오버센스거나 자만심(?)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최근에 읽은 히가시노의 작품이 기린의 날개였는데,

아무래도 제겐 미스터리와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가 잘 배합된 가가 형사 시리즈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백야행’, ‘방황하는 칼날처럼

눈물을 쏙 빼놓거나 마음을 후벼파는 이야기가 제격이란 생각입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라플라스의 마녀를 볼 때마다 잠시 마음이 흔들리곤 했는데,

역시 히가시노의 과학책은 제겐 무리한 도전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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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바람 진구 시리즈 4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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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기 작가의 투톱 주인공 중 한 명인 진구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입니다.

또 다른 주인공 어둠의 변호사고진도 독특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지만,

진구는 선과 악, 정의와 불의, 법과 무법을 오가는 자유로운 영혼(?)이란 점에서

어느 장르물의 주인공과도 차별화되는 특이한 인물입니다.

진구 시리즈의 첫 작품인 순서의 문제를 읽은 뒤에 쓴 서평을 일부 인용하면,

 

정의감으로 뭉친 명탐정인가 하면, 법을 우습게 여기는 불량시민의 면모도 있고,

세상을 달관한 백수인가 하면, 돈에 관한 한 절대 뒤지지 않는 욕심도 지니고 있다.

 

심지어 출판사의 책 소개글에서는 진구를

법망의 허점을 이용하는 데 일말의 주저도 없는 소시오패스라고까지 설명합니다.

말 그대로 정체성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이 어려운 캐릭터입니다.

 

모래바람은 진구의 과거와 현재를 다룬 작품입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조용한 수학 천재 중학생이던 진구를

명탐정이자 소시오패스라는 극단적인 양면성을 지닌 인물로 변질시킨 과거의 사건과

그 사건이 우연과 필연을 거쳐 10여 년 후인 현재 시점에 일으킨 또 하나의 사건을 다룹니다.

앞의 이야기가 진구의 비극적인 프리퀄이라면,

뒤의 이야기는 그 프리퀄로부터 파생된 안타까운 현재진행형 비극입니다.

그리고 두 이야기에는 과거 진구의 중학교 친구이자 선의의 라이벌이며

로맨스의 분위기까지 풍겼던 유연부라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 ● ●

 

실크로드 조사단인 아버지들을 따라 험한 사막 원정에 참여했던 중학생 진구와 연부.

하지만 살인적인 모래바람 속에 진구와 연부의 아버지는 참혹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현재.

진구는 창투사 회장으로부터 망나니 아들의 연인을 뒷조사해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그 연인은 다름 아닌 연부였고, 진구는 고민에 빠집니다.

진구에게 있어 연부는 철저하게 봉인했던, 그래서 다시는 꺼내보고 싶지 않은 과거이며,

모래바람 속에서 죽어간 아버지들의 죽음의 비밀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연부가 연루된 살인사건이 터지면서 진구는 운명처럼 연부와 조우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구는 곧 그 살인사건이 모래바람 속 비극의 연장임을 깨닫게 됩니다.

 

● ● ●

 

진구와 연부가 흑풍이라 불리는 끔찍한 모래바람을 마주했던 곳은 타클라마칸 사막입니다.

진구가 아버지는 물론 연부와 수학을, 그리고 예정돼있던 안온한 삶을 잃어버린 곳이

하필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다는 뜻의 타클라마칸이란 점은 비극적인 아이러니입니다.

 

모래바람은 진구로 하여금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만들었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게 만듦으로써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악몽에 가뒀습니다.

상실과 악몽 속에서 성장한 진구가 극단적인 양면성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운명처럼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었던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10여년 만에 엉뚱하게도 뒷조사의 대상으로 재회한 연부 덕분에

진구는 단단히 봉인해온 과거를 스스로 해제시켜야 하는 얄궂은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과거와 현재의 사건은 연부라는 접점 외에는 전혀 별개처럼 보이지만,

작가는 약간의 억지와 약간의 신파 코드를 동원하여 두 이야기를 연결시킵니다.

 

창투사 회장과 그 아들, 그리고 연부가 연루된 살인사건은 전형적인 미스터리인데 반해,

진구와 연부를 비극에 빠뜨린 아버지들의 죽음의 비밀은 일종의 고해성사처럼 전개됩니다.

현재 사건의 미스터리는 그리 새롭거나 충격적이지 않지만,

과거에 대한 고해성사는 첫 맛은 담담하지만 곱씹을수록 씁쓸해지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팩트 자체도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자아내지만,

한 사람의 삶이 찰나의 순간에 얼마나 극단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작가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일으킨 인간의 탐욕과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해소될 수 없는 악연의 안타까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무래도 비극적인 프리퀄을 주제로 한 작품이라

이전의 진구 시리즈와 달리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착잡한 기분이 더 강하게 남습니다.

특히 마지막 페이지에서 묘사된 진구와 연부의 만남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질 두 사람의 서글픈 악연을 예고하는 것 같아

한편으론 기대감을, 또 한편으론 안쓰러움을 느끼게 만듭니다.

다음의 진구 시리즈에 또다시 연부가 등장한다면 꽤나 센 비극이 등장할 것 같습니다.

진구에게 있어 연부는 결국은 어떤 식으로든 봉인돼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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