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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강
핑루 지음, 허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웬만한 미스터리 서사에는 제법 익숙한 편이라고 여겨왔지만,
‘검은 강’은 그런 저에게도 꽤나 낯설고 독특한 작품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범인과 피살자를 모두 공개한 점이라든가
사건 전후 그들의 심리를 디테일하게 그린 점은 크게 색다른 방식은 아니지만,
사건을 바라보는 작가의 냉정한 시선, 그 시선을 담아내는 담담하면서도 심연 같은 문장들,
누구를 비난하고 누구를 동정해야 할지 점점 모호해지는 캐릭터들,
반전도 충격도 없지만 왠지 읽을수록 서서히 진흙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듯한,
또는, 악취를 풍기며 느리게 흘러가는 검은 강을 눈앞에서 바라보는 듯한 불쾌함 등
작품 내내 제목에 걸맞는 ‘이상한’ 느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심플합니다.
커피점에서 일하는 젊은 여자(자전)가 단골이던 중년 부부(훙보, 훙타이)를 살해합니다.
작가는 ‘누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야기를 구성합니다.
즉, ‘자전은 왜 훙타이 부부를 살해했을까? 부부는 왜 자전에게 살해당했을까?’가 중심입니다.
작가는 두 명의 화자 – 범인인 젊은 여자 자전과 살해된 중년 여자 훙타이 – 를 앞세우는 한편,
두 사람의 여러 시제 – 현재, 과거, 대과거 등 – 를 동원하여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자전의 경우, 트라우마와 상실감만 남긴 과거 유년기, 훙 부부와 묘한 악연으로 엮인 현재,
그리고,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남자친구 셴밍과의 불확실한 미래가 엇갈려 묘사됩니다.
훙타이 부부의 경우, 처음부터 어긋난 결혼생활, 각자 다른 궤도를 달리던 치명적인 욕망들,
그 결과 임계점까지 다다른 서로를 향한 증오심과 함께 자전에 대한 애증이 그려집니다.
이런 서사와 구성은 필연적으로 범인과 피해자 모두에게 단선적인 캐릭터 이상의 면모,
즉, 그들은 절대 악도 아니고 절대 선도 아니라는 식의,
도덕적으로 무척 모호해질 수 있지만, 그래서 더 현실감 있는 면모를 부여하기 마련입니다.
작가는 자전을 ‘사이코패스’와 ‘동정 받아 마땅한 가해자’의 경계에 세워놓고,
훙 부부를 ‘불쌍한 피해자’와 ‘자업자득이라 비난 받을 만한 피해자’의 경계에 세워놓습니다.
그런 후 그들이 살인과 피살에 이르기까지의 물리적, 심리적 과정을 집요하게 묘사합니다.
살인이든 피살이든 응축된 에너지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뚝딱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 작품 속의 자전과 훙 부부는 꽤 오랫동안 각자의 불행한 에너지를 쌓아왔고,
작가는 그 지점에 방점을 찍은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아무 정보 없이 책을 읽어서 다 읽은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작품이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점입니다.
실제 사건이 벌어졌을 때 대만에서는 범인인 젊은 여자에 대한 엄청난 비난이 일었다고 합니다.
언론과 여론은 물론, 공정해야 할 재판장에서까지 무죄추정원칙 따윈 무시됐으며,
그런 분위기 속에서 범인에게는 사갈녀(蛇蠍女, 뱀과 전갈처럼 남에게 해를 가하는 여자)라는
듣기만 해도 등골이 싸해지는 별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작가가 굳이 현실의 ‘사갈녀’를 옹호하는 듯한 픽션을 자아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실의 ‘피살된 부부’에게 어딘가 일그러진 캐릭터를 부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솔직히 이 부분은 다 읽고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차라리 100% 픽션이었다면 작가의 독특한 정신세계에 위화감 없이 반했을 것 같은데,
막상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을 알게 된 순간
작품 내용과는 별개의 편치 못한 감정이 일어난 것이 사실입니다.
어쩌면 이마저도 작가의 의도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작품 뒤에 실린 정보를 보니 대만에서는 꽤 유명한 작가인 것 같은데,
핑루의 여러 전작들이 이런 식으로 실제 사건에 기반을 둔 작품들이라고 합니다.)
이런저런 불편한 감정들에도 불구하고 ‘검은 강’은 꽤 오랜 여운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비록 그 여운이란 게 애틋하거나 아련한 것과는 정반대인 음습한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담담한 문장들 속에 잔뜩 웅크린 듯 숨어있던 지독한 악의들,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훑어가는 자전과 훙타이의 처연하지만 소름 돋는 고백들,
그리고 쓰레기로 가득 찬 검은 강물과 그 기슭을 장악한 끈적끈적한 진흙 등
작품 내내 오감을 자극하던 온갖 것들이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여전히 제 주변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느낌이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핑루의 신작이 나온다면
이런 불편한 여운을 한번쯤은 더 겪어보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