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가 추락한 이유
데니스 루헤인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살인자들의 섬’, ‘켄지&제나로 시리즈’, ‘커글린 가문 3부작’ 등에 이어
데니스 루헤인과 만나는 10번째 작품입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나름 데니스 루헤인의 팬이라 자부할 만한 이력인 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추락한 이유’는 작가 이름을 가려놓고 읽었다면
결단코(?)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이 아니라고 판정했을 것 같습니다.
출판사의 홍보카피만 보면 금세 그 이유를 알 수 있는데,
‘이 작품은 범죄 소설이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이 작품의 핵심이다.’,
‘데니스 루헤인이 여성 시점으로 집필한 첫 로맨틱 스릴러.’ 등이 그것입니다.
언뜻 수긍하기 힘든 조합인데, 결과적으로 홍보카피가 과장 또는 오류는 아니었고,
실제로 이 작품의 핵심서사는 ‘사랑’이 맞습니다.
주인공 레이철은 성격파탄에 가까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생부가 누군지 절대 알려주지 않던 어머니가 사망한 후
그녀는 백방으로 생부를 찾아 나섰지만 결과는 꽤 비극적이었습니다.
덕분에 그녀가 얻은 것은 불쑥불쑥 폭발하는 공황발작뿐이었습니다.
이후 기자로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레이철은 불의의 사고로 낙마하게 되고
결국 공황발작과 대인공포증은 나날이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맙니다.
하지만 그때 레이철 앞에 나타난 브라이언은 그녀의 모든 공포를 잠식시켜 줍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해주는 브라이언 덕분에 점차 세상과 마주할 준비를 하던 레이철은
어느 날, 브라이언이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니란 것을 깨닫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레이철은 살인, 사기, 복수, 탐욕이 뒤섞인 사건에 휘말리고 맙니다.
사실, 초반에는 무척 당혹스러웠습니다.
첫 장면이 ‘남편’을 쏴 죽이는 레이철로 시작하는데 그 뒤는 좀 생소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성격파탄 어머니와의 갈등 및 출생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한 생부 찾기 이야기,
반골기질과 소신과 재능을 겸비한 기자로서의 성공 이야기,
공황발작과 대인공포증에 걸린 여자의 사랑 이야기 등등...
그 어느 것도 데니스 루헤인다운 스릴러와 거리가 먼 서사인데,
이 서사들이 전체 분량의 절반을 차지하며 초반 내내 약간은 지루하게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레이철이 브라이언의 실체를 알게 되는 대목부터 본격적인 스릴러가 시작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앞서 어머니, 생부, 기자 이야기가 왜 필요했던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고,
이 의문은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한 뒤에도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는 데니스 루헤인이라면 초반부터 스릴러 서사를 돌직구처럼 날렸을 텐데
주인공의 가족사와 성장기를 위해 왜 절반에 가까운 분량을 할애한 걸까 궁금했습니다.
물론 앞서 말한대로 이 작품의 핵심서사가 ‘사랑’이고, 장르가 로맨틱스릴러라는 걸 감안하면,
또, 진실이나 범인 찾기보다는 레이철의 성장과 사랑에 방점이 찍힌 작품이란 걸 감안하면,
그녀에 대한 초반의 장황한 설명이 충분히 납득될 수도 있겠지만,
역시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이기에 저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의문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가족이 남긴 상처와 거기에서 파생된 트라우마로 인해 세상과 단절될 뻔했던 레이철이
점차 자신감을 얻고, 사랑을 얻고, 삶의 원동력을 얻게 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더욱 큰 추락과 비극을 맛보게 된다는 게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레이철은 몇 번의 위기를 겪으면서 자신의 추락을 막아내는 것은 물론
스스로 사건의 종지부를 찍는 역할까지 담당하는 여전사(?)로 진화하기도 합니다.
중반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스릴러는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답게 빠르고 촘촘하게 전개되는데,
초반에 다소 지루함을 느꼈던 독자라도 단숨에 몰입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흥미롭습니다.
‘켄지&제나로 시리즈’처럼 거칠고 폭력적이면서도 블랙유머가 깃든 스릴러라든가
여타 작품들처럼 묵직하고 장대한 서사를 기대했던 탓에 다소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데니스 루헤인의 신작은 반갑고 또 반가웠습니다.
다음엔 데니스 루헤인의 ‘전공’이 제대로 폭발한 작품과 꼭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족으로...
지금까지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을 읽으면서 한 번도 번역의 문제를 느낀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같은 문장을 몇 번씩 되읽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오타는 아니지만 조사가 생략돼서 비문처럼 읽히는 경우도 있었고,
한 문장 안에 주어가 두 번씩 들어가거나, 한 번에 이해 안 되는 문장도 있었습니다.
그간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을 전담하다시피 작업하셨던 분들의 번역에 익숙해진 탓도 있지만
이 작품에서 느낀 아쉬움 중 번역이 차지한 부분이 상당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