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된 시간
사쿠 다쓰키 지음, 이수미 옮김 / 몽실북스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2016년에 이어 올해도 일본 미스터리가 대체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그런지

신간이 나올 때마다 이번에는하며 안쓰러운(?) 기대감을 갖게 됩니다.

 

조작된 시간의 원제는 사망추정시각(死亡推定時刻)’인데,

번역제목과 원제에서 연상되는 대로 피살자의 사망추정시각이 논란의 중심에 있는 법조물로,

원죄(冤罪,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의 문제, 각 사법주체들의 판이한 정의감 등

꽤 매력적인 코드들이 다양하게 버무려진 작품입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때보다 조금은 더 큰 기대감을 갖고 첫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 ● ●

 

후지산 기슭 대저택의 주인 와타나베 쓰네조의 딸이 유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유괴범은 몸값 1억 엔을 요구했지만, 끝내 딸은 시신이 되어 돌아온다.

와타나베는 유괴범 체포를 위해 몸값을 전달하지 말 것을 지시한 경찰 수뇌부에게 분노한다.

그는 특히 딸의 사망추정시각이 몸값 수수 실패 이전이었는지 이후였는지에 집착한다.

몸값 수수 실패로 딸이 죽었다면 경찰의 비리를 까발려서라도 복수하겠다는 심산인 것.

한편 용의자로 체포된 고바야시 쇼지는 범행을 부인하지만 가혹한 취조에 시달리게 된다.

자신들을 향한 와타나베의 분노에 겁을 먹은 경찰 수뇌부는

고바야시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것은 물론 사망추정시각까지 조작할 계획을 세운다.

무기력한 변호인 탓에 궁지에 몰린 고바야시 앞에

가난하지만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국선변호인 가와이가 나타나면서 사건은 새 국면을 맞는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법과 정의를 다루는 이야기다보니 당연히 사법시스템 내의 선과 악이 대결구도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후반부의 주인공 격인 선한 변호사 가와이를 제외하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경찰, 검찰, 변호인, 재판관, 검시관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악인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수뇌부의 지시에 따라 사망추정시각을 비롯한 중요한 정황들을 조작하거나,

근거 없는 자신감과 빗나간 신념을 앞세워 전근대적인 범인 만들기에 혈안이 되거나,

가난한 의뢰인에게 돈만 뜯어내곤 본연의 업무를 내팽개치거나,

한 사람의 생명이 달린 재판 과정에서 대놓고 귀차니즘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때론 인물들의 캐릭터도, 그들의 행동도 지나치게 아날로그적이어서

이 작품이 2001년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 것이 맞나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비록 거친 수준이긴 해도 과학수사가 등장하는 상황이지만,

작품 속 사법시스템은 70~80년대를 연상시킬 정도로 구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구태때문에 독자들의 분노 게이지는 급상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 어딘가에서 이 모든 악습들을 일망타진할 영웅이 나타날 거라 기대하게 됩니다.

그 기대는 일부는 충족되기도 하고, 일부는 실망감만 안겨주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야기는 예측 가능한 해피엔딩으로만 이어지진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전개가 작가가 의도한 이 작품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소설 집필을 위해 형사소송법을 읽다가 법의 세계에 빠져든 끝에

결국 법조인이 된 현직 변호사가 쓴 정통 법조 미스터리입니다.

이런 독특한 이력 탓인지 모르겠지만, 소재나 이야기 구조 모두 돌직구 같은 스타일입니다.

작가 스스로도 소설이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나 리포트에 가깝다고 할 정도인데,

어찌 보면 그 점이 미스터리 독자들에게는 가장 아쉽게 느껴지는 대목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사법시스템의 디테일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해설하는 내용이라든가

대부분 읽지 않고 그냥 넘겼던 굵은 글씨로 표시된 각종 메모나 재판 관련 서류들,

, 별 갈등 없이 자신의 역할에만 충실한 캐릭터들은 소설적 재미와 거리가 먼 설정들이라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지루함을 느끼게 하는 원인입니다.

