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 이유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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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명물(?) 경찰 존 리버스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입니다.

자칫 시리즈 초반 작품들만 읽곤 영영 헤어질 뻔 했던 존 리버스였지만,

천천히 예열되던 그의 매력은 조금씩 가속이 붙더니

결국엔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만드는 멋진 캐릭터로 성장했습니다.

직전에 읽은 다섯 번째 작품 검은 수첩은 그 매력의 정점을 찍은 듯한 느낌이었고,

덕분에 불과 4개월 만에 출간된 치명적 이유는 더 큰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 ● ●

 

페스티벌 무드로 달아오른 한여름의 에든버러.

어느 날 잔혹하게 고문을 받고 살해당한 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조사를 위해 리버스 경위는 스코틀랜드 수사반으로 파견되지만, 그곳의 시선은 곱지 않다.

수사 끝에 피해자의 신원이 악명 높은 조직 보스의 아들로 밝혀지는데,

리버스는 시체에 남은 흔적에 주목한다. 범인들은 왜 이렇게까지 잔혹한 흔적을 남겼을까?

한편, 경찰이 사건의 단서를 찾아 동분서주하는 사이, 잔혹한 살인이 연달아 벌어진다.

관광객들로 꽉 들어 찬 도시에 테러가 예고되고,

리버스마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에게 습격을 당하는데..

(출판사의 책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 ● ●

 

본문에 앞서 서문으로 실린 작가의 말에서

이 작품의 주제는 스코틀랜드의 파벌주의와 교파 분열이란 문구를 본 순간

왠지 좀 쉽게 읽힐 작품이 아닐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 것이 사실입니다.

스코틀랜드-아일랜드-잉글랜드의 복잡하고 오랜 갈등에 대해 미미한 지식만 갖고 있는 탓에

혹시라도 그 갈등이 이야기의 중요한 배경 또는 사건의 배후로 설정됐다면

꽤나 많이 헤매거나 아니면 좀처럼 따라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현실이 되기도 했습니다.

 

신교도와 가톨릭의 오랜 갈등,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북아일랜드의 폭력적인 상황,

그리고 IRA, UVF, 로열리스트, 얼스터의 붉은 손, 오렌지로열여단 등의 테러조직 등

스코틀랜드-아일랜드-잉글랜드의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개념들이 이야기의 근저에 깔려있습니다.

물론 존 리버스가 이 정치적 혹은 종교적 대립의 심판 역할을 맡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연이어 참혹한 상태로 발견되는 희생자들과 용의자들의 백그라운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런 난감한 개념들이 무척 중요한 사전 필수지식으로 설정된 탓에

정작 존 리버스의 활약과 사건의 본질이 자꾸 흐려지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희생자도 용의자도 모두 오랜 구원(舊怨)에 얽힌 것으로 추정되다 보니,

결국 존의 수사는 1960~70년대의 기록을 찾아보는 데까지 이르게 되고,

현재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은 대립 집단 간의 단순한 보복이나 입막음 차원이 아니라

좀더 큰 사건, 즉 불법적 무기반입을 통한 대량살상 테러 계획과 연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존으로서는 과거와 현재를 부지런히 오가며 수사를 해야 하는 벅찬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데,

거기에 덧붙여 존의 숙적이자 에든버러 최대의 악당인 캐퍼티까지 연루되는 것은 물론,

무슨 이유에선지 런던의 특수부까지 개입하고, 미국 FBI까지 관심을 갖기에 이르자

사건의 볼륨감은 거의 무한대로 확장되는 느낌을 주게 됩니다.

 

과거 기록 속의 사소한 단서들, 또는 발로 뛰어 찾아낸 사건 이면의 큰 그림들을 통해

존은 에든버러를 대량살상의 위기에서 구해냄과 동시에

세대를 이은 정치적-종교적 갈등, 대의에 목맨 무차별 테러, 비밀과 복수, 부패한 경찰 등

복잡하기 그지없던 여러 주제들을 하나의 가닥으로 수렴시키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그야말로 숨 돌릴 틈도 없이 달리느라 도저히 수습이 불가능해 보이던 여러 이야기가

마지막에 이르러 자동완성퍼즐처럼 착착 한 곳으로 모여드는 건 분명하지만,

이 대목에서도 어딘가 뿌려놓기만 하고 회수하지 못한 복선 또는 장치들이 있는 것 같아

깔끔하고 선명하게 결론을 설명했던 전작들과는 조금은 다른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와중에도 작가는 존의 입을 통해 이런저런 스코틀랜드 식 유머를 구사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작품 분위기 때문인지 냉소의 정도는 약하고, 현지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래서 유독 원문을 괄호 안에 병기한 문장이 많이 등장하곤 합니다.

