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트기 힘든 긴 밤 추리의 왕
쯔진천 지음, 최정숙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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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장소에 시체를 유기하려던 용의자가 수백 명의 목격자 앞에서 체포되었다.

증인과 증거, 진술을 확보한 검찰이 용의자를 정식 기소하지만,

그는 재판정에서 갑자기 진술을 번복하며 사건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끈다.

재수사 과정에서 피해자인 전직 검찰관이

십여 년 전의 살인사건의 진실을 끈질기게 조사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젊음, , 명예, 미래, 가정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까지 바친 한 남자의 삶이 조금씩 베일을 벗는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오랜만에 대륙의 힘이 느껴지는 중국 미스터리를 만났습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사악한 최면술사의 주하오후이, ‘심리죄의 레이미와 함께

중국 추리소설계 3대 인기작가로 손꼽힌다고 하는데

다분히 개인적인 견해지만 쯔진천은 그들과는 체급 자체가 달라 보입니다.

물론 이 작품의 소재나 주제가 워낙 묵직하고 견고해서 그런 느낌이 들었을 수도 있지만,

캐릭터를 묘사하는 힘이나 사건을 풀어가는 방식 모두 대작의 분위기를 내뿜는 작품입니다.

굳이 소감을 비교하자면 찬호께이의 ‘13.67’의 압도감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제목이 좀 독특한데, 실은 원제인 장야난명(長夜難明)을 그대로 풀어쓴 번역제목입니다.

말하자면, 지난한 어둠의 시간을 지나 어렵사리 만난 밝음이란 뜻인데,

(중국에서는 정치적 암흑기를 비유한 말이라고도 합니다.)

이 작품의 실질적 주인공인 전직 검찰관 장양은

신참 시절에 휘말린 한 살인사건의 진실을 캐고 거대권력이 짓밟은 피해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끝이 없어 보이는 어둠 같은 10년의 세월을 자신의 모든 것을 내팽개치며 질주한 인물입니다.

 

시작은 무척 미미했습니다.

무난한 승진가도를 앞두고 골치 아픈 사건을 떠맡기 싫었던 장양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성년자 성폭행 의혹을 제기했던 한 남자의 죽음에 관여하게 되는데,

수사를 진행할수록 서서히 드러나는 추악한 이면으로 인해

자신의 미래를 붕괴시킬지도 모르는 더럽고 깊은 늪에 발을 담그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결정적 증인은 실종되거나 살해되고, 중요한 증거와 단서 역시 훼손되거나 사라지면서

장양의 수사는 10년 동안 한시도 평탄한 길을 걷지 못합니다.

그의 곁에는 돌직구 경찰 주웨이, 재테크에도 능한 타고난 법의관 천밍장이 있었지만,

경찰과 검찰의 비호를 받는 재벌, 폭력조직, 권력자의 카르텔을 깨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10년이 지난 어느 날, 이들은 희대의 살인극을 기획합니다.

그것만이 10년 전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특별수사팀장 자오톄민과 뛰어난 추리력을 지닌 수학과 교수 옌량이

자백을 번복한 살인범 장차오를 취조하며 파묻힌 진실을 캐는 현재 시점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장차오에게 살해된 장양이 추악한 권력자들과 싸워온 지난 10년의 기록들입니다.

민간인임에도 수사팀에 합류한 옌량은 살인범 장차오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곤

수사팀장인 자오톄민에게 피살된 장양에 관해 조사할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장양의 과거를 알면 알수록 장차오의 범행이 결코 평범한 살인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현재 시점의 자오톄민과 옌량의 조사에 발맞춰 장양의 과거사가 한 챕터씩 전개되는데,

그 내용은 앞서 언급했듯 장야난명이라 할 수 있는 장양의 투쟁 기록이기도 합니다.

 

사실, 힘없고 외롭지만 정의감 하나로 똘똘 뭉친 주인공이

거대한 부정부패 세력과 싸우는 이야기의 전형적 요소가 빼곡하게 들어찬 작품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만의 미덕이라면 10년 동안 내내 패배의 쓴맛만 들이켰던 장양 일행이

더는 밀릴 수 없는 막판에 이르러 도박처럼 내던진 마지막 카드의 의외성과 비장미입니다.

