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킬 수 없는 약속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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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자신이 일하던 가게의 손님이던 오치아이의 제안으로 바(bar)의 공동경영자가 된 무카이.

그는 과거의 삶을 버리고, 믿을 수 있는 파트너와 자신의 성()을 새롭게 구축하였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소박하지만 평온한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버려버린 과거에서 도착한 한 통의 편지가 예전에 봉인한 기억을 되살린다.

그들은 지금 교도소에서 나왔습니다.”

(출판사의 책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 ● ●

 

줄거리나 인물들을 좀더 상세하게 소개하고 싶었지만,

출판사의 절제된소개글을 보니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이렇듯 어중간한 인용에 그쳤습니다.

다만, 궁금증 유발 차원에서 한두 줄만 더 한다면,

살인을 약속한 대가로 어두운 과거와 단절하고 새 삶을 얻었던 주인공이

15년이 지난 지금, 그 약속의 실행을 요구받으면서 벌어지는 미스터리입니다.

 

최근 읽은 야쿠마루 가쿠의 두 작품(‘기다렸던 복수의 밤’, ‘악당’) 모두

짧게는 10여 년, 길게는 30년 전의 과거사를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았는데,

이런 설정은 주인공의 고뇌, 갈등, 상처를 그 기간만큼 깊고 절실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어서

사회적 문제나 개인의 복수를 주로 다루는 야쿠마루 가쿠의 서사와 잘 매치되는 것 같습니다.

 

주인공 무카이 사토시는 인생에서 결정적인 두 번의 딜레마와 마주칩니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먼 미래에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약속을 해야 하는 상황이 하나이고,

15년 간 봉인했던, 결코 현실이 될 거라 여겨본 적 없는 그 약속의 이행을 요구받게 됨으로써

지금껏 일궈온 소소한 행복과 단란한 가족을 모조리 깨부숴야 하는 상황이 또 하나입니다.

과거, 나름의 절박한 사정으로 영혼을 팔아 위기를 넘겼지만,

결국 그 거래가 혹독한 부메랑으로 돌아와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된 경우라고 할까요?

 

무카이는 과연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저지를까?

그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약속한 자의 마음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혹시, 살인을 포기한다면 그는 어떤 참혹한 대가를 치르게 될까?

무카이에게 약속된 살인의 이행을 요구하는 자는 과연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가?

이런저런 의문과 궁금증과 긴장감이 팽팽하게 펼쳐진 상황에서

무카이는 그에게 주어진 얼마 안 되는 시간 안에 미션을 마무리하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지금까지 읽었던 야쿠마루 가쿠의 주인공들 대부분이 무카이와 같은 사면초가의 신세였는데,

그들과 마찬가지로 무카이는 행복하다고도, 불행하다고도 할 수 없는 결말을 맞이합니다.

그것은 이 비극의 출발점이 결국은 무카이 자신이 저질렀던 젊은 날의 죄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 죄를 저지른 사람은 새 삶을 꿈꿀 수 없는 것일까?’라는 홍보 문구는

아마도 무카이의 이런 상황을 적절하게 짚어낸 한 줄 카피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마지막에 드러난 한 조각의 진실이 조금은 작위적으로 구성됐다는 점입니다.

뭐랄까, 무카이를 조금이나마 구원하기 위해 작가가 이런저런 변명을 하는 느낌이랄까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한 언급은 할 수 없지만,

이 작품을 다 읽은 독자라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유일한 옥의 티인 건 분명합니다.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들은 사이즈나 구성 면에서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이긴 하지만

주인공들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심리적 딜레마에 관한 한

여느 대작보다 탁월하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런 주인공이 사회적 문제나 개인의 복수라는 주제 속에 던져지면서

이야기는 힘과 긴장감과 호기심을 함께 얻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소위 문학적 멋내기는 찾아볼 수 없는 쉽고 평이한 문장들이지만

오히려 더 깊고 오래가는 여운을 남기는 것 역시 야쿠마루 가쿠만의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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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에 걸린 소녀 밀레니엄 (문학동네) 4
다비드 라게르크란츠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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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는 개인적으로 베스트 목록 상단에 올릴 만큼

재미와 인상과 무게감이 남달랐던 작품들입니다.

