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데이즈
루스 웨어 지음, 서나연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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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타 크로스(이하 잭)와 남편 게이브는 기업의 의뢰를 받아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모의 공격을 실행함으로써 보안 취약점을 찾아내는 펜 테스터(Penetration-tester)입니다. 잭의 완벽한 현장침투 능력과 게이브의 고도의 사이버공격 능력 덕분에 두 사람이 이끄는 보안회사는 순항 중입니다. 그런데 한 기업의 테스트를 마친 어느 날, 게이브가 목이 잘린 채 살해되고 현장침투를 마치고 돌아온 잭이 그 참상을 목격합니다. 패닉 상태에 빠졌던 잭을 더욱 놀라게 한 건 경찰이 자신을 용의자로 여긴다는 점. 더구나 자신도 모르는 거액의 생명보험 계약이 체결됐다는 메일이 때마침 도착하자 잭은 스스로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경찰서를 빠져나갑니다. 런던경찰청의 지명수배가 떨어진 가운데 잭은 목숨을 건 필사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헤더브레 저택의 유령을 비롯하여 여러 작품이 한국에 출간된 루스 웨어지만 설정이나 분위기가 제 취향이 아닌 것 같아 한 편도 읽지 않았는데, “남편을 죽인 진범을 찾기 위해 도망자가 된 아내의 8이라는 홍보 카피에 눈길이 끌려 제로 데이즈를 통해 처음 만나게 됐습니다.

 

잭과 게이브에게 부여된 펜 테스터라는 독특한 직업 덕분에 독자는 두 가지 중요한 서사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디지털, 컴퓨터, 스마트폰, 보안, 해킹 등 이른바 테크노 스릴러가 펼쳐질 거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뛰어난 현장침투 능력을 가진 잭이 결정적인 순간 액션 스릴러의 진수를 보여줄 거라는 점입니다.

안 그래도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게이브가 살해당하고 잭이 도망자라는 위험천만한 여정을 선택한 덕분에 독자는 초반부터 빠르고 긴박한 흐름을 만끽할 수 있는데, 거기에다 흥미진진한 테크노 액션 스릴러까지 예감이 되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못잖은 이야기를 기대하게 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도망자 스릴러의 고전인 해리슨 포드 주연의 영화 도망자와 마찬가지로 8일에 걸친 잭의 도망자 여정은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 정도로 고난의 연속입니다. 경찰에게 쫓기다가 입은 상처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진범 찾기는 그야말로 눈 감고 코끼리 다리를 더듬는 식의 막연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 잭에게 정보와 피난처를 제공하는 건 게이브의 평생 절친인 콜과 언니 헬레나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도움 속에 잭은 자신의 현장침투 능력을 발휘하여 조금씩 진상에 다가갑니다.

 

마지막 장까지 한 호흡에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의 미덕을 갖추긴 했지만 개인적으론 아쉬움이 좀더 남은 작품입니다. 우선 큰 틀 자체가 너무 익숙하게 설정돼있습니다. 도망자+테크노+액션 스릴러의 조합은 거의 예상한대로 전개됐고, 반전과 진범의 정체 역시 그다지 놀랍지 않습니다. 테크노 스릴러의 소재도 요즘 독자에겐 다소 식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평범했고, 그것이 게이브의 죽음을 초래하는 과정은 거의 공식에 가깝게 설정돼있습니다.

루스 웨어가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작가라고 여긴 더 큰 이유는 잭의 심리묘사에 할애된 지나친 분량 때문입니다. 특히 게이브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을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그것도 지나치게 길게 묘사하다 보니 중반쯤부턴 그런 대목이 나오면 눈대중으로 페이지를 넘기곤 했는데, 물론 그 애정이 위험천만한 도망자 신세를 선택한 잭의 가장 큰 동력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과도한 강조가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는 생각입니다.

