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어야 하는 밤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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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제바스티안 피체크는 사이코스릴러의 대명사인 작가입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장르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읽은 작품이라곤 영혼파괴자가 유일했습니다. 3년 전에 읽은 영혼파괴자가 매력적인 마중물 역할을 했다면 계속 그의 작품을 찾았겠지만, 아쉬움을 꽤 많이 느꼈던 탓에 그 뒤로는 제바스티안 피체크를 잊고 지냈는데, 한 줄의 카피 - “자유롭게 딱 한 명을 죽일 수 있다면, 당신은 누굴 선택하겠는가?” - 때문에 다시 한 번 그의 사이코스릴러에 도전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독일의 한 인터넷사이트에서 살인복권을 발행합니다. 죽이고 싶은 사람의 이름과 함께 단돈 10유로만 낸 뒤 당첨이 되면 그 사람은 만인의 표적이 되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게 됩니다. 인터넷사이트에서 그 사람을 사냥한 자에게 무려 천만유로의 상금을 내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88일 밤 8, 메인 사냥감과 예비 사냥감 두 명의 이름이 공개됩니다. 한 명은 유명 밴드의 드러머였지만 지금은 빈털터리 신세인 베냐민 뤼만이고, 또 한명은 심리학을 전공한 여대생 아레추 헤르츠슈프룽입니다. 사냥꾼들에게 허용된 자유로운 살인 시한은 12시간. 두 사람은 천만유로에 눈이 먼 불특정다수의 사냥꾼들은 물론 오로지 폭력의 맛에 취한 사이코패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악몽의 12시간을 보냅니다.

 

제도와 관습에 의해 억눌렸던 인간들의 쾌락적 폭력성과 가학적인 파괴성은 인터넷과 유튜브라는 기폭제 덕분에 통제 불능의 망나니가 돼버렸고, 우리는 그 망나니가 수시로 저지르는 어이없는 비극들을 지켜보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 작품 속에서 살인복권을 발행하고 상식 밖의 살인극을 설계한 오즈라는 인물은 어쩌면 더 이상 특이하거나 돌연변이 같은 캐릭터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즈는 마치 게임을 설계하듯 살인복권 계획을 세웠고, 자신의 의지대로 게임이 전개되지 않거나 게임을 방해하는 자에게 거침없이 철퇴를 내립니다.

 

오즈의 게임에 갇힌 베냐민과 아레추는 그야말로 몇 번의 죽을 위기를 넘기는데, “정부에게 12시간 동안 합법적 살인을 보장받았다.”오즈의 가짜뉴스에 현혹된 사냥꾼들은 두 사람이 도망치는 곳마다 나타나 천만유로의 대박을 꿈꾸며 광기 어린 폭력을 휘두릅니다. , 잔혹한 폭력장면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려 돈을 버는 사이코패스는 그들의 가족까지 위협하며 두 사람을 막장까지 몰아갑니다.

이렇듯, 설계자-도망자-추격자들이 벌인 12시간의 피비린내 나는 게임은 새벽녘 핵심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인 가운데 예상치 못한 반전과 함께 마무리됩니다. 인터넷과 유튜브의 광기에 지배당한 사냥꾼들의 기행은 적잖은 사상자를 발생시켰고, 베냐민과 아레추의 생존을 위한 싸움 역시 해피하지도, 새드하지도 않은 엔딩을 맞이합니다.

 

사실, 읽는 내내 100m를 전력 질주하는 듯 호흡이 가빠지는 경험을 했는데, 그건 이 작품이 소설이라기보다 엄청 빠른 템포로 전개되는 액션영화처럼 읽혔기 때문입니다. 베냐민과 아레추는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연이어 새로운 위기에 빠지고, 두 사람을 추격하는 사냥꾼과 사이코패스들은 한시도 그들에게 쉴 틈을 주지 않습니다. 덕분에 450여 페이지의 분량임에도 한나절 만에 완독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속도감과 긴장감만 놓고 보면 꽤 매력적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이해하기 힘든 막판 반전 때문에 맥이 확 빠졌다는 점입니다.

