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을 파는 가게 1 밀리언셀러 클럽 149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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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단편들을 한데 모아 놓으면 자정에만 문을 여는 노점상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나는 이런저런 것들을 늘어놓고, 와서 하나 골라보라고 독자들을 유혹한다.

하지만 정식으로 경고를 하자면 위험한 품목도 있으니 조심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런 품목들 안에는 악몽이 숨겨져 있어서...”

 

최고의 이야기꾼 스티븐 킹의 단편집 악몽을 파는 가게서문의 일부인데,

노골적인 호객행위이면서 동시에 대단한 자부심이 엿보이는 문구입니다.

처음엔 수록작 중에 악몽을 파는 가게가 실려서 이런 제목이 지어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야말로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재치 있는 제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두 10편이 수록돼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킹의 장담대로 악몽이 숨겨진 매력적인 작품도 있고,

소소한 감동을 주는 작품도 있고, , 조금은 기대에 못 미치는 작품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꾼 스티븐 킹의 초기 단편은 물론

초고를 잃어버린 뒤 한참이 지나 기억에 의존해 재집필한 단편도 수록돼있어서

마치 스티븐 킹의 먼지 쌓인 옛날 앨범을 살짝 들춰보는 묘한 매력도 느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킹의 색깔이 가장 짙게 느껴진 ‘130킬로미터’, ‘못된 꼬맹이’, ‘우르’,

그리고, 뒤통수치는 엔딩이 매력적이었던 모래언덕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킹 스스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낯선 사람과의 왈츠나 어둠 속의 키스라고 부를 정도로

단편에 대한 그의 애착은 특별하고, 실제로 지금까지 꽤 많은 단편집이 출간됐는데,

이는 비슷한 반열의 대작가들과 킹을 확연히 구분해주는 그만의 별난 매력이라는 생각입니다.

특히 악몽을 파는 가게의 경우 수록작마다 작가의 해설비슷한 프롤로그가 붙어있는데,

집필하게 된 계기나 첫 아이디어, 집필 중의 비하인드 스토리 등이 담겨 있어서

작품의 탄생 비화는 물론 단편에 대한 킹의 애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별미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다만, 개인적으론 본편을 먼저 읽은 뒤 프롤로그를 읽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약간은 스포일러의 부작용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제일 궁금했던 작품은 2016년 에드거 상 단편 소설 부문 최고상을 받은 부고였는데

목록을 보니 악몽을 파는 가게 2’에 수록돼있어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물론 조만간 찾아 읽게 되겠지만요.

끝으로, 킹의 촌철살인이 잘 배어있는 맛있는 문구 하나를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겠습니다.

 

우스갯소리에 따르면 날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알츠하이머의 장점이라고 한다.

샌더슨이 깨달은 바에 따르면 대본이 거의 달라지지 않는 것이 알츠하이머의 진정한 장점이다.

그들이 거기서 일요일마다 점심을 먹은 지 3년이 지났는데도 아버지는 거의 항상 똑같은 말을 한다.”

(수록작 배트맨과 로빈, 격론을 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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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의 섬
샤론 볼턴 지음, 김진석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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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따라 영국 북부 셰틀랜드 제도에 이사 온 산부인과 의사 토라는

집 앞마당에서 수수께끼에 싸인 여성의 시신을 발견한다.

죽기 얼마 전 출산을 한 흔적이 남아 있고, 심장이 사라진 끔찍한 모습의 시신.

토라는 시신의 이름을 밝혀주기 위해 나름으로 수사를 시작한다.

수수께끼를 풀려는 그녀와 사건을 덮으려는 경찰의 갈등은 점점 고조되는데..

경찰이 숨기려 했던 진실은 섬의 기괴한 역사와 맞물려 토라에게 참혹한 진실을 보여준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작품의 주 무대인 셰틀랜드 제도는 스코틀랜드 최북단에서도 160km 떨어져있으며,

100여 개의 유무인도가 촘촘히 자리 잡은 곳으로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독특한 곳입니다.

15세기까지 노르웨이의 영토였던 탓에 당시의 역사, 전통, 신화의 잔재가 남아있으며,

그만큼 독자적인 문화를 고수하며 배타적인 분위기를 내뿜는 곳입니다.

