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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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82년생일까?’, ‘왜 주인공 이름이 저토록 특색 없을까?’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채 1/3도 읽기 전에,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관한 한 이보다 더 적절한 제목,

이보다 더 적절한 주인공의 캐릭터는 없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김지영은 1982년에 태어나 2015년 현재 우리 나이로 34살인 한 아이의 엄마입니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그녀의 입에서 다른 사람의 말이 튀어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친정엄마가 됐다가, 친했던 대학선배가 되기도 합니다.

남편은 그녀에게 정신과 진료를 받게 했고,

그때부터 이야기는 김지영이 진술한 자신의 일생에 관한 짧은 리포트로 이어집니다.

그녀가 태어나기 전, 그녀의 어머니가 겪은, 지금은 상상하기도 힘든 고난의 시간들,

그녀가 국민학교에 입학한 뒤 학창시절을 거치는 동안 겪은 크고 작은 불합리한 일들,

그리고 직장에 들어간 뒤, 결혼한 뒤, 아이를 낳은 뒤 겪은 온갖 부조리한 일들이 나열됩니다.

그 모든 것들은 그녀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1로 시작됐다면

아마 대부분 겪지 않았을 지도 모를, 아니 절대 겪지 않았을 일들이었습니다.

 

김지영이 겪은 고난과 불합리와 부조리는 사실 폭력과 동의어입니다.

가해자는 가족, 친구, 선생, 직장동료, 낯선 타인 등 그녀가 만난 거의 모든 사람들입니다.

모든 남자가 가해자였던 것도 아니고, 모든 여자가 동지들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 가운데 명백한 적대감을 갖고 폭력을 휘둘렀던 건 극히 일부라는 점입니다.

대다수는 그게 당연한 거니까’, 또는 상식이니까라는 이유로 김지영을 아프게 했습니다.

 

여자애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학교 망신이다, 망신.”

여자 직업으로 선생님만 한 게 있는 줄 알아?”

, 됐어. 씹다 버린 껌을 누가 씹냐?”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 가는 것 같아서 태워준 거야.”

넌 그냥 얌전히 있다 시집이나 가.”

배불러까지 지하철 타고 돈 벌러 다니는 사람이 애는 어쩌자고 낳아?”

예전에는 방망이 두드려서 빨고, 불 때서 삶고.. 요즘 여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나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면서 돌아다니고 싶다.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

 

고백하자면, 이제 나이가 먹어 이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말들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일방적이고, 맥락 없는 것들이란 걸 깨닫게 됐지만,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저 역시 숱한 ‘82년생 김지영들에게

부당한 폭력을 휘둘렀고 깊은 상처를 줬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폭력이 상식이고, 자연스러운 거고, 그러니 당연히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그저 부끄럽고 창피해질 따름입니다.

 

김지영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에서 큰 목소리를 몇 번 내지 못합니다.

자신을 씹다 버린 껌으로, 재수 없는 첫 손님으로, 대책 없는 임산부로 여기는 가해자들에게

큰 목소리로 화내려다 말고, 따지려다 참고, 저항하려다 미루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34살이 된 그녀가 다른 사람의 말을 하게 된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독자로 하여금 깊고, 두껍고, 끝없는 분노를 느끼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82년생 김지영들이 지금도, 또 앞으로도

그런 삶을 강요받고, 강요받을 거란 사실에 지독한 씁쓸함까지 맛보게 됩니다.

 

아마도 가해자들은 이 소설을 지긋지긋한 페미니즘이라고 편리하게 부정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가해자인지도 모를뿐더러,

좀 심하게 말하면, 김지영의 상처에 대해 조금도 공감 못하는 사이코패스인지도 모릅니다.

의 여자들에게 제멋대로 불쾌하기 짝이 없는 성희롱을 자행하곤

밤늦게 귀가하는 딸을 에스코트하러 간다며 술자리를 뜨는 작품 속 대기업 부장처럼 말이죠.