독자는 중반부쯤에 이르러 살인범 장차오의 진의를 얼핏 깨달을 수는 있지만,

장양 일행의 마지막 카드10년 전의 진실을 끌어올리는 과정을 그린 클라이맥스는

제법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극적인 효과를 발휘합니다.

 

다만, 장양의 과거사가 상투적이긴 해도 묵직한 서사의 힘을 지닌 반면,

자오톄민과 옌량의 현재 시점의 수사는 다소 수동적이거나 모호한 부분이 많고,

장양의 과거사 챕터와 유기적으로 맞닿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현재 시점의 주인공들이 자신들만의 힘으로 과거의 진실을 찾아가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진술 듣고 추리하기이상의 특별한 매력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다 읽고도 자오톄민과 옌량이 뭘 했지?”라는 의문이 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고,

0.5개가 빠진 것도 바로 같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옌량이 주인공을 맡은 추리의 왕시리즈의 마지막 편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쯔진천의 작품 중 한국에 처음 소개된 걸 보면

아마 대중성이나 작품성 면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보이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쯔진천의 다른 작품들에도 관심이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중화권 미스터리를 꽤 읽었지만 나름 작품마다 편차가 좀 있다고 느꼈고,

찬호께이 외에는 후속작을 기대하는 작가가 딱히 없었는데,

이제 그 목록에 쯔진천을 올려놓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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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 리더 - 사람의 마음을 읽는 자 스토리콜렉터 68
크리스토퍼 판즈워스 지음, 한정훈 옮김 / 북로드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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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Kill File’이지만 주인공의 특별한 재능(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 때문에

마인드 리더라는 친절한(?) 번역제목이 붙은 것 같습니다.

어딘가 작위적인 느낌이 드는 존 스미스라는 이름을 지닌 주인공은

자신도 기억 못하는 언젠가부터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됐고,

그 재능을 알아본 CIA에 의해 조련되면서 더욱 더 강력한 초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 상대의 시각 기능을 뒤흔들어 착시 현상을 일으킬 수도 있고,

자신이 겪은 최악의 트라우마를 상대의 뇌에 투사하여 급격한 패닉에 빠지게 할 수도 있으며

텔레파시(?)를 통해 상대의 생각 자체를 좌지우지 할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단순한 마인드 리더가 아니라 마인드 조작자에 버금가는 인물이란 뜻입니다.

 

CIA 소속이었지만 지금은 사설 컨설턴트로 일하던 그는

어느 날 억만장자 컴퓨터 천재 슬론으로부터 엄청난 제안을 받습니다.

자신의 알고리즘을 훔쳐간 엘리 프레스턴을 응징해달라는 것인데,

프레스턴은 항간에 제2의 저커버그로 불릴 정도로 부와 기술을 겸비한 인물입니다.

대저택이 있는 무인도를 통째로 99년 간 무상임대해주겠다는 말에 존은 의뢰를 받아들이지만

프레스턴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일은 틀어지기 시작하고, 존은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크게 두 개의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하나는 존이 갖은 고난 끝에 슬론의 의뢰를 해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주는 과거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작품이 시리즈물로 확장될지는 모르겠지만, 특별한 재능을 가진 주인공을 설명하려다 보니

아무래도 꽤 많은 분량이 그의 과거를 위해 할애됐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현재의 미션보다 그의 과거 성장사가 더 흥미롭게 읽혔는데,

그건 입양, 군 입대, CIA에서의 훈련 및 실전 등 과거 스토리가 재미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현재의 미션이 다소 단선적이고 공식대로만 흘러간 탓도 있습니다.

 

대저택이 딸린 무인도를 무상으로 주겠다는 억만장자의 의뢰 목적도 다소 불명확하고,

프레스턴의 야망과 목표, 또 존의 목숨까지 제거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도 잘 모르겠고,

사면초가에 처한 존이 큰 위기들을 벗어나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과정은 너무 쉬워 보입니다.

가장 심플하고 교과서적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웅 스토리랄까요?

그에 비해 이런저런 굴곡도 많고 반전도 있는 과거사가 더 흥미롭게 읽힌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특이한 주인공 캐릭터 자체는 매력적입니다.

상대의 생각을 읽어냄으로써 은밀한 비밀이나 현재의 감정 등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상대의 뇌를 통제함으로써 오감과 행동까지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은 꽤 흥미로운 설정입니다.