이 시리즈의 색다른 매력 중 하나가 상대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존의 썩은 유머인데

기대만큼 맛보지 못한 것 역시 아쉽게 느껴지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존이 SCS(스코틀랜드 수사반)로 파견된 상태에서 이야기가 전개된 탓에

그의 든든한 우군인 왓슨 총경, 쇼반 클락, 브라이언 홈스와의 케미가 덜 보인 점도,

, 그를 지독하게 못 살게 구는 로더데일 경감, 플라워 경위의 악행이 소소하게 그려진 점도

(그래도 서운하지 않을 정도로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꽤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아일랜드-잉글랜드의 구원(舊怨)에 관한 서사 자체는 흥미로웠지만,

아무래도 이해력이 딸린 상태에서 읽다 보니 정보 파악하는데 급급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큰 숲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 책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다시 한 번 읽는다면 큰 그림이 훨씬 더 잘 보일 것 같긴 한데,

언제쯤 그럴 기회가 올지 모르겠습니다.

 

번역하신 최필원 님께서 후기를 통해 벌써 차기작을 언급하셨는데,

제목은 피 흘리게 하라’(Let It Bleed)라고 합니다.

차기작에선 존의 유머와 동료들의 케미, 사건에 매진하는 서사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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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을 빌려 드릴까요
사토 아유코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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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보디 렌털포르노 소설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가와데 문예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고백하자면, 출판사 소개글의 첫 줄을 보고 호기심이 동한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동시에, 지독한 성애 묘사가 노골적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묵직하고 애틋한 여운을 남겼던

구보 미스미의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국내에선 19금 출간)의 좋은 기억이 떠올라

호기심 반, 기대감 반으로 이 작품을 읽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실, 특별히 줄거리라고 정리할 내용은 별로 없습니다.

주인공 후지노 마야는 뭇 남성들에게 자신의 몸을 대여해주는 20살의 명문대 재학생입니다.

이야기는 그녀와 뭇 남성들의 만남, 그녀와 그녀 친구들과의 소소한 일상들이 전부입니다.

성장소설이라고 하기도, 파괴소설(?)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긴 하지만,

아무튼, 특별히 포르노 소설이라고 못 박을 만한 장면은 별로 없고,

오히려 자신의 마음과 육체와 두뇌에 대한 존재론적인 고민이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합니다.

 

어둡고 무겁지 않다는, 오히려 가볍고 밝은 장난 같다는 점에서

마야는 자신의 보디 렌탈을 매춘과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고 그녀의 목적이 거액의 렌탈료, 부의 축적인 것도 아닙니다.

작품 여기저기서 독백이나 대화를 통해 그녀는 보디 렌탈의 동기와 목적을 설명합니다.

 

사랑은 무겁고 답답하다. 하나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비일상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싶다는 동경심, 완전한 오브제가 되어 버리는데 대한 동경심.

인간이 아닌 물건이 되고 싶다.

자학도 아니고 복수도 아니다. 구태여 말한다면 가벼워지기 위해 하는 일이다.

나 자신을 텅 비워 버리고 싶다.

나는 이를테면 하나의 무형의 물질이다.

나의 육체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빌려주어도 상관없지 않은가?

(여러 페이지에서 발췌하여 편집한 내용입니다)

 

독자에 따라 마야의 행위는 자기 파괴로 보일 수도 있고, 치유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둘 중 어느 하나라고 딱 꼬집을 수 없을 만큼 마야의 행동이 일관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론 텅 빈 그릇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론 허무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위악적인 치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앞서 성장소설이라고 하기도, 파괴소설(?)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고 한 건 이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솔직하게 평하자면, ‘?’라는 질문에 대해 명확하게 답하지 못하는 마야를 보면서

읽는 내내 답답함과 궁금함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습니다.