 

요약하면... 새로움과 신선함이 부족하긴 하지만 도망자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읽다가 잭의 심리묘사 대목에서 느슨함이나 지루함이 느껴지면 과감하게 건너뛰어도 무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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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의 고뇌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5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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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물리학자 유가와 마나부가 이끄는 이과 미스터리 갈릴레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인 갈릴레오의 고뇌는 전작인 용의자 X의 헌신성녀의 구제와 달리 다섯 편의 단편으로 이뤄진 작품집입니다. 시리즈 1~2편인 탐정 갈릴레오예지몽의 형식으로 다시 돌아간 건데, 단편 특유의 맛과 매력을 만끽할 수 있었지만 개인적으론 장편을 기대했던 터라 처음 이 작품을 읽었던 무렵에도 무척 아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 여자의 추락사가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놓고 벌이는 미스터리(떨어지다), 저택 별채에서 일어난 의문의 폭발과 화재의 진상을 밝히는 이야기(조준하다), 대학 동창이 운영하는 펜션에 초대받은 유가와가 한 남자의 죽음의 비밀을 파헤치는 밀실 트릭 미스터리(잠그다), 다우징(dowsing, 도구를 사용하여 지하수나 광맥을 찾는 일종의 점복占卜)을 할 줄 아는 소녀가 노파 살인사건의 진상을 찾아가는 이야기(가리키다), 한 남자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유가와에게 복수하기 위해 희대의 살인사건을 일으키는 이야기(교란하다) 등이 실려 있는데, 절반쯤이 유가와 특유의 이과 미스터리라면, 절반쯤은 천재 물리학자가 아니라 셜록 홈즈처럼 활약하는 정통 미스터리라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수록작은 용의자 X의 헌신의 감동과 여운을 느끼게 만든 조준하다인데, 그 누구도 눈치 챌 수 없을 만큼 범행수법이 정교했던 것은 물론 거듭된 반전을 통해 밝혀진 범인의 진짜 동기는 유가와는 물론 독자의 눈가까지 뜨끈하게 만들어서 용의자 X의 헌신의 마지막 장면에서 느꼈던 울컥함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유가와를 노린 한 남자의 복수극을 그린 교란하다는 미스터리 자체는 고만고만했지만 연쇄살인범의 타깃이 유가와라는 점 때문에 마지막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갈릴레오의 고뇌의 가장 큰 특징은 세 번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여형사 우쓰미 가오루의 맹활약입니다. ‘성녀의 구제에서도 독특한 캐릭터를 선보였던 우쓰미는 이번 작품에선 선배이자 서열 2인 구사나기 슌페이를 따돌리고 유가와와 콤비에 가까운 비중과 역할을 맡았습니다. “여자라면 대개는 알고 있을 겁니다.”, “여자란 그런 동물이거든요.”, “그런 반지를 제 손으로 사는 여자는 없어요.”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투척하면서도 정작 여자라고 해서 특별 취급받는 건 누구보다 싫어하는 우쓰미는 뛰어난 직감과 관찰력을 지녔으면서도 과도한 상상과 고집 때문에 늘 구사나기에게 꾸중을 들어왔지만, 이번 작품에선 수시로 구사나기를 코너로 몰아붙이며 자신의 장점과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유가와에게도 재능을 인정받은 우쓰미가 이후 작품에서 어떤 활약을 펼쳤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거침없이 폭주하는 그녀의 매력 때문에 이 뒤로 이어지는 작품들에 대해 더 큰 기대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시리즈 3편인 용의자 X의 헌신이 최고의 평가를 받으며 정점을 찍은 탓에 그 앞뒤로 나온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손해(?)를 본 건 아이러니한 사실입니다. ‘갈릴레오의 고뇌역시 이과 미스터리의 미덕과 단편의 매력을 겸비하고 있긴 하지만, 두어 작품을 제외하곤 기대에 살짝 못 미친 게 사실입니다. 럭비공처럼 통통 튀며 종횡무진 수사를 펼치는 우쓰미 가오루가 없었다면 아쉬움이 훨씬 더 컸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희미한 기억에 따르면 후속작인 시리즈 6한여름의 방정식은 꽤 흥미롭게 읽은 장편인 듯한데, 부디 저의 그 희미한 기억에 오류가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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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메이슨 코일 지음, 신선해 옮김 / 문학수첩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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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로봇 윌리엄을 만드는데 모든 것을 쏟아 부은 로봇공학자 헨리는 아내 릴리와의 관계가 파국에 이르렀음을 감지합니다. 스스로가 지능은 뛰어나지만 사회성이 떨어지는 너드(nerd)이자 신경증과 광장공포증을 앓는 환자라는 걸 잘 아는 헨리는 릴리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애쓰면서도 완벽한 AI 로봇 윌리엄을 완성하는 일에 골몰합니다. 그러던 중 릴리의 옛 직장동료인 데이비스와 페이지가 식사 초대를 받아 찾아오고, 헨리는 아내와 데이비스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낍니다. 질투와 불안을 느낀 헨리는 갑자기 그들에게 윌리엄을 보여주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윌리엄은 헨리의 기대와 달리 명백한 적의와 폭력을 휘두르며 완벽한 스마트 홈인 헨리의 집을 일순간에 지옥으로 만들어버립니다.

