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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미한 살인
카린 지에벨 지음, 이승재 옮김 / 밝은세상 / 2018년 10월
평점 :
품절
국내에 7편의 작품이 출간된 작가지만 이제야 처음 만나게 된 카린 지에벨입니다.
‘유의미한 살인’은 가장 최근 출간됐지만 실은 작가의 데뷔작입니다.
주인공 잔느는 마르세유 경찰서 지원실에 근무하는 28살 여성입니다.
그녀는 누구와도 섞이지 못한 채 스스로 강박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또, 오랜 정신적 문제를 앓고 있으며, 자신이 설정한 루틴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당연히 친구도 없고 연인도 없으며,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어느 날, 그런 그녀의 일상을 모조리 뒤엎을만한 큰 사건이 벌어집니다.
출퇴근 기차에서 늘 같은 자리에만 앉던 그녀는 좌석 틈에 꽂힌 한 통의 편지를 발견합니다.
편지를 보낸 자는 스스로를 엘리키우스(벼락을 내리는 신 주피터의 다른 이름)라 칭하며
잔느의 마음을 뒤흔드는 두 개의 고백을 털어놓습니다.
“당신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어제 한 여자를 죽였습니다.”
잔느는 엘리키우스가 지금 현재 마르세유를 발칵 뒤집어놓은 연쇄살인범임을 눈치 챕니다.
하지만 잔느는 평생 들어보지 못한 엘리키우스의 따뜻한 위로와 흠모의 문장들 때문에,
또, 그가 자신에게 살인을 고백한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는 탓에
연쇄살인사건 담당인 (자신이 흠모하는) 에스포지토 반장에게 편지를 내보이지도 못합니다.
그러는 동안 희생자는 점점 늘어가고, 잔느는 죄책감과 황홀함 사이에서 길을 잃습니다.
330여 페이지 가운데 1/3쯤까지 제 마음 속의 별점은 무조건 5개였습니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여주인공, 그녀에게 흠모의 마음과 살인 사실을 고백한 미지의 살인범,
그리고 여주인공이 좋아하면서도 말 한마디 붙여볼 생각도 못하는 호감형 강력계 반장 등
주요인물 대부분 캐릭터도 매력적이었고 그들간의 관계 역시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입니다.
또, 엘리키우스라는 자의 편지 속에 언급된 ‘죽어 마땅한 희생자들’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는 왜 하필 잔느에게 위험천만한 살인 고백까지 하는 것인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대감과 호기심들은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점차 사그라지기 시작했고
클라이맥스와 엔딩쯤엔 ‘왜 초반에 잘 쌓은 심리스릴러의 토대를 이렇게 마무리했나?’라는,
다소 이해할 수 없는 실망감까지 느끼게 됐습니다.
우선, 주인공 잔느는 엘리키우스의 첫 편지를 받은 이후 더 이상 진화하지 않습니다.
엘리키우스의 편지 덕분에 그녀는 조금씩 당당함을 되찾기도 하고,
자신이 흠모하던 에스포지토 반장에게 마음을 열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핵심인 ‘사건’에 관해 그녀는 수동적인 역할 외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고민과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지만 다음 단계로 도약하지 않습니다.
그녀에게 의문의 편지를 보낸 엘리키우스나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에스포지토 반장 역시
초반에 보여준 신비감이나 매력남으로서의 캐릭터를 전혀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특히 에스포지토 반장은 수사과정에서는 무기력한 경찰 역할에 그치고 있고,
잔느에게 호감을 갖는 과정은 뚜렷한 계기도 없고 감정의 색깔 자체도 모호할 뿐입니다.
형사로서, 남자로서 특별한 캐릭터도 없던 그가
엔딩에서 뭔가 특별한 인물처럼 그려진 대목은 조금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희생자들이 끔찍하게 살해된 연쇄살인사건이 메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수사과정과 마무리는 심리스릴러답지 않게 너무 쉽고 안이하게 처리됐습니다.
에스포지토 반장과 마르세유 경찰서 강력계는 연쇄살인사건을 맡은 경찰답지 않게 무기력하고
말 그래도 ‘의욕 없는 월급쟁이 공무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또, ‘과연 엘리키우스는 누구일까?’, ‘그는 왜 참혹한 연쇄살인극을 펼쳤는가?’,
‘왜 그는 잔느에게 흠모와 살인이라는 모순된 고백을 했을까?’라는 의문에 대해
심리스릴러다운 특별한 해법을 제시하지 않을까, 나름 기대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습니다.
결국, 작품 내내 잔느의 심리적 불안정을 그렸음에도 정작 엔딩은 그와는 무관해보였습니다.
잔느가 평범한 인물이었다고 해도 아무 문제없었을 엔딩이란 뜻입니다.
초반의 긴장감을 잘 키웠다면, 또, 사건이 확산됨에 따라 인물들이 적절히 진화했더라면,
그래서 미처 예측하지 못한 심리스릴러다운 반전과 엔딩이 펼쳐졌다면
애초 마음 먹은대로 별 5개도 부족한 작품이 됐겠지만
그 모든 기대감들이 다소 허무하게 풀린 탓에 결국 별 1.5개를 빼게 됐습니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카린 지에벨의 작품은 그녀의 5번째(6번째?) 작품인 ‘그림자’입니다.
앞선 작품들보다 먼저 국내에 소개된 걸 보면 대중성이나 완성도에서 뛰어나다는 반증일 텐데
그런 면에서, ‘유의미한 살인’이 다소 아쉽긴 했어도 ‘그림자’는 찾아 읽어볼 생각입니다.
대체로 출판사나 독자들의 서평들이 그 작품을 그녀의 대표작이라 칭한 걸 보면
이번에 느낀 아쉬움을 충분히 상쇄시켜 주리라 기대해도 괜찮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족으로... 이 작품의 원제는 ‘Terminus Elicius’입니다.
사전을 보니 Terminus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경계를 다스리는 신’, 또는 ‘종착역’이란 뜻인데
이런 원제가 어떻게 ‘유의미한 살인’이란 번역제목이 된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혹시나 하고 찾아보니 국내에 출간된 카린 지에벨의 작품 가운데
‘그림자’(Juste une ombre) 외에는 모두 원제와 번역제목 사이의 거리가 멀어보였는데,
독자의 눈길을 끌기 위한 출판사 나름의 노력이라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원제를 직역했어도 큰 무리가 없었을 거란 생각입니다.