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남녀
나혁진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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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퇴근길에 괴한에게 칼에 찔리는 사고를 당한 유지혜는

그때의 충격으로 잘 다니던 회사마저 그만두고 현재는 학원 강사를 하고 있다.

그 사건 이후 부쩍 소심하고 쉽게 우울해지며 늘 처지를 비관하기만 하는 그녀 앞에

조금 수상한 남자 강마로가 나타나 탐정을 자처하며 함께 사건을 풀어 보자고 제안한다.

지혜는 '멈춰 있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강마로의 말에 용기를 내어,

자신을 이렇게 만든 범인을 스스로 잡기로 결심한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추리, 액션, 모험 등이 잘 녹아있던 독특한 작품 교도섬이후

3년 만에 다시 만난 나혁진 작가입니다.

정말 아무 정보 없이 주문했다가 포장을 뜯고 표지를 보는 순간

, 다른 책이 왔나?”싶을 정도로 잠시 당황했습니다.

당연히 교도섬의 톤과 비슷한 작품이 아닐까 예상했던 차에

갑자기 라노벨 같은 표지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주인공은 표지 속 이미지와 꼭 닮은 허당 초보탐정과 탐정조수 미녀였고,

메인 스토리는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전개되는 전형적인 후더닛구조였습니다.

물론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이야기라 좀 이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아무튼 주인공들의 케미가 유쾌한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두 사람은 2년 전 낙원아파트에서 발생한 살인사건과 살인미수사건을 조사합니다.

여주인공 유지혜는 당시 미수사건의 피해자로 아직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기도 하고,

1차 조사대상이 이웃들이다 보니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피해자들이 모두 아파트 자원봉사 모임 회원임에 주목한 강마로는

나머지 자원봉사 회원들을 의심하며 그들의 행적을 파헤칩니다.

 

표지와 캐릭터, 초반 설정 모두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코믹 코드였지만,

꽤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기게 할 정도로 작가의 필력은 매끄럽습니다.

뛰어난 이야기꾼으로서의 나혁진 작가의 재능이 잘 발휘됐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도섬후기에서 작가 스스로 신나게 놀아보고 싶었던 저자의 치기라고 밝힌 바 있는데,

낙원남녀역시 그런 작가의 도전적인 치기(?)가 이야기나 캐릭터에 잘 녹아있습니다.

주인공뿐 아니라 조연들도 개성 있게 설정됐고,

엔딩의 반전을 위한 단서나 복선들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적재적소에 잘 배치돼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취향의 문제 때문인지 수시로 오글거리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취향보다 더 아쉽게 느껴졌던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몇몇 설정들이었습니다.

 

강남이지만 전혀 강남 같지 않은, 더구나 북향으로 된 낡고 오래된 아파트가 주 무대인데,

음대교수, 스타 드라마작가 등 그곳의 주민들의 면면들은 간혹 수긍하기 어려워 보였습니다.

강마로는 유지혜 사건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일부러 그녀에게 조사를 제안했으면서도

정작 그녀의 수락을 받고 시작한 첫 조사는 사건 당시 기사들을 찾는 일입니다.

경찰은 피해자였던 유지혜가 조사를 시작하자 공무집행방해운운하며 훼방을 놓으면서도,

그녀가 알아내고자 했던 당시 사건의 세세한 정황을 일부러 들으란 듯이다 알려줍니다.

무엇보다, 주인공은 한순간의 깨달음만으로 마치 사건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범행의 전후 사정과 수법, 동기까지 완벽하게 파악하는데,

번뜩이는 이미지처럼 떠오른 영감만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엘러리 퀸을 연상시킬 정도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덜컹거리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위에서 지적한 부분들에 대해 작가는 대부분 사후 설명을 부연합니다만,

이미 위화감을 진하게 느낀 뒤에 듣는 변명(?)처럼 쉽게 수긍하긴 어려웠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나혁진 작가는 뛰어난 이야기꾼임에는 분명합니다.