 

사망추정시각을 조작한다는 설정 자체가 너무 매력적이라서

아마 전업소설가가 이 작품을 썼다면 이야기의 굴곡도 커지고, 픽션의 재미는 배가됐겠지만,

부당하게 작동하는 사법시스템의 민낯의 리얼리티는 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재미를 기대했던 독자 입장에서는

작가의 너무 정직한 태도가 못내 아쉽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번에도 일본 미스터리에 대한 안쓰러운 기대감은 충족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 작가의 신작이 출간된다면 분명 귀가 솔깃해질 것 같긴 합니다.

다음엔 너무 돌직구만 던지지 말고, 변화구도 좀 섞인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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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증명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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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판사에서 변호사로 변신한 도진기 작가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 악마의 증명을 포함, 모두 8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각 작품마다 작가의 매력이 잘 배어있어서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지금껏 보지 못했던 도진기 작가의 숨은 관심을 엿볼 수 있어서 더욱 좋았던 작품집입니다.

 

후반에 실린 작품별 후기에서 도진기 작가는

추리와 오컬트 혹은 호러가 결합된 작품에 늘 매료되곤 한다.”라고 고백했는데,

실제로 정글의 꿈’, ‘외딴 집에서’, ‘시간의 뫼비우스’, ‘죽음이 갈라놓을 때

적잖은 수록작들이 오컬트, 호러, 판타지를 표방하고 있어서 무척 놀랐습니다.

 

특히 마지막 수록작인 죽음이 갈라놓을 때에 대해 도진기 작가는

내가 괴기 환상물을 쓰게 된 건 DNA 수준의 필연인지 모른다.”라고 설명했는데,

이 작품은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누구도 도진기 작가의 작품이라고 맞출 수 없을 정도로

호러와 오컬트에 충실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표제작 악마의 증명을 비롯 본격 추리물들도 다수 있지만,

그 작품들 역시 추리물다운 선명하고 깔끔한 엔딩 대신

어딘가 감성적이고 비논리적인 뉘앙스를 풍기며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 증거와 단서에 의한 합리적이고 명료한 결론이 아니라,

추정컨대, 진실은 이런 모습 아니었을까?”라는 식의 희망사항을 담은 엔딩의 느낌이 강합니다.

이런 류의 엔딩이 도진기 작가의 작품에서 처음 경험한 느낌은 아니지만,

호러, 오컬트, 판타지 단편들과 번갈아, 연이어 읽다 보니 또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요즘 들어 단편 읽기가 좀 부담스러워지곤 했는데,

악마의 증명여름용 장르물로 적극 추천할 수 있을 만큼 알찬 단편집이었습니다.

어디 서늘한 책 하나 없을까, 하시는 분들은 꼭 찾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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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람을 죽여라
페데리코 아사트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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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주인공 테드가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가족들을 여행 보내고 관자놀이에 총을 발사하려는 찰나, 초인종이 울린다.

자신의 이름을 린치라고 밝힌 방문자는 테드에게 달콤한 제안을 건넨다.

법망을 교묘히 피해간 인간쓰레기를 한 명씩 죽여주면 조직에서 테드를 죽여주겠다고.

가족이 받을 충격을 생각해서든 이 사회를 위해서든 그 방법이 훨씬 정의롭지 않으냐고.

자살은 중단되었고, 테드는 새로운 행동에 나선다. 바로 살인이다.

그의 첫 살인은 생각보다 수월했지만, 테드는 모든 것이 조금씩 뒤틀린 듯한 느낌을 받는다.

(출판사 책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위의 줄거리는 이 작품의 첫 챕터인 Part 1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모두 네 개의 챕터와 에필로그로 구성돼있는데,

스토리도, 구성도 워낙 파격적인 작품이라 나머지 챕터를 소개하기가 불가능한 작품입니다.

다만, 출판사가 공개한 정보를 인용하면, “1부의 일부 내용이 2부에서 변형, 반복되었다가

3부에서 완전히 부정되고 4부에 이르러 진실을 드러내는 식이다.”인데,

Part 1~2가 주인공 테드의 종잡을 수 없는 살인행적을 다루고 있다면,

Part 3은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 분노와 광기에 짓눌린 테드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으며,

Part 4는 테드가 겪은 모든 혼돈의 원인이 됐던 과거의 참혹한 기억들을 소환함으로써

어디로 튈지 예측 불가능하고 제멋대로(?)였던 길고 긴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다음 사람을 죽여라는 이야기 구조도 그렇지만

혼돈 그 자체인 주인공 테드의 삶 역시 미로처럼 설정해놓았습니다.

