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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래빗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유괴 전문조직의 인질 ‘매입’ 담당인 우사기타에게 “네 아내를 유괴했다.”는 전화가 걸려온다.
우사기타의 보스인 이나바는 “조직의 돈을 훔친 컨설턴트 오리오를 찾으라”고 그를 협박한다.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
다급해진 우사기타는 오리오를 추적하여 센다이시의 어느 단독주택에 침입하지만,
그가 마주한 건 불안해 보이는 모자(母子)와 그보다 더 수상한 한 남자.
아내를 되찾으려는 우사기타의 몸부림은 또 다른 인질극으로 이어지고,
빈집털이 겸 탐정인 구로사와가 ‘흰토끼 사건’이라 불리는 이 유괴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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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긴 만담 또는 설명역이 등장하는 수다스런 블랙코미디 연극을 본 느낌입니다.
센다이시의 한 주택에서 벌어진 하룻밤동안의 인질극을 다루고 있는데,
인질범이나 인질들 모두 ‘어쩌면 저럴 수가’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우연과 우연이 겹치고, 운명과 운명이 겹친 듯한 기막힌 행보들을 보입니다.
그 과정에서 대량의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대사들은 한 편의 만담을 방불케 하고,
어디로 튈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인물들의 언행은
쉴 새 없이 배우들이 등퇴장하며 관객의 혼을 쏙 빼놓는 연극무대를 연상시킵니다.
아내를 유괴당한 유괴범은 아내를 구하기 위해 인질극을 벌이면서
스스로 방송국에 연락을 하는가 하면, 경찰에겐 또 다른 인질을 찾아올 것을 요구합니다.
사기꾼의 금고를 털기 위해 나섰던 빈집털이는 얼떨결에 인질극에 휘말렸다가
복잡하기 그지없는 작전을 구상하여 모두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다급한 유괴범에 비하면 아주 느긋한 태도로 협상에 임합니다.
어느 한구석도 멀쩡하지 않은, 뭔가 이상야릇한 인물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작가 스스로도 “‘어? 이거 어떻게 된 거지?’ 하고 고개를 갸웃하다가
나중에 가서 ‘아아, 그런 거였구나!’ 하고 유쾌한 기분을 느끼길 바란다.”고 했는데,
그만큼 이 작품 안에는 공간이나 서술에 관한 다양한 트릭들이 등장하고,
이 트릭들에 대한 설명 역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빠르고 정신없이 전개됩니다.
지금까지 읽은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 가운데 가장 현란하고 빠른 템포의 작품이랄까요?
이 정도 설명이면 대략 작품의 분위기가 감지될 텐데,
활자로 인쇄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다 읽고 나면 엄청난 낙차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난 듯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지경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독자에 따라 평가가 갈라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인물과 트릭들이 모두 결과를 위해 작위적으로 설정됐다는 점인데,
몇몇 대목에서는 ‘과연 저럴 수 있을까?’라는 위화감이 강하게 들기도 했고,
일부는 ‘차라리 만화였다면 공감 가능’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작품이 정극보다는 약간은 비현실적 희극에 가까운 서사를 구사하고 있어서
일반적인 관점으로 서평을 쓰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기대한 만큼의 만족감에는 조금은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타고난 이야기꾼 이사카 고타로의 의도는 나름 충분히 독자에게 전해진 것 같긴 한데,
‘유쾌한 기분’보다는 ‘어, 뭐지?’가 좀더 강하게 남은 건 저만의 느낌은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