영혼파괴자에서도 똑같은 경험을 한 탓에 실망감이 더 클 수밖에 없었는데, 앞서 쌓아온 탄탄한 서사와 숨 가쁘게 몰아친 사건들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막판에 드러난 진실은 너무 안이하고 실망스럽게 설정됐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 충분히 납득하거나 매력적인 반전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제바스티안 피체크와 궁합이 잘 안 맞는 게 아닌가, 라는 회의를 다시 한 번 느끼게끔 만든 대목이었습니다.

그의 작품을 딱 한 편만 더 읽게 된다면 아마도 가장 많이 알려진 눈알수집가일 것 같은데

그 작품을 통해서라도 사이코스릴러의 대명사의 매력을 맛볼 수 있다면 다행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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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리피시는 얼어붙지 않는다
이치카와 유토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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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 비행선 젤리피시의 비행 성능을 시험하던 중 선내에서 멤버 한 명이 시체로 발견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동 항행 시스템이 망가져 젤리피시는 설산에 갇힌다.

이윽고 희생자는 하나둘 늘어가고 생존자들은 서로를 의심하기에 이른다.

구조대의 손길이 요원한 가운데 기묘한 연쇄살인이 벌어진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과학적 상상력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SF물이라 할 수도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1970~1983, 그러니까 꽤 오랜 과거입니다.

, ‘밀실복수라는 코드까지 버무려져서 무척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26회 아유카와 데쓰야상 수상작이라는 이력에 못잖게 시선을 끄는 건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연상케 하는 플롯을 차용한 점인데,

희생자 전원이 밀폐된 공간에서 타살됐다는 점에서 내부 범인설도 불가능하고,

사건의 무대인 젤리피시가 외부에서의 침입이 100% 불가능한 구조인 탓에

누구도 쉽게 입증할 수 없는 연쇄살인 미스터리가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작가는 막간이라는 챕터들을 통해 범인의 1인칭 서술을 중간중간 노출하는데,

그의 정체와 범행동기, 그리고 범행 방법을 딱 감질날 정도로만 설명하고 있어서

마지막까지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매력적이 점은 사건을 수사하는 마리아&렌 콤비의 캐릭터입니다.

마리아는 평소 말과 행동에 분별이 없고 생활 능력도 빵점에 가까운인물이지만,

서른 언저리에 경감에 오를 정도로 날카로운 분석력과 추리력을 자랑합니다.

반면 동양인 형사 렌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완벽한 정장 차림에 냉정하고 시니컬한 언사로

상사인 마리아의 속을 부글부글 끓게 만드는 매력남입니다.

외모나 성격 모두 이질적이지만 두 사람은 진지한 수사과정에서도, 코믹한 일상에서도

최고의 시너지를 내는 명콤비처럼 보입니다.

 

다만, 미스터리 자체의 힘은 다소 아쉬움이 컸던 작품입니다.

초중반까지만 해도 궁금증과 기대감을 팽팽하게 유지하고 있었지만,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는 후반부에 와서 급격하게 맥이 빠졌다고 할까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는 언급할 수 없지만,

밀실, ‘복수, ‘SF’도 대부분 결과론적인 변명으로 일관하는 느낌이었는데,

바꿔 말하면, 범행방법과 동기,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 모두 설득력이 약했다는 뜻입니다.

과연 이런 계획 자체가 가능할까? 계획이야 가능하다 해도 실현 가능성이 1%나 될까?

그런데 그 1%의 가능성이 어쩐지 현실감이라곤 거의 없는 방식으로 실현된 건 아닐까?

특히 사건의 무대인 밀실에 관한 한 작가가 반칙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독자에 따라 다른 의견들이 분분할 수 있을 것 같아

기회가 되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살펴보려고 합니다.

 

더불어, 작가가 나름대로 과학적 지식을 최대한 쉽게 풀어쓰려고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물리, 화학, 항공공학에 관한 서술이 적잖이 포함돼있다 보니

저 같은 순도 100% 문과생에게는 간혹 부담스럽게 여겨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명작에 대한 오마주, 과거를 무대로 한 SF, 흥미로운 주인공 캐릭터 등

여러 가지 미덕과 장점을 지닌 작품임에는 틀림없지만

설득력 없는 반전과 그에 대한 장황한 변명이 초중반의 매력을 감소시킨 탓에

개인적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운 작품이었습니다.