물론 이 능력이 특별한 은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읽고 싶지 않은 타인의 생각들이 끝없는 소음처럼 밀려들 수도 있고,

그 누구와도 인간적인 감정교류를 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어쩌면 저주에 가까운 능력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 상대와 너무 밀접하게 연결돼있을 경우 상대가 물리적으로 느끼는 고통까지

고스란히 공유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무척 위험한 능력일 수도 있습니다.

특별한 능력의 양면성을 보여주기 위한 적절한 설정으로 보이긴 한데,

다만, 단순히 마음을 읽는 차원을 넘어 완벽한 통제를 휘두르는 슈퍼히어로가 되다 보니

도대체 존의 능력의 한계치는 어딘가?”라는 의문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무한한 능력이 미션 완료 과정을 좀 평이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이었고,

그래서 다 읽은 뒤 현재 시점의 이야기만 복기해보면 다소 맥빠진 느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할리우드 제작자들에게는 꽤 구미가 당기는 원작이 될 것 같고,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실제로 영화화 가능성이 높다는 뉴스도 나온 듯 합니다.

이 특별한 주인공 캐릭터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분량도 그리 길지 않으니 주말 한나절이면 충분히 그 재미를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족으로..

특별히 어디가 문제라고 지적할 수는 없지만 번역이 다소 매끄럽지 않았다는 느낌입니다.

직역이라는 인상을 받은 문장도 꽤 있었고,

분명 한국어인데 맥락이나 문장 자체가 잘 이해되지 않는 경우도 좀 있었습니다.

북로드 작품 중에 이런 인상을 받은 경우가 잘 없는데, 저만의 오해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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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치는 달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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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호텔 로열로 사쿠라기 시노를 처음 만난 이후

유리갈대’(2016), ‘빙평선’(2018) 2년마다 한 편씩 그녀의 작품을 읽어왔는데,

올해는 욕심을 좀 내서 빙평선에 이어 2015년에 출간된 굽이치는 달까지 읽게 됐습니다.

 

모두 6편의 단편이 연작 형태로 수록된 작품집인데,

언제나 그렇듯 이야기의 주 무대는 훗카이도 동부의 작은 항구도시 구시로입니다.

작가 본인이 나고 자란 곳이기도 한 구시로는 무척 특이한 분위기를 내뿜는 곳입니다.

넓은 습원(濕原)이 자리 잡은 탓에 신비함, 스산함, 애틋함이 녹아있는 것 같고

마치 안개 속의 풍경처럼 아스라한 느낌까지 주는 곳입니다.

바다에서 살아있는 생물처럼 다가오는 해무 때문에 도시 전체가 갯내에 휘감겨 있었다.”

빙평선의 수록작 중 한 편에서 언급된 구시로에 대한 압축적인 묘사인데,

이런 분위기는 사쿠라기 시노의 모든 작품에 전반적으로 녹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굽이치는 달은 구시로의 독특한 분위기가 덜 배어있는 편인데,

그것은 이야기의 중심에 위치한 인물이 도쿄 변두리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이끄는 주인공들은 모두 구시로에 위치한 도립 습원고등학교 독서부 멤버들입니다.

이들이 20대 초반이었던 1984년부터 약 25년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각각의 인물은 단편 하나하나의 주인공을 맡아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동시에

1984년 스무살 연상의 유부남과 야반도주한 한 친구와의 인연을 담담히 그리고 있습니다.

 

스가 준코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삿포로에서 화과자집 종업원으로 일하던 중

사장이자 유부남인 교이치로와 불륜에 빠진 뒤 임신까지 한 상태에서 도쿄로 야반도주합니다.

1984년의 주인공 기요미는 준코가 야반도주 직전 마지막으로 연락한 친구였고,

1990년의 주인공 모모코는 과거의 준코처럼 유부남과 불륜에 빠진 상태에서

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준코의 편지를 받곤 그 행복을 확인하려고 도쿄로 찾아갑니다.

1993년의 주인공 야요이는 준코에게 남편을 빼앗긴 삿포로 화과자집 주인으로,

7년 만에 모든 것을 정리하기 위해 남편과 준코가 있는 도쿄로 향합니다.

2000년의 주인공 미나에는 학생 때부터 흠모했던 국어선생 다니카와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그는 학창시절의 준코가 푹 빠져 있던 상대이기도 합니다.

