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머더 레이코 형사 시리즈 6
혼다 데쓰야 지음, 이로미 옮김 / 자음과모음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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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비저블 레인’(시리즈 4)의 사건으로 경시청 수사 1과 히메카와 반은 뿔뿔이 흩어졌다.

히메카와 레이코 역시 이케부쿠로 경찰서로 자리를 옮긴 상태.

어느 날 관내에서 조직폭력배 두목이 온몸의 뼈가 부스러진 상태로 살해된다.

탐문 결과, ‘블루 머더라는 자가 이케부쿠로의 뒷골목을 공포에 빠뜨렸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블루 머더는 오로지 조직폭력배, 폭주족, 중국계 마피아 등만 살인 타깃으로 삼으며,

이미 수많은 악인들이 그에게 당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는 것.

한편, 센주 경찰서로 이동한 기쿠타는 탈주범을 쫓던 중 우연치 않게 레이코와 만나게 된다.

서로를 마음에 품고 있었으면서도 다른 길을 가야 했던 둘은 감정적 동요에 휩싸인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블루 머더혼다 데쓰야의 히메카와 레이코 시리즈중 여섯 번째 작품입니다.

아쉽게도 앞선 4(인비저블 레인), 5(감염유희)을 못 본 상태에서 먼저 읽게 됐는데

가능하다면 4편인 인비저블 레인만큼은 꼭 먼저 읽은 뒤 블루 머더를 읽기를 추천합니다.

그 이유는 주요 인물 3명 사이의 관계와 감정이 전작의 연속선상에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인비저블 레인이후 경시청에서 이케부쿠로 서로 쫓겨난(?) 주인공 히메카와 레이코,

경시청 히메카와 반 소속으로 그녀를 마음속에 품고 있던 거구의 형사 기쿠타 가즈오,

경시청에서의 마지막 수사 때 레이코의 파트너였던 중년형사 시모이 마사후미가 그들입니다.

 

그들은 각각 다른 경로로 희대의 살인마 블루 머더에게 접근합니다.

관할 구역에서 뼈가 전부 으스러진 야쿠자, 폭주족, 중국계 마피아의 시신이 발견되자

레이코는 조폭담당부서와 함께 수사에 나서지만 좀처럼 단서를 잡지 못합니다.

탈주한 전화금융사기범을 쫓던 기쿠타는 탐문 도중 이케부쿠로에서 레이코와 마주치게 되고

이어 자신이 쫓던 탈주사기범이 블루 머더와 관련 있음을 알아내게 됩니다.

최근 이케부쿠로의 폭력단들이 갑자기 꼬리를 내리고 잠잠해진 것을 이상하게 여긴 시모이는

7년 전 자신의 권유로 폭력단에 위장잠입했다가 소식이 끊긴 기노 가즈마사를 찾던 중

블루 머더 사건과의 접점을 알아내게 됩니다.

 

이들 중 특히 레이코와 기쿠타의 인연이 이 작품에서 꽤 중요한 모티브로 설정돼있는데,

둘은 서로에게 마음을 품고 있었으면서도 전작에서 운명적으로 갈라서야 했기 때문입니다.

레이코는 17살 때 당한 성폭행의 트라우마로 인해 남자공포증에서 벗어나지 못한데다,

기쿠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도 전작에서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쿠타를 완전히 잊지 못했던 레이코는

정작 기쿠타가 그 사이 결혼한 사실을 알게 되자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합니다.

기쿠타 역시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오랜만에 재회한 레이코로 인해 여러 감정에 휩싸입니다.

특히 시리즈 첫 편인 스트로베리 나이트에서 소중한 동료를 잃은 적이 있는 두 사람은

끔찍한 살인마 블루 머더를 뒤쫓으면서 그때와 같은 상처를 겪을까봐 속을 태우기도 합니다.

 

블루 머더에는 꽤 많은 주제가 녹아있습니다.