1/3까지만 해도 별 5개를 줄 생각이었지만, 절반쯤 읽었을 때 4.5개로 줄었고,

클라이맥스와 엔딩에 와선 결국 4개로 쪼그라들고 말았습니다.

소개글을 보니 마리아&렌 콤비가 활약하는 시리즈가 계속 출간됐다는데,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은 독자들의 반응을 지켜본 뒤 읽을지 여부를 결정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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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방정식 살인방정식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한희선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신흥 종교 쇼메이카이의 카리스마 교주 기데나 미쓰코가 철교 부근에서 사체로 발견된다.

이후 차기 교주에 오른 미쓰코의 남편 고조 역시 한 빌딩 옥상에서 사체로 발견된다.

형사들은 수사에 착수하지만 사건은 더욱 미궁으로 빠져든다.

특히 새 교주인 고조는 종교의식 때문에 밖으로 한 걸음도 나올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

젊은 형사 아스카이 교와 그와 성격이 정반대인 쌍둥이 형제가 함께 수사에 착수한다.

조금씩 실마리가 잡히는 듯하지만, 다시 새로운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관 시리즈로 널리 알려진 아야츠지 유키토의 1989년 작품입니다. (국내 출간은 2011)

그가 1987십각관의 살인으로 데뷔한 점을 감안하면 꽤 초기작이라 할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미스터리 설정, 트릭, 진범의 정체 등 여러 지점에서

(요즘 독자 눈높이로 보자면) 제법 올드하거나 아날로그적인 냄새가 많이 풍기는 작품입니다.

 

신흥 종교집단의 주요인물들이 연이어 참혹하게 살해되는데,

주변인물 모두가 동기 면에서 용의선상에 오르지만 대부분 확증을 잡을 수 없는 인물들인데다

살해방법이나 사체유기방법 모두 상식적으로 이해 불가능한 점이 있고,

연이어 발견된 사체가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인지 여부 자체도 불확실해서

경찰은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집니다.

 

피살된 인물도 많고,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도 많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의 특징은 사건을 해결하는 주체들도 여럿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처음엔 시체만 봐도 속이 뒤집어지는 백면서생 형사 아스카이 교와

차분하고 냉정한 베테랑 형사 오제키가 콤비 플레이를 하는가 싶었는데,

(출판사 소개글대로) 곧이어 등장한 아스카이 교의 쌍둥이 형이 실질적인 수사를 이끕니다.

이름까지 똑같은 쌍둥이 형은 다분히 4차원적인 천재 캐릭터에 가까운 인물인데,

닮은 외모를 이용하여 형사인 동생 대신 현장을 누비고 다니며 진실을 캐냅니다.

(일본에서 살인방정식 시리즈가 출간된 걸 보면 쌍둥이의 콤비 플레이는 계속 된 것 같은데,

현재 국내에는 이 작품만 출간돼있습니다.)

 

살인방정식이란 제목은 마지막에 드러나는 살인 및 사체유기 방법과 관련 있는데,

더 언급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한 묘사는 못하겠지만,

아야츠지 유키토의 스승(?)이자 동 시대에 활약한 모 작가의 작품에서 본 적 있는 트릭이라

약간의 기시감까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디테일한 방법에선 차이가 있지만 다소 비현실적이고 작위적이란 점에선 닮은꼴의 트릭인데

왠지 그 시대(1980년대 후반)에는 이런 트릭이 먹혔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막판에 밝혀진 진범의 정체는 독자의 예상을 빗나가긴 했어도

허용 가능한 범위에서 너무 많이 빗나간 탓에 약간은 뜬금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작가는 진범의 입을 통해 범행동기와 설계과정을 꽤 길고 장황하게 설명함으로써

반전 자체를 수긍하기 어려워하는 독자에게 양해를 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끝나는가 싶던 막판에 마지막 반전 한 가지를 추가로 선사하기도 합니다.

 

다만, 요즘 독자들에게는 결과론적이거나 다소 반전을 위한 반전으로 읽힐 여지가 커서

말 그대로 고전을 읽는다는 느낌으로 이 작품을 대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입니다.