2005년의 주인공 시즈에는 준코의 엄마로, 평생 여러 남자에게 전전하느라 준코를 방치했다가

60대가 돼서야 자신의 미래가 두려운 나머지 준코를 찾아가기로 결심합니다.

2009년의 주인공 나오코는 독서부 멤버 중 유일한 미혼으로,

부모의 죽음에 죄책감을 갖고 있던 중 준코를 통해 마음의 안식을 얻게 됩니다.

 

이렇듯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준코가 놓여있지만, 정작 준코가 화자인 작품은 없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화자가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하지만,

동시에 준코에 대해, 준코와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셈입니다.

무엇보다 25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은 이들 사이의 관계와 감정과 인연이란 것이

얼마나 짙고, 깊고, 되돌리기 어렵고, 잊기 어려운 것인가를 설명하는 중요한 설정입니다.

그들 사이의 관계와 감정과 인연이란 단어 하나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숱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애()든 증()이든 한 방향으로만 치닫지도 않습니다.

 

이런 관계와 감정과 인연을 지켜보는 일은 설령 소설이라 하더라도 만감을 교차하게 만드는데

정곡을 콕콕 찌르면서도 담백하고 알싸한 사쿠라기 시노의 문장으로 그것들을 읽다 보면

어느 새 독자 스스로 준코가 되거나 그 친구들, 엄마, 남편을 빼앗긴 여자가 되어

한없이 깊게 감정이입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쿠라기 시노가 그려낸 구시로의 아련한 모습을 맛보지 못한 건 무척 아쉽지만,

6명의 화자와 1명의 중심인물이 이끌어가는 특별한 분위기의 굽이치는 달

개인적으론 호텔 로열다음으로 그녀의 베스트로 꼽고 싶은 작품입니다.

국내 출간된 작품 중 아무도 없는 밤에 피는순수의 영역만 못 읽었는데,

특히 (국내출간작 중) 유일한 장편인 순수의 영역이 무척 궁금하고 기대가 됩니다.

언제쯤 또 그녀의 신간이 나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아껴 읽어야 할 형편인 건 분명한데,

마음 같아선 당장 두 작품 모두 장바구니에 넣고 싶은 심정이니, 참 난감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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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의 사자 와타세 경부 시리즈 2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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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세 경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첫 편의 제목이 테미스의 검이었으니 다분히 의도적인 작명으로 보이는데,

테미스가 법의 여신인 반면, 네메시스는 (흔히 알기로) 복수의 여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카야마 시치리는 네메시스의 올바른 어원은 의분(義憤)’이라고 주장합니다.

, ‘나와 직접적인 이해관계는 없지만 도의에 어긋나고 불공정한 것을 보며 느끼는 분노인데

댓글이나 청원 등을 통해 의분을 드러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만약 살인이 의분의 창구로 이용된다면 그건 꽤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에 와타세 경부가 맞닥뜨린 사건의 진범은 살인현장에 네메시스라는 글자를 남겼습니다.

그 의미가 복수든 의분이든 결국엔 사적인 응징을 의미한다는 건데,

특히 피살자들이 과거 흉악범들의 가족이란 점 때문에 경찰과 검찰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 흉악범들은 사형이 확실하다는 예상을 깨고 모두 무기 또는 장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비록 감금된 상태이긴 해도 분명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와타세는 과거 피해자 유족들을 조사하지만 그들에겐 동기 외엔 혐의점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자 누군지도 모를 제3자가 의분을 참지 못해 복수를 대행한다는 심증과 함께,

교도소 안의 흉악범 대신 그 가족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추리만 남게 됩니다.

이럴 경우 잠재 용의자는 무한대로 늘어나고 범인의 범행 역시 언제 그칠지 알 수 없게 돼서

와타세와 그의 파트너 고테가와가 속한 사이타마 현경은 물론

이 사건에 투입된 도쿄지검 차장검사 미사키 역시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전작인 테미스의 검이 원죄(冤罪, 억울하게 덮어쓴 죄)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면

네메시스의 사자는 사적 복수, 사형제도, 사법시스템, 가해자-피해자 가족의 비극 등

좀더 광범위하지만 좀더 현실적인 딜레마를 깊고 폭넓게 다루고 있습니다.

연이은 흉악범 가족 피살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의 의도가 사적 복수라는 게 밝혀지자

잠시 충격을 받았던 일반시민들은 이내 국가를 원망하고 범인을 영웅 시 여기기 시작합니다.