어쩌면 작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더는 후속편을 만날 수 없게 된 탓도 있겠지만,

뭐랄까, 일종의 전설 같은 느낌까지 주는 대작이라고 할까요?

 

그런 밀레니엄 시리즈의 후속편이 국내에 6년 만에 소개됐습니다.

다비드 라게르크란츠라는 낯선 작가에 의해서 말이죠.

사실, 지난 9월에 출간 소식을 들었지만 읽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탐사전문기자 미카엘 블롬크비스트와

천재 해커이자 증오+폭력+연민으로 똘똘 뭉친 인간 흉기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여전하겠지만

스티그 라르손이 아닌 다른 작가에 의해 그려진 두 사람을 지켜보는 일은

아무래도 불편하거나 아쉬움만 남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미줄에 걸린 소녀이후 다비드 라게르크란츠의 이름으로

밀레니엄 시리즈가 계속 이어졌다는 소식(후속작은 자기 그림자를 찾는 남자’)을 듣곤

결과야 어찌 되든 미카엘과 리스베트를 한 번은 만나봐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 ● ●

 

판매부수의 추락, 특종의 부재 등으로 위기에 빠진 밀레니엄과 미카엘은

새로운 모기업의 상업적 정책 때문에 존재감 자체가 사라질 처지에 놓입니다.

그 무렵, 미국에서 돌아온 천재 과학자 프란스 발데르 사건이 터지면서

미카엘은 몇 년 만에 리스베트와 온라인으로나마 재회하게 됩니다.

당초 사건성 자체가 부족해 보이던 천재 과학자 사건은

시간이 지날수록 미카엘에게 엄청난 특종의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특히, 미국, 러시아, 스웨덴의 정보기관, 대기업, 해커그룹이 연루됐다는 사실에 더해,

리스베트가 꽤 오래 전부터 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카엘은

극히 위험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프로젝트라고 판단하고 본격적인 취재에 나섭니다.

무엇보다 이 사건 어딘가에, 오래 전 자취를 감췄던 리스베트의 쌍둥이 자매이자

포악한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카밀라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카엘은

리스베트가 그 어느 때보다 피하기 힘든 위험한 상황에 놓였음을 깨닫습니다.

 

● ● ●

 

일단, 왜 다비드 라게르크란츠가 밀레니엄 시리즈의 계승자로 지목받을 수 있었는지

스티그 라르손의 독자 입장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작품인 건 분명합니다.

미카엘이나 리스베트의 캐릭터만 놓고 보면 어디에서도 이질감을 느끼기 힘들었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 역시 전작들에 버금가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스티그 라르손의 전작들과의 비교를 떠나,

작품 자체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여러 가지 면에서 아쉬움이 더 많이 남은 게 사실입니다.

캐릭터는 여전하더라도 매력을 찾아보기 힘든 두 주인공,

200페이지에 이르는 첫 챕터의 지루함과 명료하지 못한 사건 개요,

딱히 왜 등장했는지 알 수 없는 일부 조연들의 모호한 존재감,

(특히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천재 과학자의 아들과 리스베트의 쌍둥이 자매 카밀라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연성과 작위성이 과도한 인물들인데,

문제는 이들이 미카엘 못잖은 비중과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 읽고도 선명하게 정리되지 않는 선과 악의 대결 구도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대작 스릴러로서 갖춰야 할 미덕이 많이 부족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쉬운 점은 아무래도 두 주인공에 관한 점인데,

미카엘은 위험한 진실을 좇는 탐사전문기자로서의 매력을 좀처럼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다지 능동적이지도 않고, 큰 위기에 빠지는 경우도 별로 없습니다.

스릴러 주인공이라기보다 거의 관찰자 수준에서 이야기를 끌어갈 뿐입니다.

리스베트는 몇몇 해킹과 구출 작전 장면에서 그녀다운 모습을 보여준 것 외에는

독자 입장에선 안 읽고 넘어가도 아무 지장 없는 수학과 과학 설명에 더 바쁩니다.

다 읽고 보면 그녀의 가장 큰 미션은 해킹한 파일의 암호 깨기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그 과정에서 리스베트가 한 일은 (의외의 도움을 받은 것 외엔) 별로 없습니다.

