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추락한 이유
데니스 루헤인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살인자들의 섬’, ‘켄지&제나로 시리즈’, ‘커글린 가문 3부작등에 이어

데니스 루헤인과 만나는 10번째 작품입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나름 데니스 루헤인의 팬이라 자부할 만한 이력인 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추락한 이유는 작가 이름을 가려놓고 읽었다면

결단코(?)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이 아니라고 판정했을 것 같습니다.

 

출판사의 홍보카피만 보면 금세 그 이유를 알 수 있는데,

이 작품은 범죄 소설이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이 작품의 핵심이다.’,

데니스 루헤인이 여성 시점으로 집필한 첫 로맨틱 스릴러.’ 등이 그것입니다.

언뜻 수긍하기 힘든 조합인데, 결과적으로 홍보카피가 과장 또는 오류는 아니었고,

실제로 이 작품의 핵심서사는 사랑이 맞습니다.

 

주인공 레이철은 성격파탄에 가까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생부가 누군지 절대 알려주지 않던 어머니가 사망한 후

그녀는 백방으로 생부를 찾아 나섰지만 결과는 꽤 비극적이었습니다.

덕분에 그녀가 얻은 것은 불쑥불쑥 폭발하는 공황발작뿐이었습니다.

이후 기자로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레이철은 불의의 사고로 낙마하게 되고

결국 공황발작과 대인공포증은 나날이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맙니다.

하지만 그때 레이철 앞에 나타난 브라이언은 그녀의 모든 공포를 잠식시켜 줍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해주는 브라이언 덕분에 점차 세상과 마주할 준비를 하던 레이철은

어느 날, 브라이언이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니란 것을 깨닫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레이철은 살인, 사기, 복수, 탐욕이 뒤섞인 사건에 휘말리고 맙니다.

 

사실, 초반에는 무척 당혹스러웠습니다.

첫 장면이 남편을 쏴 죽이는 레이철로 시작하는데 그 뒤는 좀 생소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성격파탄 어머니와의 갈등 및 출생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한 생부 찾기 이야기,

반골기질과 소신과 재능을 겸비한 기자로서의 성공 이야기,

공황발작과 대인공포증에 걸린 여자의 사랑 이야기 등등...

그 어느 것도 데니스 루헤인다운 스릴러와 거리가 먼 서사인데,

이 서사들이 전체 분량의 절반을 차지하며 초반 내내 약간은 지루하게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레이철이 브라이언의 실체를 알게 되는 대목부터 본격적인 스릴러가 시작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앞서 어머니, 생부, 기자 이야기가 왜 필요했던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고,

이 의문은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한 뒤에도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는 데니스 루헤인이라면 초반부터 스릴러 서사를 돌직구처럼 날렸을 텐데

주인공의 가족사와 성장기를 위해 왜 절반에 가까운 분량을 할애한 걸까 궁금했습니다.

물론 앞서 말한대로 이 작품의 핵심서사가 사랑이고, 장르가 로맨틱스릴러라는 걸 감안하면,

, 진실이나 범인 찾기보다는 레이철의 성장과 사랑에 방점이 찍힌 작품이란 걸 감안하면,

그녀에 대한 초반의 장황한 설명이 충분히 납득될 수도 있겠지만,

역시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이기에 저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의문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가족이 남긴 상처와 거기에서 파생된 트라우마로 인해 세상과 단절될 뻔했던 레이철이

점차 자신감을 얻고, 사랑을 얻고, 삶의 원동력을 얻게 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더욱 큰 추락과 비극을 맛보게 된다는 게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레이철은 몇 번의 위기를 겪으면서 자신의 추락을 막아내는 것은 물론

스스로 사건의 종지부를 찍는 역할까지 담당하는 여전사(?)로 진화하기도 합니다.

중반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스릴러는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답게 빠르고 촘촘하게 전개되는데,

초반에 다소 지루함을 느꼈던 독자라도 단숨에 몰입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흥미롭습니다.