 

이 작품을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무작정 싸우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 어떤 선택에서도 를 포기하는 것만큼은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누구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 누구보다 소중한 자신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 ‘82년생 김지영은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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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 - 죽음을 질투한 사람들
제인 하퍼 지음, 남명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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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폐쇄적+배타적 소도시라는 무대는 그 자체만으로도 서사를 묵직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호불호를 거침없이 드러내고, 언제나 날이 서있는 듯한 그곳 사람들의 언행은

외부인이라면 불편하다 못해 웬만해선 견뎌내기 힘든 엄청난 압력입니다.

초라한 번화가 외엔 대부분이 광활한 농장인 그런 소도시에 2년째 가뭄이 지속된다면,

그래서 산불경고 지수는 극히 위험을 가리키고, 기르던 가축은 살처분을 해야 하고,

끝내 생존의 문제마저 위태로워지는 상황이 도래한다면,

사람들은, 날카롭다 못해 사소한 시비만으로도 피를 보는 일을 어렵지 않게 생각할 것입니다.

 

호주 멜버른에서 5시간 거리의 소도시 키와라가 지금 그런 지경에 처해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루크라는 사내가 아내와 아들을 살해한 뒤 자살한 끔찍한 사건이 터집니다.

최악의 가뭄 때문에 궁지에 몰렸던 루크의 극단적 선택을 동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가족들까지 참혹하게 살해한 그의 마지막 결정을 극렬히 비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루크와 그 가족의 비극적인 죽음 자체보다

장례식을 위해 키와라를 찾은 루크의 친구이자 돌아온 탕아에게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에런 포크는 키와라에서 나고 자랐지만, 20년 전 도망치듯 마을을 떠났던 남자입니다.

그 무렵 16살 동갑내기 소녀 엘리의 의문사에 관해 경찰의 의심을 받았던 에런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키와라에서는 살인자로 낙인찍힌 상태입니다.

더구나 경찰이란 신분 때문에 루크의 부모로부터 사건진상을 밝혀달라는 부탁을 받은 에런이

1주일의 휴가를 이용하여 비공식 수사에 나서면서 키와라의 분위기는 극도로 험악해집니다.

 

5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딱 알맞은 분량의 스릴러지만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무겁고 습한 정서의 작품들이 그렇듯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무렵엔 거의 7~800페이지를 읽은 듯한 천근만근의 느낌이 듭니다.

특히 20년 전 엘리의 의문사와 현재 벌어진 루크 가족의 참혹한 사건이 나란히 전개되면서

가뭄에 찌든 소도시 키와라를 배경으로 한 스토리는 한없이 독자의 마음을 무겁게 만듭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 무거움을 기꺼이 감당하게 할 만큼 매력적인 스릴러를 전개시킵니다.

루크는 과연 가족을 살해하고 자살할 만큼 궁지에 몰렸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루크의 사건은 20년 전 엘리의 죽음과 어떻게 연결돼있는가?

에런은 엘리의 죽음에 진짜 책임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루크의 이웃이자 죽은 엘리의 아버지인 음험하기 짝이 없는 맬 디컨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

 

독자는 자살이냐 타살이냐, 타살이라면 소도시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등을 관찰하며

에런의 비공식 수사를 초조하게, 하지만 기대와 궁금함을 갖고 지켜보게 됩니다.

, 16살이던 20년 전, 키와라를 헤집고 다녔던 에런과 루크와 엘리의 회상을 지켜보며

그 무렵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안쓰럽고 애틋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됩니다.

아마, 미국의 작은 마을에서 위태로운 10대 시절을 보낸 한 소녀의 비극적 성장기인

넬레 노이하우스의 여름을 삼킨 소녀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호주의 소도시 키와라에서 20년의 간극을 두고 벌어진 두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는

드라이에서도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평점 별을 4.5개에 그치게 만든 아쉬운 점이 두 가지 있었는데,

우선, 이야기가 동어반복되거나 느슨해지고 지루해지는 지점이 간혹 목격된다는 점입니다.