 


1980~90년대 SF 영상물의 고전인 터미네이터블레이드 러너는 볼거리 가득한 화려한 액션물이면서도 동시에 재앙과 공포로 뒤덮일지 모르는 머나먼 미래에 대한 막연한 경고를 담은 작품들입니다. 반면 윌리엄2025년을 살아가는 독자에게 곧 도래할 AI 시대의 암울하고도 끔찍한 가능성 한 조각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그래서 100% SF라고 할 수 없는 현실적인 공포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AI 로봇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최악의 경우 통제 불가능한 악당이 될 수 있으며 종국에는 인간의 모든 것을 대체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런데 헨리가 자신의 집 다락방 연구실에서 재활용 부품들로 만들어낸 윌리엄은 이 두 가지 위험 요소를 모두 안고 있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더라도 결코 등장해선 안 될, 실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만한 AI 로봇입니다.

자신의 통제력을 과신한 한 야심가가 악마와의 계약에 응한 이야기를 그린 괴테의 파우스트를 가장 재미있게 읽었으며, 의식과 발상과 욕망까지 보유한 윌리엄은 말 그대로 인간이 창조한, 인간이 아닌 생명입니다. 탄생 이후 스스로 지적 성능을 개발한 윌리엄은 기계적 오류나 프로그래밍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파괴와 살인과 통제를 즐깁니다. ‘윌리엄이 단순히 AI를 소재로 한 SF소설을 넘어 지독하게 현실적인 공포소설로 분류되는 건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헨리는 창조자인 자신을 대체하려는 AI 로봇 윌리엄뿐 아니라 아내 릴리를 빼앗아가려는 데이비스의 공격에도 대처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립니다. 동시에 집밖으로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할 정도의 광장공포증과 신경증 역시 헨리의 이성과 감성을 갉아먹으며 사태를 더욱 최악으로 몰아갑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른 막판에 이르러 작가는 단 한 줄의 엄청난 반전으로 애초 자신이 이 작품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를 명료하게 밝힙니다. 단순히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넘어 “AI가 안길 수 있는 최대한의 공포와 딜레마를 실감하게 만드는 이 반전과 엔딩이야말로 윌리엄의 가장 큰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칼 군무를 추는 로봇과 전쟁에 투입되는 로봇개는 더는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영원히 SF의 허구 속에 머무를 것 같던 터미네이터블레이드 러너의 공포 역시 더는 남의 얘기도, 먼 얘기도 아닙니다.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는 이 세상이라면 누구라도 헨리가 될 수 있고, 언제라도 윌리엄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비극을 막아낼 수 없다는 것, 또 헛된 희망이나 낙관론 따위는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을 윌리엄은 단 270여 페이지의 이야기를 통해 너무나도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족으로... AI 로봇에 관한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이야기지만, 간혹 진짜 판타지처럼 읽히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헨리의 캐릭터가 반영된 경우도 있지만, “윌리엄이 아무리 고성능 AI 로봇이라 해도 어떻게 이런 상황까지 만들어낼 수 있지?”라는 의문이 든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모호함마저도 윌리엄의 독특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 읽은 뒤에 다소 찜찜함이 남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 찜찜함 때문에라도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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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돌아오다
사쿠라다 도모야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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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모도(@knitting79books) 서평단 자격으로 내친구의서재(@mytomobook)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매미 돌아오다는 자칭 곤충 애호가이자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거듭 아마추어 탐정 역할을 떠맡곤 하는 30대 남자 에리사와 센이 주인공인 미스터리 연작단편집입니다. 2017년 일본에서 출간된 서치라이트와 유인등’(サーチライトと誘蛾灯)에 이은 에리사와 센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데,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과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한 덕분에 시리즈 첫 편보다 먼저 소개된 것 같습니다.

