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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남녀
나혁진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7월
평점 :
2년 전 퇴근길에 괴한에게 칼에 찔리는 사고를 당한 유지혜는
그때의 충격으로 잘 다니던 회사마저 그만두고 현재는 학원 강사를 하고 있다.
그 사건 이후 부쩍 소심하고 쉽게 우울해지며 늘 처지를 비관하기만 하는 그녀 앞에
조금 수상한 남자 강마로가 나타나 탐정을 자처하며 함께 사건을 풀어 보자고 제안한다.
지혜는 '멈춰 있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강마로의 말에 용기를 내어,
자신을 이렇게 만든 범인을 스스로 잡기로 결심한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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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액션, 모험 등이 잘 녹아있던 독특한 작품 ‘교도섬’ 이후
3년 만에 다시 만난 나혁진 작가입니다.
정말 아무 정보 없이 주문했다가 포장을 뜯고 표지를 보는 순간
“어, 다른 책이 왔나?”싶을 정도로 잠시 당황했습니다.
당연히 ‘교도섬’의 톤과 비슷한 작품이 아닐까 예상했던 차에
갑자기 라노벨 같은 표지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주인공은 표지 속 이미지와 꼭 닮은 허당 초보탐정과 탐정조수 미녀였고,
메인 스토리는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전개되는 전형적인 ‘후더닛’ 구조였습니다.
물론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이야기라 좀 이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아무튼 주인공들의 케미가 유쾌한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두 사람은 2년 전 낙원아파트에서 발생한 살인사건과 살인미수사건을 조사합니다.
여주인공 유지혜는 당시 미수사건의 피해자로 아직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기도 하고,
1차 조사대상이 이웃들이다 보니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피해자들이 모두 아파트 자원봉사 모임 회원임에 주목한 강마로는
나머지 자원봉사 회원들을 의심하며 그들의 행적을 파헤칩니다.
표지와 캐릭터, 초반 설정 모두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코믹 코드였지만,
꽤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기게 할 정도로 작가의 필력은 매끄럽습니다.
뛰어난 이야기꾼으로서의 나혁진 작가의 재능이 잘 발휘됐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도섬’ 후기에서 작가 스스로 ‘신나게 놀아보고 싶었던 저자의 치기’라고 밝힌 바 있는데,
‘낙원남녀’ 역시 그런 작가의 도전적인 치기(?)가 이야기나 캐릭터에 잘 녹아있습니다.
주인공뿐 아니라 조연들도 개성 있게 설정됐고,
엔딩의 반전을 위한 단서나 복선들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적재적소에 잘 배치돼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취향의 문제 때문인지 수시로 오글거리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취향보다 더 아쉽게 느껴졌던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몇몇 설정들이었습니다.
강남이지만 전혀 강남 같지 않은, 더구나 북향으로 된 낡고 오래된 아파트가 주 무대인데,
음대교수, 스타 드라마작가 등 그곳의 주민들의 면면들은 간혹 수긍하기 어려워 보였습니다.
강마로는 유지혜 사건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일부러 그녀에게 조사를 제안했으면서도
정작 그녀의 수락을 받고 시작한 첫 조사는 사건 당시 기사들을 찾는 일입니다.
경찰은 피해자였던 유지혜가 조사를 시작하자 ‘공무집행방해’ 운운하며 훼방을 놓으면서도,
그녀가 알아내고자 했던 당시 사건의 세세한 정황을 ‘일부러 들으란 듯이’ 다 알려줍니다.
무엇보다, 주인공은 ‘한순간의 깨달음’만으로 마치 사건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범행의 전후 사정과 수법, 동기까지 완벽하게 파악하는데,
‘번뜩이는 이미지처럼 떠오른 영감’만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엘러리 퀸을 연상시킬 정도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덜컹거리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위에서 지적한 부분들에 대해 작가는 대부분 사후 설명을 부연합니다만,
이미 위화감을 진하게 느낀 뒤에 듣는 변명(?)처럼 쉽게 수긍하긴 어려웠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나혁진 작가는 뛰어난 이야기꾼임에는 분명합니다.
‘교도섬’ 역시 아쉬운 대목들이 있었지만 독자를 잡아끄는 힘이 대단했고,
‘낙원남녀’도 페이지터너로서는 수준급인 작품입니다.
두 작품 공히 저의 신경을 건드린 부분은 어쩌면 작가가 고백한 ‘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특히 ‘낙원남녀’의 경우 유쾌한 캐릭터를 통해 과하게 재미를 주려다 역효과가 난 점,
또, 주인공에게 엄청난 탐정의 DNA를 부여하려던 점은 ‘치기의 절정’처럼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강마로와 유지혜 콤비를 통해 시리즈까지 염두에 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도 이후엔 디테일한 부분에 좀더 신경써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평가도 야박하고, 별도 짜게 줬지만,
매력적인 한국 장르작가가 꾸준히 건승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비롯됐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