폭발 직전의 키와라의 분위기에 대해 반복적으로 부연설명하고 있는 부분들,

혹은 에런과 루크와 엘리의 10대 시절을 강조하는 부분들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이런 느낌은 어쩌면 드라이같은 구조를 가진 작품들의 태생적인 한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대와 캐릭터에 대해 확실히 독자의 뇌리에 각인시켜야 한다는 작가의 부담감이랄까요?

물론, 작품의 큰 미덕을 훼손할 정도는 절대 아니며,

독자에 따라 그런 지점을 재미있게 읽는 분이 더 많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또 한 가지는, 사실 굉장히 주관적일 수 있는 부분인데,

가끔씩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거나 잘 이해가 안 되는 문장들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게 원작의 문제인지, 번역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옥의 티처럼 보여서 많이 아쉬웠습니다.

 

제인 하퍼는 이 작품으로 데뷔하면서 많은 매체로부터 찬사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후속작에 대해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작가입니다.

번역하신 남명성 님에 의하면, 에런 포크를 주인공으로 한 다음 작품이 예정돼있다는데,

실은 금융범죄 전문수사관인 에런 포크가 다음 작품에서는 어떤 사건을 맡게 될지,

(추정컨대) 애증의 고향인 키와라 대신 대도시 멜버른에서는 어떤 캐릭터를 발휘할지

벌써부터 기대와 궁금증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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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O 모중석 스릴러 클럽 43
제프리 디버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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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인형도로변 십자가에 이은 캐트린 댄스 시리즈세 번째 작품입니다. 캐트린 댄스의 캐릭터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인간 거짓말탐지기입니다. 정확하게는 심문과 동작학(動作學), 보디랭귀지 분석이 전문인 캘리포니아 연방수사국(CBI) 요원입니다. 댄스는 상대방의 사소한 몸짓 하나만으로도 진실과 거짓말을 밝혀내는 것은 물론 상대의 심리상태까지 꿰뚫어보는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범죄자도 그녀의 시선에 걸려들면 땀 한 방울도 함부로 흘려서는 안 됩니다. 상대의 심리를 파악한 댄스의 집요하고도 뒤통수치는 심문이 연달아 날아오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댄스가 만난 강적은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컨트리 뮤지션 케일리 타운을 스토킹하는 에드윈 샤프입니다. 모처럼의 휴가를 맞아 잘 알고 지내던 케일리의 공연을 찾은 댄스는 케일리 주변 사람들이 차례로 살해되는 사건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범인은 케일리의 인기곡 ‘Your Shadow’의 가사에 따라 살인을 저지르는데, 현지 경찰은 평소 케일리에게 집요한 구애를 하던 에드윈을 즉각 체포하지만 미숙한 심문 탓에 곤혹스런 처지에 빠지고 결국 외부인인 댄스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문제는 댄스조차도 에드윈의 속내를 좀처럼 파헤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결국 수사는 공전하게 되고, 댄스는 (제프리 디버의 히어로 캐릭터인) 링컨 라임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리고 급진전된 수사 끝에 예상외의 범인이 밝혀지지만 그때부터 이야기는 끝도 없는 반전의 궤도를 달리기 시작합니다.

 

제프리 디버의 작품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안심할 수 없기로 유명한데, ‘XO’ 역시 끝났나 싶으면 또다시 시작되는 아찔한 롤러코스터를 방불케 합니다. 특히 노래 가사에서 영감을 얻은 끔찍한 살인수법, 케일리의 모든 것을 낱낱이 알고 있으며 그녀의 지인은 물론 적대자까지 희생자로 선택하는 범인의 행태 때문에 롤러코스터의 진폭이 훨씬 크고 요란합니다.

케일리의 친구이자 연방요원인 댄스 역시 여러 차례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는데, 음악과 함께 휴가를 즐기러 왔던 댄스로서는 날벼락을 맞은 것도 문제지만, 범인의 궁극적 목표가 케일리가 분명하다는 사실이 더욱 소름끼치는 일입니다. 수사가 막다른 골목에 처했을 때 링컨 라임의 도움을 청한 것은 그만큼 댄스에게 이 수사가 중요하다는 반증인 셈입니다.

