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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체온증 ㅣ 에를렌뒤르 형사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 지음, 김이선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3월
평점 :
호숫가의 별장에서 마리아라는 여성이 자살한 채 발견된다.
부검의는 자살로 판정하고 조서도 그렇게 적힌다. 사건 파일은 신속하게 정리된다.
경찰로서 할 일은 다 끝난 것처럼 보이는 이 지점에서 에를렌뒤르 형사는 수사를 시작한다.
자살로 죽은 여자는 사후 세계를 믿었다고 했다.
그녀에게는 영매에 대한 믿음, 의사인 남편, 그리고 막대한 유산이 있었다.
눈곱만큼도 타살의 흔적이 없지만, 그녀는 정말 자살한 것일까?
그녀는 왜 그토록 사후 세계에 집착했으며,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과거의 상처는 무엇일까?
(출판사 책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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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과는 첫 만남이지만 인터넷 서점을 검색해보니
‘저체온증’ 전에 이미 세 편의 작품이 한국에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2006년 ‘무덤의 침묵’, 2007년 ‘저주받은 피’, 2009년 ‘목소리’ 등인데,
낯익은 제목이 있어 찾아보니 그 중 한 편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제 책장 속에 갇혀있더군요.
저체온증은 ‘극심한 냉기 속에 모든 신진대사가 둔화되고 혼수상태에 빠지는 상태.’입니다.
‘얼음대륙 아이슬란드의 싸한 이미지’와 ‘냉기로 인한 혼수상태를 이르는 저체온증’의 조합은
첫 페이지를 읽기도 전에 어딘가 암울하고 불온한 분위기를 내뿜습니다.
실제로, 저체온증은 이 작품에서 전개되는 세 개의 비극을 상징하는 직간접적 코드입니다.
주인공인 레이캬비크 경찰 범죄수사과의 베테랑 형사 에를렌뒤르는
어릴 적 일명 화이트아웃이라 불리는 눈보라 속에서 동생을 잃은 뒤
홀로 살아남은 죄책감 때문에 평생을 심리적 저체온증 상태로 살아온 인물입니다.
그의 현재 삶 역시 고단하긴 마찬가지인데,
악의만 남긴 채 갈라선 아내, 술과 약물에 절어있는 자식들은 그에겐 진행형의 고통입니다.
호숫가 별장에서 목을 매 자살한 상태로 발견된 마리아는
유년기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뒤부터 죽음과 사후 세계에 집착하며 살아왔고,
이후 거의 강박적으로 집착하던 어머니마저 암으로 사망한 뒤엔
삶 자체가 저체온증 혹은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여자입니다.
또한, 30년이 지났지만 에를렌뒤르가 여전히 외면하지 못하는 몇몇 실종사건의 유족들은
그 긴 저체온증의 시간을 흘려보낸 뒤 이제 삶을 마감하기 일보직전에 있지만,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실종된 자식들 때문에 죽음을 앞두고도 냉기에 휩싸여 있습니다.
작품 내내 차디찬 얼음물 속에 갇힌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어서인지
사실 ‘저체온증’은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는 스릴러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스릴러라기보다 ‘저체온증에 걸린 사람들의 비극’에 더 가깝다는 생각입니다.
동생을 잃은 에를렌뒤르, 부모를 잃은 마리아, 자식을 잃은 실종 유가족들의 이야기는
어디 한군데 밝은 곳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싸늘한 냉기만 내뿜고 있고,
그 냉기 속에는 오랜 시간 동안 봉인돼있던 추악한 비밀들이 은밀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명백한 자살로 판명된 마리아의 죽음을 비공식적으로 수사하기로 한 에를렌뒤르의 집념은
사실 ‘진범 찾기’보다 저체온증에 걸린 사람들을 위로하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어 보입니다.
물론 그는 사소한 단서에서 극적인 추리를 끌어내기도 하고,
탐문에서 얻어낸 진술 한마디를 바탕으로 추악한 비밀의 실체를 깨닫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이 분명 뛰어난 경찰소설인 건 맞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엔 장르물 이상의 가슴 먹먹함이 밀려 들어와서
에를렌뒤르라는 인물이 평생을 겪어 온 저체온증에 전염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분명 매력적인 작가의 매력적인 작품인 건 맞는데,
솔직히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의 작품을 다시 읽게 될지는 장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읽는 내내 주먹을 꽉 쥐어야 하고 미간을 찡그려야 하는 책읽기 때문이랄까요?
또는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묵직하거나 얼음장 위에 누운 듯 초조해져야 하기 때문이랄까요?
그런 예감에 화답(?)하듯 해설에 실린 작가 인터뷰를 보면 “내가 가장 관심 있는 인물은
상실을 맞닥뜨린 사람들, 시간 속에 얼어붙어버린 사람들.”이란 대목이 있습니다.
이 인터뷰를 보고 나니 더더욱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의 작품을 읽기가 주저됩니다.
물론 그리 멀지 않은 시간 안에 그의 작품이 문득 생각날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이상하게도 이런 정서들은 묘한 중독성을 갖고 있어서
갑자기 마음 한 구석에서 툭 튀어나오곤 하기 때문입니다.
읽으면서 힘들고 불편하고, 읽고 나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서사 속에
뭔가 진짜배기 같은 감정이 들어있기 때문일까요?
마음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라도 다음 책읽기는 지극히 속된 이야기를 고르고 싶은데,
어쩐지 그런 이야기를 읽을수록 에를렌뒤르가 생각날 것 같은 건 왜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