곤충 애호가라는 주인공 캐릭터에 걸맞게 다섯 편의 수록작 모두 제목에 매미, 거미, 딱정벌레, 반딧불이, 파리 등 곤충이 들어가 있는데, 실제로 각 곤충은 미스터리의 핵심이자 해결의 열쇠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가볍고 코믹한 곤충 미스터리라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16년 전 대지진 자원봉사 활동 당시 작은 마을의 신사에서 목격한 소녀 유령의 정체를 다룬 매미 돌아오다’, 교차로에서 일어난 여중생의 교통사고와 아파트에서 벌어진 주부 상해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염낭거미’, 펜션에서 만난 한 외국인과의 짧고 애틋한 인연을 그린 저 너머의 딱정벌레’, 한 과학잡지 편집자가 5년 전 소식이 끊긴 곤충 작가의 행방을 쫓다가 뜻밖의 사건과 마주치는 이야기를 그린 반딧불이 계획’, 아프리카에서 NGO 활동을 하던 의사가 치명적인 감염병에 맞서 싸우는 격렬하고도 가슴 아픈 사연을 다룬 서브사하라의 파리등 모두 다섯 편이 수록돼 있습니다.

 


왓더닛(What done it)이란 무엇인가? 이 책에서 그 답을 확인할 수 있다” -노리즈키 린타로

 

매미 돌아오다의 가장 큰 특징은 누가?”(후더닛), “?”(와이더닛), “어떻게?”(하우더닛)라는 일반적인 미스터리 서사와 달리 무엇에 방점을 찍은 작품이란 점입니다. 후반부에 실린 노리즈키 린타로의 해설을 인용하자면, ‘왓더닛 미스터리’, 즉 수수께끼 자체를 찾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구조를 품고 있습니다.

수록작 가운데 중반부까지도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또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바로 이 대목에서 에리사와 센의 특별한 능력이 발휘됩니다. 그는 스쳐 지나간 말 한마디, 무심히 던진 시선,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흔적을 통해 숨겨진 미스터리를 발견하곤 자신만의 추리를 펼쳐 끝내 진상에 도달합니다. 말하자면 그의 첫 미션은 미스터리 자체를 발견하는 거란 뜻입니다. 후더닛과 와이더닛과 하우더닛에 익숙한 독자에겐 다소 생경한 책읽기가 될 수도 있는데, 거듭 페이지를 넘기며 에리사와 센의 사고와 추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왓더닛이 얼마나 매력적인 장르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첫 두 편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표제작인 매미 돌아오다는 호러와 미스터리와 사회파 서사의 콜라보에다 기막힌 반전과 함께 밀려드는 진한 감동까지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염낭거미의 경우, 에리사와 센은 행인1’ 수준의 작은 비중과 역할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사건의 전말을 꿰뚫어 보는데, 덕분에 이런 탐정도 있을 수 있구나!”라는 독특한 느낌을 맛볼 수 있습니다. (나머지 수록작도 모두 흥미로운데, 스타일이 모두 달라서 독자마다 선호하는 수록작이 제각각일 것 같습니다)

 

제목과 표지에서 연상할 수 있듯 매미 돌아오다는 자극적인 설정도 없고 뛰어난 명탐정도 없는 착하고 순한 미스터리입니다. 물론 사건과 사고로 인해 잔혹하거나 안타까운 장면들이 펼쳐지기도 하고, 부당한 관습, 외국인 혐오, 자연 파괴와 유전자 조작, 선진국이 외면한 질병 등 사회파 소재를 통해 날선 비판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면 여지없이 휴먼 드라마의 따뜻함과 뭉클함을 품은 엔딩을 선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물건입니다. 아니 정말 좋은 (추리)소설입니다.”라는 출판사 인스타그램의 한마디는 이 작품의 미덕을 잘 함축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착하고 순한 미스터리 쪽 취향이 아니더라도 에리사와 센이 펼치는 왓더닛 미스터리가 궁금한 독자라면 매미 돌아오다에 관심을 가져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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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 라이
프리다 맥파든 지음, 이민희 옮김 / 밝은세상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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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매물로 나온 교외 저택을 방문한 이선과 트리샤 부부는 폭설과 통신 두절로 인해 부득이 아무도 없는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됩니다. 그곳이 3년 전 실종된 유명한 정신과 의사 헤일의 저택이란 걸 알게 된 트리샤는 음울한 분위기에 압도된 것은 물론 누군가 이곳에 머물고 있는 듯한 흔적을 발견한 탓에 두려움에 휩싸이지만, 이선은 자신이 찾던 저택이라며 만족감을 표합니다. 새벽녘 잠에서 깬 트리샤는 책장 뒤편의 비밀공간에서 헤일이 환자와의 면담을 녹음한 대량의 카세트테이프를 발견하곤 호기심에 사로잡힙니다. 이선 몰래 테이프를 듣던 트리샤는 3년 전 헤일의 실종 전후 상황을 암시하는 내용이 나오자 큰 충격에 빠집니다.