켄지&제나로 시리즈처럼 거칠고 폭력적이면서도 블랙유머가 깃든 스릴러라든가

여타 작품들처럼 묵직하고 장대한 서사를 기대했던 탓에 다소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데니스 루헤인의 신작은 반갑고 또 반가웠습니다.

다음엔 데니스 루헤인의 전공이 제대로 폭발한 작품과 꼭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족으로...

지금까지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을 읽으면서 한 번도 번역의 문제를 느낀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같은 문장을 몇 번씩 되읽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오타는 아니지만 조사가 생략돼서 비문처럼 읽히는 경우도 있었고,

한 문장 안에 주어가 두 번씩 들어가거나, 한 번에 이해 안 되는 문장도 있었습니다.

그간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을 전담하다시피 작업하셨던 분들의 번역에 익숙해진 탓도 있지만

이 작품에서 느낀 아쉬움 중 번역이 차지한 부분이 상당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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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나방
장용민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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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을 무대로 미래를 기억하는 신비한 능력자 이야기를 다룬 궁극의 아이나 진시황의 불로초를 소재로 한중일 3국의 쫓고 쫓기는 스릴러를 그린 불로의 인형처럼 작가는 이번에도 글로벌한 무대 위에 복잡하게 얽힌 추적자 이야기를 내놓았습니다. 두 전작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귀신나방은 역사적 배경이 중요한 설정인데, 소설 속 현재는 1969년이고, 이야기의 연원은 2차 대전 즈음으로 잡혀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한국인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라서 그야말로 세계적인 마케팅을 염두에 둔 듯한 느낌까지 받게 됩니다.

 

서평을 쓰기 전에 혹시나 해서 출판사의 소개글을 살펴보니 역시나 이 작품의 주인공이 평생에 걸쳐 추적하는 악당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악당의 정체는 작품 초반부에 등장하기 때문에 사실 스포일러라고 할 수도 없고, 또 그 정체를 언급하지 않곤 줄거리든 서평이든 제대로 쓰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어쨌든 출판사가 노출하지 않은 정보를 제멋대로 언급할 수는 없는 일이라 아주 두루뭉술한 서평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명한 여성 컬럼니스트가 사형을 코앞에 둔 사형수의 초대로 인터뷰에 나섭니다. 사형수는 뮤지컬 극장에서 16살 소년에게 다섯 발의 총을 난사한 뒤 체포됐는데 스스로 함구한 탓에 동기도, 피해자와의 관계도 오리무중인 상태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그런 그가 사형을 앞두고 초대한 컬럼니스트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2차 대전 종전 즈음부터 현재까지 그는 20여년에 걸쳐 추적극을 벌여왔는데, 그 대상은 불사신처럼 오랫동안 죽음을 초월하여 생존해 온 것은 물론 자본과 정치의 힘으로 전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망을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처음엔 헛소리로 들렸지만 사형수의 진술이 소름 끼칠 정도로 팩트에 가깝다는 걸 깨닫자 컬럼니스트는 전대미문의 특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지난 20여 년간 집요하게 악당을 추적한 과정을 그립니다. 물론 그 혼자만이 추적극을 벌인 것은 아닙니다. 함께 했던 동료들이 있었지만 결국엔 오롯이 그만의 미션으로 남게 됐고, 몇 번쯤은 결정적 기회를 잡아 악당을 제거할 수도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현직 경찰임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도 악당에 대해 털어놓지 못합니다. 아무도 믿어줄 리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고독한 추적극을 감당해야 했고, 마침내 자신의 미션을 달성해냅니다.

 

하지만... ‘악당이 도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사형수는 20여 년간 집착의 끈을 놓지 못한 걸까요? 20여 년에 걸친 추적 끝에 살해한 대상이 왜 16살 소년일까요? 16살 소년은 정말 사형수가 노렸던 악당이 맞을까요? 과연 20여 년의 추적을 마친 사형수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까요?