어딘가 애틋해 보이는 레이코와 기쿠타 사이의 묘한 분위기,

어둠의 세력들만 골라 온몸의 뼈를 부숴 잔혹하게 살해하는 살인마 블루 머더의 범행 동기,

조직폭력배를 상대하는 일본 경찰조직의 비효율성과 정치적 타산에 대한 비판 등이 그것인데

거의 대등한 비중으로 분배된 세 가지 주제 때문에 뚜렷한 핵심이 흐려졌다는 생각입니다.

분량만 놓고 보면 살인마 블루 머더 이야기가 압도적이지만,

그를 쫓는 세 인물의 스토리가 각각 따로 노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레이코는 탐문이나 추리라는 본연의 역할에서 다소 수동적이거나 뒤처리 담당에 가까웠고,

기쿠타는 탈주범 추적보다는 레이코에 대한 회상에 더 몰두했으며,

중년형사 시모이는 무기력해진 일본경찰의 조직폭력배 응대 방침 비판에 더 열을 올립니다.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그려진 블루 머더의 범행동기와 심리묘사에 좀더 집중했더라면

작가의 의도도 훨씬 더 잘 살아나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을 갖게 됐습니다.

야쿠자, 폭주족, 중국계 마피아만 골라 온몸이 곤죽이 되도록 뼈를 부숴 죽이는 블루 머더는

지금껏 본 여느 살인마보다 끔찍한 것은 물론, 동기조차 특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배경과 동기에 대한 설명이 살짝 부족한 면도 있었고,

그래서 그의 진짜 범행 목적에 대해 선명한 대답을 듣지 못한 느낌이었습니다.

 

주제가 다소 복잡하게 얽혀있어도 시리즈를 쭉 읽어온 독자라면 충분히 공감 가능하겠지만

이 작품을 통해 히메카와 레이코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맥락 찾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작품을 읽고 나면 레이코의 과거가 궁금해서라도 앞선 시리즈를 찾게 되겠지만요.

레이코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형사인지, 어떤 여자인지 궁금한 독자라면

시리즈 첫 편인 스트로베리 나이트를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러고나면 어쩔 수 없이(?) 후속작들을 찾아 읽을 수밖에 없게 되는데,

다소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묘사를 즐기는 혼다 데쓰야의 매력적인 필력은

한번 빠져들면 좀처럼 잊기 어려운 중독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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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포스 1
돈 윈슬로 지음, 박산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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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데니 멀론은 뉴욕 맨해튼 북부 특수수사팀의 리더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맨해튼 북부의 왕.

흑인 동료 빅 몬티, 이탈리아계 단짝 친구 필 루소 등과 함께

맨해튼 북부 지역에서 일어나는 마약과 폭력 사건들을 해결해온 영웅 경찰이다.

이 영웅 경찰이 어느 날 부패 혐의로 체포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뉴욕시 정관계와 경찰 등 최고 권력자들이 모두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한다.

데니 멀론은 이들 모두와 촘촘히 연루돼 있고, 이들 부패의 핵심에 서 있는 인물이기 때문.

멀론이 무너지면 뉴욕 권력의 핵심부가 통째로 무너지게 된다.

소설은 의협심 넘치던 모범 경찰이었던 멀론이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구치소에서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경찰이 주인공인 대부를 상상해보라.”라는 스티븐 킹의 추천사는

이 작품을 가장 적확하게, 가장 의미심장하게 압축한 한줄 평입니다.

대부의 주인공들이 피도 눈물도 없는 마피아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그들에게 열광했듯

일찌감치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은 더 포스의 주인공들에게도 독자들은 열광하게 됩니다.

데니 멀론에겐 대부의 주인공들처럼 기꺼이 대신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친구들도 있고,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증오의 대상(동료경찰이든 마약폭력조직이든)도 수두룩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친구와 적들 모두 부패라는 사슬로 견고히 엮여있습니다.

 

데니 멀론과 동료들은 현장에서 수거한 마약과 돈을 빼돌려 미래를 준비하기도 하고,

돈 한 푼 안 내고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음식과 여자를 향유하는 것은 물론,

맹렬하게 대치중인 흑인, 중남미, 이탈리아 계 마피아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자신들만의 이익을 취하는 위험한 행보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크리스마스 때마다 맨해튼 북부의 빈민들에게 칠면조를 돌리기도 하고

시한폭탄 같은 할렘의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근무하기도 합니다.