 


연쇄살인마의 자식인 유능한 외과의사가 주인공인 핸디맨과 저택의 가사도우미로 들어간 가석방 전과자가 주인공인 하우스메이드에 이은 프리다 맥파든의 세 번째 한국 출간작입니다. 각각 연쇄살인 스릴러, 도메스틱 스릴러인 두 작품에게 모두 별 4개의 평점을 줬지만, 무척 흥미진진하게 읽은데다 반전의 매력도 뛰어나서 뇌손상 전문의이자 스릴러 작가인 그녀의 신작 소식을 기다려왔습니다.

 

이선과 트리샤 부부가 3년 전 실종된 헤일의 저택에 갇힌 채 불안한 이틀 밤을 보내는 현재의 이야기와, 실종되기 전 헤일에게 닥친 끔찍한 사건을 그린 과거의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됩니다. 안 그래도 불온한 기운을 내뿜는 저택에 두려움을 느끼던 트리샤가 헤일의 녹음테이프를 통해 3년 전의 진상을 조금씩 알아가는 이야기와 그 당시 헤일에게 벌어졌던 일들이 배턴 터치하듯 이어지는 구조라서 독자는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는 물론 그것들이 어떻게 연결되며 접점을 이룰지 궁금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특히 폭설로 고립된 저택은 스티븐 킹의 샤이닝에 등장하는 오버룩 호텔을 연상하게 만들어서 초반부터 호러의 향기를 진하게 피우는데, 재미있는 건 샤이닝이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소품으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두 사람이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 사람이 죽어서 사라지는 것뿐이다.” (p340)

 

본문 중간에도 두어 번 등장하지만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줄을 장식한 이 문장은 네버 라이의 매력과 미덕을 한마디로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밀과 거짓말이 난무하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가운데 과거와 현재의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과 목적을 손에 넣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을 죽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수고들은 복잡하면서도 정교하게 설계된 이야기 속에서 뜻밖의 접점을 이뤄내는데, 작가는 그 지점까지 숱하게 독자의 헛발질을 유도하곤 합니다.

 

저택의 분위기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헤일의 녹음테이프에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트리샤, 아내가 겁에 질린 걸 알면서도 당장에라도 저택을 사들일 듯 만족감을 느끼는 이선, 유명한 정신과 의사지만 정작 본인의 정신세계가 일그러지고 비틀렸던 헤일, 그런 헤일에게 오랜만에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만든 루크, 그리고 비밀과 거짓말과 협박을 일삼던 헤일의 몇몇 환자 등 네버 라이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은 속내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미묘하게 설정됐거나 노골적으로 악의를 내뿜는 위험인물로 그려집니다. ‘다른 한 사람을 죽여서라도 비밀을 지키려는 건 과연 누구인지, 그렇게 지킨 비밀이 과연 끝까지 봉인될 수 있을지, 그 봉인이 해제된다면 어떤 사태가 초래될지 등 작가는 마지막까지 궁금증을 유발하며 이야기를 전개시킵니다.

 

한국에 소개된 두 편의 전작들에 비해 속도감이나 스릴러의 묘미나 반전의 짜릿함 모두 압도적인 작품입니다. ‘핸디맨하우스메이드에서 다소 아쉬움을 느낀 독자라도 네버 라이에선 전혀 다른 맛을 만끽할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다만,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이 꽤 상세한 줄거리를 공개하고 있으니 가급적이면 헤드라인 정도만 참고한 상태에서 본편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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