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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모리미 토미히코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읽은 독자라면
이 작품의 제목만 보고도 작가 특유의 ‘밤의 판타지’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목부터 인상적이던 전작이 유쾌한 판타지 멜로 소동극을 그려냈다면,
‘야행’은 그 제목만으로도 내밀하거나 신산하거나 또는 마음을 옥죄는 서사를 연상시킵니다.
‘야행’은 판타지를 넘어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10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 옛 지인들이 털어놓는 기이한 경험담 속에는
도저히 현실에서는 겪을 수 없는 현상과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집 나간 아내를 찾아 나선 곳에서 만난 아내와 똑같이 생긴 여자,
여행 중에 만난 관상가 할머니로부터 들은 ‘죽음’에 대한 예언,
한겨울 늦은 밤의 온천여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동행들,
기차 안에서 만난 기묘한 분위기의 여고생과 스님,
눈밭에서, 터널 앞에서, 무인기차역에서 연이어 목격되는 하얀 옷의 여인들,
설국이나 다름없는 광활한 공터에서 밤의 적막을 깨며 홀로 불타오르던 집 등이 그것입니다.
전부 화자가 다른 제각각의 이야기지만, 이 경험담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두 기차나 자동차나 전차를 이용한 깊은 밤의 여행과 관련이 있고,
화자들은 카페, 호텔, 화랑 등에서 불쾌함과 그리움을 자극하는 묘한 동판화를 목격하게 되며,
갑자기 ‘누군가’를 만나거나, 갑자기 ‘누군가’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사건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괴담에 가까운 이 경험담들에는 공포와는 거리가 먼,
아니, 오히려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애잔함이나 회한이 더 짙게 깔려있습니다.
집 나간 아내를 만나러 갔다가 아내를 닮은 여자를 만나 혼란을 겪게 된 화자는
그 덕분에 아내와 함께 보낸 시간들, 아내와 함께 했던 밤기차 여행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밤의 설국을 만끽하기 위해 일부러 고른 야행열차에서 특별한 경험을 겪은 화자는
기차에서 내린 직후부터 오랫동안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과 조우하게 됩니다.
물론 때론 섬뜩한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들도 있지만,
큰 그림 자체는 ‘애수(哀愁)’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는 수시로 ‘밤의 밑바닥’이라는 표현을 동원하는데,
이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명작 ‘설국’에서 따온 표현으로,
‘야행’이라는 제목에 담긴, 작가가 그리고 싶었던 정서의 핵심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단순히 철로나 도로를 통해 밤길을 달렸던 것이 아니라
내밀한 상처나 드러낼 수 없는 추억을 간직한 채
오직 자기 자신만의 여행을 하듯 밤의 밑바닥을 숨죽인 채 지나갔고,
거기에서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만남과 헤어짐을 겪었다는 뜻입니다.
독자에 따라 여러 반응이 나올 수 있는 작품입니다.
온다 리쿠의 아련한 판타지를 떠올리는 독자도 있을 것이고,
맥락을 따라잡기 힘든 연이은 비현실적 상황에 당황하는 독자도 있을 것입니다.
화자들의 경험은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전개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던 각각의 경험담들이
마지막 챕터에 이르러 예상치 못한 반전과 함께 하나로 수렴되는 대목에서는
대부분 뒤통수를 제대로 한방 맞았다는 느낌을 공유하게 됩니다.
물론 이 대목에서조차 여전히 이야기는 현실성을 배제한 채 전개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호불호가 극명히 갈릴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런 이야기를 구상한 작가의 기발하고 무한한 상상력은 거의 경외심을 일으킬 정도지만,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시즌2처럼 유쾌한 판타지를 기대했던 탓인지,
조금은 어렵고 난해한 서사로 포장된 ‘야행’은 당혹스런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 무리해서라도 두 번째 읽기를 강행하곤 했는데,
‘야행’은 잠시 접어놓았다가 겨울이 맹위를 떨칠 내년 2월쯤 다시 읽어볼 생각입니다.
인상 깊었던 수록작 ‘세 번째 밤. 쓰가루’가 2월을 배경으로 한 탓이기도 하고,
왠지 한겨울 심야에 다시 읽는다면 ‘야행’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족으로,
모리미 토미히코 특유의 화려하고 색감 있는 문장들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야행’은 소설보다는 영상에 더 어울리는 텍스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야행’이 ‘기묘한 이야기’ 같은 옴니버스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소설만의 디테일한 맛과 여운은 잃을지 몰라도,
대중의 공감을 사는 힘은 훨씬 더 강해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즉, 각자의 추억과 상처를 간직한 채 ‘밤의 밑바닥’을 떠돌았던 등장인물들의 애틋함이
좀더 확연하게 마음에 다가올 수 있을 것 같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