 

굳이 이런 장황한 소개를 늘어놓은 이유는

작품 속 인물과 사건은 물론 행간을 흐르는 미세한 분위기조차

어딘가 극도로 위험해 보이는 셰틀랜드 제도의 음습함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희생양의 섬은 분명 21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먼 옛날의 신화와 전설의 부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출산 직후 살해된 여인들의 몸에는 다산’, ‘수확’, ‘희생을 의미하는 고대문자가 새겨져있고,

심장이 사라진 참혹한 사체임에도 리넨 천으로 감싸여 소중히 모셔진듯 보이기도 합니다.

 

남편 덩컨 때문에 런던을 떠나 셰틀랜드 제도에 온지 이제 6개월밖에 안 된 토라는

자신의 집 앞마당에서 직접 발견한 그 시신을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올곧고 거침없는 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 자신이 산부인과 의사인 탓에

출산 직후 살해된 여인의 진실을 미덥지 않아 보이는 경찰에게만 맡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셰틀랜드 제도에서 토라의 유일한 아군은 본토에서 날아온 여자형사 데이나 톨루치입니다.

민간인 의사 토라의 개인적인 수사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데이나는

토라가 위험을 무릅쓰고 병원의 각종 기록을 검색하여 합리적인 단서들을 찾아내자

기꺼이 그녀의 든든한 지원군이 돼줍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들에게 연이어 위기가 닥칩니다.

누군가 명백한 의도를 갖고 그녀들의 수사를 중지시키기 위한 행동에 나선 것입니다.

그리고 토라는 이제 데이나 외에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상기합니다.

 

그와 동시에 토라는 피해 여성의 몸에 새겨졌던 트로의 문자가 그저 우연이 아님을,

, 스스로 말도 안 된다고 여기면서도, 이 사건의 배경에 신화적 요소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우월한 지배자를 자처하며 여성을 억압하고 희생양으로 삼는 남성 중심의 트로신화는

들여다볼수록 토라 앞에 놓인 사건과 유사한 면모를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서사 때문에 골치 아픈 북유럽 신화와 전설에 대한 상당한 양의 강의를 들어야했는데,

처음엔 좀 낯설다가도 사건과의 접점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나름 흥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21세기에 과연 이런 생각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었지만,

셰틀랜드 제도라는,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듯한 공간과 그곳의 독특한 역사를 그리면서도

독자의 위화감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인 작가의 필력 덕분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스릴러로서의 매력과 음습한 신화의 비린 맛을 함께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두 가지 정도 아쉬운 점이 있어서 별 0.5개가 줄어들었는데,

첫 번째는 내용에 비해 과도한 분량(652p)입니다.

이는 아무래도 셰틀랜드 제도의 역사, 지리, 신화 등에 할애된 분량이 많았기 때문인데,

근본적으로는 인물 소개, 동선 설명 등 모든 면에서 디테일한 묘사를 즐기는 듯한

작가의 고유한 글쓰기 습관때문이 아닌가, 라는 생각입니다.

두 번째는 수시로 현실감이 살짝살짝 사라지곤 했던 민간인 토라의 슈퍼우먼 급 능력인데,

요트와 승마 덕분에 후천적으로 얻은 신체적 강점이나 올곧고 직선적인 심성은 이해가 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록버스터 여주인공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을 읽다 보면

때론 민간인 의사라는 캐릭터를 의심하게 할 정도로 과도하게 설정됐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국내에 먼저 소개됐지만 아직 못 읽어본 뱀이 깨어나는 마을의 소개글을 찾아보니

“(작가는) 영국 고딕 미스터리의 계보를 잇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뱀이라는 소재와 종교적 상징을 통해 시종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샤론 볼턴이 대략 어떤 스타일의 작가인지 눈치 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개인적으로 호감 가는 장르는 아니지만 작가가 워낙 타고난 이야기꾼 같아서

한 편쯤은 더 읽어봐야겠다는 욕심이 들긴 합니다.

스릴러와 신화를 이만큼 재미있는 픽션으로 섞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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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 스트리트 베라 스탠호프 시리즈
앤 클리브스 지음, 유소영 옮김 / 구픽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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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캐슬의 눈보라 치는 성탄 전야, 딸 제시와 함께 복잡한 열차에 탑승한 형사 조 애쉬워스는

혼란스런 열차 안에서 딸이 발견한 살해된 노파 마가렛의 시신에 경악한다.