경찰 내부에도 데니 멀론 무리를 못마땅히 여기는 동료나 상관들이 부지기수지만,

언제나 대단한 성과를 올리는 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자는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데니 멀론의 탄탄대로는

너무나도 사소해 보이는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순식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을 파멸로 이끌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고,

그제야 지난 18년 동안의 경찰 생활에서 자신이 야금야금 넘어왔던 들을 기억해냅니다.

처음엔 공짜 커피에서 시작됐지만, 어느 샌가 100달러 지폐를 당연한 듯 받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안락한 미래를 설계하고도 남을 토대를 차곡차곡 쌓아왔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부패경찰 데니 멀론의 참회록이란 뜻은 절대 아닙니다.

뉴욕의 권력가들은 그의 파멸을 바라면서도 동시에 그의 입이 열릴까봐 전전긍긍하게 되고

데니 멀론은 날개 없이 추락하는 와중에도 전세를 뒤엎기 위해 마지막까지 분투합니다.

자신을 파멸로 이끈 마피아와 갱조직을 궤멸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기도 하고,

자신의 파멸로 이익을 보려는 권력자들에게는 호된 반전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은 부패경찰인 데니 멀론의 마지막은 해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화 대부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어떤 느낌일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1~2권 합쳐 700페이지가 넘는 대단한 분량이지만 주말 하루면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1권이 데니 멀론과 그의 동료들, 소위 다 포스(Da Force)의 화려한 무용담에 할애됐다면

2권은 브레이크 없이 내리막길을 치닫는 그들의 파국을 긴장감 있게 그리고 있습니다.

명확한 주적(主敵)’ 없이 경찰, 마피아, , 권력자들의 복잡한 갈등관계가 그려지고 있어서

독자에 따라 쉽게 따라갈 수 있는 핵심줄기가 모호하다는 의견이 나올 수도 있지만,

오히려 피아의 식별이 불분명한 뉴욕의 정치-법조-경찰--마피아간의 먹이사슬 관계는

이 작품의 필수요소이자 가장 큰 매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서평을 마치고 경찰이 주인공인 대부를 상상해보라.”라는 스티븐 킹의 코멘트를 다시 보니

이런저런 미사여구를 붙인 긴 서평이 참 허망하고 무색해 보입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에 따르면 더 포스가 영화로도 만들어질 계획이라는데,

아무래도 마피아가 주인공인 대부만큼의 위압감을 갖긴 어렵겠지만,

그에 버금가는 비장미만큼은 충분히 맛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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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
렌조 미키히코 지음, 양윤옥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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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신간의 홍수 속에 오랜만에 공백이 생겨 책장 속에 갇혀 있던 책들을 지켜보다가

매번 특별한 이유도 없이 뒤로 미뤄오던 렌조 미키히코의 백광을 집어 들었습니다.

처음 만나는 작가지만 이름도, 작품 제목도, 표지도 무척 온화해 보여서

부드러운 일상 미스터리가 아닐까, 예단했다가 정말 제대로 뒤통수를 맞고 말았습니다.

 

평범한 중산층 주택 마당에서 4살 소녀가 교살당한 후 매장된 사체로 발견됩니다.

유아살해라는 충격적인 소재이긴 하지만, 사건은 이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소녀가 살해될 당시 집에 머물거나 드나들었던 7명의 인물을 통해

소녀의 죽음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그들간의 균열, 갈등, 복수심, 집착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특히 이들은 가족이거나 그에 준하는 관계라서

누가 범인이어도 그 결과는 참담할 것이 분명하기에 초반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4살 난 조카딸 나오코를 돌봐주기로 여동생 유키코와 약속했던 사코토는

본의 아니게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와 나오코만 집에 남겨두고 외출하게 됐는데,

그 사이 나오코가 살해당했고, 조사 결과 꽤 많은 인물이 범인일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치매 환자인 시아버지, 사건 발생 시각에 회사에 없던 남편, 나오코를 방치한 사코토 본인,

자유분방한 삶을 구가하던 나오코의 엄마 유키코와 그녀의 불륜남,

그런 아내 유키코를 지켜보며 괴로워했던 남편 다케히코 등이 그들인데

그들은 차례차례 심중에 감춰뒀던 자신만의 끔찍한 비밀들을 독백으로 털어놓거나

날선 대화를 통해 상대의 진실과 거짓을 캐는 모습을 반복하여 보여줍니다.