너무 세련되고 매끄럽고 과학적인 미스터리에 식상한 독자라면

스마트폰도 없고, DNA 감식도 없던 시절의 아날로그 미스터리에 도전해보는 것도

꽤 신선하고 특별한 경험이 돼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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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미한 살인
카린 지에벨 지음, 이승재 옮김 / 밝은세상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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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국내에 7편의 작품이 출간된 작가지만 이제야 처음 만나게 된 카린 지에벨입니다.

유의미한 살인은 가장 최근 출간됐지만 실은 작가의 데뷔작입니다.

 

주인공 잔느는 마르세유 경찰서 지원실에 근무하는 28살 여성입니다.

그녀는 누구와도 섞이지 못한 채 스스로 강박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 오랜 정신적 문제를 앓고 있으며, 자신이 설정한 루틴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당연히 친구도 없고 연인도 없으며,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어느 날, 그런 그녀의 일상을 모조리 뒤엎을만한 큰 사건이 벌어집니다.

출퇴근 기차에서 늘 같은 자리에만 앉던 그녀는 좌석 틈에 꽂힌 한 통의 편지를 발견합니다.

편지를 보낸 자는 스스로를 엘리키우스(벼락을 내리는 신 주피터의 다른 이름)라 칭하며

잔느의 마음을 뒤흔드는 두 개의 고백을 털어놓습니다.

당신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어제 한 여자를 죽였습니다.”

 

잔느는 엘리키우스가 지금 현재 마르세유를 발칵 뒤집어놓은 연쇄살인범임을 눈치 챕니다.

하지만 잔느는 평생 들어보지 못한 엘리키우스의 따뜻한 위로와 흠모의 문장들 때문에,

, 그가 자신에게 살인을 고백한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는 탓에

연쇄살인사건 담당인 (자신이 흠모하는) 에스포지토 반장에게 편지를 내보이지도 못합니다.

그러는 동안 희생자는 점점 늘어가고, 잔느는 죄책감과 황홀함 사이에서 길을 잃습니다.

 

330여 페이지 가운데 1/3쯤까지 제 마음 속의 별점은 무조건 5개였습니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여주인공, 그녀에게 흠모의 마음과 살인 사실을 고백한 미지의 살인범,

그리고 여주인공이 좋아하면서도 말 한마디 붙여볼 생각도 못하는 호감형 강력계 반장 등

주요인물 대부분 캐릭터도 매력적이었고 그들간의 관계 역시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입니다.

, 엘리키우스라는 자의 편지 속에 언급된 죽어 마땅한 희생자들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는 왜 하필 잔느에게 위험천만한 살인 고백까지 하는 것인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대감과 호기심들은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점차 사그라지기 시작했고

클라이맥스와 엔딩쯤엔 왜 초반에 잘 쌓은 심리스릴러의 토대를 이렇게 마무리했나?’라는,

다소 이해할 수 없는 실망감까지 느끼게 됐습니다.

우선, 주인공 잔느는 엘리키우스의 첫 편지를 받은 이후 더 이상 진화하지 않습니다.

엘리키우스의 편지 덕분에 그녀는 조금씩 당당함을 되찾기도 하고,

자신이 흠모하던 에스포지토 반장에게 마음을 열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핵심인 사건에 관해 그녀는 수동적인 역할 외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고민과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지만 다음 단계로 도약하지 않습니다.

 

그녀에게 의문의 편지를 보낸 엘리키우스나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에스포지토 반장 역시

초반에 보여준 신비감이나 매력남으로서의 캐릭터를 전혀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특히 에스포지토 반장은 수사과정에서는 무기력한 경찰 역할에 그치고 있고,

잔느에게 호감을 갖는 과정은 뚜렷한 계기도 없고 감정의 색깔 자체도 모호할 뿐입니다.

형사로서, 남자로서 특별한 캐릭터도 없던 그가

엔딩에서 뭔가 특별한 인물처럼 그려진 대목은 조금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희생자들이 끔찍하게 살해된 연쇄살인사건이 메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수사과정과 마무리는 심리스릴러답지 않게 너무 쉽고 안이하게 처리됐습니다.

에스포지토 반장과 마르세유 경찰서 강력계는 연쇄살인사건을 맡은 경찰답지 않게 무기력하고

말 그래도 의욕 없는 월급쟁이 공무원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 ‘과연 엘리키우스는 누구일까?’, ‘그는 왜 참혹한 연쇄살인극을 펼쳤는가?’,

왜 그는 잔느에게 흠모와 살인이라는 모순된 고백을 했을까?’라는 의문에 대해

심리스릴러다운 특별한 해법을 제시하지 않을까, 나름 기대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습니다.