현장에 도착한 조의 상관 베라 스탠호프 경감은 이 복잡하고 특이한 사건에 의문을 느끼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며칠이 지나가고 두 번째 피해자가 발생한다.

사건의 단서는 첫 피해자 마가렛에게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주변을 철저히 탐문하던 베라에게

하버 스트리트의 주민들은 누구도 증언을 꺼려하고

그럴수록 베라는 마가렛의 과거에 모든 사건의 실마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보진 못했지만) 영국 인기 범죄드라마 베라의 원작소설이며,

노섬벌랜드의 카리스마 넘치는 여성 경감 베라 스탠호프가 주인공인 작품입니다.

모두 8편의 시리즈가 출간됐고, ‘하버 스트리트는 그중 6번째 작품입니다.

 

소도시 마들에 자리한 항구거리 하버 스트리트에서 연이어 두 건의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베라를 비롯 그녀가 가장 아끼는 후배 조 애쉬워스, 홀리, 찰리 등이 수사를 벌입니다.

작고 폐쇄적인 마을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대부분 그렇듯

하버 스트리트역시 서로를 너무나 잘 아는, 그래서 애증으로 복잡하게 엮인 여러 사람들이

용의자 혹은 방관자 혹은 고발자 등의 역할을 맡아 극의 긴장감을 끌어올립니다.

특히 베라가 첫 희생자의 비밀투성이 과거에 집착하면서

수십 년 전 하버 스트리트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사건들이 꽤 중요한 단서로 등장하는데,

문제는 어느 누구도 쉽사리 그 과거사를 털어놓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결국 베라와 팀원들은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을 번갈아 집요하게 탐문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단서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고 굳게 닫힌 하버 스트리트 사람들의 입은 거의 요지부동입니다.

 

베라는 딱히 과학수사에 목을 매지도, 직감이나 본능에 의지하지도 않는 현실적인 인물입니다.

단서가 가리키는 대로 지시를 내리고 스스로도 기꺼이 발품을 파는 모범적 상관입니다.

수사가 끝나면 아침저녁으로 회의를 열어 결과를 보고받고 후속 수사를 계획합니다.

말하자면, 스마트폰 시대를 배경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라와 그녀의 부하들은 어딘가 시대극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탐문형 수사팀의 모습입니다.

물론 사건 자체가 소도시 항구에서 벌어진데다 개인적 원한이 바탕에 깔린 듯한 사건이라

크리미널 마인드‘CSI’ 같은 수사기법이 어울릴 리 없지만

지시하고 지시받고, 수사하고 보고하고, 회의하고 계획 짜고식의 루틴이 반복되는데다

베라를 비롯 모든 경찰 캐릭터 자체가 눈에 띄는 개성이 부족한 탓인지

이야기 전체에서 올드함이 많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주인공 베라 스탠호프는 분명 드라마 주인공이 될 만한 특이한 캐릭터이긴 합니다.

옆집 아줌마 같으면서도 부하들이 알아서 쩔쩔 매는 카리스마 넘치는 경감이기도 한 그녀는

여성성이 강조된 기존의 여자 경찰 캐릭터와는 거의 180도 반대의 모습을 지닌데다

작가의 말대로 현실적이고 진짜 살아 움직이는 여성 캐릭터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영웅처럼 그려지지도 않고, 누구나 저지를 법한 실수도 현실감 있게저지릅니다.

탐문 대상이나 부하들을 대할 때에도 대체로 능숙한 심리전을 구사하는 편이지만,

때론 자기도 모르게 감정이 훅 앞질러 나가기도 하는 평범한 인간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시리즈를 첫 편부터 읽었다면 베라의 진면목을 좀더 잘 알 수 있었겠지만,

하버 스트리트만 놓고 보면 베라의 현실감이 너무 생생한 나머지

오히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물로 보였다는 점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두 번째 주인공처럼 보인 조 애쉬워스나 톡톡 튀는 홀리도 대체로 평면적이었습니다.)