 

사실, ‘귀신나방은 판타지라 하기엔 과학과 의학의 성과가 바탕에 깔려있고, 픽션이라 하기엔 꽤 많은 실존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에 장르 자체가 모호한 작품입니다. 방대한 인물이 등장하고, 복잡다단한 설계도 위에 무척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배치돼있어서 사이즈 면에서 보면 거의 대하드라마 급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작품입니다. 작가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상상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전작들의 경우 그 상상력이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리얼하게 읽힌 반면, 이번 작품은 상상력이 너무 멀리 간 나머지 다소 황당하게 읽혔다는 점입니다. 특히 악당이 미국의 자본과 정치를 장악하는 과정은 아무리 픽션이라 해도 이게 말이 돼?” 또는 이렇게 쉬워?”라는 의아함을 자아내곤 했는데, 워낙 전개가 빠르고 긴장감이 넘쳐서 페이지는 휙휙 넘어갔지만 어딘가 찜찜한 위화감과 의아함을 떨쳐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장용민의 거대한 스케일과 엄청난 상상력을 좋아하는 독자에겐 오랜만의 반가운 신작이겠지만 이 작품으로 장용민을 처음 접한 독자라면 다소 당황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4년 만에 나온 신작인데다, 내용 상 꽤 많은 자료조사와 공부가 필요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작품 곳곳에서 그 고된 과정의 흔적을 발견할 수는 있었지만 약간은 과할 정도로 뻗어나간 서사가 오히려 아쉬움으로 남았던 작품입니다.

 

악당에 대한 언급 없이 서평을 쓰긴 썼는데, 제가 봐도 참 무리라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출판사 입장에서도 악당을 이용한 홍보가 괜찮은 마케팅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감춘 이유를 잘 모르겠고 덕분에 서평 쓰는 독자 입장만 곤혹스러워졌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악당의 정체에 대해 별 생각 없이 언급하는 서평들도 있겠지만, 이렇듯 작품 자체에 대해 할 말이 없어지는 경우도 참 드물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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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 잇 블리드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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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역구 주민들의 민원 상담을 하던 톰 길레스피 의원 앞에

얼마 전 출소한 매커널리가 나타나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는 잘 알지도 못하는 의원을 일부러 찾아와 보란 듯이 방아쇠를 당긴 것.

뭔가 감추는 듯한 의원의 태도에 리버스는 불시에 그의 집을 방문하고,

급하게 문서들을 파쇄 중이던 의원의 얼굴에 드리운 두려움을 발견한다.

전과자의 우발적 자살로 사건을 종결지으려는 상부에 반발해 독자적인 수사를 하던 리버스는

경찰 수뇌부는 물론 감찰부서와 정치권의 압력까지 받던 끝에 강제로 휴직당하고 만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유능하고 괴팍하면서도 반골 기질로 가득한 존 리버스 형사 시리즈의 일곱 번째 작품입니다.

네 번째 작품인 스트립 잭을 제외하곤 그의 시리즈를 모두 읽었는데,

영미권 또는 북유럽권 작품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던 건

아마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라는 좀 특별한 무대 탓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치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어딘가 불안정하고 뾰족뾰족 모난 느낌이 드는 분위기는

실제로 그곳에 가보지 않은 건 물론 딱히 해박한 지식 없이도

다른 책이나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습득할 수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접한 존 리버스 시리즈는 확실히 색다른 분위기의 스릴러로 읽혔습니다.

 

렛 잇 블리드에서 존 리버스가 마주한 사건은

스코틀랜드의 정치적-경제적 문제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방의회, 경제 관련 정부부처, 재벌, 경찰조직 등이 총출동한 가운데

살인, 자살, 납치 등 다양한 미스터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됩니다.

전작인 치명적 이유에서 세대를 이은 정치적-종교적 갈등과 파벌주의를 다룬데 이어

또 다시 사회적 이슈를 소재로 삼은 셈인데,

특히 이번에는 존 리버스로 하여금 꽤나 심각한 딜레마까지 겪게 만들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정의와 도덕, 그리고 보편적 공익에 관한 딜레마인데,

본문에 이를 압축적으로 묘사한 악당의 변명이 등장합니다.

 

한 아이가 사과를 좀 훔쳤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커서 많은 생명을 구하는 의사가 됐어요.