 

주인공들이 그다지 주인공답지 않은 면모만 보여주는데 반해,

사건의 외양은 인공지능의 미래, 각국 정보기관의 비리, 악질적인 국제 해커그룹의 준동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능가하는 규모로 마냥 확장됩니다.

솔직히 이만한 사이즈와 능력을 갖춘 악당들이 번번이 미션에 실패하는 것도 이상하고,

미카엘 한 명만 잡아서 족치면(?) 금세 해결될 고민을 질질 끄는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꽤 비중 있게 그려진 천재과학자 아들의 서번트 증후군이나

중후반부에 갑자기 등장한 리스베트의 쌍둥이 자매 카밀라에 대한 장광설은

엔딩을 허무하게 만들거나 이야기 방향을 엉뚱한 쪽으로 틀게 만들어서

굳이 왜 설정했는지 그 이유도 잘 알 수 없었습니다.

 

쓰다 보니 정말 혹평이 돼버렸는데,

객관적인 평을 하고 싶었지만 역시 스티그 라르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 와서 다시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를 읽어보면

예전처럼 열광하지 않을 수도, 이에 못잖은 혹평을 쓸 수도 있겠지만,

그때 남은 여운과 새 시리즈에 기대치가 너무 컸던 탓인지

자꾸 마음에 안 드는 부분만 눈에 들어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카엘과 리스베트만 생각하면 곧 출간될 자기 그림자를 찾는 남자가 너무 궁금하지만,

아마 그보다는 스티그 라르손의 유작들을 다시 읽을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습니다.

그때의 미카엘과 리스베트는 모든 감정을 이입하게 만든 매력덩어리 캐릭터였고,

사건과 조연들 역시 주인공과 한데 섞여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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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번째 인격
기시 유스케 지음, 김미영 옮김 / 창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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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집’, ‘악의 교전’, ‘말벌에 이어 네 번째로 만난 기시 유스케입니다.

사실, 오래 전에 강렬한 느낌을 줬던 검은 집이후 그의 팬이 됐지만,

아까운(?) 마음에 아껴 읽다 보니 이제 겨우 네 번째 작품을 읽게 됐습니다.

국내에 12편이나 출간됐고, 소장한 작품도 7~8편인데 너무 인색했던 셈입니다.

 

‘13번째 인격은 기시 유스케의 데뷔작입니다.

제목대로 13개의 인격을 지닌 다중인격 여고생 치히로가 등장하고,

다른 사람의 사고와 감정을 읽을 줄 아는 특별한 능력자 유카리가

치히로의 인격을 통합하고 치유하기 위해 분투하는 여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두 사람은 1995년 발생한 고베대지진을 통해 만납니다.

지진의 트라우마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원봉사를 온 유카리는

모든 봉사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감당하기 어려운 여고생 치히로를 맡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의 사고와 감정을 읽는 과정에서 그녀에게 여러 인격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문제는 대지진 와중에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이는 무척 이질적인 13번째 인격입니다.

유카리는 그 인격에게 이소라라는 특이한 이름이 붙은 점도,

, 그 이름이 일본 괴담 속에 등장하는 끔찍한 원령의 이름이란 점도 석연치 않습니다.

자원봉사기간이 끝나고 몇 달이 지난 뒤 다시 치히로를 찾아온 유카리는

그 사이 치히로 주변에서 의문의 죽음이 잇달았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배후에 13번째 인격인 이소라가 연루됐음을 깨닫습니다.

유카리는 이소라를 제거하지 않는 한 끔찍한 비극이 멈추지 않을 것을 예감합니다.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특별한 능력자 유카리가 사악한 13번째 인격 이소라와 대결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임사체험, 유체이탈, 인격 간의 헤게모니 대결 등 강렬한 판타지 요소와 함께

치히로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의문의 죽음이라는 현실적 공포가 가미되면서

굉장히 복잡한 서사가 400여 페이지에 걸쳐 전개됩니다.