교도섬역시 아쉬운 대목들이 있었지만 독자를 잡아끄는 힘이 대단했고,

낙원남녀도 페이지터너로서는 수준급인 작품입니다.

두 작품 공히 저의 신경을 건드린 부분은 어쩌면 작가가 고백한 치기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특히 낙원남녀의 경우 유쾌한 캐릭터를 통해 과하게 재미를 주려다 역효과가 난 점,

, 주인공에게 엄청난 탐정의 DNA를 부여하려던 점은 치기의 절정처럼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강마로와 유지혜 콤비를 통해 시리즈까지 염두에 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도 이후엔 디테일한 부분에 좀더 신경써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평가도 야박하고, 별도 짜게 줬지만,

매력적인 한국 장르작가가 꾸준히 건승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비롯됐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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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의 테이프 스토리콜렉터 57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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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저는 늦은 밤에 미쓰다 신조의 책은 번역하지 않기로 하고 있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호러물을 많이 번역하신 현정수 님이 후기에 이런 글을 남기셨습니다.

공교롭게도 저 역시 미쓰다 신조의 책은 웬만해선 밤에 읽지 않기로 한 터라,

요 며칠, 출퇴근길에는 괴담의 테이프, 밤에는 제프리 디버의 ‘XO’를 병행해서 읽었는데,

아마도 미쓰다 신조의 노조키메작자미상을 읽은 독자라면

저나 현정수 님의 이 괜한 엄살이 아니라는 점은 이해하실 겁니다.

 

노조키메후기에 실린 현정수 님의 설명에 따르면

영문을 알 수 없는 것을 단서를 찾아 논리적으로 풀어내야 하는 것이 미스터리이고,

영문을 알 수 없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둬야 하는 것이 호러인데,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가 전자의 대표적 작품이라면

괴담의 테이프99% 후자에 속하는 작품합니다.

 

● ● ●

 

소설가 미쓰다는 알고 지내던 여성편집자에게 괴담의 테이프출간을 제안받습니다.

자살을 앞둔 자의 마지막 녹취록 내용을 소재로 한 죽은 자의 테이프 녹취록을 시작으로

그동안 발표한 단편 호러작품들을 묶어 소설집으로 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편집자는 최근 자신이 겪은 기이한 경험들을 중간에 삽입할 것을 요청합니다.

사실 그 편집자는 과거 미쓰다가 갖고 있던 꽤 많은 괴담 녹취테이프에서 괜찮은 소재를 모아

연작단편을 출간할 것을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들은 다 상이하지만 괴담 테이프를 기반으로 한 공통점을 컨셉으로 잡자는 얘깁니다.

미쓰다는 큰 기대 없이 그 테이프를 건네줬는데,

문제는 테이프를 들은 편집자가 어느 날인가부터 이상한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결국 새로 출간된 괴담의 테이프에는 미쓰다의 단편 6작품과

편집자의 경험담이 서장, 막간, 종장의 형식으로 함께 실립니다.

 

● ● ●

 

도키토 씨에게 어째서 일련의 괴이현상이 일어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괴이가 발생한 의미를 알 수 없는 상태로는 독자가 불만스럽게 느낀다든가...”

이 책이 미스터리 소설이었다면 절대 불가였겠지요. 하지만 호러니까 딱히 문제는 없습니다.”

 

미쓰다와 편집자가 작품 속에서 나눈 대화인데, 이 작품의 특징을 함축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말 그대로 영문을 알 수 없다면 그대로 내버려둬야 하는 호러라는 뜻이죠.

물론 미쓰다는 종장에서 나름대로 수록작들을 관통하는 코드를 해석해주긴 하지만,

그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죠.

심지어 본인마저 편집자 못잖은 괴이한 경험을 한 미쓰다는 이런 언급까지 합니다.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과연 나 자신의 의사였을까?”