결국, 작품 내내 잔느의 심리적 불안정을 그렸음에도 정작 엔딩은 그와는 무관해보였습니다.

잔느가 평범한 인물이었다고 해도 아무 문제없었을 엔딩이란 뜻입니다.

 

초반의 긴장감을 잘 키웠다면, , 사건이 확산됨에 따라 인물들이 적절히 진화했더라면,

그래서 미처 예측하지 못한 심리스릴러다운 반전과 엔딩이 펼쳐졌다면

애초 마음 먹은대로 별 5개도 부족한 작품이 됐겠지만

그 모든 기대감들이 다소 허무하게 풀린 탓에 결국 별 1.5개를 빼게 됐습니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카린 지에벨의 작품은 그녀의 5번째(6번째?) 작품인 그림자입니다.

앞선 작품들보다 먼저 국내에 소개된 걸 보면 대중성이나 완성도에서 뛰어나다는 반증일 텐데

그런 면에서, ‘유의미한 살인이 다소 아쉽긴 했어도 그림자는 찾아 읽어볼 생각입니다.

대체로 출판사나 독자들의 서평들이 그 작품을 그녀의 대표작이라 칭한 걸 보면

이번에 느낀 아쉬움을 충분히 상쇄시켜 주리라 기대해도 괜찮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족으로... 이 작품의 원제는 ‘Terminus Elicius’입니다.

사전을 보니 Terminus로마신화에 나오는 경계를 다스리는 신’, 또는 종착역이란 뜻인데

이런 원제가 어떻게 유의미한 살인이란 번역제목이 된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혹시나 하고 찾아보니 국내에 출간된 카린 지에벨의 작품 가운데

그림자’(Juste une ombre) 외에는 모두 원제와 번역제목 사이의 거리가 멀어보였는데,

독자의 눈길을 끌기 위한 출판사 나름의 노력이라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원제를 직역했어도 큰 무리가 없었을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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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파더 1 브론크스 형사 시리즈
안데슈 루슬룬드.스테판 툰베리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완전무장한 강도단이 현금수송 차량을 털고 경비원을 무차별 폭행한 사건이 일어난다.

스톡홀름 시경의 브론스키 형사는 유례없는 잔인함에 경악하며 수사에 착수한다.

경찰을 비웃듯 강도단이 연이어 은행을 터는 동안 그저 제자리만 맴돌던 브론크스 형사는

군이 관리하던 무기고가 6개월 전 털렸다는 소식을 듣곤 강도단의 소행임을 직감한다.

CCTV 속 강도단의 행적을 면밀히 주시하던 브론크스는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추리한 끝에

강도단 멤버들이 어린 시절 학대당하며 자랐고, 친형제로 구성됐을 가능성에 주목한다.

한편 가정폭력사건 이후 아내와 아들들에게 절연 당하다시피 고립된 채 홀로 살던 이반은

텔레비전 뉴스 속에 등장한 복면 강도단에게 미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안데슈 루슬룬드는 전작인 비스트’, ‘쓰리세컨즈에서 버리에 헬스트럼과 호흡을 맞췄다가

이번에는 시나리오 작가 스테판 툰베리와 함께 이 작품을 집필했습니다.

공동집필임에도 안데슈 루슬룬드가 모든 작품에서 메인 작가 역할을 맡은 걸로 보이는 이유는

세 작품 모두 비슷한 톤인 것은 물론 아쉬움과 미흡한 점까지 꼭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더 파더의 메인 코드는 가족의 폭력희대의 연쇄 은행강도사건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잔혹한 폭력성을 물려받은 레오 형제들은 희대의 연쇄 은행강도단이 됩니다.

군대의 무기를 탈취하여 스웨덴 전역의 은행을 터는 것은 물론

그 과정에서 살인까지 이르진 않더라도 수많은 사람을 공포에 떨게 만듭니다.

, 아버지의 폭력으로 가족이 해체된 탓에 폭력을 지독히도 혐오하는 형사 브론크스는

상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폭력덩어리로 보이는 은행강도단 수사에 전력을 쏟습니다.

