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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7월
평점 :
결코 많이 읽었다고는 할 수 없어도 읽은 작품마다 워낙 강렬한 인상을 받은 덕분에
나름 요시다 슈이치의 팬이라 생각하고 있던 저로서는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중도포기’를 고민하게 될 거라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읽기 시작한 이후 딱 절반쯤 왔을 무렵 그 고민이 시작됐고,
‘그래도 믿고 읽는 요시다 슈이치인데..’라는 미련 때문에
제 독서 습관을 거슬러가면서까지 번역자 이영미 님의 후기를 먼저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명확한 사건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독자는 잔잔하고 평범한 일상 풍경 하나하나가
어떻게 무엇으로 연결되는지 모른 채 책을 읽어나가게 된다.
이 작품은 스토리의 중심을 공백으로 비워둠으로써
독자에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유도하려는 것 같다.
그제야 제가 잘못 읽은 게 아니란 걸 확인했고,
더불어, ‘중도포기’의 고민이 필연적(?)이었다는 점을 확실히 깨닫게 됐습니다.
누군가의 일상을 밀착카메라처럼 포착한 스토리는 그 디테일만큼의 지루함만 남겨줬는데,
그런 전개가 책의 절반인 270여 페이지까지 이어진 탓에
‘무엇을 읽고 있는 건지, 무엇에 신경 쓰며 남은 분량을 읽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명확한 사건도 없고, 스토리의 중심을 공백으로 비워뒀다’는 설명을 보고나니
그나마 갖고 있던 기대감도 사라지고 맥이 훅 빠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동시에 “왜 이런 설정을 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어서 출판사 소개글까지 찾아봤더니,
‘사소한 사건들과 작은 결단들이 엮여서 만들어지는 미래에 관한 이야기’라는 설명이 있더군요.
그럼, 이들의 이 지루한 일상들이 어떤 특별한 미래를 만든다는 뜻인가?, 라는 궁금함도 들고,
어쨌든 이미 절반을 읽은데다, 그 ‘미래’라는 게 어떤 모습인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에
나름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마지막 에필로그까지 마무리를 했습니다.
이제 실망감은 그만 털어놓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각 챕터별 주인공들의 일상이 평면적인 일기장처럼 나열됩니다.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고, 이런저런 과거를 회상하고, 이런저런 고민을 합니다.
그러다가 출판사 소개글 그대로 ‘사소한 사건’들을 겪게 되고 ‘작은 결단’을 내립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기-승-전-결이 아니라 기-승-승-승 같은 이야기들이 전부입니다.
물론 주인공들은 나름대로의 말 못할 고민과 내적 갈등을 가진 인물들이며,
시한폭탄 같은 위태로운 상황을 끌어안은 채 불안한 일상을 유지하고 있어서,
분명 어딘가에서 요시다 슈이치다운 큰 폭발을 이끌어낼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기다렸던 폭발은 없고, 애매한 지점에서 각 챕터는 마무리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각각 ‘봄’, ‘여름’, ‘가을’로 명명된 세 챕터의 주인공들이
과연 마지막 챕터인 ‘겨울’에서 어떻게 조우할까, 가 관심사항이 되는데,
요시다 슈이치는 마지막 챕터에서 갑자기 80년 후의 세상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즉, 앞선 챕터에 등장했던 인물들의 크고 작은 선택과 행동들이
80년이 지난 미래에 (좋든 나쁘든)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연히, 앞선 인물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그 후손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하지만, 선대의 선택이나 행동들이 2085년을 살아가는 후대의 삶에 미친 영향은
딱히 필연적이지도, 운명적이지도, 극적이지도 않습니다.
말하자면, “80년 전, A가 B를 버리고 C와 결혼해서 개망나니 D를 낳았는데,
만일 그때 A가 B와 결혼했더라면 개망나니 D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식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요시다 슈이치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단순하고 허망한 서사를 펼친 것은 결코 아니지만,
다 읽은 뒤에 제 머릿속에 남은 느낌은 딱 이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또, 이런 이야기를 위해 500페이지의 분량이 필요했을까?, 라는 반감이 저절로 들었는데,
“그때 바꿨으면 좋았을 거라고 누구나 생각하지만 아무도 지금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도,
“오늘 내가 보고 만 것, 하고 만 것, 못 본 척 한 것, 하려다 말았던 것, 말하려다 삼킨 것,
그런 사소한 하나하나가 쌓여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실감한다.”는 가쿠타 미쓰요의 헌사도
중편만으로도 충분히 그려낼 수 있는 덕목이었다는 점에서
자꾸만 ‘모든 게 과잉이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지금 나의 사소한 선택 하나가 불과 5분 뒤 내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하지만 지독한 아이러니를 내포한 주제가 될 수도 있지만,
굳이 80년의 간극과 500페이지의 분량이 필요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짧게 ‘불만’만 털어놓으려던 서평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그만큼 요시다 슈이치의 신작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뜻이겠죠.
호불호가 갈릴 수 있으니 다른 분들의 서평(주로 호평입니다만..)도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에는 제가 좋아하고, 제게 익숙한 요시다 슈이치와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