 

어쩌면 괴담 녹취 테이프에 들러붙은 그것의 힘에 의해

자기 자신도 모르게 쓴 글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미쓰다 신조는 작품마다 이런 애교 섞인 협박을 독자에게 툭툭 던지곤 하는데,

이 협박이 밤만 되면 이상하게 머릿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의 작품은 어지간해선 밤에는 안 읽겠다고 결심한 거구요.^^

 

개인적으로는 노조키메’, ‘작자미상’, ‘백사당’, ‘사관장등에 비해선 강도가 좀 약했지만,

단편으로서의 매력은 꽤 괜찮았던 작품이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이유도 묻지 말고, 논리적으로 따지지도 말고 호러 자체를 즐기면 되는 작품입니다.

 

사족으로..

미쓰다 신조는 작품 속에서 자신의 차기작을 언급하곤 하는데,

괴담의 테이프에서는 애초 도조 겐야 시리즈로 기획됐다가 스탠드얼론으로 급선회한

검은 얼굴의 여우라는 작품을 여러 차례 언급합니다.

물론, 2015년에 출간된 괴담의 집에서도 자주 언급된 유녀(幽女)처럼 원망하는 것

아직까지 국내에 출간되지 않아서 무척 아쉽지만,

유녀처럼~’이든 검은 얼굴의 여우든 하루 빨리 미쓰다 신조의 신작이 소개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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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달콤한 고통 버티고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7월
평점 :
품절


하숙집 사람들이 성인(聖人)’이라 부를 만큼 예의 바르고 조용하며

회사에서는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는 젊은 과학자 데이비드 켈시.

그는 2년 전 고향에서 애나벨을 보고 첫눈에 반한 뒤 그녀에 대한 사랑을 키워왔지만,

그녀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하자 큰 충격에 빠진다.

애나벨이 자신의 곁으로 돌아올 거라 확신하는 데이비드는

윌리엄 뉴마이스터라는 가명으로 둘만을 위한 집을 마련하곤,

주말마다 그곳에서 그녀와 함께하는 달콤한 나날을 상상하며 보낸다.

하지만 그의 끊임없는 구애에도 애나벨에게서는 아무런 답장도 오지 않는다.

그런 어느 날, 애나벨과 결혼한 사내가 찾아오면서 데이비드의 비극은 시작된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이름과 그녀의 대표작인 리플리 시리즈는 여러 번 들어 익숙했지만,

작품으로 만나는 건 국내 초역 출간된 이토록 달콤한 고통이 처음입니다.

1960년에 출간된 심리서스펜스라는 것 외엔 아무런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일찌감치 밝혀지는 주인공 데이비드의 집착에 가까운 사랑법을 알게 되는 순간

이 작품의 제목에 담긴 반어법의 의미가 뚜렷이 각인됐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은 아니라는것도 예감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남자와 결혼한 그녀와의 미래를 위해 가명으로 집을 사고

주말이면 그곳에서 그녀와 클래식과 와인을 즐기는 상상을 하며 절정감을 느끼는 데이비드는

요즘의 시선으로 보면 지독하게 일그러진 스토커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이라는 아날로그적인 배경은 어딘가 그에게 면죄부를 주는 듯 합니다.

불편한 전화통화, 편지로 오가는 고백들,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 등

스마트폰과 각종 디지털 문명이 삭제해버린 관계와 소통의 문제덕분에

데이비드의 사랑은 일견 섬뜩하면서도 애틋함을 동시에 느끼게 만듭니다.

더구나 주위 사람들에게서 훌륭한 인격체로, , 능력 있는 과학자로 인정받는 그가

한편으론 두 개의 집과 두 개의 인격을 즐기는 듯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현대의 그 어떤 편집증적이거나 집착적인 사랑에 빠진 캐릭터도

이토록 매력적(?)이진 않았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됩니다.

 

작가는 이런 데이비드의 심리를 때론 돌직구처럼 과격하고 거칠게,

때론 시적인 섬세함과 (그의 직업대로) 과학적인 정교함으로 차곡차곡 쌓아갑니다.