출구를 찾으려 할수록 점점 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는 느낌이랄까요?

작가의 의도를 대변한 듯한 작품 속 한 인물의 말은 그런 느낌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항상 미로를 매혹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미로와 관련되어 있는 것 같아요.

테드는 자기 마음이 만들어낸 미로에 갇힌 것과도 같았어요.”

 

유년 시절부터 테드는 출구 없는 미로 같은 삶을 살아왔고,

자살을 꿈꾸기 시작한 무렵부터는 스스로 만들어낸 미로 속에서 지독한 혼란과 마주합니다.

자신이 보고 만지고 느낀 것들조차 믿을 수 없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누군가를 죽였지만, 실제 자신이 죽인 것인지,

죽인 상대가 애초 자신이 노렸던 사람인지, 상대가 정말 죽긴 죽은 것인지조차 헷갈립니다.

이러니 이야기는 미로이면서 동시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제멋대로 비틀립니다.

 

작가 스스로 반전이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했지만,

사실, ‘다음 사람을 죽여라는 작품 전체가 반전으로 꽉 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인공 테드는 물론 등장인물 누구 하나 믿을 사람이 없고,

작가가 뿌린 크고 작은 단서들 역시 페이지나 챕터가 넘어갈 때마다 독자를 배신합니다.

말 그대로 도대체 어쩌려고 이렇게 끝없이 비틀고, 뒤집는 거야?”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이야기는 하염없이 미궁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래선지 이 작품은 책갈피를 끼워놓고 짬날 때마다 찔끔찔끔 읽어선 제 맛을 느낄 수 없고,

넉넉한 시간 여유를 갖고 한 번에 완독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야기의 핵심을 소개하려면 Part 3의 내용을 언급해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작품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인 Part 1~2의 김을 확 빼놓는 일이라

이렇게 어중간한 서평 밖에 올리지 못하게 됐습니다.

개인적으로는 Part 1~2까지 읽었을 때만 해도 올해 최고의 스릴러라고 확신했지만,

그 뒤로 전개가 늘어지면서 이런저런 군더더기가 붙는 바람에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더불어,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도 명료하게 설명되지 않은 부분들이 꽤 있어서

고심 끝에(?) 별 반 개를 덜어내기로 했습니다.

 

어떤 분의 서평을 보니 누구든 저랑 이야기 좀 나눠보잔 말입니다.’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아마 이 작품을 읽은 대부분의 독자가 비슷한 심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복잡다단한 심리 스릴러라서 모든 게 선명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나름 중요하게 설정된 요소들(가령, 주머니쥐의 의미)에 대해서만큼은

좀더 설득력 있는 설명이 있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처음 만난 작가지만 이렇게 독자를 쥐고 흔들만한 필력이라면

후속작에 대한 기대를 안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어떤 반전이 있는 이야기를 들고 독자를 찾아올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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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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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많이 읽었다고는 할 수 없어도 읽은 작품마다 워낙 강렬한 인상을 받은 덕분에

나름 요시다 슈이치의 팬이라 생각하고 있던 저로서는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중도포기를 고민하게 될 거라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읽기 시작한 이후 딱 절반쯤 왔을 무렵 그 고민이 시작됐고,

그래도 믿고 읽는 요시다 슈이치인데..’라는 미련 때문에

제 독서 습관을 거슬러가면서까지 번역자 이영미 님의 후기를 먼저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명확한 사건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독자는 잔잔하고 평범한 일상 풍경 하나하나가

어떻게 무엇으로 연결되는지 모른 채 책을 읽어나가게 된다.

이 작품은 스토리의 중심을 공백으로 비워둠으로써

독자에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유도하려는 것 같다.

 

그제야 제가 잘못 읽은 게 아니란 걸 확인했고,

더불어, ‘중도포기의 고민이 필연적(?)이었다는 점을 확실히 깨닫게 됐습니다.