 

사건은 역시나 독자의 예상을 한참 빗나간 방식으로 해결되는데,

문제는 뒤통수를 맞았다는 느낌보다 좀 억지 같다는 기분이 강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다 읽은 뒤에 생각해보면 작가가 곳곳에 단서를 뿌려놓았다는 게 떠오르긴 하지만

막판에 드러난 범인의 정체나 동기는 앞서 펼쳐진 이야기들을 좀 무색하게 만들기도 했고,

하버 스트리트의 30여 년 전의 과거사와 작위적으로 엮인 느낌도 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 베라와 조가 범인의 윤곽을 떠올리는 과정이 비약적이었다는 점도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아무리 앞뒤를 다시 읽어봐도 그럴 만한계기나 단서가 보이지 않았는데,

딱 한 가지 추정할 만한 근거는 (스포일러라 언급하긴 어렵지만) 너무 쉽고 안이하게 보여서

설마?’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습니다.

 

출판사에서는 곧 시리즈 최신 편인 ‘The Seagull’을 출간할 계획이며,

이어 1편부터 차례대로 소개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작은 커뮤니티 안에서 촘촘하게 얽히고설킨 사람들의 인간관계와 심리를 다뤘다는 걸 보면

대체로 하버 스트리트와 비슷한 서사의 작품들일 것으로 보이는데,

베라의 매력이나 부하들의 캐릭터가 궁금해서라도 한 편 정도는 더 읽게 될 것 같습니다.

적어도 영국추리작가협회의 평생공로상인 다이아몬드 대거 상 수상자인 작가의 이력만 보면

단 한 편의 작품으로 지레 선입관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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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내인 - 네트워크에 사로잡힌 사람들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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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생 샤오원(小雯)이 죽었다. 22층에서 뛰어내려 온몸이 부서졌다.

경찰은 자살이라고 말하지만 샤오원의 언니 아이(阿怡)는 알고 있다. 동생은 살해된 것이다.

샤오원은 세상을 떠나기 전, 성추행 사건을 꾸며냈다며 인터넷에 신상이 공개되어

수많은 누리꾼의 조롱과 모욕의 대상이 되었다.

억울하게 희생된 샤오원을 위해 아이는 이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겠다고 맹세한다.

그를 위해 기인에 가까운 해커 겸 탐정 아녜(阿涅)의 도움을 받게 된 아이.

그러나 SNS, 인터넷, 스마트폰 등 네트워크 속에 감춰졌던 진실이 베일을 벗을수록,

아이는 자신이 알던 동생 샤오원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는 느낌을 받는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13.67’로 홍콩 경찰소설의 진면목을 보여줬던 찬호께이가

네트워크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소재로 한 사회파 미스터리로 돌아왔습니다.

전반부가 천재적인 해커이자 까칠한 명탐정 아녜의 도움을 받은 아이가 진실을 찾는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찾아낸 범인을 향한 두 사람의 가차 없는 복수의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망내인은 단순한 진실찾기-복수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네트워크가 지배한 세상에서 악의가 얼마나 쉽게 싹을 틔우고 사람을 망가뜨리는지,

네트워크에 의지한 소통이란 얼마나 가볍고 이기적이고 위험할 수 있는지,

그리고, 결국 스스로를 네트워크에 가둔 인간의 미래가 얼마나 암담한 것인지 등

찬호께이다운 묵직한 주제들을 다룹니다.

 

두 주인공은 구시대적 컴맹전지전능한 해커라 할 만큼 대조적인 인물들입니다.

아이는 20대 초반의 여성이지만 도서관 대여프로그램 외엔 컴퓨터와 담을 쌓은데다

스마트폰은 만져본 적도 없고, 네트워크를 통한 소통이란 문자메시지가 전부입니다.

반면, 아이를 도와 진실 찾기에 나선 아녜는 네트워크 세상의 지배자입니다.