 

링컨과 댄스의 협업은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입니다. 예상치 않은 보너스나 공짜 선물을 받은 느낌이랄까요? 물론 링컨과 그의 파트너 아멜리아 색스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한정된 역할에 충실하지만, 댄스에게 기대 이상의 선물을 전해주고 아름답게 퇴장합니다.

 

원래 컨트리 음악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요즘은 외국 음악을 잘 안 들은 탓에 컨트리 음악이 미국에서도 꽤 오래 전에 소멸(?)한 줄 알았는데, ‘XO’를 보니 아직도 여전히 정정한 것 같습니다. 본편 뒤에 부록으로 ‘Your Shadow’를 비롯 이 작품에 등장한 모든 곡의 가사가 실려 있고, 웹사이트에서 들을 수도 있다고 하니 기회가 되면 꼭 한번 들어봐야겠습니다.

 

사족으로, RHK링컨 라임 시리즈를 통해 익숙해진 아멜리아 색스의 이름이 비채의 ‘XO’에서는 어밀리아 색스로 표기됐습니다. 출판사도, 번역자도 다르니 이런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읽는 내내 딴 사람을 보는 것 같아 좀 어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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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보수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홍지로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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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소설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87분서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이자,

오리지널 주인공 스티브 카렐라의 자리를 위협하는(?) 코튼 호스 형사의 두 번째 출연작입니다.

 

(다 읽은 건 아니지만) 보통 두 개의 사건이 병행되던 전작들과 달리

살인자의 보수는 사냥총에 얼굴이 날아간 갈취범 살인사건 하나에만 매진하고 있습니다.

피살자는 비록 타인의 약점을 노려 사익을 취한 비열한 갈취범이지만

어쨌든 87분서의 형사들은 살인범을 잡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습니다.

하지만 갈취범의 피해자 중 한 명이 범인일 거라는 심증만 있을 뿐,

정작 경찰이 찾아낸 피해자들은 살인사건과는 무관한 자들이었습니다.

전작인 살인자의 선택에서 망신살 뻗치는 데뷔를 했던 코튼 호스 형사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갈취범 살인사건에 전력을 다 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실수하는 모습을 동료들에게 보이기 싫어 단독수사를 감행하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코튼 호스는 예상치 못한 성과를 올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치명적인 위기 상황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대략 정리한 줄거리지만, 이 시리즈를 한 편 이상 읽은 독자라면

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스티브 카렐라의 이름이 한 번도 안 나오나, 궁금할 것입니다.

전작인 살인자의 선택후반에 실린 저자의 말을 읽은 독자라면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익히 짐작할 수 있겠지만,

궁금히 여기는 독자들을 위해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작가 에드 맥베인은 집필 당시 편집자로부터

연애 한 번 맘대로 할 수 없는 성실한 유부남스티브 카렐라 대신

맘껏 연애도 할 수 있고 거칠기 짝이 없는 마초 같은 매력적인 형사를 강요받았고

그 결과 코튼 호스라는 캐릭터가 탄생하게 됐습니다.

번듯한 외모, 점잖은 이력과 달리 데뷔작에서 큰 실수를 하며 허당 캐릭터를 부여받았던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작가로부터 제대로 주인공의 포스를 선물 받게 되는데,

다른 동료들의 도움을 받긴 했어도 거의 단독으로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역할을 맡은 덕분에

실질적인 주인공이었던 스티브 카렐라를 거의 조연으로 위축시키고 만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1957년에는 편집자의 입김이 그만큼 셌다는 뜻이겠죠.

 

아무튼...

스티브 카렐라 뿐 아니라 마이어 마이어, 버트 클링, 아서 브라운 등

전통적인 87분서의 캐릭터들이 전작에 비해 분량이나 비중 모두 왜소해진 반면,

코튼 호스는 정열의 마초와 유능한 형사로서의 매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습니다.