누군가의 일상을 밀착카메라처럼 포착한 스토리는 그 디테일만큼의 지루함만 남겨줬는데,

그런 전개가 책의 절반인 270여 페이지까지 이어진 탓에

무엇을 읽고 있는 건지, 무엇에 신경 쓰며 남은 분량을 읽어야 할지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명확한 사건도 없고, 스토리의 중심을 공백으로 비워뒀다는 설명을 보고나니

그나마 갖고 있던 기대감도 사라지고 맥이 훅 빠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동시에 왜 이런 설정을 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어서 출판사 소개글까지 찾아봤더니,

사소한 사건들과 작은 결단들이 엮여서 만들어지는 미래에 관한 이야기라는 설명이 있더군요.

그럼, 이들의 이 지루한 일상들이 어떤 특별한 미래를 만든다는 뜻인가?, 라는 궁금함도 들고,

어쨌든 이미 절반을 읽은데다, 미래라는 게 어떤 모습인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에

나름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마지막 에필로그까지 마무리를 했습니다.

 

이제 실망감은 그만 털어놓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각 챕터별 주인공들의 일상이 평면적인 일기장처럼 나열됩니다.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고, 이런저런 과거를 회상하고, 이런저런 고민을 합니다.

그러다가 출판사 소개글 그대로 사소한 사건들을 겪게 되고 작은 결단을 내립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결이 아니라 기---승 같은 이야기들이 전부입니다.

 

물론 주인공들은 나름대로의 말 못할 고민과 내적 갈등을 가진 인물들이며,

시한폭탄 같은 위태로운 상황을 끌어안은 채 불안한 일상을 유지하고 있어서,

분명 어딘가에서 요시다 슈이치다운 큰 폭발을 이끌어낼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기다렸던 폭발은 없고, 애매한 지점에서 각 챕터는 마무리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각각 ’, ‘여름’, ‘가을로 명명된 세 챕터의 주인공들이

과연 마지막 챕터인 겨울에서 어떻게 조우할까, 가 관심사항이 되는데,

요시다 슈이치는 마지막 챕터에서 갑자기 80년 후의 세상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 앞선 챕터에 등장했던 인물들의 크고 작은 선택과 행동들이

80년이 지난 미래에 (좋든 나쁘든)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연히, 앞선 인물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그 후손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하지만, 선대의 선택이나 행동들이 2085년을 살아가는 후대의 삶에 미친 영향은

딱히 필연적이지도, 운명적이지도, 극적이지도 않습니다.

말하자면, “80년 전, AB를 버리고 C와 결혼해서 개망나니 D를 낳았는데,

만일 그때 AB와 결혼했더라면 개망나니 D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식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요시다 슈이치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단순하고 허망한 서사를 펼친 것은 결코 아니지만,

다 읽은 뒤에 제 머릿속에 남은 느낌은 딱 이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 이런 이야기를 위해 500페이지의 분량이 필요했을까?, 라는 반감이 저절로 들었는데,

그때 바꿨으면 좋았을 거라고 누구나 생각하지만 아무도 지금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도,

오늘 내가 보고 만 것, 하고 만 것, 못 본 척 한 것, 하려다 말았던 것, 말하려다 삼킨 것,

그런 사소한 하나하나가 쌓여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실감한다.”는 가쿠타 미쓰요의 헌사도

중편만으로도 충분히 그려낼 수 있는 덕목이었다는 점에서

자꾸만 모든 게 과잉이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지금 나의 사소한 선택 하나가 불과 5분 뒤 내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하지만 지독한 아이러니를 내포한 주제가 될 수도 있지만,

굳이 80년의 간극과 500페이지의 분량이 필요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짧게 불만만 털어놓으려던 서평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그만큼 요시다 슈이치의 신작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뜻이겠죠.

호불호가 갈릴 수 있으니 다른 분들의 서평(주로 호평입니다만..)도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에는 제가 좋아하고, 제게 익숙한 요시다 슈이치와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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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들이 식사할 시간
강지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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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재미있게 읽은 단편집입니다.

작가의 이력을 보니 8년 전 첫 단편집이 있었고 다수의 장편도 출간됐다는데

사실 (부끄럽게도) 강지영이라는 소설가는 제 기억엔 없던 이름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카페나 블로그에서 개들이 식사할 시간에 대한 글들이 자주 눈에 띄었고

고백하자면, “좋은 신인이 나왔나보다.”라는 기대감에 이 작품을 읽게 됐습니다.

