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베스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요 네스뵈 지음, 이은선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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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네스뵈의 두툼한 분량에 꽤 익숙한 편임에도 727페이지의 무게감은 남달랐습니다. 더구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았다는 사실까지 더해져서 첫 페이지를 열기도 전에 이미 분량과 서사에 압도되다시피 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원작 맥베스를 언제 읽었는지, 제대로 읽긴 했는지조차 불분명한데다 캐릭터나 스토리 모두 상식적인 수준 밖에 기억 못하지만, 일부러 원작에 대한 정보를 구하지 않은 채 무작정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무대가 11세기 스코틀랜드에서 1970년대 가상의 도시로 옮겨졌다는 점, , 권력에 눈이 먼 왕 맥베스는 능력과 매력을 겸비한 특공대장으로, 맥베스를 부추겨 피의 향연을 벌이게 만든 레이디 맥베스는 야망 넘치는 카지노 업주로, “맥베스가 왕이 되리라!” 예언했던 여신 헤카테와 세 마녀는 도시를 지배하는 마약상으로 변신한 점은 초반 작가의 말과 각주를 통해 본의 아니게 예습(?)할 수 있었습니다.

 

불행한 고아 출신에 약물중독자였던 맥베스는 경찰사관생도를 거쳐 특공대장에 이릅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카지노 업주 레이디의 연인이기도 한 그는 25년간 도시를 지배했던 부패한 경찰청장 사후 조직의 3인자에 등극합니다. 하지만 맥베스가 경찰청장이 될 것이다.”라는 마약상 헤카테의 말에 현혹된 레이디로부터 신임 경찰청장을 제치고 도시 권력의 정점에 서야 한다.”는 부추김을 받은 맥베스는 처음엔 다소 소극적이었지만 첫 번째 피맛을 본 뒤로 광기 어린 폭주를 시작합니다. 수많은 인물들이 무자비하게 제거되면서 맥베스의 지위는 점차 상승합니다. 레이디로부터는 광기의 에너지를, 마약상 헤카테로부터는 마약과 폭력을 제공받은 맥베스는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채 폭주하지만 그의 정점은 너무나도 짧고 허망했습니다.

 

맥베스는 권력의 정점에 오르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존재들을 잔인하게 제거한 것은 물론 마약에 취해 악몽에 시달리는 명백한 악당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맥베스에 대한 레이디와 헤카테의 평가는 전혀 다릅니다. 레이디는 그를 용감하고 가차 없는 행동주의자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필요한 독기가 없고, 이른바 정의를 사랑했고 남들이 정한 원칙을 충실히 지키는 인물”(p156~157)로 여겼고, 마약상 헤카테는 사랑에 홀딱 빠진 마약쟁이 겸 도덕주의자”(p188)라고 평가합니다. 실제로 맥베스는 작품 내내 다중적인 캐릭터를 발산합니다. 탐욕스런 살인자이자 유년기의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마약과 악몽에 시달리는 가련한 인물이기도 하며, 또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죽인 인물들에 대한 지독한 회한에 빠지는 인물 등 단지 권력욕에만 매달리는 악당보다는 상처 입은 처연한 캐릭터라고 할까요?

 

어쩌면 맥베스에게 중요한 건 권력이 아니라 레이디를 향한 사랑이 전부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처음과 끝이었고 그의 탄생이자 삶이자 죽음이라는 표현대로 그의 폭주는 레이디 때문에 시작됐던 것이고, 그의 몰락 역시 레이디의 파멸과 부재(不在)에서 비롯됐기 때문입니다. 레이디를 기쁘게 하기 위해 권력투쟁과 살육전에 나섰지만, 레이디가 망가지기 시작하면서 깊은 혼란에 빠지거나 과도한 광기를 증폭시켰고, 레이디가 자신을 떠난 뒤로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는 꼴을 목도하게 된 것입니다.

 

원작과 무관하게 한 편의 스릴러로서의 맥베스의 미덕은 별 5개도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해리 홀레 시리즈에서 맛봤던 지독한 폭력과 우울감은 여전했고, 깊은 울림과 능구렁이 같은 매끈함을 선사하는 요 네스뵈의 필력도 곳곳에서 감지됩니다. 늘 비 또는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인 채 마약, 폭력, 살인, 부패경찰이 지배하는 도시 속에서 각자의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이 벌이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그 자체로 페이지터너입니다.