시민들의 분노는 검찰, 사법부, 법무성을 가리지 않고 폭발합니다.

와타세와 미사키는 어쩌면 이런 분노야말로 범인의 진짜 목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애초 흉악범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했더라면 이 복수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

흉악범이 사형을 면하면 피해자는 두 번 죽습니다.”

사형 하나 못 하는 게 무슨 법치국가냐! 다음 법무대신은 네메시스!”

 

나카야마 시치리는 사적 복수사형제도의 문제라는 묵직한 두 개의 소재를

하나의 큰 사건 속에 잘 녹여냈습니다.

, ‘네메시스의 사자로 불린 범인 한 사람의 스토리를 넘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치유될 수 없는 피해자 유족의 깊은 상처,

단지 가해자의 가족이란 이유만으로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고 따돌림 받아야 하는 억울한 상황,

그리고 온정주의적인 판결을 반복했던 한 판사의 고뇌 등 다양한 주제를 다각도로 그립니다.

더불어,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미스터리의 꽃인 막판 반전에도 공을 들인 모습입니다.

 

다만, 이야기의 상당부분이 사형제도나 사적 복수에 대한 원론적 설명에 할애된 점이라든가,

주인공 와타세가 이 두 문제에 대해 모호하고 중립적인 태도를 보인 점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여러 등장인물을 통해 일본의 사법체계에 대해 설명한 점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비슷한 내용들이 중언부언 동어반복된 점은 종종 지루함을 느끼게 만들었고,

논란의 주제에 대해 이쪽도 저쪽도 아닌 원론적이고 중립적인 태도만 보이는 와타세의 경우

주인공이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다소 몰입감을 떨어뜨리는 캐릭터 설정이란 생각입니다.

 

큰 그림 차원에서도 전작들에 비해 다소 아쉬움이 느껴졌는데,

범인의 행적 범행동기, 범행준비과정, 그의 진짜 목적 등 대부분이

결과적으로 보면 너무 평범하거나, 너무 완벽하거나, 너무 쉬워 보였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결론을 위해 작위적으로 설계된 느낌이랄까요?

물론 작가는 그 작위성을 극복하기 위해 이런저런 장치들을 부연설명하고 있지만,

전작들과는 달리 그 설명이 변명처럼 읽히기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 작품에서 스토리나 주제 못잖게 흥미로운 점은

소위 나카야마 월드에 속한 인물들이 카메오나 주요 조연으로 교차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형사 와타세와 검사 미사키는 10년 만에 조우했다지만 간접적으로는 무척 밀접한 관계입니다.

와타세는 미코시바 레이지 시리즈 첫 편인 속죄의 소나타에서

변호사 미코시바를 도와 사건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차장검사 미사키는 미코시바 레이지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추억의 야상곡에서

숙적 변호사 미코시바에게 연이어 완패한 안 좋은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묘한 인연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을 각각 다른 시리즈에서 만나게 되니 무척 흥미롭더군요.

 

, 와타세의 파트너이자 까마득한 후배 고테가와는

나카야마 시치리의 또 다른 작품 연쇄살인마 개구리 남자의 히어로지만,

이 작품에선 아직 풋내를 풍기는 초짜 형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특종이라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 기자, 와타세의 단골 부검의 등

크고 작은 조연들이 시리즈와 스탠드얼론을 막론하고 교차출연하고 있는데,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에 익숙한 독자라면 남다른 별미를 맛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엄청난 다작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나름의 퀄리티를 유지하고 있는데,

부디 나카야마 시치리가 양을 위해 질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물론 빠른 시간 안에 새로운 작품을 만나보고 싶은 역설적인 바람도 갖고 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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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추락한 이유
데니스 루헤인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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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살인자들의 섬’, ‘켄지&제나로 시리즈’, ‘커글린 가문 3부작등에 이어

데니스 루헤인과 만나는 10번째 작품입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나름 데니스 루헤인의 팬이라 자부할 만한 이력인 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추락한 이유는 작가 이름을 가려놓고 읽었다면

결단코(?)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이 아니라고 판정했을 것 같습니다.