 

모두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9편 모두 무척 매력적인 작품들이었지만

순한(?) 독자 입장에선 좀(또는 아주 많이?) 불편하게 읽힐 작품들이 꽤 있습니다.

 

과거의 원죄를 망각한 대가로 참혹한 지경에 이르는 남자 (개들이 식사할 시간),

세 개의 눈을 가진 소녀의 비극 (눈물),

아내의 시체 곁에 누워 뒤늦은 애정을 표현하는 남편 (거짓말),

숙주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이어가는 여자 (스틸레토),

사향나무로 둘러싸인 저택에 사는 노파의 끔찍한 비밀 (사향나무 로맨스),

거대한 성기 때문에 맺어진 두 남녀의 애틋한 인연 (허탕)

대부분의 수록작들이 충격적인 소재와 엔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도 다르고, 깊이나 수위도 다르고, 작가의 성향도 분명 다르지만

읽는 내내 편혜영의 아오이 가든이나 히라야마 유메아키의 남의 일’,

오츠이치의 ‘ZOO’ 등이 생각나곤 했습니다.

호러와 판타지, 때론 의도된 불쾌감이 끈적끈적 묻어나는 작품들이지만

각각 재미나 주제 면에서도 독자에게 강한 소구력을 발휘하는 작품들이기도 합니다.

다른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문득 연상된 이유는 무척이나 막연하고 추상적이어서

?”냐고 묻는다면 딱 부러지게 한마디로 대답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그 작품들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개들이 식사할 시간역시 매력적으로 읽을 가능성이 높다는 정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호러나 판타지를 읽으면서 굳이 주제까지 따지고 드는 편은 아니지만,

각 작품의 의미를 확인하고 싶다면 문학평론가 박인성 님의 해설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다른 평론가에 비해 꽤 쉬운 표현으로 찬찬히 설명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론가의 해설이다 보니 현학적으로 읽히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다만, 박인성 님의 해설 중 100% 공감하는 대목이 있어서 짧게 인용해보면,

 

한국 단편소설은 (중략) 개인의 내면만을 과도하게 전경화하거나

특정한 사건 없는 세계를 그저 브리콜라주적인 방식으로 그려냄으로써

플롯으로부터 손쉽게 이탈해버리곤 한다.

이것은 마치 몰입 없는 이야기야말로 문학적 수법인 것처럼 착각하는 편견 때문이기도 하다.”

(브리콜라주 : 손에 닿는 대로 아무것이나 이용하는 예술 기법)

 

최근 읽은 작품 중에 딱 이런 느낌을 받은 작품이 황정은의 단편집 아무도 아닌입니다.

(황정은의 다른 작품을 읽지 못해서 자칫 편견일 수도 있는 내용이니 양해 바랍니다)

다 읽고 수록작 별로 줄거리 정리까지 해놓고도 결국 서평을 못 쓴 작품인데,

반론할 독자가 엄청 많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슨 서평을 써야 할지 참 난감했습니다.

수록작 중 약간이라도 공감했던 작품은 누가복경정도였는데,

이 두 작품의 공통점은 어쨌든 스토리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 외에는 대부분 이게 끝이야?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의문만 남긴 채 막을 내렸습니다.

유수의 문학상 수상집에서도 이런 의문을 자주 접하곤 했는데,

솔직히 소설 독자 입장에서 개인의 내면을 과도하게 전경화하거나 특정한 사건 없는 세계

언제나 환영할 만한 소재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점에서 강지영의 개들이 식사할 시간은 스토리텔링에 충실하면서도

나름 이것저것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겨주는 작품집입니다.

(물론 수록작에 따라 재미에 그친 작품도 있습니다.)

작품집 자체에 대한 호불호는 물론 수록작 각각에 대해서도 의견들이 많이 갈리겠지만

저의 호감을 산 작품은 사향나무 로맨스’, ‘스틸레토’, ‘거짓말입니다.

 

독자의 취향에 따라, 또 같은 독자라도 어떤 조건에서 책을 읽느냐에 따라

사건 없는 내면을 택할 수도, ‘명료한 스토리텔링을 택할 수도 있겠지만,

고온다습한 날씨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요즘 같은 때라면

강지영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서늘한 느낌을 만끽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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