피살자의 여친, 실종자의 애인, 식당에서 만난 웨이트리스 등

유부녀만 아니라면 언제 어디서든 짧고 강렬한사랑에 빠지는가 하면,

전작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예리하고 정확한 추리로 끝내주는 성과를 올리기도 합니다.

 

고백하자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상반된 느낌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분명 코튼 호스는 매력적인 캐릭터이고, 이야기도 MSG를 친 것처럼 재미있어진 건 사실인데

왠지 ‘87분서 시리즈만의 독특한 향기 그건 스티브 카렐라의 향기일지도 모릅니다

적잖이 사라졌다는 느낌도 동시에 받았다는 뜻입니다.

욕심 같아선 두 가지 미덕이 모두 살았다면 어땠을까, 라는 바람이지만

두 명의 영웅을 다 살리려다 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났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긴 했습니다.

 

갑자기 궁금함이 밀려와, 전에 읽은 킹의 몸값’, ‘아이스등 이후 시리즈의 서평을 찾아보니

어디에도 코튼 호스의 이름은 보이지 않더군요.

기억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마이어 마이어나 버트 클링의 이름이 서평에 나오는 걸 보면

코튼 호스의 비중이 축소됐거나, 시리즈 어디쯤에선가 하차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후반에 실린 저자의 말을 보면 대략 코튼 호스의 미래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

그건 꼭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동어반복이지만, ‘살인자의 보수는 재미 면에서는 어떤 전작들보다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물론 1957년에 창조된,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아날로그 서사의 아쉬움은 여전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에 의지하지 않고, 뛰고 달리며 끊임없이 생각하는

87분서의 형사들이 훨씬 더 안쓰럽고 기특해 보이고 애정이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뒤의 순서를 보면 ‘Lady Killer’-‘살의의 쐐기’-‘'Til Death’-‘킹의 몸값인데,

아직 안 읽은 살의의 쐐기를 먼저 읽어야 할지,

아니면 ‘Lady Killer’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순서대로 읽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물론 순서대로 출간될지 여부는 피니스아프리카에 맘대로겠지만요.^^

올해에만 ‘87분서 시리즈가 두 권씩 출간돼서 흐뭇했는데,

연말쯤 세 번째 출간소식을 바라는 것은 무리겠지만

너무 늦지 않게 ‘Lady Killer’가 나와주기를 조심스럽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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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과 천둥
온다 리쿠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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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에 한 번 개최되며 젊고 우수한 인재들을 다수 배출해내

클래식 음악계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요시가에 국제 피아노 콩쿠르.

한때 천재 소녀로 불렸지만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무대를 떠났던 에이덴 아야.

유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히는, 줄리아드 음악원 출신의 엘리트 마사루 카를로스.

음악을 전공했지만 악기점에서 일하며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28세 가장 다카시마 아카시.

그리고 양봉가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며 자유로운 음악을 추구해온 소년 가자마 진.

수많은 참가자들 사이에서 이들 네 사람이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자신과의 싸움.

3차에 걸친 예선을 뚫고 본선에서 우승을 거머쥘 사람은 누구인가?

진정 음악의 신에게 사랑받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에 흠뻑 빠진 적이 있습니다.

클래식을 소재로 한 청춘들의 성장 드라마인데,

문외한들조차 그 드라마에 등장한 클래식을 찾아 듣게 만들 정도로 매력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역시 꽤 오래 전의 일이지만, ‘나는 가수다초반 시즌에 흠뻑 빠진 적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가수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는 무대 자체도 좋았지만,

탈락자를 골라내기 위한 살 떨리는 경연을 지켜보는 일은

긴장과 재미는 물론 심지어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갖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노다메 칸타빌레나는 가수다모두 재미와 감동 외에 특이한 경험을 선사하기도 했는데,

그건 바로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갑자기 두 눈에서 툭 터져나오는 눈물이었습니다.

