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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 ㅣ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9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7년 12월
평점 :
‘스노우맨’에서 손가락을 잃고, ‘레오파드’에서 얼굴 절반이 찢어진 해리.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운명의 연인 라켈 역시 도망치듯 그와 헤어졌다.
‘팬텀’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홍콩으로 떠난 해리가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번에 그를 오슬로로 이끈 것은 라켈의 아들 올레그였다.
그에게만 속마음을 털어놓던, 아들보다 더 가깝던 소년이 다른 소년을 죽인 혐의로 체포된 것.
그러나 해리는 이제 경찰이 아니다. 더군다나 올레그의 아버지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 어느 때보다 경찰이자 아버지의 입장에 선 해리.
진정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해리는 가장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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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 포함) 국내 출간된 해리 홀레 시리즈 8권 중 ‘바퀴벌레’를 제외하고 모두 읽은 셈인데
‘팬텀’은 사건의 외연만으로 비교하면 소박한 작품에 속하지만,
사건의 질이나 해리에게 가해진 정신적, 육체적 충격 면에서는 단연 압도적인 작품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마약중독자인 10대 소년이 살해당한 사건’에 불과하지만,
문제는 그 용의자가 해리의 운명의 연인인 라켈의 아들 올레그이기 때문입니다.
헤어진 후에도 여전히 해리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라켈,
또 자신을 아버지처럼 따랐지만 이젠 마약중독자에 살인용의자까지 된 올레그와 재회한 해리는
수사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이미 정신적으로 무자비하게 난타당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요 네스뵈의 말대로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은 마약의 천국 ‘오슬로’입니다.
역대급 신종 마약 바이올린이 등장하면서 오슬로의 마약 지형은 요동을 치게 되고,
그 와중에 잉태된 정치권과 경찰의 야합은 오슬로 곳곳에서 비열하게 작동되면서
사방팔방에 약에 찌든 환자들을 쏟아내기에 이릅니다.
중독자들은 바이올린을 구하기 위해 구걸을 하거나, 돈을 훔치거나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피살된 소년 구스토와 살인용의자 올레그 역시 그런 자들 가운데 하나였고,
결국 그들 사이에 벌어진 비극은 오슬로라는 ‘마약계의 빅 브라더’에 의해 파생된 셈입니다.
진범 찾기가 목적이 아니라 올레그의 무죄만을 위해 전력을 다 하던 해리는
어느 순간 자신을 방해하거나 노리는 자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가 수사하는 살인사건 뒤에 미처 예상치 못했던 거대한 배후가 있음을 유추하게 됩니다.
그 배후의 주인공들이 권력자, 경찰, 마약생산자들이란 사실은
그리 오래지 않아 해리의 추리 속에서 밝혀지게 되는데,
문제는 해리는 이미 경찰도, 그에 준하는 어떤 사법권도 갖지 않은 민간인이라는 점입니다.
결국 해리의 수사는 차포를 다 떼인 상태에서 최고수와 맞부딪힌 형국에 이르고,
얼마 안 되는 ‘해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아주 느리게 진행됩니다.
더욱이 해리를 심난하게 만드는 것은 운명의 연인 라켈과의 관계입니다.
올레그의 무죄만 밝히면 마음 편하게 오슬로를 떠나 홍콩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과연 자신과 라켈은 예전의 소소한 행복을 다시금 공유할 수 없는 걸까?
애초 나는 왜 오슬로로 돌아온 것일까?
이런 정답 없는 질문들이 수사에 전념해야 하는 해리를 수시로 갈등하게 만듭니다.
사실, 올레그의 살인사건의 배경은 전형적인 틀대로 구성돼있습니다.
러시아 출신이지만 ‘두바이’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마약업자,
권력과 부를 위해 살인을 포함한 모든 불법을 자행하는 탐욕스러운 경찰,
오슬로의 마약을 자신의 신분상승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부패한 정치인 등이 엮여있고,
배신자와 밀고자와 라이벌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사람들이 죽어나갑니다.
물론 막판 반전을 통해 이 상투적인 구도 안에 뭔가 ‘신선한’ 단서가 숨어있음이 드러나지만
이전에 읽었던 해리 홀레 시리즈에 비하면 ‘분량 대비 만족감’은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손에 묵직하게 잡히는 방대한 분량이 페이지터너의 위용을 잃지 않은 이유는
거의 전적으로 해리 홀레라는 캐릭터 덕분이라는 생각입니다.
원래 출간순서와는 무관하게 뒤죽박죽 (국내 출간순서대로) 읽어왔지만
매번 해리 자신은 물론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치고 상처받고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당사자인 해리의 뇌 속에 차곡차곡 쌓인 트라우마와 악몽들이 저에게도 고스란히 전염됐었고,
그런 덕분에 라켈과 올레그가 연루된 이 사건을 대하는 해리의 정신적 부담과 고통에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이 몰입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팬텀’으로 해리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공감하기 쉽지 않은 대목일 텐데,
아마 ‘스노우맨’만 먼저 읽었어도 ‘팬텀’ 속 해리의 감정을 이해하기가 쉬울 거란 생각입니다.
다음에 이어질 ‘해리 홀레 시리즈’가 ‘스노우맨’ 직전의 ‘The Redeeemer’일지,
아니면 ‘팬텀’ 이후인 ‘Police’ 또는 ‘The Thirst’일지 모르겠지만,
부디 다음 편에는 좀 덜 아픈 해리와 마주하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애초 바랄 수 있는 기대는 아니겠지만,
그냥 ‘멋진 히어로 해리’도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