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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 이유 ㅣ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명물(?) 경찰 ‘존 리버스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입니다.
자칫 시리즈 초반 작품들만 읽곤 영영 헤어질 뻔 했던 존 리버스였지만,
천천히 예열되던 그의 매력은 조금씩 가속이 붙더니
결국엔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만드는 멋진 캐릭터로 성장했습니다.
직전에 읽은 다섯 번째 작품 ‘검은 수첩’은 그 매력의 정점을 찍은 듯한 느낌이었고,
덕분에 불과 4개월 만에 출간된 ‘치명적 이유’는 더 큰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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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 무드로 달아오른 한여름의 에든버러.
어느 날 잔혹하게 고문을 받고 살해당한 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조사를 위해 리버스 경위는 스코틀랜드 수사반으로 파견되지만, 그곳의 시선은 곱지 않다.
수사 끝에 피해자의 신원이 악명 높은 조직 보스의 아들로 밝혀지는데,
리버스는 시체에 남은 흔적에 주목한다. 범인들은 왜 이렇게까지 잔혹한 흔적을 남겼을까?
한편, 경찰이 사건의 단서를 찾아 동분서주하는 사이, 잔혹한 살인이 연달아 벌어진다.
관광객들로 꽉 들어 찬 도시에 테러가 예고되고,
리버스마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에게 습격을 당하는데..
(출판사의 책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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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앞서 서문으로 실린 ‘작가의 말’에서
“이 작품의 주제는 스코틀랜드의 파벌주의와 교파 분열”이란 문구를 본 순간
왠지 좀 ‘쉽게 읽힐 작품이 아닐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 것이 사실입니다.
스코틀랜드-아일랜드-잉글랜드의 복잡하고 오랜 갈등에 대해 미미한 지식만 갖고 있는 탓에
혹시라도 그 ‘갈등’이 이야기의 중요한 배경 또는 사건의 배후로 설정됐다면
꽤나 많이 헤매거나 아니면 좀처럼 따라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현실이 되기도 했습니다.
신교도와 가톨릭의 오랜 갈등,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북아일랜드의 폭력적인 상황,
그리고 IRA, UVF, 로열리스트, 얼스터의 붉은 손, 오렌지로열여단 등의 테러조직 등
스코틀랜드-아일랜드-잉글랜드의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개념들이 이야기의 근저에 깔려있습니다.
물론 존 리버스가 이 정치적 혹은 종교적 대립의 심판 역할을 맡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연이어 참혹한 상태로 발견되는 희생자들과 용의자들의 백그라운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런 난감한 개념들이 무척 중요한 ‘사전 필수지식’으로 설정된 탓에
정작 존 리버스의 활약과 사건의 본질이 자꾸 흐려지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희생자도 용의자도 모두 오랜 구원(舊怨)에 얽힌 것으로 추정되다 보니,
결국 존의 수사는 1960~70년대의 기록을 찾아보는 데까지 이르게 되고,
현재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은 대립 집단 간의 단순한 보복이나 입막음 차원이 아니라
좀더 큰 사건, 즉 불법적 무기반입을 통한 대량살상 테러 계획과 연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존으로서는 과거와 현재를 부지런히 오가며 수사를 해야 하는 벅찬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데,
거기에 덧붙여 존의 숙적이자 에든버러 최대의 악당인 캐퍼티까지 연루되는 것은 물론,
무슨 이유에선지 런던의 특수부까지 개입하고, 미국 FBI까지 관심을 갖기에 이르자
사건의 볼륨감은 거의 무한대로 확장되는 느낌을 주게 됩니다.
과거 기록 속의 사소한 단서들, 또는 발로 뛰어 찾아낸 사건 이면의 큰 그림들을 통해
존은 에든버러를 대량살상의 위기에서 구해냄과 동시에
세대를 이은 정치적-종교적 갈등, 대의에 목맨 무차별 테러, 비밀과 복수, 부패한 경찰 등
복잡하기 그지없던 여러 주제들을 하나의 가닥으로 수렴시키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그야말로 숨 돌릴 틈도 없이 달리느라 도저히 수습이 불가능해 보이던 여러 이야기가
마지막에 이르러 자동완성퍼즐처럼 착착 한 곳으로 모여드는 건 분명하지만,
이 대목에서도 어딘가 ‘뿌려놓기만 하고 회수하지 못한 복선 또는 장치들’이 있는 것 같아
깔끔하고 선명하게 결론을 설명했던 전작들과는 조금은 다른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와중에도 작가는 존의 입을 통해 이런저런 스코틀랜드 식 유머를 구사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작품 분위기 때문인지 냉소의 정도는 약하고, 현지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래서 유독 원문을 괄호 안에 병기한 문장이 많이 등장하곤 합니다.
이 시리즈의 색다른 매력 중 하나가 상대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존의 ‘썩은 유머’인데
기대만큼 맛보지 못한 것 역시 아쉽게 느껴지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존이 SCS(스코틀랜드 수사반)로 파견된 상태에서 이야기가 전개된 탓에
그의 든든한 우군인 왓슨 총경, 쇼반 클락, 브라이언 홈스와의 케미가 덜 보인 점도,
또, 그를 지독하게 못 살게 구는 로더데일 경감, 플라워 경위의 악행이 소소하게 그려진 점도
(그래도 서운하지 않을 정도로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꽤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아일랜드-잉글랜드의 구원(舊怨)에 관한 서사 자체는 흥미로웠지만,
아무래도 이해력이 딸린 상태에서 읽다 보니 정보 파악하는데 급급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큰 숲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 책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다시 한 번 읽는다면 큰 그림이 훨씬 더 잘 보일 것 같긴 한데,
언제쯤 그럴 기회가 올지 모르겠습니다.
번역하신 최필원 님께서 후기를 통해 벌써 차기작을 언급하셨는데,
제목은 ‘피 흘리게 하라’(Let It Bleed)라고 합니다.
차기작에선 존의 유머와 동료들의 케미, 사건에 매진하는 서사를 기대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