노다메와 그녀의 동료들이 일궈내는 클래식의 향연을 지켜보며 눈시울이 뜨끈해지기도 했고,

나는 가수다에서 간혹 카메라에 잡힌 관객이 흘리는 조용한 눈물을 보며

제 눈에서 툭 터져나온 눈물이 낯 뜨겁고 별난 일은 아니구나라는 위안을 받기도 했습니다.

꿀벌과 천둥은 바로 그런 사람을 울리고 웃기는 음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소재는 클래식이고, 배경은 젊은 천재들의 콩쿠르 무대지만,

음악이 갖는 고유하고 보편적인 속성이 잘 녹아있어서 누구나 흠뻑 빠져들 수 있는 작품입니다.

 

외피만 보면 무척 통속적인 설정입니다.

세 명의 천재와 한 명의 범인(凡人)이 주인공이며,

그들은 보름 넘는 콩쿠르를 통해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경쟁을 펼칩니다.

이야기는 전형적인 대결-갈등-애증-성장의 구도를 갖고 있고,

캐릭터들은 만화 속에 등장할 법한 매력적인 천재들로 구성돼있습니다.

예측불허의 해석과 연주로 모두를 놀라게 만드는 순수하고 이질적인 천재 가자마 진,

뛰어난 외모까지 겸비한 천재지만 튀기는커녕 오히려 평범해 보여서 매력적인 마사루,

천재성에 있어 진과 마사루의 중간쯤에 서있으며 내면에 큰 상처를 갖고 있는 에이덴 아야,

그리고 후천적 노력파에 해당하는 28세의 최고령(?) 아마추어 아카시가 그들인데,

이야기의 구도나 캐릭터만 보면 온다 리쿠 작품 맞아?” 소리가 절로 날만큼 대중적입니다.

하지만 오직 들릴 뿐인 음악의 세계를 눈에 보이는 색채와 이미지로 묘사한 문장을 읽다보면

역시 온다 리쿠!”라는 탄성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2악장 아다지오.

차분하고 장엄한 오케스트라 도입부.

숲속을 천천히 거니는 사슴이 보이는 듯하다.

희미한 안개가 피어오르고, 쌀쌀하지만 어딘가 신비한 공기가 팽팽하게 차오르는 아침.

밤은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아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이 주위에 감돈다.

어느덧 (객석에 앉은) 아야도 그 차가운 아침 안개 속을 거닐고 있었다.” (672p)

 

다만, 독자에 따라 색채와 이미지 묘사가 지루하거나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700페이지에 가까운 엄청난 분량 가운데 이런 묘사가 꽤 자주, 많이 등장하기 때문인데,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대목이라는 생각입니다.

(저 역시 그런 면에서 살짝 아쉬움이 있어서 별 반 개를 뺐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는 책을 읽었다기보다 한 편의 거대한 교향곡을 들은 듯한,

, 보름 넘도록 진행된 콩쿠르를 객석에 앉아 직접 본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는 그녀의 몽위를 읽은 뒤 마치 긴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이나

달의 뒷면을 읽은 뒤 판타지 속 도시로 여행을 다녀온 듯한 느낌과 비슷했습니다.

다만, 그 작품들이 스토리나 캐릭터 모두 몽환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힌 경우라면,

꿀벌과 천둥은 오히려 온다 리쿠답지 않게 지극히 사실적인 이야기를 전개시키면서도

음악이라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세계를 그녀 특유의 서사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노다메 칸타빌레나는 가수다를 보고 그랬듯이,

아마 저는 조만간 꿀벌과 천둥에 등장한 클래식들을 찾아 듣게 될 것 같습니다.

그 음악들을 모두 들은 뒤에 다시 한 번 이 작품을 읽는다면

저마다 절절한 사연들을 갖고 있는 주인공들의 과거와 현재,

, 그들이 콩쿠르를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에 좀더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고,

색채와 이미지로 묘사된 음악에 관한 문장들도 새롭게 읽힐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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