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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에 걸린 소녀 ㅣ 밀레니엄 (문학동네) 4
다비드 라게르크란츠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평점 :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는 개인적으로 베스트 목록 상단에 올릴 만큼
재미와 인상과 무게감이 남달랐던 작품들입니다.
어쩌면 작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더는 후속편을 만날 수 없게 된 탓도 있겠지만,
뭐랄까, 일종의 전설 같은 느낌까지 주는 대작이라고 할까요?
그런 ‘밀레니엄 시리즈’의 후속편이 국내에 6년 만에 소개됐습니다.
다비드 라게르크란츠라는 낯선 작가에 의해서 말이죠.
사실, 지난 9월에 출간 소식을 들었지만 읽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탐사전문기자 미카엘 블롬크비스트와
천재 해커이자 증오+폭력+연민으로 똘똘 뭉친 인간 흉기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여전하겠지만
스티그 라르손이 아닌 다른 작가에 의해 그려진 두 사람을 지켜보는 일은
아무래도 불편하거나 아쉬움만 남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미줄에 걸린 소녀’ 이후 다비드 라게르크란츠의 이름으로
밀레니엄 시리즈가 계속 이어졌다는 소식(후속작은 ‘자기 그림자를 찾는 남자’)을 듣곤
결과야 어찌 되든 미카엘과 리스베트를 한 번은 만나봐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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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부수의 추락, 특종의 부재 등으로 위기에 빠진 ‘밀레니엄’과 미카엘은
새로운 모기업의 상업적 정책 때문에 존재감 자체가 사라질 처지에 놓입니다.
그 무렵, 미국에서 돌아온 천재 과학자 프란스 발데르 사건이 터지면서
미카엘은 몇 년 만에 리스베트와 온라인으로나마 재회하게 됩니다.
당초 사건성 자체가 부족해 보이던 천재 과학자 사건은
시간이 지날수록 미카엘에게 엄청난 특종의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특히, 미국, 러시아, 스웨덴의 정보기관, 대기업, 해커그룹이 연루됐다는 사실에 더해,
리스베트가 꽤 오래 전부터 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카엘은
극히 위험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프로젝트라고 판단하고 본격적인 취재에 나섭니다.
무엇보다 이 사건 어딘가에, 오래 전 자취를 감췄던 리스베트의 쌍둥이 자매이자
포악한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카밀라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카엘은
리스베트가 그 어느 때보다 피하기 힘든 위험한 상황에 놓였음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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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왜 다비드 라게르크란츠가 ‘밀레니엄 시리즈’의 계승자로 지목받을 수 있었는지
스티그 라르손의 독자 입장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작품인 건 분명합니다.
미카엘이나 리스베트의 캐릭터만 놓고 보면 어디에서도 이질감을 느끼기 힘들었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 역시 전작들에 버금가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스티그 라르손의 전작들과의 비교를 떠나,
작품 자체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여러 가지 면에서 아쉬움이 더 많이 남은 게 사실입니다.
캐릭터는 여전하더라도 매력을 찾아보기 힘든 두 주인공,
200페이지에 이르는 첫 챕터의 지루함과 명료하지 못한 사건 개요,
딱히 왜 등장했는지 알 수 없는 일부 조연들의 모호한 존재감,
(특히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천재 과학자의 아들과 리스베트의 쌍둥이 자매 카밀라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연성과 작위성이 과도한 인물들인데,
문제는 이들이 미카엘 못잖은 비중과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 읽고도 선명하게 정리되지 않는 ‘선과 악의 대결 구도’ 등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대작 스릴러로서 갖춰야 할 미덕이 많이 부족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쉬운 점은 아무래도 두 주인공에 관한 점인데,
미카엘은 위험한 진실을 좇는 탐사전문기자로서의 매력을 좀처럼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다지 능동적이지도 않고, 큰 위기에 빠지는 경우도 별로 없습니다.
스릴러 주인공이라기보다 거의 관찰자 수준에서 이야기를 끌어갈 뿐입니다.
리스베트는 몇몇 해킹과 구출 작전 장면에서 그녀다운 모습을 보여준 것 외에는
독자 입장에선 안 읽고 넘어가도 아무 지장 없는 수학과 과학 설명에 더 바쁩니다.
다 읽고 보면 그녀의 가장 큰 미션은 해킹한 파일의 암호 깨기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그 과정에서 리스베트가 한 일은 (의외의 도움을 받은 것 외엔) 별로 없습니다.
주인공들이 그다지 주인공답지 않은 면모만 보여주는데 반해,
사건의 외양은 인공지능의 미래, 각국 정보기관의 비리, 악질적인 국제 해커그룹의 준동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능가하는 규모로 마냥 확장됩니다.
솔직히 이만한 사이즈와 능력을 갖춘 악당들이 번번이 미션에 실패하는 것도 이상하고,
미카엘 한 명만 잡아서 족치면(?) 금세 해결될 고민을 질질 끄는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꽤 비중 있게 그려진 천재과학자 아들의 서번트 증후군이나
중후반부에 갑자기 등장한 리스베트의 쌍둥이 자매 카밀라에 대한 장광설은
엔딩을 허무하게 만들거나 이야기 방향을 엉뚱한 쪽으로 틀게 만들어서
굳이 왜 설정했는지 그 이유도 잘 알 수 없었습니다.
쓰다 보니 정말 혹평이 돼버렸는데,
객관적인 평을 하고 싶었지만 역시 스티그 라르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 와서 다시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를 읽어보면
예전처럼 열광하지 않을 수도, 이에 못잖은 혹평을 쓸 수도 있겠지만,
그때 남은 여운과 새 시리즈에 기대치가 너무 컸던 탓인지
자꾸 마음에 안 드는 부분만 눈에 들어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카엘과 리스베트만 생각하면 곧 출간될 ‘자기 그림자를 찾는 남자’가 너무 궁금하지만,
아마 그보다는 스티그 라르손의 유작들을 다시 읽을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습니다.
그때의 미카엘과 리스베트는 모든 감정을 이입하게 만든 매력덩어리 캐릭터였고,
사건과 조연들 역시 주인공과 한데 섞여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