 

다만, 0.5개를 빼게 만든 딱 한 가지 아쉬움은 주인공들의 변화에 관한 설명이 많이 부족했거나 설득력이 약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레이디의 부추김 때문이었다 해도 능력과 매력을 겸비한 특공대장 맥베스가 스스로 권력투쟁과 살육전에 뛰어드는 계기는 읽는 내내 목에 걸린 가시마냥 설득력이 약해 보였습니다. 애초 그는 권력엔 조금도 관심 없는 철저한 현장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도 마다하지 않던 레이디도 중반에 갑자기 캐릭터가 변하는데, 물론 그럴 만한 사건이 있긴 하지만 다소 설명이 부족하거나 비약이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두 주인공의 변화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인데, 다 읽은 지금까지도 ?’라는 질문이 여전히 제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족으로...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대표작을 현대 소설로 재탄생시키는 호가스 셰익스피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출간됐는데, 찾아보니 반갑게도 그 목록 가운데 길리언 플린의 이름이 눈에 띄었습니다. 더구나 집필한 작품이 햄릿이라니 더더욱 반가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작품은 몰라도 길리언 플린의 햄릿만큼은 꼭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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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아델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이현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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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가을에 읽은 넬레 노이하우스의 끝나지 않는 여름이후

거의 2년 만에 접한 서구권 미스터리 작품입니다.

아르테의 포스트(‘관능뿜뿜! 여성 소설 4’)를 보곤 호기심이 발동해 찾은 작품인데,

‘12번째 공쿠르상 여성 수상 작가라는 타이틀과 함께

해당 수상작인 달콤한 노래가 심리스릴러라는 점도 제 구미를 자극한 대목입니다.

여성작가가 쓴 여성에 대한 관능(적인)소설”, “현대판 보봐리 부인’.”,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욕망에 관한 절망적 보고서라는 평에서 엿볼 수 있듯

이 작품의 핵심코드는 여성의 성적 욕망입니다.

 

35세의 아델은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신문사 기자로,

다정하고 유능한 의사 남편 리샤르, 3살 아들 뤼시앙과 함께 파리의 부촌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평온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이성의 힘으로는 떨쳐내기 어려운 본능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끝없는 성적 욕망입니다.

스스로 나 자신보다 더 힘센 어떤 게 날 움직인다.”고 고백할 정도로 통제불능인 그 욕망은

아델로 하여금 끝없이 남자들을 수집하게 만드는데,

문제는 그 욕망이 상대를 가리지도 않을뿐더러 결코 채워지지도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아슬아슬하던 아델의 욕망의 폭주는 어느 날 갑자기 멈춰버립니다.

한없이 따뜻하던 남편 리샤르가 그녀의 욕망의 실체를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작품에 관심이 갔던 것은 원초적 호기심보다는

과연 작가가 아델이라는 여자와 그녀의 통제 불능인 성적 욕망을

비슷한 소재의 전작들과 어떻게 다르게 그렸을까, 라는 남다른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좀더 아델이 주체적이기를 바랐고, 그녀의 욕망이 1차적 본능에 그치지 않기를 바랐고,

, 결과적으로 그녀의 욕망이 기성의 담론을 뛰어넘어 자립적으로 그려지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델은 저의 바람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는 캐릭터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놈저놈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상대를 고릅니다.

하지만 그 욕망의 정체가 단지 육체적 갈망인지, 마조히스트 또는 새디스트적인 탐욕인지,

(좀 억지스럽긴 해도) 자아의 실현을 위한 몸부림인지 통 모호하게 보였습니다.

, 욕망 실현에 가장 방해(?)가 되는 남편과 아들에 대한 아델의 태도 역시

어딘가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이거나 구태의연하게만 보입니다.

가령, 현실적인 이유(돈 잘 버는 의사 남편) 때문에 내재된 욕망을 억압하고 결혼을 택했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의 욕망이라는 걸 깨닫고 주체적인 삶을 선택했다면

이 작품이 은폐되고 다뤄지지 않은 여성의 성욕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는 소설.”이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이 충분히 납득이 됐겠지만,

작품 속 아델은 결국 욕망 대신 현실을 택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오픈된 엔딩이긴 해도) 그녀의 마지막 선택이 나름 주체성을 띄긴 했지만

읽는 내내 이렇게 쉽게 포기할 욕망이었나?’라는 의문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 “‘야한소설로 느껴질 수 있지만 읽을수록 슬퍼지는 건 왜일까요?” (아르테 포스트),

아델의 섹슈얼리티 속엔 아주 슬픈 무언가가 있다.” (리베라시옹),

그녀의 정원에 쾌락은 없다. 슬픔만 있을 뿐.” (뒷표지 홍보카피)

유독 아델의 슬픔을 강조하는 한 줄 평이나 카피가 많았는데,

아델의 욕망 자체가 불분명하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그 슬픔을 체감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더불어, “섹스, 거짓말, 배신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이 소설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작가 본인의 코멘트도 다소 당황스러웠는데,

어디에서 어떤 색깔의 사랑을 읽어야 했던 건지 잘 알 수 없었습니다.