그는 타인의 네트워크에 마음껏 파고들 수 있는 건 물론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불가능 자체를 모르는 지상 최고의 해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녜가 네트워크 속에 숨은 진실들을 하나씩 파헤칠 때마다 아이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드러나는 진실들의 무게도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그 사람이 접하는 정보를 통제할 수 있으면 생각과 감정도 통제할 수 있는”(548p)

네트워크의 파멸적인 힘을 지켜보는 일이 아이에겐 더욱 충격적이고 절망적인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비열한 익명성을 겸비한 탓에 쉽게 찾아낼 수도, 단죄할 수도 없는 대상이거니와

그저 가학의 희열과 끝없이 샘솟는 관음증만 조장하는 허깨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작가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증오해야 할 것은 인터넷이 아니라 인터넷 뒤에 숨은 인간성의 어두움”(685p)이지만

독자는 아이의 눈을 통해 네트워크가 지배한 세상의 끔찍한 단면을 새삼 재인식하게 됩니다.

사건은 단순하고, 용의자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으로 설정됐지만,

7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설정들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가 네트워크가 지배한 디스토피아라는 철학적 주제에만 천착한 것은 아닙니다.

현실 속 미스터리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마지막까지 양파껍질처럼 새 진실을 드러냅니다.

자살한 동생은 내가 알던 동생이 맞는가?

동생을 조롱과 모욕의 장으로 내몬 끝에 죽음에 이르게 한 범인들의 동기는 무엇인가?

진실찾기는 물론 복수의 대리인까지 자처하는 아녜의 정체는 무엇인가?

작가는 크고 작은 미스터리를 사방에 뿌려놓고 아주 천천히 그것들을 풀어나갑니다.

, 그 과정에서 화려한 홍콩의 이면, 안타까운 가족사, 사적 복수의 문제까지 언급되면서

이야기의 볼륨감은 분량에 걸맞게 점차 커져갑니다.

 

이야기 자체도 매력적이지만 두 주인공 역시 시리즈를 기대하게 할 만큼 매력을 발산합니다.

까칠한 안하무인 성격, 천재적인 해커이자 명탐정, 복수를 상징하는 네메시스라는 필명 등

다양한 캐릭터가 부여된 아녜는 비현실적인 면도 있지만 시리즈 주인공의 미덕을 모두 갖췄고,

아녜 덕분에 점차 강인한 인물로 성장하는 아이 역시 뒷이야기가 기대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녜와 아이가 콤비를 이룬 후속작을 써달라고 작가에게 조르고 싶을 정도인데,

망내인이 호응을 얻는다면 불가능한 기대도 아닐 거란 생각입니다.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딱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역시 분량의 문제입니다.

작가 스스로 원래는 기억나지 않음, 형사와 비슷한 분량(312p)으로 쓸 생각이었다. (중략)

탈고했을 때는 30만 자를 넘어 ‘13.67’보다도 길었다. 망했다.”라고 밝혔을 정도로,

망내인의 핵심 스토리는 이만한 분량을 필요로 하지 않는 규모입니다.

하지만 각 인물의 입장과 생각, 그들의 희로애락을 전달하고 싶었다.”는 의도대로

작가는 꽤 많은 분량을 내밀한 묘사를 위해 할애했고,

해킹이나 네트워크의 원리에 대한 친절하고 상세한 설명도 그에 못잖게 곁들이고 있습니다.

기억나지 않음, 형사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100p 안팎 정도만 줄였다면

지레 분량에 질려서 망내인을 읽을까 말까 주저하는 독자는 없을 거란 생각입니다.

물론, 저처럼 찬호께이의 팬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숙명(?)처럼 받아들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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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책이좋아 2018-01-07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시리즈였으면 좋겠어요!!!!
 
기룡경찰 LL 시리즈
쓰키무라 료에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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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접 전투에 맞게 개발된 2족 보행형 병기인 기갑병장이 발달한 근미래.

신형 기갑병장인 드래군을 도입한 경시청은 총감 산하 직속의 특수부를 구성하고

드래군의 탑승 요원으로서 세 명의 용병을 영입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한다.

불법으로 제조된 기갑병장으로 무장한 농성범들이 막심한 피해를 일으키는 사태가 벌어지자,

특수부 대원들은 경찰 내부의 다른 조직들의 반발과 견제에도 불구하고 현장으로 출동한다.

하지만 사건의 배후에는 상상을 초월한 거대한 암흑이 펼쳐져 있었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경찰소설의 대가 요코야마 히데오 또는 사사키 조가 집필한

신세기 에반게리온또는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의 초기 버전이라고 할까요?