텅 빈 그릇이 된다는 게 도대체 뭘까?

사막처럼 메마르고 싶다는 욕망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래서 그녀가 도착하고 싶은 종착지는 어디일까?

 

두 편의 해설(일본편, 한국편)과 옮긴이의 말까지 샅샅이 읽어봐도 그 답을 찾진 못했습니다.

제 이해력의 부족이 원인인지, 그런 답을 찾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작품인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보디 렌탈이라는 극단적인 소재를 도입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작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정체는 책을 덮을 때까지 제겐 오리무중이었습니다.

마음과 육체와 두뇌가 아무런 관련도 없는 허무의 상태를 지향한다는 마야의 주장과는 반대로

마지막에 제게 남은 이미지는 망가진 관절 인형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자기 파괴적인 캐릭터와 서사를 기대했던 탓에

어딘가 난해한 느낌까지 드는 이 작품에 깊이 심취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 어떤 의도(?)를 갖고 접근한 독자들에게도 쉽게 어필하긴 어려운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물론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이고, 호불호는 극단적으로 갈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족으로...

딱히 번역의 문제가 눈에 띄진 않았지만, 간혹 서걱거리는(?) 느낌을 받은 건 사실입니다.

특히 마야의 심리 또는 생각에 관한 디테일한 묘사들이 그랬는데,

그 부분들이 매끄럽고 이해하기 쉽게 번역됐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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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는 밤에만 사냥한다 미아&뭉크 시리즈
사무엘 비외르크 지음, 이은정 옮김 / 황소자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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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 깃털, 백합꽃, 오각형으로 배치된 양초 등

다분히 주술적인 분위기로 장식된 공터에서 17살 소녀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미아와 뭉크를 비롯한 수사팀은 소녀가 기거하던 보육원을 샅샅이 뒤지고 탐문하지만

어디에서도 단서는 나오지 않고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갈 뿐입니다.

그러던 중, 피살자가 감금된 상태에서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 찍힌 동영상이 제보되고,

그것이 특별한 목적을 갖고 제작된 것이란 사실이 드러나면서 수사는 급물살을 탑니다.

 

● ● ●

 

나는 혼자 여행 중입니다에 이은 미아&뭉크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단서를 통해 사건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특별한 직관력의 소유자인 여형사 미아 크뤼거와

인심 좋은 옆집 아저씨 같은 베테랑 형사 홀거 뭉크 콤비가

6살 소녀들의 연쇄피살사건을 다뤘던 전작에 이어 다시 한 번 엽기적인 사건과 마주합니다.

 

전작도 그랬지만 이번 작품에서도 어딘가 으스스한 북유럽의 주술적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피살자들은 제의를 위한 희생물처럼 장식된 채 발견되고,

(나중에 밝혀지는) 범인의 의도는 상식과는 거리가 먼 판타지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위기는 주인공인 여형사 미아 크뤼거의 두 가지 캐릭터, ,

쌍둥이의 죽음의 트라우마 때문에 약물에 중독된 채 자살을 꿈꾸는 불행한 여자이면서,

동시에, 직감과 예감에 의해 진실을 밝히는 뛰어난 형사라는 면모와 잘 맞아 떨어져서

독자로 하여금 살짝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의 책읽기를 경험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작가의 그런 시도가 전작에서는 나름 설득력과 개연성을 얻는데 성공했지만,

올빼미는~’에서는 좀 지나치게 설정된 나머지 부작용이 더 커졌다는 생각입니다.

뭐랄까.. 마치 전작보다 센 설정이 필요했던 작가의 욕심이 좀 과해졌다고 할까요?

문제는 그 과욕 때문에 미스터리의 서사가 힘을 얻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작가가 범인을 워낙 다른 차원의 세계에 사는 인물로 설정한 탓에

탐문과 추리 등 주인공의 순수한 노력만으로는 진실을 찾을 방법이 요원해진 것입니다.

, 우연 또는 갑작스런 깨달음 같은 변수 없이는 미스터리를 풀기가 힘들어진다는 뜻입니다.

 

직감과 예감을 통해 진실을 밝히는 미아의 능력은 이번 작품에선 거의 발휘되지 않습니다.