 

작가는 다양한 인물의 1인칭은 물론 객관적인 3인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점을 활용하는데,

처음엔 그 이유도 잘 모르겠고 약간의 혼란도 느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다양한 시점 구성 자체가 작가의 고도의 전략이란 걸 깨닫게 됐습니다.

각 인물이 소녀살해와 관련된 은밀한 고백을 1인칭 화법으로 털어놓을 때마다

독자는 그럼 이 사람이 범인인가?’라는 확신에 가까운 짐작을 하게 되는데,

문제는 다음 챕터에 넘어가 또 다른 인물이 고백을 털어놓자마자

앞선 짐작이 온통 허사가 돼버리고 예상치 못한 반전과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누구나 범인인 것 같지만, 또 동시에 누구도 범인이 아닌 것 같은,

, 누구나 살해동기를 가진 것 같지만, 동시에 그 반대인 것 같기도 한 아이러니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쉴 새 없이 등장한다는 뜻입니다.

번갈아 등장하는 1인칭 시점을 따라가다 보면 모두가 소녀를 죽이고 싶었던 같기도 하고,

모두가 다른 사람의 범행을 감추기 위해 스스로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탓에 소설 속 인물들은 물론 독자마저 점점 패닉 상태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진실이란 게 과연 있기나 한 걸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오죽하면 메인 화자인 사토코가 오히려 이 노인네만 정상이고 미친 건 우리 쪽이다.”라며

자신들이 처한 미스터리한 상황을 자탄하기도 합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등장인물간의 관계나 갈등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는데,

위에서 언급한 내용대로 이 작품은 사건 중심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각 인물의 고통스런 전사(前史), 비틀리고 일그러진 악연, 참아왔던 분노와 배신감의 폭발 등

심리적인 서사가 굉장히 강한 작품입니다.

그런 서사에 서술트릭의 일종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다양한 시점 변화가 끼어든 덕분에

꽤 집중력 있는 책읽기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저는 출퇴근길에 띄엄띄엄 읽다 보니 얼마 안 되는 분량임에도 사흘이나 걸렸고,

그래서인지 작품의 진짜배기 맛을 제대로 못 본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관심 있는 독자라면 가능하면 한 번에 집중해서 완독할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대담한 설정과 서정성 넘치는 문체로 굵직한 문학상을 휩쓸었다는 출판사의 작가 소개글이

절대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직접 확인한데다,

렌조 미키히코의 작품들이 비슷한 미덕과 장점을 지녔다는 번역가 양윤옥 님의 후기 덕분에

회귀천 정사등 그의 다른 작품들도 조만간 찾아 읽고 싶어졌습니다.

그야말로 먼지 쌓인 책장 속에서 보물을 찾아낸 기분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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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걸 비포
JP 덜레이니 지음, 이경아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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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한 완벽주의와 자기애로 똘똘 뭉친 에드워드는 극단적인 미니멀리즘 건축가입니다.

에드워드가 지은 원 폴게이트 스트리트의 주택은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

소위 사물인터넷의 집합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특별한 주택입니다.

이야기는 이 특별한 주택의 과거 세입자 에마와 현재 세입자 제인이 이끌어갑니다.

그녀들은 각각 큰 상처를 입고 안전한 주택을 찾던 중 원 폴게이트 스트리트에 머물게 되는데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까다로운 세입자 규칙에 놀라면서도 점차 적응해가는 것은 물론

주택의 설계자이자 주인인 에드워드와 특별한 관계에 이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에마와 제인은 에드워드와 이 주택의 치명적인 비밀에 관심을 갖게 되고,

나름대로의 조사를 진행하지만 그녀들 앞에는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닥쳐오기 시작합니다.