 

미혼이든 기혼이든 남녀를 불문하고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욕망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여러 조합 중 가장 불행하거나 상대적으로 억압받아온 것은 당연히 유부녀일 것입니다.

아델을 통해 결혼에 묶였지만 여전히 활화산 같은 욕망을 지닌 유부녀를 그리려 했다면

19세기와 20세기에 그려진 비슷한 처지의 주인공들과는 조금은 달라야 했다는 생각입니다.

욕망의 근원은 비슷할지 몰라도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과정이나 엔딩만큼은

이전 세기의 주인공들보다는 조금은 더 진보적이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아델에게서는 이전의 주인공들의 그림자 이상의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다소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레일라 슬리마니의 필력에는 나름 관심이 생긴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2016년 공쿠르상 수상작이자 심리스릴러인 달콤한 노래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아기가 죽었다. 단 몇 초 만에.”라는 첫 문장부터 불온한 기운을 내뿜는 달콤한 노래

과연 어떤 색깔의 심리스릴러일지 사뭇 기대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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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탄의 문 1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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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정보관리회사, 일명 사이버패트롤에서 아르바이트 중인 대학생 고타로는

같이 일하던 선배가 노숙자들의 연쇄실종사건을 조사하다 실종되자 직접 그를 찾아 나선다.

선배가 실종된 장소로 추정되는 한 유령 빌딩에 숨어든 고타로는

그곳에서 옥상의 조각상이 움직인다는 괴소문을 확인하러 온 전직 형사 쓰즈키와 마주친다.

도시의 어둠 속, 거대한 날갯짓 소리와 함께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은

현재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의문의 연쇄살인사건과 연결되고,

고타로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의 힘을 빌려 직접 진상을 밝히기로 결심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미미 여사의 작품은 현대물과 시대물을 가리지 않고 믿고 읽는 편입니다.

특히 모방범으로 일본 미스터리에 입문한 저로서는

그녀의 사회성 짙은 서사가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지금껏 거의 실패(?)한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책읽기를 경험했습니다.

인상적인 표지와 제목으로 유명한 에도 시리즈를 비롯한 시대물 미스터리는

판타지와 미스터리의 매력까지 잘 배합돼서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별미 같은 작품들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소(솔직히... 아주 많이) 낯설고 당황스런 느낌을 피할 수 없었는데,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에도 시리즈에서나 볼 법한 판타지가 현대물에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미 여사라고 해서 현대물 판타지를 쓰지 말란 법은 없지만,

예상치도 못한 뜻밖의 전개에 제가 생각해도 과할 정도의 당혹감을 느꼈습니다.

 

일단 초반부터 여러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집니다.

교살 후 희생자의 발가락이나 손가락을 절단하는 연쇄살인사건,

주인공 고타로의 이웃집 여학생이 연루된 학교 내 왕따사건,

그리고 고타로가 소속된 사이버패트롤에서 감지한 노숙자 연쇄실종사건 등이 그것입니다.

고타로는 노숙자 연쇄실종사건을 조사하던 선배가 실종되자 그의 흔적을 뒤쫓게 되고

오래전부터 방치돼온 한 유령빌딩 인근에서 유력한 단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편, 고타로와 함께 투톱 주인공을 맡은 전직형사 쓰즈키는

유령빌딩 옥상의 괴물 조각상이 저절로 움직인다는 이웃 노파의 진술을 듣곤

형사로서의 촉을 발동하여 남몰래 조사를 진행하던 중 심상치 않은 상황을 목격합니다.

두 사람은 운명처럼 유령빌딩에서 조우하게 되고,

그곳에서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비현실적인 존재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사실, 초반에 그 비현실적 존재를 목격한 소녀와 노파 이야기가 나올 때만 해도

뭔가 지극히 현실적인 트릭이 깔려있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왜냐하면... 미야베 미유키니까...’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 때문이었는데,

진짜 비현실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것은 물론 또다른 비현실적 존재까지 고타로 앞에 나타나자

그때부터 마치 어울리지도 않은 옷을 억지로 입은 듯한 불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 ‘정령’, ‘다른 영역(세계)’, ‘테두리’, ‘시원(始原)의 대종루를 수호하는 전사