 

범인의 아버지와 형사의 아버지 모두 폭력의 화신이었고 결과적으로 가족을 붕괴시켰는데,

한쪽의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유전된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진화시켰고,

다른 한쪽의 아들은 폭력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발판으로 폭력을 막는 형사가 된 셈입니다.

그런 면에서 더 파더는 가족폭력의 상반되는 양면성을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축으로 전개됩니다.

어린 레오가 존경과 증오의 대상인 아버지로부터 폭력을 전수받는 과거 이야기와,

스톡홀름 경찰 브론크스가 레오 형제의 은행강도사건을 수사하는 현재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3형제 중 맏아들인 레오가 어떻게 아버지로부터 폭력성을 전수받았으며

어떻게 두 동생에게 카리스마를 발휘하여 연쇄강도단으로 진화하는지 설명합니다.

동시에, 폭력에 대한 본능적 혐오감이 자아낸 특별한 촉을 지닌 형사 브론크스가

어떤 방식으로 은행강도단의 정체와 그들간의 특별한 유대감을 밝히는가를 설명합니다.

 

안데슈 루슬룬드가 버리에 헬스트럼과 호흡을 맞췄던 쓰리세컨즈도 그랬지만,

더 파더역시 분권이 필요할 정도로 800페이지에 육박하는 두툼한 분량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그만큼의 분량에 비해 주제, 서사, 캐릭터는 다소 허약한 편입니다.

우선 두 주인공(레오 VS 브론크스)의 기계적 설정은 그다지 감흥이 강하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폭력이 낳은 상반된 캐릭터라는 점 자체는 인상적이지만,

너무 완벽할 정도로 대조된 점은 읽는 내내 위화감만 불러일으켰습니다.

100% 대척점에 선 인물들을 그리기 위해 마치 자로 재고 설계한 듯한 느낌이랄까요?

 

, 스릴러에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의 동기와 목표가 부실하다는 것도 문제로 보이는데,

레오와 두 동생이 왜 하필 이 시점에 와서 연이어 은행을 털려는 건지,

그 많은 돈을 훔쳐서 무엇을 하려는 건지, 얼마만큼의 돈을 훔쳐야 범행을 그치려는 건지 등

레오의 범행 전반에 대한 설정이 다 읽은 뒤에도 잘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브론크스의 경우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특별한 으로 범인들의 윤곽만 포착할 뿐 구체적인 수사 모습은 별로 없는데,

대신 그 자리엔 아버지의 폭력이 남긴 트라우마에 대한 한없는 고찰과 회한,

그리고 (등장이유를 전혀 알 수 없는) 연인과의 불화에 대한 자책만 가득합니다.

 

폭력 자체에 관한 설정도 모호한 편인데,

레오 일당은 극단적인 폭력성을 보이긴 해도 가능하면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애씁니다.

배려가 뭘 뜻하는지, 보통의 폭력성과 무슨 차이가 있는 건지 전혀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 문제는 독자 입장에선 꽤나 인간적으로 보이는 레오의 이 배려 깊은 폭력

유독 형사 브론크스에게만은 용서할 수 없는 지독한 폭력으로 보였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레오의 배려 깊은 폭력, 브론크스의 뜬금없는 폭주수사도 이해불가입니다.

결국, 범인도 형사도 ?’라는 질문에 대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채,

오로지 작가에 의해 부여받은 경로를 따라 그저 직진만 할 뿐입니다.

 

그 외에도, 왜 등장했는지 알 수 없는 조연들(주로 여자 캐릭터),

묵인하고 넘어가기엔 꽤 자주 눈에 띄는 오타들, 불필요해 보이는 사족 같은 분량 등

장점이나 미덕보다는 아쉬움이 훨씬 더 많이 눈에 띄는 작품이었습니다.

특히 전작들과 비슷한 부분에서 비슷한 종류의 아쉬움을 느꼈기에 실망감이 더 컸습니다.

2013년에 쓴 비스트서평에 안데슈 루슬룬드의 후속작 한 편쯤은 더 보고 싶다.”고 했는데

이후에도 그가 참여한 작품을 계속 찾아 읽게 될지는 자신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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