 

● ● ●

 

사고인지, 살인인지, 자살인지 불명확한 몇 건의 죽음이 등장하고

과거와 현재의 세입자인 에마와 제인이 그 진실을 찾아가는 것이 주된 스토리이긴 하지만,

사건 자체보다는 각 인물들의 불안정하고 강박적인 심리 묘사가 핵심인 작품입니다.

에마와 제인은 서로 만난 적도 없는 과거와 현재의 세입자지만 묘한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자매로 보일 만큼 꼭 닮았고, 에드워드와 판박이 같은 사랑을 나누며,

이 기이한 주택에서 벌어진 기이한 죽음에 관해 관심을 갖고 조사에 나선다는 점입니다.

그녀들은 에드워드는 물론 그의 분신과도 같은 주택이 내뿜는 압도적 분위기에 굴복하면서도

에드워드와 주택의 비밀을 파헤치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일단 설정 자체는 무척 흥미롭습니다.

미니멀리즘과 빅브라더의 혼합물 같은 기이한 저택과 그곳에 자리 잡은 상처투성이 인물들,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팽팽한 심리전과 긴장감 넘치는 미스터리 등

흥미를 자극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내재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 별 세 개밖에 줄 수 없었던 것은

뒤로 갈수록 점점 이야기가 사실감과 방향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의 캐릭터는 자연스레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를 위해 편의적으로 변질됩니다.

누가 봐도 비상식적인 세입자 규칙에 동의해가면서 이상한 집에 살고 싶어 하는 이유도,

모든 걸 통제당하는 이상한 집의 시스템에 큰 거부감 없이 순응하는 이유도,

빛나는 외모와 카리스마를 지녔지만 누구 봐도 비정상인 집주인에게 반하는 이유도,

(아무리 심리적 서사가 강한 스릴러라 해도) 딱히 설득력 있는 설명이 없습니다.

깊은 상처를 지녔던 인물은 점차 거짓말쟁이로 포장되기 시작하더니 전혀 딴사람이 돼버렸고,

집주인에게 철저한 이던 인물은 나중에 알고 보니 실은 이었던 것으로 밝혀집니다.

순도 100%의 완벽주의자이자 통제권을 잃지 않던 인물은 막판에 갑자기 순정파로 변하고,

미스터리로 남아있던 여러 죽음의 진실은 엉뚱하고 개연성 없는 인물이 진범으로 지목된 탓에

아무리 봐도 반전을 위한 반전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심리스릴러임에도 독자의 눈길을 끌었던 사건들이 너무 어이없이 마감된 느낌이랄까요?

 

이런 일관성 없는 전개 덕분에 마지막 챕터를 읽을 쯤엔 좀 허무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인물들이 중후반부터 실은 이런 사람이었다는 식으로 캐릭터가 변한 점은

앞서 꽤 거창하고 장황했던 내용들이 굳이 필요했나, 싶은 회의까지 들게 만들었습니다.

엔딩 지점의 주요 인물들은 초반부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라 보였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이름이 낯설어서 찾아보니 과거 베스트셀러를 썼던 작가의 새 필명이라고 돼있는데,

첫 페이지를 읽기 전만 해도 작가의 본명이 무척 궁금했지만,

다 읽고 난 뒤에는 다른 이유에서 작가의 본명을 알고 싶어졌습니다.