 

현실과 거리가 먼 판타지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독자는 어느 순간부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망각한 채

유카리가 끌고 가는 이야기 속으로 속절없이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의문의 13번째 인격 이소라의 정체에 대해 호기심과 공포심을 함께 느끼게 되는데

유카리의 탐문과 추리로 이소라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에는

머리칼이 쭈뼛거릴 정도의 당혹감을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엔,

도시전설, 원령 괴담, 잔혹 호러, 살인 미스터리를 한꺼번에 읽은 듯한 묵직한 두통은 물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소라의 저주와 공포까지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비현실적 공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현실감 있게 읽히는 건

100% 유카리의 매력적인 캐릭터 덕분입니다.

다른 사람의 사고와 감정을 읽는다는 건 얼핏 특혜처럼 보이지만,

실은 원하지 않는 엄청난 소음과 환각에 시달리게 되는 저주와도 같은 능력입니다.

그 때문에 어린 시절 가출을 한 유카리는 먹고 살기 위해 천박한 직업을 택하지만

그곳에서 의외로 자신의 능력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곤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런 특별한 능력과 선량한 마음씨의 조합이 치히로에게 관심을 갖게 만들었고,

결국엔 치명적인 위험을 무릅써가면서 이소라와의 대결에 헌신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런 매력적인 캐릭터 탓인지, 왜 기시 유스케가 유카리 시리즈를 이어가지 않았는지

의문스럽기도 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심리학이나 약리학에 대한 엄청난 자료조사의 흔적이 작품 곳곳에 배어있는데,

간혹 너무 지나친 나머지 부담스럽게 읽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흔적들 덕분에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슬그머니 희미해지면서

독자에게 좀더 리얼한 공포심을 전달하게 된다는 점에서

작가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애초 괴담이니 원령이니 하는 컨셉에 우호적이지 않은 독자라면 모를까,

조금이라도 공포물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출간된 지 20년도 넘은(일본 출간 1996) 이 작품을 2017년에 읽는다고 해도

꽤 높은 만족감을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데뷔작부터 엄청났던 기시 유스케의 내공에 새삼 놀라고 또 놀란 즐거운 책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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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라 불린 남자 스토리콜렉터 58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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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미식축구 선수, 아내와 딸과 처남을 참혹한 범죄로 잃은 전직 경찰, 그리고 과잉기억증후군에 걸려 원하든 원치 않든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된 남자. 데이비드 발다치가 창조한 특이한 히어로 에이머스 데커는 전작에서 자신의 가족들을 살해한 범인을 갖은 고난 끝에 밝혀냈고, 이번엔 FBI의 객원요원이 되어 20년 간 사형수로 갇혀있던 한 남자의 진실을 추적합니다.

 

미식축구선수였던 멜빈 마스는 20년 전 부모 살해범으로 체포됐습니다. 물증, 동기, 목격자가 워낙 확고해서 꼼짝없이 유죄를 선고받았고, 20년의 수형기간을 보낸 현재, 사형집행일만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형수가 자신이 마스 사건의 진범이라고 주장하면서 사태는 급반전됩니다. 전작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서 인연을 맺은 FBI 로스 보거트의 제안으로 미제 사건을 다루는 신설 특별수사팀에 참여한 데커는 마스 사건에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관심을 갖습니다. 자신의 가족들이 살해된 사건 때처럼 갑자기 누군가 자신이 진범이라며 나선 점, 마스와는 대학시절 미식축구선수로서 직접 경기장에서 만난 적이 있던 점, 그리고 무엇보다 마스가 사형수로 보낸 20년의 세월 뒤에 묻힌 비밀에 대한 의문 때문입니다.

 


전작인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개인적으로 2016년 베스트 11으로 꼽았던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1년 만에 과잉기억증후군에 걸린 명탐정데커를 다시 만난 건데, 그는 더욱 매력적인 인물이 됐고, 사건은 더욱 복잡하고 강한 비극성을 지녔으며, 페이지는 훨씬 더 빨리 넘어가는, 그야말로 기대에 100% 부응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20년을 복역한 한 사형수의 억울한 사연은 단순히 진짜 범인은 누구?’를 넘어 한 가족의 비극과 미국 남부의 씻을 수 없는 역사적 상처로까지 확장되면서 서사의 무게를 꽤 묵직하게 만듭니다.