뭉크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 역시 계속 헛발질만 할 뿐 좀처럼 수사를 진전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잇단 외부의 도움이 그들 앞에 선물처럼 나타납니다.

살해되기 전 피살자가 고문당하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

피살자와 똑같은 방식으로 처리된개와 고양이의 사진,

임종 직전 자신의 오랜 죄를 고백하는 의문의 노인 등

어느 하나라도 없었다면 사건을 미궁에 빠뜨릴 만한 중요한 제보와 인물들이 속속 등장합니다.

 

이 과정에서 미아와 뭉크는 너무 무력합니다.

미아는 여전히 트라우마에 갇힌 채 동어반복처럼 괴로움을 호소하면서

꽤 많은 장면에서 (좀 짜증이 날 정도로 자주) 술에 취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뭉크는 이혼한 아내의 재혼 문제 때문에 얻은 두통에 시달리며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더구나, 조연들이 겪는 다사다난한 갈등들이 적잖은 분량으로 묘사되는데,

문제는 그 갈등들이 전부 메인 사건과 이런저런 식으로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물론 작가는 나름의 방식으로 필연성을 설명하고 있지만,

하필 사건을 맡은 형사들의 딸이나 약혼녀가 사건에 연루된다는 것은 좀 심한 억지입니다.

 

정리하자면, 주인공들은 트라우마와 두통 때문에 고생하는 모습이 더 많이 보이고,

범인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혼자 놀고있으며,

진실 찾기는 생각지 못한 우연과 선물처럼 날아든 제보에 의해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작가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또다시 미아의 쌍둥이 트라우마에 관한 떡밥을 흘립니다.

다음 편의 주된 이야기가 아무래도 또 그쪽으로 전개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전 미아&뭉크 시리즈는 이 작품에서 굿바이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약과 술에 취해 자살만 꿈꾸는 주인공을 더는 바라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의 트라우마가 작품의 서사와 잘 녹아든다면 그것 자체로 매력적인 설정이지만,

미아의 트라우마는 왠지 설정을 위한 설정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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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의 마녀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박춘상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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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에게 한 실업가가 찾아온다.

그는 자신이 곧 살해당할 것 같다며, 자신이 죽은 후의 처리를 햐쿠타니에게 의뢰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실제로 살해당하고, 범인으로 세 번째 부인인 아야코가 지목된다.

햐쿠타니 센이치로는 그를 독살했다고 자백한 아야코의 변호를 위해 법정에 선다.

승산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이 사건의 행방은?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약간 상세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아직 안 읽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파계재판’, ‘문신살인사건’, ‘대낮의 사각에 이은 다카기 아키미쓰와의 네 번째 만남입니다.

패전 후부터 1960년대 사이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읽은 작품마다 묘한 매력들이 있어서 신간이 나오면 어김없이 찾아 읽게 되는 작가입니다.

특히 이 작품은 파계재판에 이은 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 시리즈라서 더욱 관심이 갔는데,

넉넉한 중편 정도의 분량이라, 장편을 기대했던 저로서는 좀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이야기의 큰 얼개는 파계재판과 유사합니다.

원죄(冤罪,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소재로 한 점,

법정에 선 피고인의 누명을 벗겨주는 히어로 변호사 스토리라는 점,

그리고, 변호에 그치지 않고 진범을 공개 지목하여 법정 안을 충격에 빠뜨린다는 점입니다.

 

이런 구조의 이야기에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은 유력한 범인으로 추정되는 피고인입니다.

단서가 됐든 정황이 됐든 목격담이 됐든 그 피고인은 명백한 진범으로 여겨져야 하고,

그 추정이 단단할수록 원죄를 벗기려는 주인공 변호사의 이야기가 쫀쫀해지기 때문입니다.

법정의 마녀의 피고인 아야코는 그런 면에서 꽤나 단단한 추정 속에 갇힌 인물입니다.

피살자와 함께 있는 현장에서 발견됐고, 독살의 증거인 청산가리가 그녀 방에서 발견됐으며,

피살자의 가족들이 하나같이 그녀를 동기가 분명한 범인으로 지목한 것은 물론

본인 스스로 경찰에서 범행을 자백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애초 생전의 피살자로부터 사후 처리 의뢰를 받은 주인공 햐쿠타니가

유력한 범인으로 지목된 피고인을 변호한다는 점입니다.