그 덕분에 3인칭 시점의 서술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데이비드에게 꽤나 깊이 이입하게 됩니다.

그의 일그러진 사랑이 결실을 맺기를 바라게 될 때도 있고,

동시에 그가 얼른 정신을 차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몸과 마음에서 무한 증식하는 그의 집착이

어떤 식으로 그를 내부에서부터 갉아먹으며 붕괴시키는지 잔인할 정도로 천천히 묘사합니다.

 

애나벨을 향한 그의 사랑은 끝내 살인이라는 참극을 불러오고,

그때부터 데이비드와 뉴마이스터라는 두 개의 인격이 각각의 역할놀이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역할놀이의 실체를 궁금히 여기는 주변 인물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이야기는 미스터리의 서사까지 함께 전개시킵니다.

 

사실 이 미스터리 서사가 현대 독자의 눈에는 가장 거슬리는 대목인데,

번역하신 김미정 님도 후기에서 지적했듯

느슨하게 수사한 후 대충 넘어가는경찰 때문에 몰입이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학수사나 네트워크로 공유된 범죄자정보 같은 게 요원했던 1950년대 후반이긴 하지만

눈앞의 진실을 일부러 외면하는 듯한 경찰의 태도가 내내 목에 가시처럼 느껴진 건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아무래도 심리 서스펜스라는 장르의 특성 상

빠른 전개나 사건 위주의 서사가 아니라 느리고 집요한 심리 묘사가 지배적인 작품이다 보니

때론 장황함이나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런 점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에게 그녀만의 개성을 부여한 매력 포인트겠지만,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게 만드는 지점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워낙 센 캐릭터들과 독한 이야기들 덕분에 생긴 내성 때문일 수도 있고,

데이비드를 바라보는 개인적인 가치관 또는 도덕관의 결과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한동안 먹먹한 감정에 휩싸였다는 번역가 김미정 님과는 달리

아무래도 그의 달콤한 고통에 전적으로 공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다만, 데이비드를 미화하거나 구원하거나 징벌할 생각 없이

독자에게 생각을 위한 먹잇감으로 툭 던져놓은 듯한 작가의 스탠스는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런 면에서 다른 독자들의 평가와 호불호가 무척 궁금해지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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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맨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13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추지나 옮김 / 레드박스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일명 립맨(RIP MAN)이라 불리는 아와노는 천재적인 어둠의 비즈니스 설계자.

그는 보이스피싱 영업소에서 만난 도모키, 다케하루 형제와 함께 새로운 범행을 모의한다.

그것은 일본에서 성공한 적 없는 이른바 유괴 사업’.

그들의 계략은 과자회사 미나토당의 사장을 납치하고 그의 어린 아들을 유괴한 다음,

사장만 풀어주면서 아들의 몸값으로 금괴를 요구하는 것.

이들에게 맞서 유괴 사건의 수사 지휘를 맡은 형사는

텔레비전 공개수사를 펼쳐서 연쇄 살인마 배드맨을 체포했던 마키시마 경시.

범인들은 끈질기게 포위망을 좁혀오는 경찰을 따돌리고 금괴를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유괴단과 경찰, 피해자 가족 간의 예측 불가능한 속고 속이기 작전이 펼쳐진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립맨의 원제는 犯人2-蜃氣樓’, 범인에게 고한다 2-어둠의 신기루입니다.

2004년 출간된 첫 편 이후 무려 11년 만에 나온 후속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원제를 그대로 썼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지만,

주인공 마키시마 형사와 정면대결을 펼치는 천재적인 범죄설계자 아와노의 별명인 립맨 역시

번역 제목으로는 무척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립맨이란 별명은 뛰어난 두뇌를 가진 범죄자 아와노의 기이한 행적에서 유래합니다.

그는 모두의 예상을 비웃듯 완벽하게 범죄를 설계하고 실행에 옮기는 천재이며,

경찰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거의 동물적인 감각을 발휘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위기의 순간이 되면 “Rest In Peace.”는 메시지를 남기고 홀로 유유히 사라집니다.