명백한 판타지 아이템들이 등장하면서 난독의 증세까지 겪게 됐는데,

그런 탓에 1권은 어찌어찌 다 읽었지만 2권은 계속 읽을지 여부를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2권에서는 (1권의 엔딩으로 미뤄보아) 고타로와 쓰즈키가 비현실적인 존재의 힘을 빌려

연쇄살인사건, 인터넷의 폐해 등을 해결하는 이야기가 전개될 것으로 보이는데,

비현실적인 존재에 대한 소화불량 상태에서 더는 몰입하기 어려울 것 같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판타지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닌데,

다른 세계의 존재가 등장하는 판타지와 현대물 사회파 미스터리의 조합

제겐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서사인 것 같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이 작품은 (제가 못 읽은) ‘영웅의 서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인 듯한데

그 작품의 소개글을 찾아보니 역시 저와는 인연이 아닌 작품으로 보입니다.

 

이 서평은 혹평이 아니라 취향이 달라 소화하지 못한 사연입니다.

영웅의 서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또 미미 여사 특유의 판타지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비탄의 문역시 충분히 열광하며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막 출간된 작품이라 한두 달 쯤 지난 뒤에 다른 분들의 서평을 찾아 읽으려고 합니다.

그 서평들 속에서 제가 미처 찾아내지 못한 미덕을 발견한다면

그때라도 비탄의 문에 다시 한 번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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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의 살인범
마리온 포우 지음, 김효정 옮김 / 북플라자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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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인물이 한 챕터씩 번갈아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형식의 미스터리입니다.

한 명은 옆집 모녀를 살해한 죄로 현재 치료감호소에 구금된 자폐증세가 있는 남자 레이,

또 한 명은 특별한 인연 탓에 레이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분투하는 변호사 이리나입니다.

 

어릴 적 부모에게 버림받은 뒤 문제아 기숙학교를 전전하던 레이는 뛰어난 제빵사가 됐지만

성인이 되고도 사회적 관계에 미숙한 채 수족관 속의 물고기에게만 애정을 쏟습니다.

옆집에 매력적인 여인 로지타가 어린 딸 안나와 함께 이사온 뒤로 레이의 삶은 요동칩니다.

유부남과의 불륜으로 딸을 낳았지만 아무런 희망도 없이 막장 같은 삶을 사는 로지타에게

레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고 물심양면으로 헌신합니다.

하지만 그는 로지타와 딸 안나를 참혹하게 살해한 범인으로 몰려 체포되고 맙니다.

 

명망 있는 로펌에서 파트타임 변호사로 일하는 이리나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아들 애런을 키우며 고군분투하는 미혼모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살인범 레이와의 특별한 인연을 깨달은 이리나는

그와의 면회 이후 확실한 물증도 없는 상태에서 그의 결백을 밝히기로 결심합니다.

 

사실, 이 작품의 장르는 미스터리지만, 큰 얼개는 비극적인 가족사입니다.

살인범 레이는 9살 나이에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뒤 자폐증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왔고,

변호사 이리나는 위로는 불편한 어머니에, 아래로는 통제불능의 4살 아들에게 시달립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를 낳았고, 아이 아빠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레이가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로지타는 유부남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지만

잠자리 파트너 외에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구질구질한 삶을 이어갑니다.

이렇듯 비극적이거나 불안정한 가족사를 끌어안은 인물들이 살인사건으로 엮인 셈인데,

그래서인지 진실이 무엇이든 엔딩이 행복하게 그려지진 않을 것처럼 보입니다.

 

다만, 살인사건의 진범과 동기와 진실, 그 진실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 등

미스터리의 큰 그림은 다소 단선적이고 상투적이라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주인공 이리나의 탐정 역할이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한 점,

중요한 변곡점마다 우연에 기대거나 안이해 보일 정도로 쉬운 해결책을 모색한 점,

막판에 드러난 진실 자체가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으로 설계된 점이 아쉬웠고,

결국 미스터리는 비극적인 가족사의 무게감에 비해 너무 가볍게 그려졌다는 생각입니다.

(아쉬움의 실체에 대해 좀더 설명을 하고 싶지만, 그럴 경우 스포일러가 될 수밖에 없고,

출판사의 소개글 역시 그 대목을 일부러 언급하지 않은 듯 해서 이 정도만 얘기하겠습니다.)

 

자주 만나기 어려운 네덜란드 미스터리인데다

술술 넘어가는 페이지와 선명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는 미덕이라 할 수 있지만,

미스터리 자체의 힘이 다소 취약했던 점은 옥의 티였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2008년에 발표됐는데) 작가의 후속작이 한국에 출간된다면

한번쯤은 찾아보고 싶은 욕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족으로...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 중에 하나는 제목입니다.

