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갱년기 소녀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평점 :
1970년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순정만화 『푸른 눈동자의 잔』.
갑작스러운 연재 중단 후 작가가 은퇴를 선언하면서 미완결로 남아버렸지만,
어린 시절 가슴 두근거리며 읽던 이 만화를 아직 기억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
주로 40~50대의 중년 여성들로 구성된 ‘푸른 6인회’는
팬클럽 안에서도 열렬한 팬심을 자랑하며 시간과 애정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간부들의 모임.
프렌치레스토랑에서 정기 모임을 열고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회지를 발행하며
추억의 만화 속 세계에서 소문과 망상을 공유하던 이들 사이에,
한 멤버의 실종과 함께 불길한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복잡한 현실문제에서 도피해 막연히 주인공이 되기를 꿈꾸는 이들의 엇나간 열정과 집착은
끝내 유혈사태까지 불러오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 ● ●
2015년 이맘때쯤, 마리 유키코의 ‘여자 친구’와 ‘골든 애플’을 연이어 읽었는데,
그때 쓴 서평을 찾아보니 “이 작가의 작품은 절대 연이어 읽으면 안 되겠다.”는 다짐과 함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답답함이 부담스러웠고, 한 번으론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 구조 탓에
두 번 읽지 않곤 못 배기게 하는 난감함도 부담스럽다.”라는 애증(?) 섞인 멘트가 눈에 띕니다.
서점에서 제목과 표지가 눈에 띄어 집어든 뒤 작가 이름을 보곤 잠시나마 주저했던 것도,
또, 집에 모셔놓고도 애써 ‘다음에’라며 게으름을 부린 것도 그런 트라우마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갱년기 소녀’는 앞서 읽은 두 작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전해줬는데,
무엇보다 무난하고 쉬운 책읽기가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전작들의 경우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지고,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 상태에서 책장을 넘겼는데,
‘갱년기 소녀’는 문장이나 이야기 구조 모두 굉장히 친절하고 심플한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마리 유키코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인 ‘여자들 사이의 미묘한 심리전’은 여전했지만,
이번에는 뭐랄까, 조금은 단선적인 돌직구 스타일의 심리전이란 인상이 강했습니다.
몸이 갱년기에 이른 현재까지도 10대 시절 열광했던 만화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팬클럽을 관리하고 간사 역할을 자처하며 현실과 몽상의 경계조차 망각한 5명의 여자들은
중년이기에, 여자이기에, 약자이기에 겪어야만 하는 자신들의 지긋지긋한 현실을
‘푸른 6인회’라는 간사 모임을 통해 잠시나마 망각하려고 분투합니다.
없는 살림에 빚까지 내가며 화려한 옷차림을 준비하고,
턱없이 비싼 식사와 후식을 만끽하며 그 덕분에 얻게 되는 거만함을 뽐내지만,
그건 찰나에 가까운 신기루일 뿐입니다.
거짓으로 꾸몄던 부와 명예와 우아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빈곤, 폭력, 황폐화된 가족이란 비참한 현실이 즉각 그녀들을 옥죄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위안을 받고자 참여했던 ‘푸른 6인회’에서 그녀들은 새로운 감정을 맛보게 되는데,
그것은 멤버들에 대한 시기, 질투, 증오, 열등감, 살의 등입니다.
결국 그녀들은 누군가를 속이거나 소외시키거나 비난함으로써 가해자가 됩니다.
그리고 가해자로서 승기를 확인한 순간 그녀들은 쾌감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여자 친구’와 ‘골든 애플’이 꽤 복잡한 구조 속에 그보다 더 복잡한 심리전을 그렸다면,
‘갱년기 소녀’는 마리 유키코답지 않게 5명의 여자들의 현실을 민낯 그대로 그립니다.
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갱년기 소녀’에 대한 아쉬움이
그런 무난함, 친절함, 심플함에서 비롯됐다는 점입니다.
중반까지만 해도 예전 같지 않은 편한 책읽기가 마음에 쏙 들었는데,
뒤로 갈수록 등장인물들의 상투적인 설정과 거기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는 상투적인 스토리,
그리고 그다지 긴장감을 자아내지 못한 채 동어반복을 거듭하는 사건들 때문에
‘지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읽고 있는 거지?’라는 의문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5명의 여자들은 이름과 환경만 조금씩 다를 뿐 거의 하나의 캐릭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남편에게 학대당하거나, 부모와 갈등을 빚거나, 유산문제로 형제와 다툽니다.
다들 가족에게서 도망치고 싶거나 자신만의 도피처를 마련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물론 빈부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결국 그녀들의 문제의 대부분은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다 보니 한 사람이 한 챕터씩 맡은 구성에도 불구하고
각 챕터 별로 확실한 개성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대동소이한 느낌만 받게 됩니다.
멤버들이 하나씩 의문의 사체로 발견되는 미스터리 역시 딱히 궁금증을 자아내지 못하는데,
애초 이 작품의 의도가 ‘범인 찾기 미스터리’와는 거리가 멀어 보여서 그런지
그 부분이 크게 불만스럽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미묘한 심리전’과 함께 작품의 한 축을 담당했어야 할
미스터리의 긴장감이 훅 떨어지다 보니 아쉬움이 배가된 것이 사실입니다.
마리 유키코는 꽤 중독성이 강한 작가입니다.
‘갱년기 소녀’ 전에 불과 두 작품, 그것도 꽤 불편한 책읽기의 기억만 남았는데도
그녀의 신간이라면 일단 끌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참 신기한 일입니다.
그 불편함 속에 든 중독성 강한 매력은 무엇일까요?
‘갱년기 소녀’는 어쩌면 그 불편함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아서 실망한 셈이 됐는데,
스스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모순된 결론이지만 그래도 그게 사실인 걸 어찌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