작품의 외형은 분명 인간형 전투병기를 타는 경찰이 등장하는 SF물이지만,

핵심 내용은 경찰의 정의또는 경찰조직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시청 특수부 폴리스 드래군, 통칭 기룡경찰은 경찰 내에서 배신자 취급을 받는 조직입니다.

수장은 경찰 출신이 아닌 전직 외무성 관료가 맡고 있고,

형사부나 공안부와 척을 질 정도로 독립적인 권한을 지니고 있으며,

경찰이 운영하는 일반 기갑병장과는 차원 자체가 다른 차세대 기갑병장 드래군의 조종은

프리랜서 용병, 전직 모스크바 경찰, 전직 테러리스트 등

엄청난 계약금을 받은, 범죄자에 가까운 이상한 인간들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찰 내부에서는 그런 특수부를 한편으론 시기와 질투의 눈길로 바라보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곳으로의 발령 자체를 좌천이라 여길 만큼 하찮게 여기기도 합니다.

이런 시선들이 모여 결국엔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고 공개적으로 멸시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매크로한 경찰 조직 내의 갈등이 한 축이라면,

실질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세 명의 용병의 내적 갈등이 또 다른 한 축을 차지합니다.

전 세계의 분쟁지역을 누비며 프리랜서 용병으로 살아온 스가타,

전직 모스크바 경찰이었지만 도망자 신세 끝에 용병이 된 유리 오즈노프,

그리고 사신(死神)이라 불리는 아일랜드 출신의 여성 테러리스트 라이저 라드너가 그들인데,

이들은 단순히 뛰어난 전투력을 지닌 용병 캐릭터뿐 아니라

절대 치유될 수 없는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지닌 인물로 설정돼있습니다.

시리즈 첫 편 격인 이 작품에서 모든 것이 다 설명되진 않지만,

그들의 압도적인 캐릭터는 분명 이 작품에서 가장 강력한 페이지 터너로서 작동합니다.

 

이들을 지휘, 관리하는 기룡경찰의 수장 오키쓰 부장은 상대적으로 덜 소개가 된 편인데,

오히려 그런 미스터리함 때문에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인물입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들조차 그 속내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주의적 캐릭터인 그는

외무성 관료 출신이지만 누구보다 탁월한 판단력과 지휘력을 발휘하는데다

경찰조직 전체와 갈등을 벌이는 특수부를 정치적으로도 유연하게 이끌어나갑니다.

그 외에도 동료들의 온갖 멸시에도 불구하고

오키쓰 휘하에서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는 여러 조연들이 등장하는데,

그들 역시 후속작에서의 활약이 궁금해질 정도로 매력적인 캐릭터들입니다.

 

사건 자체는 비교적 단순합니다.

기갑병장을 이용한 정체불명의 조직의 대규모 테러가 발생하고,

오키쓰가 이끄는 기룡경찰이 그 배후를 밝히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입니다.

테러를 일으킨 자들은 아무런 요구사항도 전하지 않은 채 현장에서 도주했고,

오키쓰는 결국 그들의 목적이 경찰 궤멸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이 위험천만한 테러에 한때 스가타와 동료였던 용병이 가담한 것이 밝혀지고,

그를 단서 삼아 테러를 일으킨 조직을 밝히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분량도 그리 길지 않은데다 그야말로 재미에 방점을 찍은 작품이라

SF물에 거부감이 있는 독자라도 한 번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리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이유 때문에 기룡경찰을 읽을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많은 분들의 서평에서 경찰소설의 매력을 갖췄다라는 대목을 읽곤

올해가 가기 전에 이 작품을 읽어보기로 작심하게 됐습니다.

 

결과적으로는 SF와 경찰소설의 미덕이 잘 섞인 재미있는 작품을 만났다는 생각이고,

여운을 잔뜩 남긴 엔딩 덕분에 일본SF대상을 받았다는 후속작 기룡경찰-자폭조항에서

오키쓰와 세 용병의 운명, 경찰조직과 특수부의 갈등이 어떻게 이어질지

벌써부터 기대감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보면 기룡경찰 시리즈3편까지 나온 것 같은데

부디 모든 시리즈가 국내에서 꼭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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