편히 잠들라.”는 뜻의 R.I.P는 범죄라는 유희(?)의 종료를 알리는 일성이자

곧 체포될 동료들에 대한 마지막 인사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보이스피싱 사기단에서 만난 도모키 형제와 함께 유괴사업을 계획합니다.

립맨의 유괴사업은 경찰과 인질과 인질의 가족까지 교묘하게 속이는 것은 물론

그들의 미세한 심리변화와 행동까지 꿰뚫어보고 설계된 완벽한 프로젝트입니다.

실패까지 계산한 빈틈없는 계획과 (립맨의 예상대로) 우왕좌왕하는 경찰의 대응을 보고 있으면

독자는 어느 샌가 립맨의 사업이 성공하기를 바라게 되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한편, 전편에서 TV프로그램을 통한 공개수사로 희대의 연쇄살인마를 잡은 마키시마는

이번에도 역시 경찰 내부의 정치적 알력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보이스피싱 수사 때부터 립맨의 존재를 희미하게나마 감지해온 마키시마는

일반적인 유괴범 수사와는 다른 경로로 미나토당 부자(父子) 유괴사건을 다룹니다.

그 과정에서 그를 못마땅히 여기는 경찰조직 내 권력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지만

마키시마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수사에 지장을 끼친다면

상대가 직속상관이라도 치워버리는’(422p)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전작인 범인에게 고한다가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갇힌 주인공, 경찰 내부의 추잡한 알력,

TV를 통한 범인과의 접촉 시도, 시청률 경쟁에 나선 방송사의 행태 등

다양한 설정과 서사를 통해 600여 페이지의 분량을 꽉꽉 채운 작품이라면,

립맨은 사건이나 주변 에피소드가 단순해서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아 보이는 작품입니다.

물론 초반에 립맨과 도모키 형제의 등장을 알리는 보이스피싱 사건의 전말도 흥미롭고,

엎치락뒤치락 서로를 속고 속이는 심리전을 펼치는 유괴 사건의 전개도 매력적이어서

페이지가 엄청난 속도로 넘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단 한 건의 유괴사건을 다루다보니 중량감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 못잖게 아쉬웠던 점은 전작에서 저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경찰 내부의 알력 스토리

립맨에서는 단역급 서사로 밀려났다는 점입니다.

범인에게 고한다의 서평에서 고위 관료에서 말단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포진한 경찰들은

경찰캐릭터 백과사전의 느낌이 들 정도로 깊이나 사실감에서 압도적이었다.”라고 썼는데,

그런 압도적 느낌을 립맨에서도 기대했던 탓에 아쉬움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몇 장면 없었지만, 마키시마의 영원한 숙적인 소네 본부장과의 짜릿한 대결은

그나마 저의 아쉬움을 달래준 대목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립맨은 시즈쿠이 슈스케의 탄탄한 미스터리를 맛볼 수 있는 수작임에 분명합니다.

올해 읽은 불티를 비롯, ‘검찰 측 죄인이나 범인에게 고한다등 그의 작품들은

사건을 다루는 솜씨도 매력적이지만 인물들의 심리를 치밀하게 그리는 점이 압권입니다.

립맨역시 시즈쿠이 슈스케의 그런 미덕들이 잘 살아있어서

적잖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금세 마지막 페이지까지 완독이 가능한 작품입니다.

 

립맨의 마지막 페이지를 보니 시즈쿠이 슈스케의 신간이 곧 나올 것으로 보이는데,

가나가와 현경의 명품 마키시마가 다음엔 어떤 활약을 펼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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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스 버티고 시리즈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버크 데보레는 23년간 제지회사에서 일해온 평범한 중산층 남자다.

하지만 미국에 불어닥친 인원 감축의 바람을 피하지 못한 그는 하루아침에 정리해고 되고 만다.

재취업을 위해 원서를 내보지만 2년이 지나도록 그를 다시 받아주는 회사는 없다.