 

출판사의 홍보카피만 보면 금세 그 이유를 알 수 있는데,

이 작품은 범죄 소설이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이 작품의 핵심이다.’,

데니스 루헤인이 여성 시점으로 집필한 첫 로맨틱 스릴러.’ 등이 그것입니다.

언뜻 수긍하기 힘든 조합인데, 결과적으로 홍보카피가 과장 또는 오류는 아니었고,

실제로 이 작품의 핵심서사는 사랑이 맞습니다.

 

주인공 레이철은 성격파탄에 가까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생부가 누군지 절대 알려주지 않던 어머니가 사망한 후

그녀는 백방으로 생부를 찾아 나섰지만 결과는 꽤 비극적이었습니다.

덕분에 그녀가 얻은 것은 불쑥불쑥 폭발하는 공황발작뿐이었습니다.

이후 기자로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레이철은 불의의 사고로 낙마하게 되고

결국 공황발작과 대인공포증은 나날이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맙니다.

하지만 그때 레이철 앞에 나타난 브라이언은 그녀의 모든 공포를 잠식시켜 줍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해주는 브라이언 덕분에 점차 세상과 마주할 준비를 하던 레이철은

어느 날, 브라이언이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니란 것을 깨닫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레이철은 살인, 사기, 복수, 탐욕이 뒤섞인 사건에 휘말리고 맙니다.

 

사실, 초반에는 무척 당혹스러웠습니다.

첫 장면이 남편을 쏴 죽이는 레이철로 시작하는데 그 뒤는 좀 생소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성격파탄 어머니와의 갈등 및 출생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한 생부 찾기 이야기,

반골기질과 소신과 재능을 겸비한 기자로서의 성공 이야기,

공황발작과 대인공포증에 걸린 여자의 사랑 이야기 등등...

그 어느 것도 데니스 루헤인다운 스릴러와 거리가 먼 서사인데,

이 서사들이 전체 분량의 절반을 차지하며 초반 내내 약간은 지루하게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레이철이 브라이언의 실체를 알게 되는 대목부터 본격적인 스릴러가 시작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앞서 어머니, 생부, 기자 이야기가 왜 필요했던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고,

이 의문은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한 뒤에도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는 데니스 루헤인이라면 초반부터 스릴러 서사를 돌직구처럼 날렸을 텐데

주인공의 가족사와 성장기를 위해 왜 절반에 가까운 분량을 할애한 걸까 궁금했습니다.

물론 앞서 말한대로 이 작품의 핵심서사가 사랑이고, 장르가 로맨틱스릴러라는 걸 감안하면,

, 진실이나 범인 찾기보다는 레이철의 성장과 사랑에 방점이 찍힌 작품이란 걸 감안하면,

그녀에 대한 초반의 장황한 설명이 충분히 납득될 수도 있겠지만,

역시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이기에 저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의문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가족이 남긴 상처와 거기에서 파생된 트라우마로 인해 세상과 단절될 뻔했던 레이철이

점차 자신감을 얻고, 사랑을 얻고, 삶의 원동력을 얻게 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더욱 큰 추락과 비극을 맛보게 된다는 게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레이철은 몇 번의 위기를 겪으면서 자신의 추락을 막아내는 것은 물론

스스로 사건의 종지부를 찍는 역할까지 담당하는 여전사(?)로 진화하기도 합니다.

중반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스릴러는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답게 빠르고 촘촘하게 전개되는데,

초반에 다소 지루함을 느꼈던 독자라도 단숨에 몰입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흥미롭습니다.

켄지&제나로 시리즈처럼 거칠고 폭력적이면서도 블랙유머가 깃든 스릴러라든가

여타 작품들처럼 묵직하고 장대한 서사를 기대했던 탓에 다소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데니스 루헤인의 신작은 반갑고 또 반가웠습니다.

다음엔 데니스 루헤인의 전공이 제대로 폭발한 작품과 꼭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족으로...

지금까지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을 읽으면서 한 번도 번역의 문제를 느낀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같은 문장을 몇 번씩 되읽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오타는 아니지만 조사가 생략돼서 비문처럼 읽히는 경우도 있었고,

한 문장 안에 주어가 두 번씩 들어가거나, 한 번에 이해 안 되는 문장도 있었습니다.

그간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을 전담하다시피 작업하셨던 분들의 번역에 익숙해진 탓도 있지만

이 작품에서 느낀 아쉬움 중 번역이 차지한 부분이 상당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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