원제인 ‘The Girl In The Dark’조차 작품 내용과 잘 매치되지 않아 보였고,

번역제목인 옆집의 살인범은 스토리는 담고 있지만 마케팅 면에선 부적절해 보였습니다.

제목에 대놓고 살인범이 들어갈 경우 다분히 눈길을 끌려는 상업적 의도가 느껴지거나

반대로, 작품 자체가 어딘가 가벼워 보이는 선입견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본문 중에 등장하는 옆집 괴물, 레이가 훨씬 더 적절한 제목으로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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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왕이 온다 히가 자매 시리즈
사와무라 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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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내와 딸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다하라 히데키.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전화나 메일이 오는 등 괴이한 일이 반복되자

히데키는 어렸을 적 자신을 찾아왔던 보기왕이라는 괴물을 떠올린다.

하지만 어떻게 생겼는지도, 정체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그 괴물이 왜 이제 와서 나를 만나러 오는 걸까.

보기왕은 시간이 갈수록 진화하고,

히데키의 아내와 딸의 이름까지 언급하면서 그를 점점 공포의 지옥으로 밀어 넣는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혼자 밤낚시를 즐기지도 못하고, 무서운 영화는 일부러 외면할 정도로 겁이 많은 편이지만

미쓰다 신조의 ‘~것 시리즈작가 시리즈’, 그리고 노조키메등 매력적인 작품들 덕분에

책으로 출간된 일본 호러물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지금까지 읽은 호러물을 돌이켜 보면 대체로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는데,

원령이나 요괴 등 비현실적인 존재의 공포가 실은 사람에 의한 행위였다. (‘~것 시리즈’)

원령이나 요괴가 인간을 공격하긴 하지만 그 실체는 끝까지 미스터리다. (‘작가 시리즈’)

원령이나 요괴가 실체를 갖고 등장하여 주인공과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인다.

 

보기왕이 온다는 굳이 분류하자면 세 번째 범주에 드는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으로 첫 번째와 두 번째 범주의 호러물을 좋아하고,

이 작품 역시 그런 쪽이 아닐까, 기대했던 탓에

보기왕이 살인과 납치 등 물리적 살상능력을 지녔다는 설정에 살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은은하면서도 뒷덜미를 오싹하게 만들거나 소름 돋게 만드는 차가운 공포도 느낄 수 있지만

그보다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블록버스터 같은 긴장감이 더 강렬한 작품입니다.

 

방문자’, ‘소유자’, ‘제삼자등 세 개의 장으로 나뉘어있는데

남편 다하라 히데키와 그의 아내 가나가 앞의 두 장의 화자인 반면,

마지막 장은 오컬트 프리랜서 노자키와 뛰어난 영매 자매 마코토, 코토코가 이끕니다.

히데키는 보기왕의 위협이 날로 고조되자 민속학 교수인 동창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를 통해 노자키, 마코토 등과 만나 대책을 마련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결계와 부적 등에도 불구하고 보기왕은 히데키의 가족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가고

그들을 도우려던 노자키와 영매 자매까지도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이런 점 때문에 보기왕은 은근한 공포심을 발산하는 전형적인 일본식 원령이나 요괴가 아니라

조금은 대중적인 영화 속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다양하고 폭넓은 자료조사를 통해 보기왕을 비롯한 원령, 요괴 등에 상세히 설명하고

그것들의 유래와 전승 방식, 각 지역별 특징까지도 일일이 언급함으로써

보기왕이 단순히 전설의 고향식의 허구가 아니라는 점을 독자에게 현실적으로 각인시킵니다.

, 오컬트 프리랜서와 뛰어난 영매 자매를 등장시킴으로써

일반적인 공포심 자극 수준을 넘어선 선과 악의 매력적인 대결 서사를 전개시킵니다.

보기왕이 왜 하필 히데키의 가족에게 끊임없이 위협을 가하는가?’라는 미스터리는

의외의 반전을 내포하고 있어 그 나름의 재미를 선사하기도 합니다.

 

다만, 미쓰다 신조나 오노 후유미 계열의 호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보기왕이 온다의 대중적이고 영화적인 서사가 다소 내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직접 살상능력을 갖지도 않은 대상이 더 두렵게 느껴질 수 있고,

그런 대상으로 인해 치명적 피해가 발생하는 이야기가 더 큰 공포심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다소 호불호가 갈릴 수 있기도 하겠지만,

엔터테인먼트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충분히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인 건 분명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2019년에 영화로 나올 예정이라는데,

솔직히 극장까지 가서 대놓고 볼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원작을 봤으니 큰맘 먹고 도전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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