, 햐쿠타니는 피살자와 함께 있던 피고인을 제일 먼저 목격한데다

그녀가 사인을 병사로 은폐하려 한 것까지 지켜본 탓에

누구보다 피고인이 범인이라는 심증을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햐쿠타니는 어딘가 기분 나쁜 분위기를 발산하는 피살자 가족들의 태도가 수상했고,

무엇보다, 피고인에 대한 탐문을 통해 원죄의 가능성을 확인하곤 승산 없는 변호를 결심합니다.

 

1963년의 작품이라 그런지 파계재판’(1961)과 마찬가지로

단선적이고 심플하고, 정직한 돌직구 같은 법정 미스터리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한 햐쿠타니의 노력은 집요하고 끈질긴 탐문이 거의 전부이고,

그 과정에서 얻은 예기치 못한 수확덕분에 피고인의 누명을 벗기는 것은 물론

진범의 정체와 살해 동기까지 폭로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때문에 법정 장면과 탐문 장면이 대부분인 이야기는 단조롭게 보일 수밖에 없는데,

대신 작가는 피살자와 피고인, 그리고 그들의 수상한 가족들 쪽에 진한 양념을 뿌려둡니다.

, 두 명의 전처와 그 소생들, 죽은 형의 딸, 예비사위로 점찍은 부하직원 등

적대적 감정들로 얽히고설킨 복잡한 가계도를 설정함으로써 법정물의 단조로움을 극복합니다.

악의에 찬 면면들을 보면 누구라도 범인이 될 만한 동기를 갖고 있는 것 같고,

독살이란 방법 때문에 누구도 완벽한 알리바이를 주장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결국 물적 단서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서적 단서가 더 중요해진 탓에

햐쿠타니의 조사는 좀처럼 쉽게 성과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인공 햐쿠타니 만큼 눈길을 끄는 두 명의 캐릭터가 있는데,

한 명은 특유의 을 발휘하여 햐쿠타니의 수사에 큰 도움을 주는 그의 아내 아키코이고,

또 한 명은, ‘파계재판에 이어 햐쿠타니와 재대결하게 된 맹렬 검사 아마노입니다.

햐쿠타니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대목에서 비범한 직감을 발휘하는 아키코는

매력적인 연상녀에 신비함까지 풍기는 캐릭터라 무척 기대가 됐고,

아마노 검사는 파계재판에서 햐쿠타니에게 워낙 큰 역전패(?)를 당했던 전력이 있어서

이번에는 어떤 승부를 펼칠지 역시 큰 기대를 했습니다.

하지만, 작품 자체가 짧아서 그랬겠지만, 두 사람 모두 소소한 역할에 그칠 수밖에 없었고,

특히 아마노 검사는 단순 조연 정도로만 그려져서 아쉬움이 컸습니다.

 

후반에 실린 상세한 작가 소개를 보니 다카기 아키미쓰의 왕성한 이력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 시리즈만 해도 7작품이나 되고,

가장 매력적인 작품인 문신살인사건이 속한 가미즈 교스케시리즈도 18작품이나 됩니다.

다음에 어떤 작품이 국내에 소개될지 모르겠지만,

단순한 미스터리 구조와 올드한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의 느낌이 좋아서 그런지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들이 꾸준히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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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꽃 엔시 씨와 나 시리즈 3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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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말’, ‘밤의 매미에 이은 엔시 씨와 나 시리즈세 번째 작품입니다.

일상 미스터리의 고전이라 불렸다는 이 시리즈에는 엔시 씨라는

좀 특별한 캐릭터를 지닌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주인공 는 스무살 문학부 여대생입니다.

책을 좋아하고, 고문학과 전통예능에 조예가 깊은 그녀가 특별히 좋아하는 장르 가운데

라쿠고(落語)라는 일본 특유의 이야기 예술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부채나 수건 같은 소도구와 함께 목소리, 추임새, 몸짓만으로

해학과 풍자가 섞인 이야기를 익살스럽게 연기하는 예술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자신이 좋아하는 라쿠고의 대가 슌오테 엔시 씨를 알게 된

이후 일상에서 기이하거나 미스터리한 일을 겪을 때마다 그를 찾아 상담을 하곤 합니다.