 

거의 원 맨 밴드에 가까웠던 전작에 비해 이번에 데커는 여러 조력자들과 함께 합니다. 보기 드물게 선한(?) FBI 요원 보거트와 얄밉고 집요한 저널리스트 알렉스 재미슨은 전작에 이어 이번에도 데커와 호흡을 맞추는데 케미는 좀 부족해도, 데커의 든든한 의지처 또는 지원사격조로 활약합니다. 그 외에 심리학자 대븐포트, 전형적인 FBI 요원 밀리건도 맛깔난 양념 캐릭터들입니다. 이들은 상부의 압력, 보이지 않는 적들의 기습과 살해 위협 속에서도 꿋꿋이 팀워크를 유지하며 20년 전의 진실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사실, 이번 작품에서 데커의 과잉기억증후군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가족을 그리워하거나 대학시절 경기장에서 맞닥뜨렸던 마스를 떠올리는 일을 위해 활용될 뿐 정작 수사 과정에서는 미미한 정도로만 언급되는데, 전작을 읽은 입장에선 오히려 더 편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아마 기억에 의존한 특별한 수사가 강조됐더라면 오히려 작위적으로 보였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다만, 데커를 이번 작품으로 처음 만난 독자라면 주인공이 과잉기억증후군이라던데, 별 거 없네.”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를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과잉기억증후군 대신 작가는 데커에게 냉정함과 가차 없는 판단력을 부여했는데, 거기까지는 충분히 매력적으로 보였지만, 거의 천재적인 명탐정처럼 활약하는 데커는 어딘가 낯설게만 느껴졌습니다. 컴퓨터 비밀번호를 쉽게 알아내고, 평범한 단어 하나에서 결정적 단서를 유추하고, 누구도 생각 못한 엄청난 상상력으로 사건의 골격을 파악합니다. 또 현장에서 단서를 찾아낸다기보다 두뇌활동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아서 때론 안락탐정의 분위기까지 풍긴 점은 유감이었습니다. 거침없이 넘어가던 페이지가 2/3쯤 잠시 느슨해졌던 건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또 하나의 아쉬움은 번역 제목인데, 전작인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원제인 ‘Memory Man’의 적절한 의역으로 보인 반면, ‘괴물이라 불린 남자는 원제 ‘The Last Mile’과는 너무 동떨어져 보였기 때문입니다. ‘The Last Mile’사형집행장까지 죄수가 걷는 마지막 길을 뜻하는데다 멜빈 마스는 어느 모로 보나 괴물이라 불릴 만한 캐릭터가 아니었습니다. 전작과 운율을 맞추기 위한 의도로 보이는데, 오히려 내용이나 원제에 충실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소소한 아쉬움을 제외하곤 괴물이라 불린 남자는 올해 가장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입니다. 시리즈 첫 두 편이 모두 제 마음을 사로잡았으니 이제 데이비드 발다치를 관심목록 최상단에 올려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20여 년 동안 30편이 넘는 작품을 쓴 데이비드 발다치가 2016년에야 한국에서 관심을 받기 시작한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습니다. 신간이 아니라도 그의 과거 작품들이 한 편이라도 더 빨리 소개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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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머니 밀리언셀러 클럽 148
로스 맥도날드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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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이 즐겨 찾는 테니스 클럽을 방문한 사설탐정 루 아처는

자산가의 아들인 피터 제이미슨이란 청년에게서 의뢰를 받는다.

이웃집에 살며 어린 시절부터 알아 온 그의 약혼녀 버지니아가

돌연 인텔리풍의 프랑스인 프란시스 마텔에게 홀려 약혼을 파기한 것이다.

제이미슨은 마텔이 사기꾼이며 심지어 진짜 프랑스인조차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처는 마텔의 행적을 뒤쫓고, 교양 있는 프랑스인만이 대답할 수 있는 문답까지 준비하며

그의 정체를 파악해 보려 하지만 단서는 쉽사리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더구나 수사를 진행할수록 테니스 클럽이 위치한 부유한 도시 몬테비스타의 사람들에게서

갖가지 미심쩍은 정황들을 확보한 아처는 수사의 끝이 결코 해피엔딩이 될 수 없음을 직감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고백하자면, ‘3대 하드보일드 거장이라는 로스 맥도널드의 이름도,

또 그가 창조한 명탐정 캐릭터 루 아처도 제겐 거의 생소한 이름입니다.

