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페닉스 - 죽을 수 없는 남자
디온 메이어 지음, 서효령 옮김 / artenoir(아르테누아르) / 2017년 5월
평점 :
디온 메이어는 ‘오리온’, ‘악마의 산’을 통해 익숙해진 남아공의 스릴러 작가입니다.
과거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의 잔재, 월드컵 개최 덕분에 각인된 현대적인 이미지,
그리고 ‘역시 그래도 아프리카의 나라’라는 원시성 혹은 야성의 기운 등
남아공에 대한 인식은 제겐 여전히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요소들의 복합체입니다.
앞서 읽은 디온 메이어의 작품들은 남아공의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저변에 깔아놓았는데,
‘페닉스’ 역시 두 개의 사건 - 은행강도와 연쇄살인 – 속에
남아공의 해결되지 않은 정치적, 사회적, 인종적 숙제들을 녹여놓은 작품입니다.
‘페닉스’가 눈길을 끌었던 가장 큰 이유는
디온 메이어의 대표 캐릭터인 형사 베니 그리설의 프리퀄 스토리이면서,
그의 멘토인 맷 주버트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소식 때문이었습니다.
가정까지 파괴할 정도로 대책 없는 알코올 중독자인 베니 그리설의 전사(前史)가 궁금했고,
그런 ‘문제 형사’를 훌륭히 키워낸 멘토가 누군지도 궁금했는데,
예상과 달리 베니 그리설의 멘토 역시 꽤나 문제적 캐릭터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맷 주버트는 경찰 동료이자 아내였던 라라가 임무수행 중 피살된 뒤로
자살충동에 시달리며 폐허와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34살이란 나이에 비만을 비롯한 온갖 성인병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지독한 헤비 스모커로 언제 어디서든 담배를 입에 물고 사는 인물입니다.
‘오리온’의 주인공 판 헤이르던이 극심한 분노조절장애를 겪는 초보 사립탐정이었고,
‘악마의 산’의 주인공 베니 그리설이 앞서 언급한대로 최악의 알코올 중독자인 걸 보면
작가가 주인공 캐릭터를 설정하는 면에서 꽤나 악취미를 지닌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튼..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해보면,
맷은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을 맡음과 동시에 상사의 지시로 심리 상담까지 받게 되는데
사건은 미궁을 헤맬 뿐이고, 심리 상담은 연애감정까지 뒤섞이면서 그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어렵게 피살자들 간의 공통점을 찾아낸 맷은 끝내 범인을 특정하게 되지만
그가 찾아낸 범인의 범행 동기는 너무나 참혹하고 비극적인 과거에 기인하고 있는 탓에
맷은 자신이 찾아낸 연쇄살인의 진실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앞서 읽은 디온 메이어의 두 작품에 대한 저의 평은 모두 별 4개였습니다.
풀어서 말하자면, 재미는 있는데, 확 잡아끄는 매력은 부족했다는 뜻입니다.
‘페닉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별 0.5개가 더 줄어든 이유는
구성이 너무 단조롭고, 형사로서의 맷의 능력과 매력이 기대 이하였으며,
마지막에 밝혀진 사건의 진실이 일부는 억지, 일부는 상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460페이지의 분량임에도, 대부분의 내용은 연이어 벌어지는 사건 묘사에 할애됩니다.
그러다가 엔딩을 얼마 안 남겨놓고 정말 사소한 곳에서 결정적 단서를 찾아냅니다.
(나중에 아닌 것으로 밝혀지더라도) 극적 긴장감을 유발할 만한 유력한 용의자도 없었고,
맷의 수사를 위기로 몰고 갈만한 경찰 내부의 갈등이나 알력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이야기가 업다운 없이 평탄하게 흘러가다 마지막 한 방에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사건은 계속 벌어지지만, 맷과 형사들은 현장을 조사하거나 기자회견장에 나타날 뿐입니다.
단서도 없고, 희생자 간의 연관성도 찾지 못하니 맷이 추리할 여지가 없습니다.
오히려 맷은 다이어트를 위해 수영장을 가고, 심리상담가와의 연애를 꿈꾸고,
죽은 아내 라라의 악몽에 시달리거나, 금연에 대해 고민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물론 유족들을 탐문하면서 미약한 단서라도 찾기 위해 애를 쓰지만
그게 형사로서 맷이 한 일의 전부입니다.
마지막에 드러난 진실에 관해서는 스포일러라 자세한 언급은 안 하겠지만,
‘아, 그랬구나!’라는 감탄사와는 거리가 먼 ‘반전을 위한 반전’이라는 느낌밖에 주지 못했고,
좀 안이해 보일 정도로 상투적인 과거사를 설정한 탓에
독자들이 흥분할 여지를 작가 스스로 감소시켰다는 정도로만 설명하겠습니다.
더불어, 나름 기대했던 베니 그리설의 프리퀄 역시 “그는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였다.” 외엔
요양원에서 치료받는 내용과 소소한 은행강도사건을 너무 쉽게 해결한 것이 전부입니다.
멘토인 맷 주버트와의 인연도 피상적인 만남 외엔 특별히 그려진 내용이 없어 아쉬웠습니다.
전작에서 꽤 괜찮았던 디온 메이어의 필력이 ‘페닉스’에서 발휘되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는데,
제 나름대로 두 가지 정도 추정을 해볼 수 있었습니다.
비교적 합리적인 첫 번째 추정은, ‘페닉스’가 디온 메이어의 데뷔작이란 점입니다.
그의 대표 캐릭터 베니 그리설의 프리퀄이라고 해서 당연히 뒤늦게 출간된 줄 알았는데,
책날개에 소개된 작가의 이력을 보니 ‘페닉스’가 첫 장편이더군요.
그런 점에서 보면, 조금은 허술한 구성과 캐릭터 설정이 이해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약간 억측에 가까운 두 번째 추정은 번역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디온 메이어의 작품은 ‘페닉스’까지 모두 다섯 권이 출간됐는데 각 작품의 번역자를 보면,
오리온-강주헌, 프로테우스-이승재, 악마의 산/13시간-송섬별, 페닉스-서효령입니다.
같은 원작자의 작품인데 (출판사도 같은 곳이고) 매번 번역자가 달라진다면
아무래도 원작자 특유의 문장의 맛이 일관성을 얻기 힘들지 않을까요?
또, 디온 메이어가 한번 읽어선 이해가 쉽지 않은 문학성 강한 문장들을 종종 구사하긴 해도,
앞선 작품들에서는 큰 거부감이나 난독의 경우가 드물었지만,
‘페닉스’에서는 분명 거듭 읽어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 대목들이 자주 등장했습니다.
제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이든, 작품 자체의 문제 때문이든,
기다렸던 디온 메이어의 신작 치곤 아쉬움이 많이 남은 작품이었습니다.
꼭 읽어야지 하면서도 방치해뒀던 ‘프로테우스’와 ‘13시간’을 통해
‘페닉스’의 아쉬움을 털어내도록 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