굳이 그를 법정에 세워 어릴 적에 벌인 절도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더 자세한 언급은 곤란하지만,

어쨌든 존은 진실에 다가갈수록 악당의 변명이 건넨 딜레마 때문에 고민에 빠집니다.

이는 범죄 관련자 대부분이 고위직이라 폭로될 경우 에든버러에 치명타라는 딜레마를 다룬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숨바꼭질과도 궤를 같이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초반부터 전방위적인 수사 중단 압박이 가해지고 끝내 강제휴직까지 당했던 시점에는

순수한 분노와 올곧은 정의감으로 중무장한 채 반골의 끝판왕처럼 수사에 매진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존은 자신의 도덕률과 보편적 공익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 읽고 보면 미스터리 자체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습니다.

자살, 살인, 납치 등 대부분의 사건이 단선적인 맥락에서 발생했고,

결정적 단서는 약간의 행운과 함께 존의 손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하지만 전작인 치명적 이유가 스코틀랜드의 역사적, 종교적 갈등에 대한

상세하고 장황한 묘사 때문에 쉽지 않은 책읽기가 됐다면,

렛 잇 블리드는 스코틀랜드의 정치권과 관료 시스템에 대한 복잡한 설명이

비슷한 성격의 장애물 역할을 하고 있어서 역시 쉽지 않은 책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임에도 큰 그림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막판에야 설명된 그 큰 그림은 어딘가 결과론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부자연스럽게 억지로 맞춰진 퍼즐 같다고 할까요?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그동안 꾸준히 등장했던 조연들의 캐릭터입니다.

어느 새 직장인이 된 딸 새미(사만다)는 아버지 존과 직업적 문제로 갈등하게 되고,

시리즈 첫 편인 매듭과 십자가에서 연인이 됐다가 금세 헤어진 질 템플러는

존의 임시 상관으로 부임한 뒤 존을 끝없이 압박하는 나쁜 간부로 등장합니다.

역시 전 연인인 페이션스나 얄미운 경찰 동료 플라워는 계속 존과 악연을 이어갑니다.

물론 늘 존의 아군이던 브라이언 홈스와 쇼반 클락은

위험을 무릅쓰고 존의 불법적인(?) 암행수사를 돕는 매력적인 활약을 보여줍니다.

 

다소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긴 했지만 존 리버스 시리즈를 쭉 읽어온 독자 입장에선

그래도 그의 독설과 지독한 반골 기질을 다시 읽을 수 있어서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이 작품으로 존 리버스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느낌표보다는 의문부호가 더 떠오를 것 같은데

시리즈 첫 편부터 순서대로 읽다보면 이 시리즈만의 묘한 중독성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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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 모노클 시리즈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민경욱 옮김 / 노블마인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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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설턴트 회사를 경영하는 도미자와 미쓰루에게는 부업이 있다.

650만 엔에 살인을 의뢰받는 청부살인업자’.

의뢰가 들어오면 작업 여부를 3일 안에 판단하고, 작업에 착수하면 2주 내에 실행한다.

어디까지나 비즈니스라고 생각하며 을 수행하지만,

저 여자는 왜 한밤중에 공원에서 검은 물통을 씻을까?

퇴근길에 기저귀를 구입하는 저 독신남의 정체는 무엇일까?”

사람을 죽여 놓고 상대가 왜 죽어야 했는지를 추리하는 특이한 청부살인업자.

그는 어느 날, 허를 찌르는 의뢰와 마주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최근 들어 청부살인업자를 내세운 작품들을 부쩍 자주 읽게 됐는데,

특히 방진호의 방의강 시리즈와 찬호께이의 풍선인간은 개성 만점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이시모치 아사미의 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는 일상 미스터리라는 맥락에서 보면

찬호께이의 작품과 비슷한 결을 지닌 작품이긴 하지만 좀더 사실감이 높다고 할 수 있는데,

찬호께이의 주인공이 초능력 캐릭터인데 반해

이시모치 아사미의 주인공은 그야말로 옆집 사는 이웃 같은 평범한 킬러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덧붙여 의뢰 접수자와 중간연락책 모두 멀쩡하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캐릭터라

때로는 희화화된 느낌을, 때로는 지독한 사실감을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일단 이들의 비즈니스 프로세스를 보면,

의뢰자 의뢰접수(치과의사) - 중간연락책(구청 공무원) - 킬러(경영 컨설턴트)’ 구조입니다.