시작과 끝이 전혀 다른 이야기로 보이는 이 작품이

아무래도 과거 베스트셀러를 썼던 작가의 작품으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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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귀 후지코의 충동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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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는 어렸을 때 가족을 잃고 결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결국 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진창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한 여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받은 왕따와 학대, 가정폭력은 결국 그녀를 살인의 길로 이끌고 만다.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라고 자신을 정당화하며 살인을 반복해 살인귀가 되어가는, 한때 장밋빛 인생을 꿈꿨던 11세 소녀. 무엇이 그 소녀를 전설의 살인귀로 만들었는가? (출판사의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이야미쓰(イヤミス)’는 불쾌한 기분이 남는 미스터리를 가리키는 일본식 조어입니다. ‘싫다는 뜻의 이야(いや)’와 미스터리의 미스를 결합한 단어인데, 마리 유키코는 이 분야에 있어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판단이지만) 단연 톱클래스입니다. 지금까지 여자 친구’, ‘골든 애플’, ‘갱년기 소녀등 세 작품을 읽었는데, 말 그대로 어딘가 찜찜하고, 불편하고, 불쾌한 여운이 더 강했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매번 더는 마리 유키코 작품을 읽지 않을 테야!”하면서도 알 수 없는 중독증 때문에 자꾸만 손이 가는 묘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제목이나 표지가 워낙 남의 시선을 끄는 작품이라 연휴를 맞아 방에 틀어박혀 읽었는데, 역시나 여러 번 속이 뒤집히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은 살인귀라는 제목에서 연상되는 공포나 잔혹함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도 디테일하게 시체 훼손 과정을 묘사한 한두 군데를 제외하곤 대체로 아주 쿨하고 간결한 방식으로 살인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히려 핵심은 살인귀가 된 후지코라는 여자의 파란만장한 연대기입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족과 학교에서 심각한 왕따와 폭력을 당하던 후지코는 일가족이 살해된 와중에 홀로 살아남아 이모의 손에 크게 됩니다. ‘어떻게든 살아남되, 절대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일념만 남은 후지코는 자신의 생존과 화려한 삶에 대한 동경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철저히 파괴합니다. 중학생 시절 부잣집 아들인 대학생과 몸을 섞으며 신분상승을 기도하는가 하면, 돈만 모으면 성형외과로 달려가 자신의 얼굴을 모조리 뜯어 고치기도 합니다. 끔찍한 가난과 추한 외모만 극복한다면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또래집단의 아웃사이더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속임수를 부리기도 하고, 자신의 약점을 알아낸 사람을 서슴없이 제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후지코의 삶은 점점 엄마의 그것과 닮은꼴로 진화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깨달은 후지코는 더더욱 포악해지고 동시에 희생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갑니다.

 

사실, 후지코가 바란 것은 행복입니다. 다만, 후지코에게 있어 행복은 어떻게 해도 채워지지 않는 무한대의 탐욕 그 자체였습니다. 후지코는 늘 자신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야.’라는 주문을 걸면서 자신의 탐욕을 합리화하고 절대 도달할 수 없는 행복을 위해 살인귀를 자처했습니다. 돈을 위해, 사랑을 위해, 행복을 위해 죄의식 없는 맹목적 살인을 불사한 후지코. 그런 살인귀의 일생을 지켜보는 일은 응원할 수도, 저주할 수도 없는 일이라 독자로서는 이야미스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며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소 작위적인 사족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의 백미라 지칭하는 대목은 서문후기입니다. 이 작품이 반전을 내포한 미스터리로 분류되는 것도 바로 서문후기때문인데 단순한 연대기처럼 읽혔던 앞선 내용들을 모두 뒤집어엎는 듯한 마지막 한 줄은 (저처럼 사족으로 여긴 독자 외에는) 꽤나 충격적으로 읽힐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CCTVDNA검사가 도입되기 전인 시대를 배경으로 삼았다 해도 후지코가 어떻게 경찰의 수사를 피해 수많은 살인극을 저질렀나, 라는 의문도 제기되지만 사실 그 부분은 이 작품에서는 굳이 리얼리티를 따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보다는, 불행한 유년기로 인해 행복에 대한 갈증이 극에 달했던 한 소녀가 어떻게 서서히 살인귀로 진화했으며, 그 갈증의 끝이 어떤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가, 라는 꽤나 암울하고 불편한 서사 자체에 몰입해서 읽어야 할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국내 출간된 마리 유키코의 작품 중 유일하게 안 읽은 작품이 고충증인데, 한동안은 읽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역시나 호기심이 생기는 것을 보면 마리 유키코의 이야미스의 늪은 무시무시한 흡인력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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