물론 로스 맥도널드의 활약 시기가 20세기 중반이란 이유도 있지만,

대실 해밋, 레이먼드 챈들러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인물이란 걸 감안하면

생소함 자체가 꽤나 당혹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아무튼...

이야기의 출발점, 즉 아처가 피터라는 청년으로부터 받은 의뢰는 무척 심플합니다.

자신의 약혼녀를 빼앗은 마텔이라는 자칭 프랑스 출신 남자의 정체를 파악해달라는 것인데,

아처가 본격적으로 탐문을 시작하자마자 이야기의 볼륨감은 갑작스러울 정도로 확 커집니다.

 

마텔을 쫓는 또 다른 인물들이 나타나고, 마텔의 동행으로 보이는 수상한 커플이 등장합니다.

마텔을 기억하는 대학교수들은 그를 뛰어난 수재라고 칭송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가 프랑스 인이 아니라 중남미 또는 스페인 계 밀입국자라고 진술합니다.

아처 입장에서 마텔은 그야말로 캐면 캘수록 새로운 면모가 드러나는 양파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마텔이 7년 전 버지니아의 아버지의 자살 사건은 물론 거대한 도박판의 불법자금,

즉 블랙머니와도 연관돼있다고 확신한 아처는 이제 단순히 마텔의 정체 밝히기를 넘어

부유한 도시 몬테비스타에서 벌어졌던 미심쩍은 사건들에까지 관심을 확장시킵니다.

 

불과 350여 페이지에 불과한 작품이지만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만 놓고 보면 거의 600페이지 급 서사에 맞먹는 작품입니다.

수상한 프랑스 청년의 정체 밝히기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아처의 광폭 탐문이 진행되면서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급격하게 볼륨을 키웁니다.

그는 몬테비스타 곳곳은 물론 L.A, 라스베거스까지 빛의 속도로 오가며 수사를 펼칩니다.

당연히 그만큼 많은 인물들을 만날 수밖에 없고,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정보 역시 방대하면서도 어느 하나 허투루 다룰 것이 없습니다.

아처는 그 모든 정보와 인간관계들을 면밀하게 조사하고 추리합니다.

쉬어가는 코너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는 오로지 만 열심히 합니다.

너무 빡빡하고 건조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말이죠.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명탐정이자 지독한 워커홀릭이라고 할까요?

 

이런 식의 이야기 구성과 주인공 캐릭터 설정은

속도감과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독자들의 몰입도를 높이는 장점이 있는 반면,

동시에 독자의 이해력을 떨어뜨리고 피로도를 높이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과밀한 인구밀도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은데,

너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다 이야기는 과속으로 달리는 바람에

미처 그들의 과거와 현재, 애정과 증오 등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600페이지가 필요한 인물들에게 350페이지밖에 주어지지 않았으니

캐릭터, 감정, 관계 등 디테일한 부분이 설명될 여지가 별로 없었다는 생각입니다.

 

루 아처는 1949년에 출간된 움직이는 표적을 통해 탄생했다는데,

블랙머니1965년에 출간된 작품입니다. (루 아처 시리즈는 모두 18편이라고 하네요)

아무래도 하드보일드 캐릭터를 제대로 맛보려면 그의 첫 데뷔를 읽는 일이 필수인데,

최소한 시리즈의 중반쯤 되는 작품을 통해 처음 만나다 보니

루 아처의 진짜 매력을 맛봤다고는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부유층들만의 테니스 클럽이 자리 잡은 부촌 몬테비스타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

일말의 동정심도 없어 보이는 송곳 같은 탐문과 핵심만 짚어내는 간결한 말투,

이성과 논리로 중무장한 듯한 금욕적인 태도 등

레이먼드 챈들러의 명품 캐릭터 필립 말로를 연상시키는 대목들이 간간이 목격되긴 하지만

루 아처만의 특별함까지 찾아내지 못한 점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황금가지에서 루 아처 시리즈를 계속 출간할지는 알 수 없지만,

혹 출간된다면 사건 자체보다 루 아처의 매력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을 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초기의 루 아처를 통해 그의 매력을 알게 된 뒤 블랙머니를 다시 읽는다면

그땐 지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책읽기가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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