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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 - 죽음을 질투한 사람들
제인 하퍼 지음, 남명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폐쇄적+배타적 소도시’라는 무대는 그 자체만으로도 서사를 묵직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호불호를 거침없이 드러내고, 언제나 날이 서있는 듯한 그곳 사람들의 언행은
외부인이라면 불편하다 못해 웬만해선 견뎌내기 힘든 엄청난 압력입니다.
초라한 번화가 외엔 대부분이 광활한 농장인 그런 소도시에 2년째 가뭄이 지속된다면,
그래서 산불경고 지수는 ‘극히 위험’을 가리키고, 기르던 가축은 살처분을 해야 하고,
끝내 생존의 문제마저 위태로워지는 상황이 도래한다면,
사람들은, 날카롭다 못해 사소한 시비만으로도 피를 보는 일을 어렵지 않게 생각할 것입니다.
호주 멜버른에서 5시간 거리의 소도시 키와라가 지금 그런 지경에 처해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루크라는 사내가 아내와 아들을 살해한 뒤 자살한 끔찍한 사건이 터집니다.
최악의 가뭄 때문에 궁지에 몰렸던 루크의 극단적 선택을 동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가족들까지 참혹하게 살해한 그의 마지막 결정을 극렬히 비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루크와 그 가족의 비극적인 죽음 자체보다
장례식을 위해 키와라를 찾은 루크의 친구이자 ‘돌아온 탕아’에게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에런 포크는 키와라에서 나고 자랐지만, 20년 전 도망치듯 마을을 떠났던 남자입니다.
그 무렵 16살 동갑내기 소녀 엘리의 의문사에 관해 경찰의 의심을 받았던 에런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키와라에서는 ‘살인자’로 낙인찍힌 상태입니다.
더구나 경찰이란 신분 때문에 루크의 부모로부터 사건진상을 밝혀달라는 부탁을 받은 에런이
1주일의 휴가를 이용하여 비공식 수사에 나서면서 키와라의 분위기는 극도로 험악해집니다.
5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딱 알맞은 분량의 스릴러지만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무겁고 습한 정서의 작품들이 그렇듯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무렵엔 거의 7~800페이지를 읽은 듯한 천근만근의 느낌이 듭니다.
특히 20년 전 엘리의 의문사와 현재 벌어진 루크 가족의 참혹한 사건이 나란히 전개되면서
가뭄에 찌든 소도시 키와라를 배경으로 한 스토리는 한없이 독자의 마음을 무겁게 만듭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 무거움을 기꺼이 감당하게 할 만큼 매력적인 스릴러를 전개시킵니다.
루크는 과연 가족을 살해하고 자살할 만큼 궁지에 몰렸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루크의 사건은 20년 전 엘리의 죽음과 어떻게 연결돼있는가?
에런은 엘리의 죽음에 진짜 책임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루크의 이웃이자 죽은 엘리의 아버지인 음험하기 짝이 없는 맬 디컨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
독자는 자살이냐 타살이냐, 타살이라면 소도시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등을 관찰하며
에런의 비공식 수사를 초조하게, 하지만 기대와 궁금함을 갖고 지켜보게 됩니다.
또, 16살이던 20년 전, 키와라를 헤집고 다녔던 에런과 루크와 엘리의 회상을 지켜보며
그 무렵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안쓰럽고 애틋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됩니다.
아마, 미국의 작은 마을에서 위태로운 10대 시절을 보낸 한 소녀의 비극적 성장기인
넬레 노이하우스의 ‘여름을 삼킨 소녀’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호주의 소도시 키와라에서 20년의 간극을 두고 벌어진 두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는
‘드라이’에서도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평점 별을 4.5개에 그치게 만든 아쉬운 점이 두 가지 있었는데,
우선, 이야기가 동어반복되거나 느슨해지고 지루해지는 지점이 간혹 목격된다는 점입니다.
폭발 직전의 키와라의 분위기에 대해 반복적으로 부연설명하고 있는 부분들,
혹은 에런과 루크와 엘리의 10대 시절을 강조하는 부분들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이런 느낌은 어쩌면 ‘드라이’ 같은 구조를 가진 작품들의 태생적인 한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대와 캐릭터에 대해 확실히 독자의 뇌리에 각인시켜야 한다는 작가의 부담감이랄까요?
물론, 작품의 큰 미덕을 훼손할 정도는 절대 아니며,
독자에 따라 그런 지점을 재미있게 읽는 분이 더 많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또 한 가지는, 사실 굉장히 주관적일 수 있는 부분인데,
가끔씩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거나 잘 이해가 안 되는 문장들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게 원작의 문제인지, 번역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옥의 티처럼 보여서 많이 아쉬웠습니다.
제인 하퍼는 이 작품으로 데뷔하면서 많은 매체로부터 찬사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후속작에 대해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작가입니다.
번역하신 남명성 님에 의하면, 에런 포크를 주인공으로 한 다음 작품이 예정돼있다는데,
실은 금융범죄 전문수사관인 에런 포크가 다음 작품에서는 어떤 사건을 맡게 될지,
(추정컨대) 애증의 고향인 키와라 대신 대도시 멜버른에서는 어떤 캐릭터를 발휘할지
벌써부터 기대와 궁금증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