초조해진 그는 자신의 인생과 상처 입은 영혼을 복구하기 위해 기막힌 계획을 세운다.

그는 잡지에 제지회사의 가짜 구인 광고를 낸다.

사서함에는 경쟁자들의 이력서가 쌓이고, 그는 자신보다 더 능력 있어 보이는 6명을 추린다.

뛰어난 인사 담당자라면, 버크 데보레보다는 이들을 채용할 것이다.

버크 데보레에게 필요한 것은 이 유능한 경쟁자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설정이나 소재도 무척 흥미로운 작품이었지만 그보다 더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박찬욱 감독이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고 싶은 원작소설로 꼽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딱 박찬욱 감독 스타일, 기발하고 파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언뜻 제목만 보면 도끼(Ax) 연쇄살인마를 다룬 작품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실제 이 제목은 직장에서 해고된 걸 비유하는 영어 표현인 도끼질 당했다에서 유래합니다.

해고의 광풍이 낳은 끔직한 참극을 그렸다는 점에서 적절한 제목으로 보이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땐 도끼 연쇄살인마스토리를 읽은 듯한 느낌도 강하게 들어서 그런지

꽤나 이중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제목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액스는 제목만큼이나 다양한 면모를 가진 작품입니다.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고발극이면서, 연쇄살인을 다룬 스릴러이기도 하지만

일면, 진짜 지독한 블랙코미디의 인상도 갖고 있습니다.

 

작가는 수시로 정리해고의 비정함과 부당함, 시스템의 문제를 정면으로 언급하면서

동시에, 그 광풍에 치인 한 개인이 어떻게 철저하게 붕괴되는지 디테일하게 묘사합니다.

공장자동화가 몰고 온 육체노동자의 몰락에 이어

컴퓨터의 등장 이후 거리로 내몰린 버크 같은 중간관리자들의 비극을 읽다 보면

수많은 버크 데보레를 거리로 쏟아낼, 로봇이 장악할 머지않은 미래가 암울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구조적 문제에 대한 고발이 지루하게 읽히지 않는 이유는

주인공 버크가 벌이는 기상천외한 프로젝트,

경쟁자 제거하기라는 다분히 엽기적이고 오락성이 강한 연쇄살인 스토리 때문입니다.

매번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살인극이 벌어지고,

완전범죄라고 안심할 무렵 뜻하지 않은 단서를 잡은 경찰이 등장하는가 하면,

해고의 후유증 때문에 엉망진창이 된 버크 가족들의 문제까지 뒤엉키면서

이야기는 숨 돌릴 틈 없이 급박하게 전개됩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눈앞에서 끔찍한 살인극이 묘사되고 있는데도

독자가 긴장감을 갖기는커녕 피식피식 웃음을 짓게 된다는 점입니다.

상황이 웃겨서가 아니라, 블랙코미디 같은 쓴웃음이라고 할까요?

평범한 중산층 남자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이하면서 킬러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쓴웃음과 동정심, 심지어 부디 잡히지 말고 미션을 완수하기를 바라는마음까지 생깁니다.

특히 버크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갖다 붙이는 이런저런 명분들이

억지라기보다 오히려 공감이 가는 내용들이라 더욱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도 모릅니다.

 

이 작품이 출간된 게 1997년이니 20년의 시간이 흐른 셈입니다.

그 사이 세상은 더욱 험악해졌고, 이제 일자리는 생존의 가장 큰 화두가 됐습니다.

그래서인지 일자리를 위해 킬러가 된 버크는 소설 속 픽션이 아니라

현실 여기저기에서 목격할 수 있는 실존 인물처럼 소름 돋게 뇌리에 각인됩니다.

한 개의 일자리, 열 명의 지원자가 제 앞에 닥친 현실이라면

저 역시 버크 같은 상상력을 발휘하지 말란 법이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살면서 버크와 맞닥뜨릴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라는 번역가 최필원 님의 말씀은

그래서 더욱 섬뜩하고 리얼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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