, 의뢰자나 의뢰접수자는 중간연락책과만 닿을 뿐 킬러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킬러 역시 의뢰자나 의뢰접수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며,

중간연락책은 킬러에게 전할 기본 정보 외에는 의뢰자에 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나름의 신중한 작업 방식인 셈인데,

이런 특이한 프로세스 덕분에 수록된 일곱 편의 작품 모두 특별한 재미를 지니게 됩니다.

 

사실, 청부살인업자 이야기를 그저 재미있게 읽기만 한다는 게 아이러니한 일이긴 합니다.

실제로 수록된 작품 속에서 킬러 도미자와에게 살해당하는 이들은

지독한 악당이나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도미자와는 동기나 배경에 일절 관여하지 않은 채 묵묵히 의뢰를 수행합니다.

이렇게 보면 도미자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소시오패스인 게 맞는데,

읽는 내내 어느 한구석에서도 그런 인상을 받지 못한다는 점은 더더욱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 자신이 살해한 대상에 대해 ()는 왜 죽어야 했는가?’를 뒤늦게 추리한다든가,

의뢰자가 취소한 탓에 목숨을 빼앗지 않은 대상에 대해 별도로 조사하고 연구하는 대목,

그리고 표적이 된 살인청부업자라는 소제목처럼 자신이 청부대상이 되는 케이스 등

상투적인 청부살인업자 이야기를 넘어선 예상 밖의 신선한 스토리들이 전개돼서

어떤 순간에는 청부살인업자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있게 읽어도 되나?’라는,

약간은 당혹스러운 느낌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수록작 가운데 동반자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이 역시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 작품은 유일하게 킬러 도미자와의 시점이 아닌 작품입니다.

바로 의뢰접수자인 베테랑 치과의사 아쿠타가와 이세도노가 주인공인 이야기인데,

의뢰자와 의뢰접수자간의 팽팽한 속고 속이기 게임이 색다른 재미를 주고 있습니다.

물론 도미자와가 이끄는 이야기도 재미있게 읽혔지만 작품마다 약간의 편차는 있습니다.

다소 작위적인 설정이 있는가 하면, 재치 있는 반전을 담은 작품도 골고루 섞여 있습니다.

아무래도 일상 미스터리에 가까운 약간의 가벼움이 느껴진 탓에 별 0.5개를 빼긴 했지만,

소소한 재미와 적절한 사이즈의 반전, 특별한 청부살인업자 이야기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사족으로...

이시모치 아사미는 3년 전쯤, ‘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로 처음 만났는데,

그때 쓴 서평을 보니 하룻밤에 벌어진 연쇄살인마의 리얼한 살인기록이지만,

동시에 판타지 또는 지독한 심리극으로 분류될 수도 있는 작품.”이라고 돼있습니다.

기억은 희미해도 별 5개를 줬을 정도로 매력 만점의 작품이었다는 인상이 남아있는데,

이 청부살인 이야기와는 분위기도, 캐릭터도 완전히 다른 톤이라 살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어느 쪽이 진면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채로운 필력의 작가임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국내에 모두 7편의 작품이 출간됐는데, 짬나는 대로 한 편씩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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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아이를 차로 치고 말았어
그렉 올슨 지음, 공보경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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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 이 작품의 제목과 표지를 보곤 뭐지?’라는 느낌을 받았던 게 사실입니다.

이웃집 아이를 차로 치었다니 황망한 건 말할 것도 없고

만일 아이가 죽기라도 했다면 엄청 비극적인 사건임에 분명한데,

왠지 제목과 표지가 풍기는 분위기는 블랙 코미디를 연상시켰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각성제와 약물을 먹고 밤새 변호사 시험 준비를 했던 리즈 재럿이

급하게 시험장으로 가기 위해 차를 몰던 중 이웃집 아이 찰리를 치면서 시작됩니다.