 

앞선 두 편의 작품이 모두 단편집인데 반해 가을꽃은 이 시리즈의 첫 장편입니다.

장르 자체가 일상 미스터리라 어쩌면 단편이 더 어울리는 시리즈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미스터리를 다루다 보니 단편에서는 분량이나 깊이 면에서 아쉬운 점이 많았는데,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장편이 출간돼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가을꽃은 이 시리즈에서는 처음으로 죽음이 등장합니다.

주인공 의 후배인 여고생 쓰다가 학교 옥상에서 의문의 추락사를 당하고,

그로 인해 초등학교 시절부터 쓰다의 절친이던 이즈미가 패닉상태에 빠집니다.

옥상은 밀실이나 다름없는 상태라 범인을 특정하기 곤란한 상황이고,

패닉상태에 빠진 이즈미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삶의 끈을 놓아버린 사람처럼 지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에게 의문의 편지들이 날아듭니다.

그 중 하나는 쓰다 마리코는 살해당했다.”라는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는 사건 당일 쓰다를 목격했던 선생님과 학생들을 만나 진실을 알아내려 하지만

수집된 단서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자살인지, 타살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습니다.

때마침 엔시 씨가 라쿠고 공연 때문에 연락을 해오자 는 그의 도움을 얻기로 합니다.

 

가을꽃은 장편이지만 287페이지의 짧은 분량입니다.

여고생 쓰다의 죽음의 미스터리가 메인 스토리이긴 하지만,

역시 그에 맞먹는 비중으로 주인공 의 성장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작가는 다양한 매개체를 통해 미스터리와 성장 스토리를 이런저런 방식으로 연결시킵니다.

동화에서 고전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독서, 또래 친구들과의 수다 또는 상담,

태풍과 함께 등퇴장하는 여름과 가을의 분위기, 계절의 변화에 맞춰 피고 지는 꽃 등

주인공 의 삶과 일상을 지배하는 다양한 매개체들이 성장의 밑거름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매개체들은 어떤 식으로든 로 하여금 쓰다의 죽음을 연상하도록 만듭니다.

그것은 때론 책임감의 형태로, 때론 진실 찾기라는 순수한 욕망의 형태로 발현됩니다.

 

와 엔시 씨가 찾아낸 진실 속에는

죄 없이 살아온 평범한 사람에게도 부조리한 사건은 일어날 수 있다.

그런 것까지도 우리의 일상.” (옮긴이의 말 )이라는,

무겁고 비극적이지만, 실은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당혹스러운 주제가 진하게 녹아있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평범한 삶 속에 부조리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인터넷 사회 뉴스만 검색해도 그런 일들이 얼마나 흔하게 벌어지고 있는지,

,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일상이 어떻게 붕괴되는지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쓰다와 이즈미가 마주한 부조리한 사건은 화가 날 정도로 안쓰럽기 그지없습니다.

아무리 그런 것까지 모두 우리의 일상이라 하더라도 말이죠.

 

전작들을 읽지 않은 독자들은 의 방대한 독서량에 놀랄 것이고,

연이어 인용되는 다양한 동화, 고전, 소설에 당황할 수도 있습니다.

미스터리와는 무관해 보이는 꽤 많은 분량의 문장들을 보면서

이 작품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출연 분량이 얼마 안 되는 엔시 씨에 대해서도 무척 궁금히 여길 수 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이 의문과 놀람들은 전작을 읽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을 문제들입니다.

만일 가을꽃이 매력적으로 읽혔다면, 또는 와 엔시 씨의 전사(前史)가 궁금하다면

앞선 두 편의 단편을 읽어보실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시리즈의 첫 장편을 읽게 된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었지만,

미스터리에 좀더 방점이 찍히지 않은 것은 역시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작가가 의 이야기를 좀더 사랑했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세 편의 시리즈를 모두 읽고 보니 이것이 이 작품의 진짜 미덕이고

작가 기타무라 가오루의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확실해졌습니다.

그에 대한 호불호는 물론 독자들의 몫이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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