문제는 정신이 혼미하고 판단력마저 흐려진데다 변호사 시험에 목숨을 걸고 있던 리즈가

이성적인 판단대신 자기도 모르게 사고를 은폐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찰리의 엄마인 캐롤이 실종신고를 하고 관광객들로 북적이던 동네에 경찰들이 잔뜩 깔리자

리즈는 뒤늦게 남편 오웬에게 사실을 고백합니다.

이쯤에서라도 일이 바로 잡혔다면 다행일 텐데 리즈는 계속 진창 속으로 빠져들 뿐입니다.

 

사람이 여럿 죽어 나가는 잔혹한 미스터리와 스릴러에 비하면

우발적인 교통사고 자체는 어쩌면 소박한 소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웬만큼 독한 설정의 미스터리나 스릴러보다 마음을 졸이게 한 작품이었는데,

다소 신선함은 떨어지더라도 너무나 현실감 있는 관계설정과 심리묘사 때문이었습니다.

 

우선, 희생자가 3살 된 어린 아이이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친한 이웃이란 점입니다.

10살 차이가 나지만 리즈와 캐롤은 꽤 친하게 지내왔고, 리즈는 찰리를 무척 예뻐했습니다.

사고를 숨긴 채 캐롤을 위로하며 마음 아파하는 역할을 리얼하게수행해야 하는 리즈는

죄책감과 갈등에 하루에도 몇 번씩 자살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 가해자 부부와 피해자 부부 모두 시한폭탄 같은 균열을 내재하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양쪽 남편들은 아내를 돈벌이를 위한 발판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물론

평소에도 가정에 소홀했던데다 여자관계도 깨끗하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이미 사건 전부터 위태롭던 두 부부의 관계는 찰리 사건 이후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공들여 키운 회사의 상장을 앞뒀던 오웬은 아내 리즈 때문에 꿈이 좌절될 상황에 처하자

사사건건 시비를 걸더니 결국엔 혼자라도 살아남기 위해 극단적인 계획을 세우기도 합니다.

평소 아들 찰리에게 무덤덤하거나 곁을 주지 않던 데이비드가

사고 이후에도 아들 찾기보다는 자신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에 더 몰두하자 캐롤은 격분합니다.

결국 교통사고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사건이 살인, 은폐, 시체유기 등 악화일로를 치달으면서

사건에 연루된 두 부부는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바닥을 칠 정도로 피폐해지고 맙니다.

 

이 작품이 섬뜩하게 읽혔던 가장 큰 이유는

언제든지 내게도 너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란 점입니다.

물론 CCTV나 블랙박스가 보편화된 지금은 처음부터 은폐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실수와 죄를 인정하고 달게 벌을 받으면 됐을 일을 한순간의 오판으로 악몽으로 만드는 것은

리즈가 특별히 어떤 인격이나 성격적인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었다는 생각입니다.

누구라도 리즈의 상황에 처했다면 그녀처럼 덮어버리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고,

몇 번이고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린 채 점점 더 깊은 늪으로 끌려들어가지 않을까요?

리즈의 악몽은 그래서 너무나 현실적이었고, 읽는 내내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습니다.

 

리즈가 더는 죄책감을 이겨낼 수 없어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할 시점에

사건은 의외의 방향으로 급선회하게 되고 아무도 예상 못한 결론이 튀어나옵니다.

하지만 리즈는 이 예상 못한 결론으로 인해

또다시 따뜻하고 용감한 이웃이라는 기만적인 역할을 맡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합니다.

과연 가해자 리즈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합당한 벌을 받게 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야 독자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미스터리 자체보다 심리묘사가 돋보이긴 했지만,

두 부부의 상황이나 심리를 그리는 과정에서 중언부언 또는 동어반복이 자주 보여서

과연 460여 페이지의 분량까지 필요했을까, 라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점만 제외하면 무척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당장 오늘부터 운전조심이라는 현실적인 교훈을 전해주기도 했는데,

이 말이 결코 웃자고 하는 소리가 아니란 점은 이 작품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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